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그 인형들."
"친구한테 받았어."

인형이 내게 안겨있는지 내가 안고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솜뭉치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카오루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창황한 얼굴은 꽤나 기묘했다. 동아리 대회 후, 카오루는 그 동안 미루두었던 공부를 하는 지 학교 쉬는 시간에도 참고서만 봤으니까.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바닥에 뒹구는 인형을 같은 종끼리 모아 정리하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면 어느새 놀란가슴이 진정되었는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는 또르르 내 손을 따르고 있었다. 무릎을 꿇어 그가 토끼인형을 들어올렸다. 축 쳐진 귀를 만지작 거리던 카오루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이......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대회같은 걸 했었지."
"어, 나기사가 그걸 알아?"
"신지군한테 들은거야, 오늘 친구들하고 같이 간다고 했었는데...흐음, 실명이도 참가했니?"
"나 말고 친구가. 걔가 우승했어. 자긴 인형 싫다고 나한테 줬는데...너무 많네 이거...나기사, 주변에 여자애들 많아?"
"그건 왜? 글쎄, 별로."
"나눠줄려고 그랬지...그래? 의외네. 잘생겼으니까 당연히 많을 줄 알았는데......아, 이건 내꺼."

토끼와 고양이 밑에 깔려있는 부엉이 인형을 꺼내 품에 꼭 안았다. 이건 뽑느라 무진장 고생했으니까 상관없겠지. 친구에게 이 인형을 뽑아 달라고 떼를 쓰며 돈을 갖다바친게 떠오른다. 이래서 인형뽑기는 하는 게 아닌데. 초등학교때도 일주일 용돈을 인형뽑기에 하루만에 써버려서 엄청 혼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땐 진짜 아빠한테 죽는 줄 알았지. 지금은 다행히 친구가 한번에 뽑아서 본전 뽑았지만.

"부원 애들한테 나눠줄까? 음...그래도 남겠네."
"살명아, 남자애들한테도 줄 생각이야?"
"귀여운 걸 좋아하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나기사군, 남녀차별하면 안 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음...근데 여자애들 중에도 별로 안 좋아할 애들 있겠지? 어림잡아 반 애들하고 동아리 애들 세어보면......여섯? 일곱? 너무 적은데..."
"친구가 너무 적네, 실명이는."
"니가 인기가 넘쳐 흐르는 거겠지!"


너 보단 친구 많거든! 쉬는시간에도 신지군이 아니면 별로 남들과 떠들지 않는 카오루를 떠올렸지만, 이내 그말은 목을 넘기지 못했다. 나기사 카오루가 친구를 사귀지 않는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였다.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 라고 저번에 내게 진지하게 말했으니까. 학교생활도 잘하고, 신지군하고도 잘 지내는 걸 보면 그 말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묘하게 사람에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면 납득이 가긴했다. 예전부터 철벽치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때 카오루는 '내가 그를 어떻게 행복으로 끌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때 그 에게 대화를 해보라고 대답했지. 카오루는 그 애랑 제대로 얘기를 나눴을 까?
그리고 그 애는 도대체 누구일까? 말 하는 걸 보면 신지군인 거 같긴 하지만, 신지군이랑 카오루는 지금도 행복해 보인다. 그럼 신지군은 아닌 거 같고. 어떤 사람이지, 카오루랑 무슨 사이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카오루에게 무참히 묻힌 고백아닌 고백의 충격에 그제서야 카오루와 나눴던 그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그 사람이 카오루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실명? 무슨 생각해?" 

잠자코 인형을 든 체로 바닥을 쳐다보는 것이 별 일인지 무슨일이냐며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든 듯 인형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물어볼까 고민하던 때에 말을 붙이다니.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저기, 있잖아."
"왜 그러니? 답지 않게 운을 띄고."
"나는 뭐 진지하면 안 돼?"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뗀 내게 카오루는 시건방진 소리를 내던졌다. 약간의 울컥함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진정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질까봐 말을 서슴는 나를 다독이는 것이겠지.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놀리곤 하지만, 이 정도의 상냥함은 있다.

"나랑 그 때 했던 얘기 기억나?"
".........어떤 얘기?"
"그게......"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무겁게 입술을 움직인 카오루가 내게 물었다. 카오루에게 그와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었을 때의 일을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K고등학교에 가려고 한 이유. 나기사 카오루가 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했던 말.
머릿속에서 그 일이 지나치자 마자, 나는 카오루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 녀석이 모르는 척 넘어가고 하는 게 맞다면, 적어도 말끔하게 그를 잊을 수 있게 거절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거기다 아주 만약의, 기적이 일어나서, 카오루가 자기도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감정을 직접 말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로,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지만 지금 카오루에게 물어야 할 말은 따로 있을 거다. 카오루도 사람이니까, 이따금씩 고민을 끌어 안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때 서글퍼 보였던 표정이 카오루가 그 사람에 대해 정말로 애를 태우고 있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친구로써,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사람으로써 그가 그 고민을 잘 풀어나가고 있는 지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말이야, 나 걸레물 뒤집어쓰고 했을 때."
"아...그 때 말이니?"
"너 그 때 나한테 같이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얘기 해봤어?"
"응. 해봤어."
"진짜? 그래서 그 애 뭐라고 했어?"

카오루는 생각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안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나 싶어 그러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행복하다고...아니, 행복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불행한 거 같진 않다고 했어."
"그럼 됐지 뭐. 사는 게 우울하지 않으면 된 거아니야?"
"...실명.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원래 행복이란 게 그런 거 잖아.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거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한 거고.
어차피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파지는 거니까...제일 좋은 게 행복이고 뭐고 생각없이 그냥 잘 사는 거지.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거 보단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카오루는 왜 그,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사람을 마치 불행하다는 것 마냥 말하는 걸까? 신지군은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았는데. 신지군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보통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니까. 나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돼, 이렇게 말하는 건 연인이 아닌 이상 마치 불행한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같다.

"카오루...있잖아, 너 그 애랑 사귀는 사이야?"
"...실명, 아무리 네가 사춘기 소녀라고 하지만 너무 연애론적인 사고방식 아니니?"
"나도 사랑이 굳이 연애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그냥 단지, 네가 너무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서. 아니면 너, 그 애를 불행하다고 생각해?"
"불행...? 그렇진 않아. 그저 단지...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사람의 마음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던 카오루는 그 때와 똑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카오루의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였다. 자기 존재가 사라져도 상관 없다는 것 마냥, 카오루는 본심을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카오루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왜 질투를 하지 않는 지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질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카오루는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해 하길 바라는 것 뿐이다. 나 처럼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지만 연애감정은 아니다. 카오루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미래에 자기는 없다. 없어도 상관이 없다. 나기사 카오루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가? 뭐지 이 아가페적인 사랑은. 사랑에 굶주린 애정결핍자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들으면 소름끼쳐할 감정이다. 받지 않고 카오루의 마음을 두 귀로 듣고 있는 나도 그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카오루는 그 앨 사랑하지만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럼 카오루는 그 애가 혼자서만 행복해져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
"너가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아?"
"난 죽어도 괜찮아."

설사 이 몸이 부숴진다고 해도, 그 애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야. 카오루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웃는 그 표정이, 더욱이 황홀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카오루가 왠지 모르게 무서워 졌다. 자길 내다버리고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 붓는 건, 이야기 속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건 이야기 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주 희생의 아이콘으로 나오곤 하지만, 카오루의 희생은 무언가 달랐다. 부모의 사랑이라기 보단, 오히려 신 같았다. 흔히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말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은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고 만다. 너무나도 다르니까. 신의 사랑은 인간을 독에 빠트리고 만다. 인간과 신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오루와 시선이 맞으면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 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심...이야?"
"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 정말이야."

그게 뭐야. 보통 사람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다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는 미래를 생각하잖아?
나는 어릴적 부터 지내왔던 친구에게 뭔지모를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런 거 단순히 자기만족이잖아? 라고 몰아세우고 싶었고, 그의 사랑이 경이로운 탓에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아니,  카오루와 있는 이 상황이 무서워 졌다. 

"...실명? 왜 그러니?"
"어? 아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프니?"
"아니야, 안 아파. 괜찮아."

방금전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카오루가,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 아이와 지낸 세월을 오래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의 이런면은 처음 보는 것이였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오랜 지인에게 이런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일을 겪곤 하지만. 그건 보통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겠지. 감정적으로 그 면을 공감한다는 이해가 아니라,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이해의 것일 거다. 하지만 카오루의 행동은 내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오루는 절대 아가페적인 자신의 사랑에 도취된 것도 아니였고, 그걸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였다. 그저 자기 안에 그런 사랑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바치기만 하는 사랑. 사람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나기사 카오루가 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실명? 얼굴이 새하얘. 속 안 좋은 거 아니니?"
"괜찮,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다독이는 듯 카오루에게 연신 탈이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듯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갖다대곤 안색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열이없는 손은,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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