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카지씨!"
"어 실명아, 잘 지내고있어?"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을 사러 시내로 나가면 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는 카지씨와 마주쳤다. 꽤 오랜만이네. 한 작년 쯤에 만났던거 같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그 눈을 바라보았지만 내 시선은 이내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붉은기를 띈 금발이 풍성한 소녀였다. 누구지, 엄청 예쁘네. 어디서 본거같기도 하고. 허나 카지씨와 있을땐 본 적이 없다. 눈이 마주치자 끼고있던 팔짱을 더욱 옥죄는 소녀는 눈썹을 세우며 나를 째려봤다. 연인이나 뭐 그런건가. 많게 보아도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데. 카지씨 내일 모래면 계란한판이시잖아.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긴하지만. 소녀를 보며 눈썹을 모으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 불쾌한 목소리였다.
"카지씨! 이 앤 누구?"
"어어, 아스카, 카오루 친구야. 실명, 이쪽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나와 같이 독일에 있을때 알고 지내던 애야."
"아...안녕, 저 난 실명이야."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류씨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차갑게 무시할 뿐이였다. 그녀의 옆에 착 달라붙은 카지씨가 겸언쩍은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대놓고 도외시 당하다니 너무 무안한데. "아스카, 사람 인사는 제대로 받아야지." 카지씨가 소류씨에게 훈계하듯 타일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카오루, 너 독일은 언제가?"
"대전시합이 끝난 다음주에 갔다 올 생각이야."
카지씨는 예전부터 카오루네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카지씨의 능력에 눈독을 들인 카오루네 할아버지께서 등록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것이 시초였다. 그 후 아르바이트로 그 회사에 일하시면서 나기사 집안과 친목을 쌓아왔다.
카지씨는 국제변호사로 현재 카오루네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 일본본사를 맡기 위해 귀화하신 카오루의 아버지를 도우시며 독일과 일본을 오가곤 하신다. 워낙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라 집안 문제까지 개입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카오루가 연휴마다 독일에 갈 때는 꼭 카지씨가 보호자 역할로 같이 움직였다. 때문에 카지씨가 일본에 오는 건 카오루가 독일에 간다는 뜻이 되었다.
"있잖아, 독일가면 또 그 과자 사다와 주면 안될까?"
"실명, 살찔텐데?"
"......"
"농담이야, 그리고 선물 살 정도로 오래 있진 않을거니까. 하루정도 머물고 올거야."
"하루? 너무 빠르지 않아? 표 아깝게."
"글쎄, 별로."
담담하게 그가 대답하면서 책을 넘겼다. 하긴, 카오루 입장에선 오히려 가고 싶지 않겠지. 어째서인지 그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 독일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어른들 앞에선 싹싹하게 굴어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어릴적에 처음으로 그의 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었지만 카오루가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말도 못 걸었었지. 남인 내가 봐도 카오루가 희한한데 얘네 부모님은 오죽하실까.
"아, 그럼 오늘 카지씨 너네 집에서 묵으시겠네?"
"뭐, 그러시지 않을까."
"아까 카지씨 옆에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고 어떤 여자애 있던데, 너도 알아?"
"아, 세컨드 말이니?"
"세, 세컨...?"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카오루는 "소류, 씨 말하는 거지?" 정정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왠지 그 호칭엔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 애, 신지군의 소꿉친구야. 나하고는 카지씨 일로 알게 된 사이이고."
"흐음~그랬구나....혹시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뭐 그런거야?"
이어지는 질문에 응하려는 듯 그가 책을 덮고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글쎄, 세컨드는 카지씨를 열렬히 좋아하는 거 같지만, 잘 모르지."
흠, 그렇구나. 하긴 그 새초롬해 보이던 얼굴이 카지씨만 보면 활짝 펴졌는걸. 맘껏 좋아한다고 티내는 모습이 부럽기도, 멋지기도 하구만. 나도 좀 보고 배워야 하나. 근데 그래봤자 카오루는 이마를 누비기만 할 거같은데. 생각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면 무정한 얼굴만이 눈에 보인다.
"왜?"
"아니, 음 그냥 그렇게 이쁜 애한테 맹렬히 사랑받는 카지씨가 대단하게 느껴져서. 아! 그 애 이카리군 소꿉친구랬지? 나기사도 연적이 엄청나서 큰일..."
"......"
"음, 농담이 심했지? 미안."
질린듯 찡그려진 그의 눈살에 어색한 웃음을 내밀었다. 솔직히 카오루가 이카리군 일이라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니까 내가 이따금씩 농담을 던지는 거라고. 평소엔 감정표현도 잘 안하면서. 반응도 없는 애가 가끔 저렇게 눈에 힘을 주니까 나도 모르게 허망한 말들을 내뱉는 거라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은 잦게 짓지만. 그건 내가 수다스러워서 겠지.
"실명."
"응?"
"더 할 말 없으면 가봐도 될까?"
카오루는 불편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는 아니였지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 들고 말았다.
그야 그럴만도 하지. 카오루도 내 방에 별로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닐테니까. 카오루에 우리 집에 오게 된 경위는, 단순히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선물을 갖다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다 거실로 내려 온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담담하게 내게 인사만 건네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아 방에 데려온 것이였다. 그야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같이 더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무슨 대화를 할 지 몰라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다 결국 그 대화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고. 왠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억지로 집에 데려가 못생긴 집 강아지를 보여주며 귀엽지를 강요하는 초등학생 남자애가 된 기분이였다.
사실 친구의 말을 줄곧 생각해 봤다. 도대체 나기사한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답은 간단했다. 연인사이가 되고 싶고, 더 가까이 있고 싶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고. 설령 카오루가 내게 아무런 연애 감정이 없다해도 말이야.
그렇다면 답을 향한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소꿉친구와 어떻게든 함께 있으며 더 알아가야 한다.
좀 더 마음을 전해야 한다.
벽 처럼 단단한 나기사 카오루를 쓰러트릴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해야한다.
그래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꺼내며 카오루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별로 나와 얘기하는 거에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하지. 아까부터 계속 가벼운 맞장구만 쳤으니까. 오히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참아왔을 지도 모른다.
그치만 더 있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좋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눈을 깜빡이며 카오루를 다시 시선에 담으면, 아까처럼 변함 없는 무표정이였다.
다행히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다음 주 부터 대전 시합 준비를 하느라 방과후에도 동아리에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미리 공부 좀 해 놔야 해."
"어, 응...공부 열심히 하네."
"실명이는 안 하니? 아, 하기사 실명이는 공부에 별로 뜻이 없으니까."
"나도 하거든!"
이 눔이. 아무리 내가 탱자탱자 노는 것 처럼 보여도 나름 공부는 하고 있다고! 너랑 같은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단 말야!
물론 이렇게 소리지르진 못한다. 그저 가만히 카오루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물론 고고하신 나기사님께선 내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봤던 시험 보니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더라."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복도에 걸려있잖니? 이름이랑 성적. 그걸 보고 알았지."
"왜 내 성적을 보는거야!"
카오루는 시큰둥하게 실명이 이름이 눈에 띄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에게 내 성적을 들켰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다. 왜 남의 성적을 멋대로 보고 난리야? 학생한테 성적이 얼마나 민감한 건지 저도 잘 알면서.
"실명이도 내 성적 알잖니?"
"몰라! 일부러 안 본다고! 남한테 성적 보이는 거 기분 나쁘잖아.
"나는 별로 신경 안쓰는 걸."
"그야 넌 성적이 좋으니까 그런거겠지..."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며 카오루를 흘겨보았지만 카오루는 그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낼 뿐이였다.
"그러고보니..."
"응?"
"실명이 넌, 어느 고등학교로 갈거니?"
"나?"
갑자기 그건 왜? 당황한 말투로 내가 다른 대답을 하면 카오루는 그냥, 그래서? 고집있게 물어보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보통 그런 건 물어보지도 않는 주제에. 여전히 입을 꾹 다물며 카오루를 질시하였다. 다만 그 눈초리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실명?"
"K고등학교."
".........흐음, 그렇구나."
"너 지금 내가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세우는 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 적 없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평소 실명이는 적당히 잘사는 주의잖니. 갑자기 성적을 높이길래, 어디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나 싶어서."
"응...뭐 그렇지. 나기사는?"
"나도 K고등학교야."
어째 나를 조금 무시하는 것 처럼 들렸지만 이번엔 군말없이 카오루에게 수긍했다.
여기서 똑바로 고하자면 카오루는 알지 못하지만, 난 진작에 이 애가 K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걸 알고 있었다. 공부도 그것 때문에 해왔던 거고. 2학년때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께 상담했었지. 교무실에 심부름으로 우연히 그것을 들은 나였다. 카오루는 전교 탑이니까 그 학교를 치는 것도 당연하다.
친구의 말마따나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별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떻게든 그의 주변에 있고 싶었다. 지금도 사이가 좋은 친구도 아닌데 학교마저 달라지면 관계는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떨어질 수도 있지.
영영 멀어질 수도 있는 거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나한테 소꿉친구가 있었어. 이렇게 기억도 나지 않는 추억속에 파묻힐 수 있다.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지만 욕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에, 없는 집중력을 모아서 수험공부에 임했었다. 그 결과는 카오루가 보기에도 성적이 많이 오른 축이지만, 여전히 못 미친다.
"그래서..."
"응?"
"왜 K고등학교니?"
핵심을 뚫어보는 그 질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카오루에게 진실을 얘기 못하겠다면, 그냥 어설픈 거짓말로 대충 떼워도 되지만 여전히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나기사 카오루에게 갑작스레 마음을 전한다.
이건 무리다. 아직 고백은 커녕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어.
그렇지만 솔직하게 카오루에게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라고 전하면 눈치밥을 말아먹지 않은 이상 그 말이 품은 뜻을 모를리가 없다.
더욱이, 눈치 9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기사 카오루가 그걸 못 알아차릴 리 없다.
"카, 카오루는?"
"나 말이니? 신지군도 거길 목표로 잡고 있고, 무엇보다 신지군의 어머님께서 그곳을 다니셨으니까."
"아하, 신지군하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였구나. 역시 나기사야."
"놀리는 거니?"
"아니, 오히려 그 집념이 감탄스럽다."
질린 얼굴로 카오루에게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면 무참히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반응 조차 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카오루를 밉다는 듯 노려보고 있으면 그가 영문모를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뭐가?"
뭐야, 뭘 물어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이면, 이번엔 카오루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진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관찰 당하는 기분이였다.
그 시선에 어렴풋이 아까 카오루와 K고등학교 얘기를 하고
"어, 그러고보니까 카오루는 공부도 되게 잘하는 데 수험공부도 하는 구나. 당연한 거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대전시합도 있으니까, 연습 끝나고 씻으면 거의 잘 시간이니까."
"그렇구나...너 진짜 고생이 많다."
"실명이가 조금만 운동을 잘했다면 날 도와줬을텐데 말이야."
"애초에 운동도 못하는 날 끌고 간 게 누군데?"
같은반도 아닌 날 방과후까지 기다리던 1학년 나기사군을 떠올렸다. 볼 일없으면 잠깐 시간 좀 내달라는 모습에 아무생각 없이 졸졸 따라갔지. 주번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임시반장으로 뽑혀서 할 일이 많은가. 뭔가 내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르면 도착한 곳은 교무실이였다. 그리고 손에 쥐어주는 것이 입부신청서. 내가 당황한 얼굴로 카오루를 바라보자 그는 예사로운 말투로 "어차피 실명이, 귀가부지?" 이딴 말을 내뱉었다. 물론 클럽이나 위원회같은건 귀찮아서 별 관심없었지만 권위적인 그 모습이 여간 꼴보기가 싫었다. 왜 카오루가 멋대로 정하냐며 울컥 쏘아붙이면 되려 앉아계신 고문선생님이 당황해 하셨다. 그 뒤 카오루가 뭐라 했는진 기억안나고, 정신차려보니 부활동을 나가고 있었지.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은 당시에도 참 우스웠다. 그 나마 2학년 때까지 타 학교랑 시합이 없는게 다행이였지. 운동은 제대로도 못하는 내가 궁도부에 들다니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나기사 카오루군께서도 내가 지지리도 몸치인걸 지극히 아실텐데 왜 날 끌고 갔는지 알 수도 없고.
"그러고보니...어릴적에 실명이랑 축구를 했을 때도 항상 공도 제대로 못쳤었지? 생각해보면 내 판단 미스였어."
"카오루도 실수 할 때가 있구나."
남 얘기 하듯이 흘려보내면 카오루는 한숨을 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운동을 못하는 게 잘못이 아니야, 그걸 알면서 나를 끌고온 네 잘못이지. 도대체가, 운동회마다 달리기 꼴찌를 했던 애를 왜 궁도부에 데리고 온거지.
"음...그러고보니까 있잖아."
"응?"
"진짜로 왜 날 데려온 거야?"
카오루의 비아냥 소리에 맞받아칠 속셈으로 꺼낸 말이였지만, 갑자기 정말 궁금해졌다. 베스트 프랜드 까진 아니더라도, 나와 카오루는 어느정도 서로가 뭐를 잘하고 뭐를 못하는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뻔히 내가 운동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 왜 나한테 궁도부에 들자고 한 거지?
"인원 수...? 는 아니였잖아, 그땐 이 삼학년들 많았고. 할 사람이 없어서...? 너 그런거 신경 안 쓰잖아?"
나는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카오루의 뜻과는 전혀 다른 답이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1학년 때 선배들에게 신입부원이라며 둘러쌓였던 것도 기억하고, 카오루가 남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는 애는 죽어도 아니니까.
카오루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아까처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였다. 진득한 그 시선에 왠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져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알고 싶니?"
"응? 뭐 그야...신경 쓰이 잖아."
"그럼 먼저 실명이가 말해줘."
"어?"
"K고등학교에 지원하려는 이유 말이야."
카오루의 말과 동시에 심장이 내려 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보통 그 즈음에서 잊어버리지 않나? 내가 왜 K 고등학교에 가려는 걸 저렇게 신경쓰는 거지. 평소처럼 날 놀리는 것과는 달리, 카오루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대답을 들어야만 겠다는 결심을 한 것 마냥. 나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아연실색하여 입만 다물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해도 된단다."
"아니, 그...저기, 왜 알고 싶은 건데?"
"네가 나한테 답해주기 전까진 뭘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아."
카오루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비록 말투는 똑 부러졌지만 그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왜 나한테 굳이 그 이유를 듣고 싶은 걸까? 당사자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 말이였기 때문에, 나는 카오루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게 동아리를 권유했던 그 때 같았다. 어쩌면 그 이유도 똑같을까. 출구가 없는 미로 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에 생각을 품었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내게 카오루의 속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신경은 그에게 K고등학교에 가려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 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말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카오루에게 내 감정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저 단순히 우정이나, 친구가 없는 건 싫은 외로움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오루에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첫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다가가는 한 발짜국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밝혀야 되는 생각은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너는 나기사 카오루랑 뭐가 하고 싶은 거야? 문득 친구가 내게 꺼낸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마음 속으론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카오루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러나 그의 앞에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언제나 속으로 중얼거린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 카오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 감정만은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고백은, 나기사 카오루에게 들리지 않으니까.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나...나는...그..."
"그러니까........."
겨우 입을 떼고 카오루를 쳐다보면, 여전히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 거북하다. 만약에 여기서 카오루가 내 뜻을 다 알고 날 차버리면 어떡하지? 두루뭉실한 관계조차 깨져버리고, 영영 카오루가 날 어색해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결심과 함께 입은 떼어져 버렸고, 카오루는 그걸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 뺄 수는 없다. 앞으로 나서는 것 밖에는.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걷는 사람마냥 그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너랑, 카오루 너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었어."
드디어 그 한마디를 말하면 카오루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칠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마치 고백하는 거 같잖아! 아니 마음은 똑같지만, 적어도 그에게 다른 여지를 생각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부리면서 말해야 되었는데.
나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빌었다. 고백도 한 게 아닌데, 고작 그에게 작은 마음 하나를 밝힌 게 이렇게나 부끄럽다니. 도대체 고백을 하는 애들은 어떤 용기로 그 마음을 전한 걸까? 살포시 눈을 뜨고 그제서야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무슨 뜻으로 대답한 건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카오루의 대답은 어떨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입을 열 때 까지 기다리면,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얘 실명아! 엄마 잠깐 나갈테니까 빨래 좀 널어라!"
갑작스레 활짝 열린 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세우고 말았다. 열린 문 너머로는 밖에 나가려는 듯, 화장을 한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는 카오루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는 줄은 몰랐다는 듯, 그를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오루에게 잘 놀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가 닫고 나간 문 너머로 얼마나 민망한 공기가 흐르는 지도 모른 체.
"........."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진짜 이만 가야겠어."
"어?"
잠깐만, 그냥 가려는 거야? 카오루가 날 왜 데려왔는 지는 대답도 듣지 못하고, 그는 유유히 내 대답만 듣고 사라지려고 했다. 보통 같으면 왜 너만 내빼냐면서 소리를 지를법 했지만, 부끄러움에 내 몸은 이미 녹아 카오루에게 제대로 된 말 조차 하기 어려웠다.
"맞다, 실명아, 대전시합 보러 올거지?"
"으? 으, 응...명색에 고참멤버 이기도 하고...선생님도 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난 이만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낼 학교에서 봐..."
카오루는 그 말과 함께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발소리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코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방 안에서 꿈쩍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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