dream

[에바/이카리 신지]착각과 연인

.............. 2023. 6. 15. 21:44

점심시간 옥상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였다. 4교시는 여자애들은 수영, 남자들은 야외수업이여서 나마에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먼저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나마에는 늘 항상 내게 미안하다며 한시코 내가 그녀의 도시락을 싸오는 걸 거절한다. 하지만 난 직접만든 음식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다는 욕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반찬을 교환하는 거라도 좋으니까, 한입이라도 먹어줬으면 좋겠어. 토우지, 켄스케와 함께 옥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스카가 나마에에게 무언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엑, 나마에 바보신지가 좋아하는 사람 알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 셋은 발걸음을 멈췄고, 동시에 둘이 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응, 그야 뻔히 보이잖아. 이카리 의외로 알기 쉽던데." 새삼스럽다는 듯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스카에게 대답했다. 나, 나마에가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

설마, 평소엔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내 도시락도 거절한 건가. 그렇다면 어떡, 어떡하지. 새파란 얼굴과 달리 새빨갛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아스카는 놀란 듯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고 반장또한 놀란 소리를 내었다. 잠시 소녀들끼리 대화를 하면 나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 아야나미씨 맞지?"

 

 

그 순간 나는 아찔해졌다.

 

 

 

 

 

 

솔직히 알고 있었다. 나마에는 원래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걸. 그러면서 정작 주변사람이 곤란해 하면 발벗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나 또한 아버지나 에바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그녀가 옆에 있어주곤 했지. 감동은 호감으로 바뀌고 소년의 호감은 사랑이 된다. 남의 마음을 멋대로 휘저으면서 왜 정작 자기는 그런 짓을 하는 줄 까마득히 모르는 걸까. 점심시간은 결국 나마에를 뒤로 하고 교실에서 혼자 지내고 말았다. 아야나미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나마에를 어째서인지 제대로 볼 수 가 없어서 였다. 책상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쉬면, 토우지와 켄스케가 걱정하는 지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어?"

"......응, 아무렇지 않아."

"이카리, 표정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나저나, 묘우지 녀석 아야나미로 착각하다니......선생님, 좀 더 발벗고 나서는 게 어때?"

"나, 나서다니...뭘?"

"큰맘먹고 고백을 한다던지...데이트를 한다던지?"

"오, 켄스케. 너 말 잘하는 구만!"

"고, 고백이라니...별로 그런 건..."

 

 

켄스케의 말에 대답을 하면 옆에 나마에가 지나쳐 갔다. 바로 우리 셋은 얼음을 맞은 것 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나마에는 신경도 안쓰는 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야나미에게 다가간 나마에는 즐거운 듯 자리를 잡고 떠들기 시작했다. 천하태평하긴. 사람 속도 모르고. 무심코 나마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다갈색 눈동자와 갑자기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움직인다. 너,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나마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왜?"

"아, 아니...아무것도..."

"이카리 말야...거짓말 할 때 눈을 꼭 피하더라?"

"뭐?!"

"아니 농담인데...진짜야?"

"노, 놀리지 좀 마! 정말..."

 

 

왜 그런 걸로 화내고 그래. 나마에의 볼멘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없이 나를 놀려대는 나마에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켄스케 말대로, 이것저것 나서서 나마에의 마음을 끌어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우선 내가 그럴 자신이 없을 뿐더러, 자존심도 상한다. 쓸모없이 허세를 부려봤자 가장 골치 아픈건 스스로인 건 알지만, 쉽게 마음이 굳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마에는 왠지 내가 무슨말을 해도 다 착각을 할거 같단 말이지. 아예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가정을 상상조차 못하는 거 같아.

정말 고백이라도 하면 달라질까. 하지만 나마에 성격상 고백을 받으면 나한테서 더 멀어질거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나마에하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친구 중에선 가장 친하지만, 오직 친구로만 따지자면 나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에 쓰러져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면 나기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신지군, 뭐해? 고민?"

"나기사.........별로, 아무것도 아냐."

"아, 그래? 당연히 묘우지씨랑 관련된 건 줄 알았지."

"어? 나기사군, 내가 뭐?"

"그게.........아, 이럴땐 함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랬어. 그치 신지군? 아무것도 아냐."

"나기사아아아아......!"

"...아야나미씨, 우리 도서실이나 갈래?"

"...응."

 

 

 

나기사를 죽일듯이 노려보자 녀석은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보아하니 이가 또 나갈까봐 무서워 하는게 틀림없다. 나기사의 눈치없는 말에 화낼 기력도 사라진 나는 가만히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나마에때문에 점점 지치는 거 같아. 다행히도 나마에는 도서실로 사라졌지만, 보통 조금이라도 신경쓰지 않나. 아니면 나한테 그 정도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건가. 눈을 반쯤 감으면 위에서 나기사가 토우지와 켄스케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카리!"

"...나마에? 아직 안 돌아갔어?"

"잠깐 도서실에 들렸다가 늦어져서. 이카리는? 오늘은 소집안하나 보네."

"응, 그렇지 뭐..."

"같이 안 갈래?"

"어, 어어 응."

"마침 잘됐다. 우산이 없어서..."

 

 

이카리가 없으면 큰일 날뻔 했네. 반갑게 나마에가 웃으면 괜시리 미간이 찌풀여졌다.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 표정이 풀려버릴 거 같아. 나마에는 겁이 난 듯 저때문에 화났냐며 내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나마에한테 닿지 않는데, 걷는 거리도 떨어트릴 필요 없잖아. "그런거 아니야. 나마에, 들어와." 조금 심통난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피면 나마에는 아무말 없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이카리,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아까 있잖아, 나기사군이 말하던거 무슨 얘기였어?"

 

 

 

 

톡 하고 나뭇잎에 고여있던 커다란 물방울이 우산에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나마에에게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겨우 대답했지만 그녀는 성에 안차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설마 내 뒷말이라도 했던거야?" 서운한듯 눈을 찡그리는 나마에에게 나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그럴리가 없잖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진 듯 나마에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또 놀리는 거였나. 한 순간도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욱한마음이 들었다.

 

 

 

"먼저 간다."

"잠깐잠깐 농담이야! 설마, 이카리가 그런 소릴 할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 안하는 걸."

"글쎄, 그건 어떨까."

"진짜라니까, 진짜, 진짜로."

 

 

 

터벅이는 발로 걷고있으면 발걸음에 미치지 못하는 나마에가 쫄래쫄래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약간 비에 젖은 그녀가 이번엔 진심인듯 울상을 지으면 마음약한 나는 화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이카리, 미안해."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목소리를 나마에가 내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도 농담이라며.

 

 

 

"무슨 고민있어?"

"뭐, 뭐?!"

"아니, 오늘 계속 책상위에 쓰러져 있었잖아. 어디 아픈거 같진 않고...괜찮으면 고민 들어줄까?"

"돼, 됐어...그런거 아냐..."

 

 

 

너하고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너한테 말할 수가 있겠어. 지금 여기서 나마에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분명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떨어트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곤란해 하는 모습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고민? 아, 역시 그렇구나."

"무, 무슨..."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면 나마에는 잡아냈다는 듯 개구쟁이마냥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분하고 들켰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빨게지는 게 느껴졌다.

 

 

"음...고백하는 게 어때? 혹시 모르잖아, 그 애도 널 좋아하고 있을 지."

"...그럴일 절대 없어."

"이카리가 그 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들었다면?"

"어?"

"나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는 걸 들었다면?"

 

 

 

한 줄기 빗방울 마냥 땀을 흘리는 나마에의 속은 뻔히 보였다. 아야나미씨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나마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나쁜 건 알고 있지만,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참고로, 아야나미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에게 한마디를 더 꺼내면 나마에는 큰소리를 내며 놀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아니라고......응?!"

"토우지하고 켄스케한테 다 들었어......뭘 멋대로 착각하는 거야."

"...아...미안...이카리, 항상 아야나미씨 잘 챙기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나마에를 챙기는 건 생각지도 않는 건가. 한숨을 쉬며 나마에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째서인지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내가 아야나미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도 슬픈건가. 고개를 푹 숙인 나마에는 건들면 흘러내릴 거 같은 빗방울 같았다.

 

 

 

"그럼...달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거야?"

"......글쎄?"

"이카리는 거짓말은 잘 안하지만 대답은 많이 안 하지. 그런 거라고 생각할게."

"잠, 나마에..."

 

 

생기없는 목소리로 나마에가 수긍하였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겨짚다니.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왠지 저 표정, 처음 나마에를 봤을 때랑 비슷하다. 마치 아무 관심도 없는 것 처럼 보여.

 

 

"...그러는 나마에는?"

"어? 나?"

"나마에가 말한대로, 그 나이대인데 좋아하는 사람정돈 있지 않아?"

".........난..."

 

 

평소의 나마에라면 웃으면서 없다거나, 숙녀에게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말할 텐데. 이상하게 장난기가 없는 그녀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진지한 눈동자이다. 좋아하는 여자애 한테서 본 적없는 여성을 발견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뛰게했다. 나마에가 달라보여. 그녀는 운을 떼더니 조곤조곤 빗소리에 맞춰서 말을 꺼내었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 있어."

".........그래?"

"응. 아,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때?"

"난......"

 

 

툭하면 장난을 걸고, 밝게 웃으면서 언제든지 사라질거 같은 실낱같은 사람. 때때로 정말 옆에 있는게 맞는가 싶은 귀신같은 아이. 아무도 모르는 속이 있지만, 감추는 게 싫지 않은 소녀. 언젠간 그 마음을 알고 싶은 나마에. 나마에의 질문 하나에 나는 여러가지 답을 속으로 읊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를 꺼냈다.

 

 

 

"그냥, 바보같은 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