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잘랐어..."
"실명, 안녕."
"머리를 잘랐어..."
"내 말 듣고 있니?"
"으, 응......있잖아."
"신지군하곤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이상한 오해하지마."

카오루에게 착잡한 마음으로 말을 걸면,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아직도 차이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 주말동안 못봤던 카오루는 짧게 머리를 자르고 왔다. 시원하게 드러낸 목덜미는 햇빛에 닿으면 금방 벌게질 것 처럼 새하얗았다.
뒷머리 만져도 돼? 카오루에게 눈을 빛내며 말하면, 그는 단호하게 안 돼. 라고 말했다. 저번엔 내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무슨 풍선이냐. 마음이 왜이렇게 가벼워? 이랬다 저랬다 하게.

"카오루, 그러고보니까 우리 대전시합은 정해졌어?"
"아마 8월 넷째쭈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일거야. 출전선수는 일 이학년 중심이지만 삼학년도 참가 가능해."
"너 나갈거야?"
"아마도, 고문 선생님이 나가라고 하실테니까."


카오루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기사, 동아리 에이스니까. 시합에 나가는 건 당연하겠지. 우리 동아리가 아무리 시합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명색의 시합이고. 고문 선생님이 보여주기 식으로 카오루에게 출전을 권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대외 활동이 있어야 학교에 동아리 활동비도 얻을 수 있으니까.
만약 우리 부에 좋은 인재가 있다면 분명 그 인재가 시합에 나가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동아리에서 실력있는 사람은 나기사 카오루 뿐이였다. 왜냐하면 시골 학교인 탓에 인원이며 활동비가 적어 지원물품을 그닥 못 얻었기 때문이였다. 동아리 인원보다 적은 활로는 열심히 연습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러니 당연히 인재가 없을 수 밖에.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카오루가 대단한 것이다.
맘 같아선 고문 선생님도 3학년인 카오루를 보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주목하고 있는 우등생이니까. 고작 인지도 없는 동아리의 출전멤버로 나가는 것 보단 수험공부를 하길 바라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믿을 게 쟤 밖에 없는데. 카오루도 그걸 알고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인 걸꺼다.


"힘들겠네, 수험준비는 괜찮겠어?"
"실명이랑 다르게 난 며칠 쉬어도 괜찮아." 


저를 위로하는 말에도 카오루는 굳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보였다. 그 심성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풀여진다. 전생에 난 카오루에게 돈이라도 빌린 걸까? 왜 구태여 내 성을 내게 만드는 소리를 내뱉는거야? 이맛살을 내보이며 카오루를 바라보지만 그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여자애들에게 가버렸다. 나기사군, 있잖아. 상냥하게 웃으면서 여자애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 저 대단한 내숭엔 내가 혀를 내둘룰 수 밖에 없다니까. 


"나기사군이랑 무슨 얘기 했어?"
"어? 우리 동아리 대전시합. 다른학교랑 같이 하거든."
"너 3학년인데 출전하는 거야?"
"설마, 나기사만 나가는 거야."

3학년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로 친구는 말을 꺼내더니, 잠시 침묵을 잇고는 이내 수긍을 하였다.

"하긴. 나기사군이 너네 동아리 에이스니까. 너네 동아리 딱히 궁도 잘하는 애도 없고 말야."
"응, 그렇지 뭐. 나기사가 빠지면 대전시합도 곤란할 테고..."
"그나저나 나기사군 3학년인데 고생이 많네. 공부하랴 시합도 나가랴..."

오히려 양쪽 다 해내려는 모습이 대단한 걸. 원래 완벽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나기사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친구는 감탄만 내뱉을 뿐이였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눈썹을 올렸다. 

"그러고보니..."
"응?"
"다른학교랑 대전시합 하는 거잖아?"
"어...그렇지?"
"그럼 다른 학교 여자애들도 나기사군을 보겠네?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그야 뭐..."
"그럼 나기사군 노리는 여자애들 더 늘어나는 거 아냐?"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친구의 한 마디에 불현듯 초등학생 때 일이 떠올랐다. 그 때는 축구였던가. 축구부 감독의 질긴 권유로 인해 나갔던 대전시합 때였다. 분명 자신의 학교를 응원하려고 왔던 여자애들이 어느샌가 카오루가 골을 넣을 때마다 함성을 지르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앞에서 카오루를 보러 온 아이들이 여럿 있었지. 얘는 정말 생각할 수록 살아온 인생이 순정만화 주인공 같다. 물론 그에 따른 고충은 알긴 알지만, 보통 적군을 아군으로 바꿀 정도로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나?

"비슷한 일이 있었어. 4학년 때인가?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상대편 학교 응원하러온 여자애들이 카오루한테 흠뻑 빠져가지고..."
"생각만 해도 귀 아프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정문에 그 학교 애들이 카오루를 보려고 버티고 있는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결국 그 학교 선생님이 와서 애들 데리고 갔어."
"...나기사군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그리고 친구는 바로 입을 닫았다. 솔직히 그 정도 인기면 감탄하다 못해 황당함에 말을 잃을 것이다. 이런 반응이 보통이지. 

"뭐 걔가 인기 많다는 건 진작 알고있었지만 나도 그 땐 놀랬어. 역시 넘 볼 나무가 아니라니까."

시답잖게 우스갯소리를 던지면, 곧 이마살은 눈썹을 찡그리는 모양새로 변했다.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친구에게 무슨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이마살을 양 손으로 펴주면, 그제서야 그 입술이 움직였다.

"또 그 소리다."
"어?"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에 몸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친구의 시선을 살폈다. 화난 것은 아니였으나 길게 뜬 눈은 마치 질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쉬며 친구는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너 말야."
"...나?"
"나기사군을 좋아한다면서 아무것도 안하네?"
"뭐...뭐가?"
"아니, 예전부터 그랬던 거 같아. 나기사군이랑 잘 지내지만, 너 정작 그 애한테 네 감정을 비친 적은 없잖아."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만큼 가슴을 꿰뚫는 그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차이는 게 무서워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찌풀이고 있으면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너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나기사군이야 확실히 너랑 소꿉친구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거잖아. 너가 같은 고등학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건 알지만, 솔직히 그건 니가 노력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고등학교 못 들어가면? 어쩌려고? 아예 접점이 없잖아. 옆집사는 거라 해도 고등학생이면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걸? 그럼 적어도 같이 있을 수 있는 핑계거리라도 만들어야지.연애라는 게 노력하면 꼭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런 노력도 안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 나기사군의 마음을 얻으려고 아무것도 안하는 거 같아."
"옛날부터 그렇게 폭풍같이 사람 애정을 얻어온 나기사군인데, 덩그러니 있으려고? 그러다가 뺏기면 어쩌려고? 강에 가서 눈물 흩뿌리게?"
"가끔 너 어차피 나기사는~하면서 말하는데, 너 진짜 나기사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 적은 있어? 그냥 걔 마음을 알기 무서우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고 단정짓는 거 아니야?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본 적은 있어? 떠본 적도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멍청하게 있는 거면 너 진짜 심각한거야. 단지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걸로 만족하는 거야? 너 그 애랑 같은 고등학교 공부하려는 거 아니였어? 못하는 과목도 죽어라 공부하고 있잖아."
"그럼 그 노력으로 나기사군한테 왜 안 다가가는데? 너 혼자서 노력하는 건 쉽게 할 수 있지만 남에게 시도하는 노력은 죽어도 못하겠어?"
"그게 얼마나 미련하기 짝이없는 건데.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걔가 얼마나 남한테 사랑받는 지 지켜봐왔잖아. 가만히 있다가 빼앗기고 아 역시 나는 안되는 구나 하고 바보같이 납득할래? 그러고 끝낼래?"
"나 네가 진짜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지 잘 모르겠어."
"너 도대체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게 뭐야? 그 말 한마디가 글자 모양 그대로 뇌 속에 박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기사 카오루랑 하고 싶은 것? 그게 뭘까. 어렸을 적엔 그저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도 기억할 만큼 그 애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지. 초등학교 땐 여러가지 일이 있어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곧바로 후회할만큼 좋아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지금도 투덜거리면서 그가 하는 말은 다 따르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변명하지 않고 나는 나기사 카오루를 좋아한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애정을 얻으려고 하는 일은 없었다.
고작 샤프로 교과서의 내용을 적어내려가는 거 뿐이였다.
적어도 마음을 써내린 적은 없었다. 감정을 눌러담은 촌스러운 러브레터조차 건넨 적도 없었다.


"정신차려."
"어, 어어."
"...말이 좀 심했나? 그래도 맞는 말이 잖아."

어느새 친구의 표정은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약간 말 끝을 흐리는 그 어투에 이젠 엄격함은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미안한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너가 너무 답답해서 그래...차이면 뭐 어때? 나기사군이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딴 사람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뭐 말이야 쉽지만...너가 나기사군을 좋아한 만큼 다른 사람도 못 좋아할 거 뭐 있어?"

그리고 너가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도 뭐가 있어?

나기사군이랑 있어서 그런지 너 좀 자신감이 없는 거 같아. 너 충분히 괜찮은 애야. 그런데 왜 청승맞게 9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 처럼 굴고있어?
요조숙녀처럼 굴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언제 순정만화 처럼 굴었다는 거야. 굳이 덧 붙여도 되지 않을 말을 듣다보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뚱해졌다.
그러나 친구의 말은 솔직히 맞는 말이였다. 정론이였다. 누군갈 좋아하면서 그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조차 안하는 인간을, 나기사 카오루가 좋아할리 없다. 아니 그 누구라도 돌아볼리가 없다. 신지군이라며 입에 내가 아닌 사람을 걸고 다니는 놈이지만. 저거 사람 편애하는게 아주 대단하신 벽창호지만.
사람이니까 눈이라도 여러번 마주친 사람을 기억하겠지.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노력하는 인간을 더 좋아하겠지.

부정할 수 없는 말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웠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순간이였다. 소꿉친구를 멋대로 판단하고 애정을 표현 하나 하지 않는다.
아니 그냥, 나는 나태한 사람이 분명하다. 소꿉친구니까 걸핏하면 만나니까. 옆에 계속 있으면 두고두고 볼 수 있어서 기회만 엿보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기회만 있어서 되는게 아닌데. 찬스도 노력한 사람한테만 온다고 하잖아. 변명따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게 좋을텐데. 그래, 그게 옳다.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는 거다. 노력도 하지않는 어설픈 애정의 끝은 미련과 자기혐오 밖에 없을테니까.
친구의 말마따나, 90년대 순정만화를 따라해봤자 의미가 없다. 아무리 카오루가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인물이라 해도 사랑은 그렇지 않을테니까. 다가가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따운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명아, 진짜 미안해! 괜찮아?"
"어, 어 응 괜찮아..."
"진짜 미안, 아 어떡하지? 체육복 있어?"
"응 있어.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방과후, 동아리 실로 가려고 하면 위에서 갑자기 걸레빤 물이 나를 덮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물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면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반 학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찢어질만큼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내게 사과와 상태를 물어보는 울음소리에 그제서야 학우의 단순한 실수인 걸 깨달은 나는 분노를 넘어선 허탈함을 맛보았다. 이미 젖은 걸 어찌할 수도 없고, 얘가 이렇게나 사과하는 데. 급하게 스포츠 타올로 내 몸을 닦아주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솔직히 눈물이 나오는 건 난데, 얘도 어쩔 수가 없지.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면 카오루가 "아, 실며..." 나를 쳐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저렇게 뜨면 무서울 지경인데. 굳은 얼굴로 내게 빠르게 다가와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무슨일이야? 왜 그러니?"

꽉 잡은 팔에 냄새나는 걸레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나 신경도 안쓰는지 그는 내 손목이 아프도록 세게 힘을 주었다. 


"잠깐, 아파, 아, 아야야야야"
"...누구한테 당한거니?"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프니까 좀 놔!"

카오루의 손목을 붙잡으며 화를 내면 그는 그제서야 작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곤 손을 떨어뜨렸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잡은거야?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화가 묻어나 있었다. 이건 좀 진정 시켜 줘야 겠다.

"같은 반애가 벌로 창문 닦는 중이였어. 걸레빤 물이 너무 무거워서 잠깐 창문 틀에 기댔는 데 손이 미끄러져서 떨어트린 거야........내 말 믿지?"
".........그래."

꺼림직한 표정을 짓는 그는 억지로 내 대답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다소 황당한 소리지만 정말 사실인 걸 어쩌겠어. 오히려 울면서 자기 교복을 입고 가라고 하는 걸 말리고 왔다.


"...그런데 그 꼴로 여기까지 온 거니?"
"그야 샤워실이 여기 밖에 없는 걸.........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이야."
"체육 수업 없어서 안 가져왔는데......카오루, 니 체육복 좀 빌려줄래?"
"...정말이지..."
"미안, 고마워."

카오루가 계속 한숨을 쉬면서 탈의실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는 데.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건가. 당사자는 이제 괜찮은데, 카오루는 여전히 초등학교 때 일이 신경쓰이는 듯 하였다.

카오루 입장에선 자기도 가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사실 그런 이야기를 그의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한다는 건 알지만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그때나 이제나 여전히 잊지 못하는 구나. 그 모습에 오히려 카오루에게 잊고싶은 기억을 준 것같아 미안했다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카오루의 체육복을 받으면 카오루 역시 안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마, 냄새 별로 안나니까." 그거 때문이 아닌데. 그런게 아니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카오루,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좀 늦을지도 몰라."
"먼저 가라니...........됐어. 기다릴게.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아니, 늦을 거같으니까 먼저 가라니깐."
"실명, 빨리 들어가."

카오루가 화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아, 알겠어. 오랜만에 보는 찡그린 미간을 보고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옛날에 베란다 넘어서 오지 말라고 혼났을 때 이후로 보는 건 오랜만이다. 무슨 이런 상황에서만 저러니까 꼭 아빠같네. 이따가 편의점에서 봉투라도 하나 사야겠다. 집에가서 얼른 교복 빨아야지. 뜨뜻한 샤워 물줄기를 맞으며 썩은내를 씻어냈다. 생각보다 걸레 냄새가 잘 안빠지네. 도대체 얼마나 더러운 걸레였던 거야. 냄새가 가실 때 쯤 샤워기를 끄고 몸을 닦아 받은 체육복을 입고 나오면 시간은 꽤나 흐른 듯 하늘이 어둑어둑 했다. 벽에 기대서 핸드폰을 보던 카오루는 내가 나오면 액정화면을 끄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명, 아주머니께 연락했어. 좀 늦을 거라고." 얘가 그런 거 까지 하고 있었나.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다. 아주 조금 내가 얘한테 붙잡혀 사는가 하는 배은망덕감도 있지만. "아...고마워, 뭐라셔?" 가방과 교복을 들어 그에게 다가가면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칠칠치 못하다고 그러시더라." 참, 아무리 우리 엄마라도 그건 좀 심하진 않나.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걱정끼친 내가 나쁘긴 하지만. 툴툴 거리면서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 카오루도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맞는 말이잖아, 실명인 너무 조심성이 없어. 평소에도 자주 듣던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어 나는 시선만 돌릴 뿐이였다.

"아주머니께서 저녁 먹고 오라고 하셨어. 먹고 싶은거라도 있니?"
"입맛 없는데......"
"실명...그러면서 사면 먹을 거 잖아."
"야...뭐 맞는 말이긴 하지...내가 탐욕스러운 돼지지..."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잖아...그래서? 어디가고 싶어?"
"난 모르겠어, 음, 음음. 카오루는?"
"그럼 무난하게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자."
"오, 좋다."


노을은 별들에게 쫓겨 어느새 산봉우리 밑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해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달님이 고개를 쏙 내밀듯 하다. 시계를 보면 8시를 넘어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근데 곧 여름인데 왜 이렇게 해가 빨리 저물지. 마지막 노을을 맞으며 황금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카오루를 바라보면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악재에 악재가 겹친 듯 했다. 친구와 있었던 일은 악재가 아니였지만, 정면으로 자신과 바라보는 건 꺼름직한 일이였다. 그런 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받아들여야 할 때 하는 짓이니까.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지만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깨닫는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순정을 바친 상대가 가만히 와주길 바랬던, 그가 변해주길 바라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통감했다.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렇지만 제일 짜증나는 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희미하게 속삭이는 자기합리였다. 어쩔 수 없잖아, 만약에 친구라는 관계조차 깨지면 끝이야. 최악을 떠올리며 스스로 끝을 만들어내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니?"
"어? 왜?"
"표정이 안 좋길래."
"아니...그런 일 없었는데."


이번에는 억지로 수긍조차 안하는 카오루의 표정은 기가 막혀 보였다. 적어도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는 얼굴이다. 맘 같아서야 무슨 일인지 조잘조잘 이야기 하고 싶지만, 본인에 관한 일이니 쉽사리 입을 열기 어려웠다. 별로 얘기해봤자 좋을 거도 없고. 시선을 피하며 입을 우물거리지마나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게 얼굴을 찔러온다.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쳐다볼 지경이였다.


"음...그게...오늘 친구한테 게으르다는 얘길 들었어."
"그건 평소에도 듣는 소리 아니니?"
"너 방금 뭐랬어?"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게으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울컥 화가 치솟았다. 왜 저렇게 얄궂은 말만 꺼내는 거지? 성이 난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나기사 카오루는 내가 욱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인간 관계 같은 거 있잖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나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왜 먼저 다가가지 않냐고. 가만히 있냐고. 멍청하게 있다가 끝나면 납득하고 냅둘거냐고..."

카오루는 흠, 하고 말 끝을 흐렸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 모습에 괜시리 부끄러워졌다. 난 왜 이런 얘길 얘한테 하고 있는 거지? 당사자인데. 카오루는 이게 자기 얘기란 걸 알면 어떻게 반응 할까.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재빠르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래서 그냥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거 같아서 좀 우울해하고 있었어. 그게 다야. 끝."

머리를 긁적이는 걸로 쑥스러움을 씻어내려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역시 괜히 말했나. 아까부터 왜 계속 보기만 하는 거야?

"실명."
"으, 응?"
"남이 와주기 만을 바라는 게 어리석은 거니?"
"어?"
"너가 생각하기엔 어때?"

카오루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였다. 유난히 진지해 보이는 얼굴은 정말 그 답을 알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마치 수학문제에 정해진 답을 찾는 것 마냥. 부드럽게 내 의견을 묻는 그 목소리는, 평소에 카오루 같지 않았다. 왠지 내가 모르는 나기사 카오루를 보는 듯 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글쎄...난......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는 내 감정을 알고 있어도 상대방은 모르는 거니까......물론 서로 상호간에 애정이 존재하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순 있겠지만...정말 중요한 건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그리고 내가 남을 좋아해서 같음 감정을 느끼가 바란다면, 적어도 남이 날 좋아할 수 있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 데? 도저히 내 말을 끝맺을 수 없어 그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 감정이란 건 너무 복잡해서,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상처 입는 걸 두려워 하기 때문일 거야. 그건 그 누군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서일 수도 있고, 자기혐오로 주저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 나는...그게 안타깝고 불쌍하지만...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사람은 한 순간의 마음으로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마음을 소중히 여기니까."

마음이 상처 받으면 살아갈 수 없을정도로 외로운 거 뿐이야. 카오루는 나지막히 그런 말을 꺼내었다.

"사실...잘 모르겠어."
"뭐가?"
"너와 신지군을 보면서, 리린의 감정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지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리린의 마음, 리린의 삶을. 지금도 리린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어."

리린?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 그는 알 수 없는 단어를 꺼냈다. 독일어인가? 내용으로 보면 사람을 말하는 거 같은데. 그나저나 카오루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니. 처음 안 사실이였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니까. 물론 사람에게 벽을 치는 성격이지만, 나나 신지군을 대하는 걸 보면 카오루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카오루, 사람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거야?"
"맞아."
"그런거 치곤 너 엄청 잘 지내잖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지는 알지만 그 이면은 모르겠어. 내가 그를...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지. 무엇이 그를 위한 행복이고 옳은 건지, 알 수가 없어."


카오루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자신 없어보이는 눈이였다. 카오루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거야...그걸 알면 이 세상에 안 행복한 사람이 어딨겠어?"

내가, 남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을리 없다. 원하는 물건이나 명예, 금전은 쉽게 알 수 있지만 행복은 감정이니까. 나만 해도 오늘 친구에게 너는 뭐가 하고 싶은데? 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남의 진정한 속내라는 건 그렇다.
카오루를 좋아한다고 넌지시 얘기를 들은 그녀도 내 행동을 보고 그 말을 의심하였다. 마음이란 보여줘도 금방 흐지부지 되는 거다. 계속 보여주고 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쉽게 알 수 있겠어?

"아무도 진정한 행복같은 건 모르고 옳은 것도 모르지. 그냥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거 잖아?  옆에 있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같이 생각하는 거 아냐? 원래 행복이란 게 주관적인 거 잖아. 너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남은 행복이라고 생각 안 할수도 있지."


카오루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그런 건 혼자 정하는 게 아니잖아.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지. 상대방이 무얼 생각하는 지 알아야지.
...그리고 계속 알려주고 들어야 하는 거 잖아. 끊임없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알려줘야 하고, 신뢰를 잃기 전 까지 계속 보여줘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귀찮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까 어떻게든 계속 알려줘야 한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아야 한다.

"결국...음 대화가 중요하다는 거 아닐까?"
"대화?"
"카오루는 그 알고 싶다는 사람하고 그런 얘기 해봤어? 행복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카오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질렀다. 얼핏 얼굴에 슬픈 빛이 맴돌았다. 왜 그걸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드디어 깨달았다는 표정인 것도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루의 속 내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사람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티비에 나오는 사기꾼이나 설득가들도, 가만보면 다 상대방의 대화를 엄청 듣기만 하던 걸.
어느 틈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고 시답지 못한 농담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웠다.

"실명."
"으, 응?"

입을 삐죽이며 카오루에게 고개를 돌리면 그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나는 오히려 긴장을 느꼈다. 처음으로 카오루와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지 알아서 좋았지만, 그 반응은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내게 핀잔을 주려나? 아니면 덕분에 좋은 얘길 들었다고 고마워 할려나?

"패밀리 레스토랑, 도착했어."
"......아, 그래..."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싱거운 평범한 대화였다. 방금까지 그렇게 무거웠던 분위기가 주전자의 김이 빠지는 것 마냥 사라진다. 내 긴장감도. 보통 저런 대화를 하고 나면 무언가 말하지 않나? 왜 얘는 없던 일 마냥 치부하는 건데. 괜히 떨던 내가 바보 같았다.

"아, 맞다. 카오루, 체육복 빌려준 거랑, 엄마한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아깐 경황이 없어서 대충 말한 거 같아서. 너 아니였으면 큰일 났을 거야. 그 꼴로 어떻게 돌아가? 약간 자조하듯 웃으며 동아리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카오루는 별말씀을. 이라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실명인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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