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만 있으면 2학년애들 수학여행가겠네...부럽다."
"우리도 작년에 갔잖아."
"학교 안가서 좋겠다~..." 


이따금씩 음악수업 때문에 밑층으로 내려가면 2학년 소식이 들려온다. 요즘은 수학여행이 얼마남지 않아 복도에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그래봤자 교토에 가는거지만 여행이란 왠지 모르게 사람을 설레게 한다. 촌스럽게 장소가 그 모양이냐며 입술을 삐죽이던 아이들도 버스에 타면 웃음꽃이 활짝핀다. 나도 그랬었고. 갔다오면 평범한 여행이고 그닥 추억거리도 없지만 여행 순간에는 잘 즐기고 있단말이야, 참.

"여행 갔다오면 축제 준비 때문에 시끌벅적 하겠네."
"수험생의 좋은 점은 축제에 참가 안해도 된다는 거지. 얼마나 안 귀찮고 좋아?"
"너 그러면서 찻집했을 때 엄청 열심히 했잖아."
"그야...농땡이 피우면 안되니까.'

아무리 내가 나태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남한테 욕먹으면서 까지 게으름을 부릴 생각은 없다고. 설득력 없는 내 단언에 친구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어련하시겠다고 말했다. 넌 다행인게 배짱이여도 새가슴이라서 남한테 민폐는 못 끼치지. 네 보기좋은 장점은 어쩔 수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사람을 칭찬하는 건지 헐뜯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곰곰히 듣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결국 제대로 반항은 못하는 소심한 게으름뱅이라는 거 아냐.

"칭찬할 건지 욕할 건지 한가지만 하지."
"애매한 칭찬이야. 설마 욕을 하겠어?"
"거하게 욕 한 사발 들이킨거 같은데."
"어? 저기 나기사군이다."

말 돌리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친구에게 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도 친구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복도에서 이카리 신지군과 즐겁게 얘길 나누고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이야, 나기사군 저런표정도 짓는구나."
"그러게."
"우리 실명이는 평생 못 볼 얼굴이지."
"내 팔자가 그렇지. 야, 매점이나 가자."
"뭐야, 너 연적이 저러고 있는거 가만 냅둘 셈이니?"
"이카리군이랑 나랑 싸워도 이백퍼센트 내가 진다."
"패기없긴...얘, 가서 본처 티 좀 내봐. 너 소꿉친구잖아."
"본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그렇게 나기사군 앞에서 끙끙 앓아봤자 누가 알아줘. 친구는 가만히 있는 나를 나무라며 한 소리 내뱉었다. 누가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거야. 내가 요즘 얼마나 카오루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친구의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 무심한 소녀에게 뜨거운 손바닥을 날렸다. 내 불타는 열정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고 친구는 맞은 등이 아픈 듯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실명, 뭐하니?"
"엇. 카오루...아, 안녕."
"친구를 때리다니, 실명이는 역시 폭력적이구나."
"역시라니, 보기보다겠지."
"내가봐도 너 맨날 나만 때리는거 같아. 나기사군 말이 맞아."
"방금까지 네가 내 욕했잖아."
"실명, 게임 좀 줄이렴. 매일 몬스터 헌터같은거만 하니까 그런거야."
"왜 게임 탓인데!"
"신지군, 이 쪽은 내 소꿉친구야."
"아, 안녕하세요."

약간 말을 더듬으며 그 신지군이 내게 수줍게 인사하였다. 이카리 신지라고 합니다. 앳 된 그 목소리가 귀여운 소년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먹힐 거 같았다. 카오루는 이런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는 구나. 약간 어색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맞인사 하였다. 깍듯한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이카리군은 멋쩍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얘기 하고 있었니?"
"그냥 수학여행이랑 축제. 아 이카리군은 2학년이라 둘다 참가하지? 축제 때 뭐해?"
"예? 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요. 수학여행 끝나고 바로 정할거 같아요."
"작년에 우리반이 일찍 정한거 뿐이야. 원랜 다 저 맘때쯤 정할 걸."

아 그렇구나. 친구의 말을 들으며 작년의 축제기간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우리반만 여행 전부터 테마를 정했구나. 딱히 반에 학생회 임원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아이들도 그닥 의욕을 보이지 않아서 계획을 빨리 짜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까딱하면 암막 뺏기는 거 부터 테마까지 다른 반이 다 차지할 지도 모르고. 작년에 반장이 얼마나 고생했었을 지를 떠올리자, 아까까지 귀찮다고 내뱉었던 말을 주워담고 싶어졌다.

"그래도 훗카이도로 수학여행 가지? 부럽다. 나도 게먹고 싶어."
"아, 이번엔 게 요리 코스를 안 들어가서 그건 못 먹는 거 같아요."
"아냐, 이카리군. 우리 때도 그건 없었어."
"맞아. 그 때 같은 방에 있었던 애들끼리 뭉쳐서 몰래 나가서 산 다음에 택배 부친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카오루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한심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카오루가 모르는 게 있다면, 수학여행을 마치고 온 다음 날 그를 집으로 초대해 내가 사온 게를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너 분명히 맛있다고 했거든. 모르고 먹었을 테지만.

"신지군, 가자."
"어? 으, 응. 저, 안녕히 계세요."

카오루는 이내 이카리군의 어깨를 끌어안곤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태와 일탈의 대표인 내가 성실하고 순수한 이카리군을 물들일 까봐 걱정하는 듯 보였다. 다소 과장된 감이 있지만 날 쳐다보는 눈이 더 이상 신지군에게 그런 얘긴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내가 한심하다는 것도 있고. 이 인간, 이카리군이 사춘기의 일탈을 저지르면 집에가서 혼자 울지나 모르겠네. 아니, 신지군에게 푹 빠져 있으니까 그러고도 남을 거다.

그리고 모든 수업이 끝난 방과후. 하교길에 오르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자신또한 볼일을 마친 듯 집에 가려는 카오루와 마주쳤다. 같이 집에 가자며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내가 신발을 다 신을 때 까지 카오루는 기다려 주었다. 애초에 옆집이니까 가는 길도 똑같아서, 결국 같이 돌아가는 꼴이 되지만. 가방을 챙겨 걸어가는 내 옆에 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보폭을 맞춰 걸었다.


"카오루 너 정말 볼 때마다 팔불출인거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니?"
"신지군 데리고 피신하는 거 말야. 누가 보면 내가 양아친 줄 알거 같애."
"양아치...는 아니더라도, 신지군에게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칠 거같진 않아, 실명이는"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눈에 힘을 주어 그에게 뜻을 되물었지만 새침한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가 확실히 게으르고 노는 걸 좋아해도 지탄받을 만큼 불 성실한 건 아닌데. 아니 것보다 카오루가 지나치게 완벽한 거 아닐까. 보통 내가 정상이잖아.

"아, 그러고보니 아까 신지군이. 카오루군한테 얘기 들었어요, 라고 말했잖아."
"응?"
"무슨 얘기 한거야?"
".........별로, 아무 얘기 안했어."
"안했으면 그런말은 보통 안하지 않나?"

어째서인지 카오루는 정적을 띄고는 짧은 답변은 하였다. 지레 찔리는 눈치인가 싶지만, 그랬다간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며 놀려대겠지. 저건 잘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아니란 뜻이다.

"카오루가 먼저 내 얘길 꺼냈을 거 같진 않고."
"...토우지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널 알고 있는 지 아이들 앞에서 너에 대해서 얘기하길래 잠깐 응해준 거 뿐이야."

흐음,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 말을 아낀게 맞구나. 예전부터 카오루와 오랜 인연으로 이래저래 주변에 관심을 받던지라 서로 알고 지낸 사이를 밝히는 건 사실 꺼름직한 일이였다. 심하게 눈길을 받은 건 아니지만 적잖이 성격 안 좋은 여자아이들에게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고. 대범치 못한 성격에 홀로 그걸 신경 쓰고 있으면 귀신같이 카오루는 그걸 알아내고는 무슨 수를 썼는 진 몰라도 소문을 잠재웠다. 생각해보니 얘 정치가가 되도 잘 할거 같은데. 뭐, 예전에 내가 좀 학을 떼다 보니 카오루도 가능하면 나에 대해서 얘기를 꺼낸 거 같지 않다. 토우지라는 애는 귀가 참 밝군. 그나저나 그럼 신지군한테도 내 얘기를 안 꺼낸 건가. 하기사 그 애한테 다짜고짜 내 얘길 꺼낼 성격은 아니지만.


"그럼 그 때 신지군도 날 알게 된거야?"
"응, 그렇지."
"그렇구나. 그래서, 그 때 뭐라고 했는데?"
"........."
"응?"
"실명...끈질기네. 아무 소리 안했다니까."
"이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무말도 안했지만, 지금부터 해주길 바란다면 신지군에게 이것저것 말해줄게. 확실히 신지군이라면 여러가지 말할 맘은 드네."
"앗, 잠깐만. 어차피 이상한 소리 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저 실명의 행동을 말하는 거 뿐이야."
"악의 가득찬 장난이랑 몰아세우는 게 무슨 본연의 행동이냐!"


성을 내며 그에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건 시침을 뚝 대답 뿐이였다. "내가 언제 그랬니?" 진짜 정치하면 성공할 놈이라니까, 얘. 어쩜 연기까지 이렇게 잘할 수가 있는 건지. 새초롬, 힐끗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내가 꽤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아무말도 안 해."
"그 신지군이 말해달라고 하면 당장 말할거면서, 무슨."
"신지군이라도 말 안해."
"...진짜?"
"응."


솔직히 신지군이라면 내 얘길 해도 괜찮은데. 남 입에서 오르락 거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 애라면 날 유흥거리로 씹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 질리게 군 것 가지고 또 몰아세우는 카오루의 꼴을 보니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하지만 카오루의 대답을 들으니 아까까지 오르던 화가 가라 앉았다. 조금 감동도 받고. 카오루 성격상 내 얘길 안 꺼내는 배려심이 있는 건 알지만 자기가 죽고 못사는 신지 군 앞에서도 날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였다. 순간이나마 신지군보다 우위에 선 기분이 든 것이 기쁘다.


"...왜 이럴 때만 배려심이 넘치고 그런대."
"별로 실명을 위한 일이 아닌걸?"
"...어, 뭐?"

따뜻한 감동을 느끼고 있던 와중 카오루가 갑작스럽게 찬 물을 끼얹었다. 물론 카오루가 진짜로 날 우선순위에 둘거라곤 생각 안했지만 사람이 좀 착각을 할 시간은 주면 안되겠냐.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던 화가 다시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퉁명스런 말투로 그에게 그럼 뭐냐고 물으면 소년이 대답한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
"말하자면?"
"......솔직히 난 신지군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 질투를 느끼지만...그래도 왠지 신지군에게 그런 얘길 듣고 싶진 않아서."
"그런...얘기?"
"실명이 말야."


그런 얘길 듣고싶지 않다니,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신지군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듣고 싶지 않다는 건가. 신지군이랑 있는 동안은 그가 자길 봐주길 바래서? 엄청난 팔불출이다.이 정도면 꽤나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십 면년지기 친구에게서 새삼스런 면을 발견하게 된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그에게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이쯤 되면 무섭다, 나기사 카오루.


"그러고보니, 실명이는 나랑 있을 땐 신지군 얘길 많이 꺼내네."
"그야 네가......으응, 아냐. 미,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왜 그러니?"
"카, 카오루 니가 신지군 엄청 좋아하니까 꺼낸 건데...이젠 농담으로도 안 꺼낼게."
"...확실히, 네가 장난으로 신지군 얘길 꺼내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신지군 얘길 하는 건 싫어하는 건 아냐."


생각보다 아량 넓은 그 말에 나는 조금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그에게 거리를 좁혔다.음, 이렇게 까지 무서워 하진 않아도 되는 거겠지. 카오루도 분명히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고. 그치만 생각해보니 내가 신지군 얘길 진지하게 꺼내도 장난스럽게 말해도 카오루는 항상 별로 기분 좋아보이진 않았다. 지금 껏 내게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소유욕은 그럼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거 치곤 너 맨날 표정 굳어있잖아."
"흠, 그거야......."
"뭔데?"
"나랑 둘이 있을 때 신지군의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카오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자전거가 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나와 그는 발걸음을 옮겼고, 자전거가 지나간 후엔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소리와 내 어깨를 감싼 카오루의 큰 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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