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가 '모리스케' 라는 이름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오늘 낮부터 였다.

야쿠 모리스케. 시모카와 유카의 자랑스러운 남자친구의 이름이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사랑스러운 사람, 늘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퍼붓는 다정한 소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외우고, 누군가가 속삭이면 어디서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언제든지 입에 올리는 건 연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즉 의식하는 건 세상의 이치, 사랑의 도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카가 모리스케란 단어를 의식하는 건 조금 다른 이유였다.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성이 아닌 온전히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연인이 되고 나서도 조차!



유카와 야쿠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절대 아니였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연인은, 이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것 마냥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대낮에 학교에서 서로를 얼싸안을 용기는 커녕 아직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 조차 부끄럽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느 연인보다 짙은 빨강색이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큰 사건은 아니였다. 점심시간을 맞이해 야쿠의 반으로 갔던 유카가 그토록 신경쓰는 소년의 이름을 들은 것 뿐이였다.

조금, 아주 조오금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애였다는 건 걸리지만. 사실 많이 걸리지만, 중요한 건 연인인 자신이 야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부름을 통해 그녀는 그제서야 깨닫고 만 것이다.



그리고 야쿠 또한 자신의 이름을 담은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모카와, 라고 말했지만 한번도 유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수줍게 야쿠와 손을 잡고 볼에 입맞춤을 하는 단계 까지 겨우겨우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연인의 이름을 불러도 되지 않을까?



물론 유카 본인은 언제든지 모리스케 선배, 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무런 부끄럼을 보이지 않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또 세상 누구보다도 달콤하게 연인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모리스케, 모리스케, 모리스케 선배...

말의 무게따위 있을리가 없는데, 단어를 입에 머금을 때마다 마치 입술에 내려앉는 기분이였다. 단어는 이윽코 불꽃이 되어 유카의 얼굴위로 펑, 하고 터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정말로 그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다면 물어보면 될 것이다. 선배, 왜 이름으로 안 부르세요? 아니면 조금 투정을 부리며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하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유카 자신이 먼저 모리스케를 부르고 싶었다.



손을 먼저 잡은 것도, 조심스레 뺨에 입을 맞춘 것도 야쿠가 먼저 해주었다. 아이들 속에 파묻혀 보일리 없던 자신과 눈을 맞춰 주었던 것도 야쿠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주었다.

모든 처음은 그가 늘 선사해주었다, 그렇담 적어도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건 자신이 하고 싶었다.



"시모카와?"

"아, 네, 네! 듣고 있어요!"


그리고 때는 흘러 하교시간. 오늘도 야쿠는 자신의 연인을 데려다주고 유카는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짐했던 의지는 시도조차 해내지 못했다. 하교길을 걸으며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입술을 열어보려 했지만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고 조용해진 순간을 눈치 챈 야쿠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였다.


한 낮의 태양만큼 뜨거웠던 결심은 해가 져물어가는 노을 빛마냥 바래졌다. 겨울을 타는 하늘은 어느새 샛별을 내보인다.

망설임을 비웃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은 집 앞에 우뚝 서 유카를 마중나왔다. 이제 그와 헤어질 시간이다. 작별을 건네려는 야쿠는 아쉬운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서, 선배! 저, 저기!"

"으, 으응?"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는 유카에게 놀란 듯 소년이 말을 더듬었다. 그 상황이 조금 부끄러워 소녀가 귀까지 빨게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야쿠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자, 자, 잘 가시라고...인사 하려고..."

"응, 그래. 잘 들어가고..."

"아뇨, 잠시만요..."


작게 웃음 소리를 내는 야쿠의 손이 유카에게 꼭 잡혀버렸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면서 궁금하기도 한 야쿠는 유카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유카는 조용히 속으로 주문을 외듯 사랑스런 이름을 불렀다.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조!"

"....조?"

"조심히...가세요...!"

"........."

"조심히 가세요, 모리스케 선배!"


설렘과 다짐, 사랑을 담아서 유카는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야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유카. 내일보자." 대답해주었다.


이 사랑스런 연인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쁨과 함께 그 설렘을 연인의 이름을 외면서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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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본은 집중이다. 눈과 귀, 그 모든 감각을 상대방에게 집중하여야 한다. 그 유명한 빨간머리 해적단의 선장이 많은 이들에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샹크스는 이따금씩 그 집중을 싸움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쏟아부었다. 아니, 이따금씩이 아니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이 소녀가 눈 앞에 나타날 때 마다였다.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그 예리한 감각은, 소녀가 다른 이와 마주볼때, 대화를 할 때, 웃을 때 마다 살아났다. 언제나 시선은 그 얼굴을 향했고 귀는 목소리를 향해 열렸다.

사랑을 처음 해보는 어린 남자마냥, 샹크스는 행동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누구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였다. 배를 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많은 감정을 나눴었지.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조용한 사랑도 해보았다.

그런데 왜 저 소녀 앞에선, 이 불 같은 사랑을 감당치 못하는 소년처럼 굴고 마는 걸까? 자신이 끌어안은 불덩이를 감당치 못하는 어리숙한 아이처럼...제어되지 않는 스스로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샹크스는 또 다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작은 입술이 웃음소리를 흘린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은 자신의 동료인 벤이였다. 감각은 또 다시 살아나고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른다. 가장 믿는 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대에게 조차 눈을 흘기고 마는 샹크스 였다. 저 남자에겐 언제든 등을 맡길 수 있는데, 왜 소녀에 관해선 그럴 수가 없는 걸까. 소녀가 누구와 대화하든 그 상대에게 화가 났다. 결국 그 화는 시덥잖은 질투를 하는 스스로를 향해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 뿐 만은 아니였다. 그저 사랑에 대해 쪼잔하게 구는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였다면 이런 착잡함 따윈 들지 않았을 거다.
샹크스가 사랑하는 연인은 소녀였다. 그의 마음을 흔드는 손길은,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린 여자의 것이였다. 그리고 그 어린 여인의 몸짓과 말 하나하나에 괜한 의미를 붙여보았다가 혼자 실망하고, 멋대로 이상한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저 눈빛은 필시 다른 이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저 말은 묘하게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고. 가만히 있는 소녀의 주위를 맴돌며 혼자 휘둘려져 버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샹크스가 자신을 보고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소녀가 손을 흔든다. 방금까지 그 남자와 즐겁게 웃고 있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야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안했다. 방긋 웃는 저 얼굴은 샹크스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지 모를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를 원망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

성큼성큼 소녀는 샹크스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씩, 소녀가 저에게 가까워지면 마치 자신의 마음을 여인이 허락한 것만 같아 샹크스는 가슴이 떨렸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소녀는 그 동안 벤과 무슨 얘길 하고 있었는 지에 대해 얘기하였다. 온 신경을 기울여 대화를 엿들은 샹크스는 알고 있었지만 처음듣는 얘기마냥 소녀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적어도 소녀의 앞에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유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아 참. 샹크스씨는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나? 갑자기 왜?"
"샹크스씨가 뭘 좋아하는 지 궁금해서요."


소녀의 그 한마디는 특별한 게 아니였다. 벤과 나눴던 대화 중, 미처 듣지 못한 사이 오고갔던 말일 수도 있고 다른 동료에게도 물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서 기둥처럼 꼿꼿히 서 있으려던 샹크스는 그 말에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아니다, 어느 애틋한 감정이 담겨져 있지도 않고 그저 샹크스를 좋은 지인으로 대하는 거겠지. 

샹크스는 알고 있다. 소녀에게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자신을 향하는 시선, 목소리는 언제든 남을 향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괜한 기대를 품고 혼자 실망하고 철가면을 씌운 마음이 흔들린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바다를 샹크스는 동경했다. 파도는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 점이 좋았다. 바다는 샹크스에게 있어 세상이였다.
그리고 소녀 또한 바다 같았다.
그 작은 물결은, 언제든지 샹크스를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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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은반 학생이라고 여겼었다.

'같은 반 친구'라는 말을 하기엔, 마츠자카 잇세이는 그녀를 몰랐다. 밑에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반에서 그녀가 누구와 친한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그런 사소한 것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접점이라곤 같은 반인 것 뿐인 흐릿한 사람. 마츠자카 잇세이에게 얼랭이는 자신의 반에 인원수를 채우는 학생일 뿐이였다.

 

싫은 것도 아니였고, 좋은 것도 아니였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사이. 

 

 

그러나 그녀를 몰랐던 오랜시간이 우스울만큼, 그 존재가 눈에 들어온 건 한 순간이였다.

 

 

방과 후, 마츠카와는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남아있었다. 이상하게 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서 꺼낸 공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놓고간 옷 한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재차 확인하며 그것을 들어본다. 학교 체육복이였으나 딱 봐도 작아보이는 그 크기는 여학생용이였다. 부원이 놓고간 옷이라곤 볼 수 없다. 체육수업 때 여학생 중 누군가가 잃어버린 걸까?

 

“그거 내 옷이야.”

 

갑자기 뒤에서 낯선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츠카와가 놀라 고개를 돌리면,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본 적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아이다. 얼떨한 마츠카와의 표정은 그녀를 모른다고 똑똑히 써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마츠카와를 향해 빙긋 웃을 뿐이였다.

 

“같은 반이야.”

“어?”

“너랑 나 같은 반이라구.”

 

마츠카와의 손에 들려있던 체육복을 가져가며 그녀가 말했다. 소년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본디 타인에게 무심한 성격이 아니였다. 보통 학생이면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아이도 5월 즈음엔 그 존재를 외운다. 마츠카와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묘하게 얼랭이는 기억에 남지 않았었다. 소년이 얼굴에 머쓱함을 씌우면 얼랭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원래 애들이 날 잘 기억 못하거든.”

 

그녀는 익숙한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아이였다. 마츠카와는 그 말에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 그거 만져봐도 돼?"

"뭐?"

"배구공 말야."

 

살갑게 말을 거는 얼랭이는 소년이 옆구리에 끼워놓은 배구공을 가리켰다. 그는 조용히 배구공을 건네주었다. 얼랭이는 이리저리 그것을 만져보며 흠,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드렁한 그 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배구공은 처음 만져봐."

"그, 그래?"

"축구공이나 농구공하곤 느낌이 많이 다르네."

 

마츠카와가 양 손안에서 배구공을 돌려보는 얼랭이에게 시선을 맞추면, 공에 집중되어 있던 눈동자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츠카와는 저도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 이만 가야겠다. 안녕.”

 

아무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얼랭이는 싱겁게 작별인사를 남기곤 떠나버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단순한 착각인 듯 했다. 그저 남과 대화할 때 똑바로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츠카와도 곧 그녀를 잊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난 부원들을 반겼다.

 

 

 

 

“연습 중이야?”

 

그렇게 얼랭이에 대해서 잊어갈 때쯤 만남은 갑작스레 다시 찾아왔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있던 도중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느낌이 들어 뒤 돌아보면 얼랭이가 서있었다. 마츠카와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츠카와의 짧은 대답을 들으며 얼랭이는 그의 옆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손은 군더더기 흙이 묻어있었다. 뭘하느라 저렇게 흙투성이가 된걸까? 조용히 손을 씻던 얼랭이를 향해 마츠카와가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마츠카와가 자신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였다.

 

“음...나 원예부거든.”

“왜 장갑을 안 끼고 해? 손 다치잖아.”

“어...그게...장갑이 다 떨어져서. 1학년이나 2학년은 아직 서툴러서 다칠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맨손으로 한다 했어.”

“고문 선생님껜 말씀 드렸어?”

“응...곧 가지고 오신대.”

 

그 말을 끝으로 얼랭이는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분위기에 마츠카와도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얼랭이가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그는 당황해했지. 어째서인지 이번엔 반대가 되어버렸다.

 

“저......마츠카와는 잘 몰랐는데 사교성이 좋네.”

“어?”

“그냥, 잘 모르는 애한테 선뜻 말도 걸고 그래서...좀 더 과묵한 성격인 줄 알았거든.”

 

물론 아무하고나 수다를 떨만큼 친화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계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리는 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츠카와는 얼랭이의 말을 되받아 쳤다.

 

“너야말로, 난 네가 낯가리는 성격인 줄 알았어.”

“응? 나 낯가리는 타입이야. 모르는 남자애한텐 말도 잘 못거는 걸.”

 

얼랭이는 마츠카와의 말에 반박하였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그녀를 오해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생각이 오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때, 얼랭이는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자신과 얼랭이는 눈빛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사이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먼저 마츠카와에게 다가간 걸까?

 

“마츠카와는 날 잘 모르겠지만 난 너 알고 있었어. 눈에 띄잖아.”

 

얼랭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라면 조금 납득이 간다. 신장이 큰 탓에 그는 어딜가나 시선을 받긴 했었다. 부드러운 성격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녹아들긴 했지만, 대부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음...그냥, 처음봤을 때부터 계속 네가 내 눈에 띄었어. 아, 역시 키가 커서 그런가?””

 

그녀는 스스로 납득을 하며 몸을 돌려 손을 털었다. 그러곤 이만 늦었다며 훌쩍 가버리는 그녀를 보며, 마츠카와는 얼랭이가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얼랭이와 보냈던 시간은 묘하게 인상에 남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평범한 것이였다. 이대로 얼랭이도 마츠카와도 서로에 대한 것을 바로 잊어버릴 만큼. 마츠카와는 아마도 두 번다시 그녀와 그 때와 같이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심사도, 무리도 맞지 않으니까.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얼랭이를 잊고 살던 나날 중 그는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고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얼랭이를 보며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떠올렸다.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보고 있으면 갑작스레 얼랭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뭐, 같은 반 친구라고 반드시 살갑게 인사해야 할 필욘 없으니 그도 얼랭이의 시큰둥한 반응을 받아들였다. 근처에 있는 책장 옆에 다가가 제목들을 훑고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자 책을 내려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던 얼랭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


소리를 죽이며 조그맣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입술은 천천히 눈과 함께 휘어졌다.

그 순간, 마츠카와는 세상이 숨을 멈추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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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상냥하며 항상 태양같은 그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마치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 마냥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동경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이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세찬이의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당하게 올라간 눈썹은 부끄러운 듯 살짝 내려가 있었고, 그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세찬이는 누구에게나 상냥하였다. 그 점에 반했는데, 왜 지금은 그 이유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는 그를 좋아했고, 남들처럼 서로 좋아 죽는 연애를 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건조한 연애관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제대로 된 연인관계를 확립했을 때 경우이다. 어떤 연애관을 추구하고 행할지는, "과연 서로 상대방을 연인으로써 확실히 보고 있는가" 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세찬이가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도 없이 고백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얼랭이는 이따금씩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불안하였다. 이 연애관계는 아무리봐도 저 혼자만 화살을 쏘는 기분이 들었다. 세찬이에게 제대로 묻고 싶었다. 오빤 날 정말로 좋아하나요?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 만약에, 만약에 그 때 보여줬던 미소와 정 반대의 것이라면, 이 설움이 폭발해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갈까 무서웠다. 세찬이의 여자친구로 있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신을 잡아 먹었다.


그리고 얼랭이는 속상한 마음을 삼켰다. 자꾸만 물 밖으로 떠오르는 그 설움을 애써 참아왔다. 세찬이를 좋아하고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자신만 참으면 세찬이의 미소는 계속 얼랭이를 향한다. 그 사실이 얼랭이를 견뎌내게 했다. 그러나 세찬이는 얼랭이에게만 웃어주는 게 아니였다. 모두에게 같았다. 모두에게 친절하면서 얼랭이에게도 다정했다. 얼랭이는 그 '모두'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그의 주변인이기만 한 것 같았다.


세찬이는 자신에게 있어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인데, 그의 눈에 자신은 어떤 색일까? 색을 띄우고 있을까? 그저 평범한 회색빛이진 않을까.


세찬이의 미소가 보고 싶어 설움을 참아왔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갔다.


눈 앞에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미안한 듯 머리를 긁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였다. 얼랭이는 세찬이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찬이에게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세찬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양해를 구하며 친구에게 가봐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가 곤경에 빠지면 언제든지 달려나갈 세찬이의 성격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몇 번이나 세찬이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왜 오랜만에 그와 오붓하게 있는 지금 이때에 그런 일이 생긴 걸까?


얼랭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는 지, 아니면 그저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 진 알 수 없었다. 얼랭이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진 알 수 없었다.

그를 좋아했고, 곁에 있고 싶어 얼랭이는 혼자 앓으며 참아왔다.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게, 연애에선 더욱이 옳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찬이의 말을 듣자마자 얼랭이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감정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얼랭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세찬이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세찬 오빠."

"어, 어어."

"좋아해."


담담한 고백과는 반대로 얼랭이는 세찬이와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세찬이는 갑작스레 얼랭이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서 놀랐는 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세찬이의 온도는 얼랭이를 더욱 부추겼다. 


자, 이제 늪에 빠져있던 얼랭이가 수면위로 나와 모든 것을 전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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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안은 조용한 공기만이 흘렀다. 누군가 없는 것은 아니였다. 얼랭이와 오이카와, 이 둘이 남겨져 있었지만 둘 사이에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정말 정말,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법한 일이 일어났다. 둘은 지금도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싶었다. 매니저 얼랭이가 체육창고를 혼자 청소하고 있길래 조금 도와줄까 싶어 오이카와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친한 사이는 아니고, 오히려 어색한 사이이지만 그 고생을 지켜보기엔 오이카와는 냉정한 성격은 아니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쓰는 창고이니까, 손이 남길래 빌려주려고 한 것 뿐이였다.


창고 안에 오이카와가 들어온 걸 눈치 챈 얼랭이는 놀란 듯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뭐 청소하고 있어? 도와줄까? 그런 말을 내뱉기엔 약간 껄끄러워서, 오이카와는 조용히 얼랭이가 있는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 때였다. 갑자기 창고 문이 닫힌 것은.


문 고장났으니까,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오이카와와 얼랭이는 부원들으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이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 둘은 꼼짝없이 이 공간에 같히고 만 것이였다!


그렇다고 그닥 급한 상황은 아니였다. 핸드폰이 있었으니까. 부원들에게 연락을 돌려 학교 근처에 남아있는 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안 있으면 곧 사람이 올 것이다.


그러나 마냥 속편한 상황은 아니였다. 특히 같이 있는 상대는, 불편한 사람이였으니까.


싫다거나, 짜증난다거나, 기분나쁜 건 아니였다.

그러나 얼랭이는 오이카와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늘 다른 사람들에게 미소를 머금는 그는 자신에겐 쌀쌀맞았으니까. 친근감있게 남을 대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왜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건 진 알 수 없지만, 그 누가 자길 싫어하는 사람에게 웃으며 다가갈 수 있겠는가? 때문에 얼랭이는 오이카와가 어려웠다.


하지만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랭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눈에띄는 타입은 아니였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 덕에 그녀는 부원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얼랭이는 오이카와에게 거리를 두며 다가가지 않았다. 꺼리고 있다는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왜 자신을 불편해 하는 진 모르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건 확실하였다. 아무리 여자들에게 친절한 오이카와였지만, 딱 봐도 저를 탐탁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진 못했다.


부원은 언제 쯤 올까? 분명 학교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테지만, 가시방석 같은 이 분위기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얼랭이는 오이카와의, 오이카아는 얼랭이의 눈치를 보며 침묵을 유지하였다. 고장난 창고 문 처럼 굳게 닫힌 그들의 입술은, “내가 혹시 무슨 잘못했어?” 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허나 아무말 없이 이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얼랭이와 오이카와, 둘 다 곤란하였다. 창고 문이 열리고 드디어 탈출한 서로가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면, 얼마든지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다. 둘은 이 창고를 나간다 해도 내일이면 다시 얼굴을 마주봐야 할 사이이다. 오이카와는 배구부의 주장으로써, 얼랭이는 배구부의 매니저로써. 서로가 졸업을 하기 전까진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이다.

피할 수 없는 관계이며 피해서도 안되는 관계이다.


얼랭이는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나갈 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다른 부원들에겐 능청맞게 구는 오이카와는 역시나 무뚝뚝하다. 아마 자신과 함께 있어서겠지. 그 태도에 자꾸만 주눅이 들고 그를 피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어색함을 유지할 순 없다. 부원들도 오이카와와 얼랭이의 사이를 슬슬 눈치채고 있으니까. 부원들을 챙겨야 하는 매니저가 오히려 그들의 걱정을 시키는 건 우스운 일이다. 얼랭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오이카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너 나 불편해?”


너무 적나라한 질문이였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였다. 돌려 말하는 것 보단 피할 길을 없애는 게 훨씬 낫다. 얼랭이는 놀란 듯 점점 눈동자를 크게 뜨는 오이카와의 답을 기다렸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긴장되고 길었다.


“넌 왜 나 싫어하는데?”


그러나 오이카와는 질문으로 얼랭이에 말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 내용은 놀랄만한 것이였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싫어한다니! 말도 안된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면 몰라도! 얼랭이는 저도 모르게 무슨 소리냐며 큰 소리를 내었다. 평소에 얌전한 그녀가 낼거라곤 상상조차 못할 크기였다. 얼랭이는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오이카와는 그 동안 얼랭이가 자신을 피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얼랭이는 놀랬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기피했던 건 사실이였으나,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였다. 얼랭이는 오이카와에게 자신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 지 얘기하였다. 오이카와는 또 놀란표정을 지었다. 얼랭이가 자신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배구부 부원이 도착해 창고 문을 열면, 얼마전까지 서로 서먹하게 굴던 얼랭이와 오이카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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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랭이란 여자애가 있었다. 늘 항상 자길 쫓아다니며 서슴없이 애정을 퍼붓던 아이였다. 바쿠고의 퉁명스런 반응에 굴하지 않고 늘 고백을 해왔었다. 그냥 무시하면 저 뜨거운 마음도 금방 식고 말겠지.  그런 생각으로 바쿠고는 얼랭이를 항상 상대하지 않았다.


얼랭이의 대쉬가 어느새 일상의 한 조각이 되었을 무렵, 그는 점차 얼랭이가 자신에게 발길이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라던 일이였고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바쿠고 카즈키에게 쫓아다니는 여자애 한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였으나 귀찮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쉽다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마음은 아니였다. 다만 허전함이 있었다.


얼랭아 널 좋아해. 개운치 않은 감이 마음 속을 어지럽히던 나날이였다. 바쿠고는 처음보는 남자애가 얼랭이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늘 자신을 향하던 눈은 부끄럼이 서려있었다. 그 탓일까, 얼랭이의 볼도 빨갛게 물들여 있었다. 바쿠고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그녀가 그런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사실에 놀랐다는 것.


사실 당연했다. 얼랭이는 끄떡도 않는 자신에게 마음을 더 보여줘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바쿠고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넘치는 사랑은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겠지. 실연은 새로운 사랑으로 덮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바쿠고는 자만했다. 아니, 자만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얼랭이의 사랑이 계속 자신을 향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바쿠고는 남학생과 함께 있는 얼랭이를 지나치지 못했다.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더듬는 얼랭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어서 얼랭이는 그 말을 해야했다. 눈 앞에 남학생의 표정은, 얼랭이의 망설임에 점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서 빨리 그 불쌍한 마음을 꺼트려 줘야한다. 평소엔 그렇게도 잘만 떠벌리던 한 마디를 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못 내뱉는 거지?


자신은 바쿠고 카츠키를 좋아한다는 그 간단한 말을 왜 저 남자에게 하지 못하는 건가!


마음 속으로 얼랭이의 대답을 예상하던, 아니 바라던 소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랭이의 마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

그건 단순히 자신이 고집을 부린 것 뿐이였다. 사실은 그 마음이 계속 되길 바랬다.


어디에 있든 제일 먼저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랬고 작은 보폭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그 발소리가 계속 들리길 바랬고 자신만 보면 올라가는 그 입꼬리를 계속 볼 수 있길 바랬다.

바쿠고 카츠키를 좋아하는 얼랭이를 늘 바랬다.


얼랭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남학생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자신을 부를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했다.

바쿠고는 성큼성큼 얼랭이와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얼랭이를, 똑바로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남학생이 무어라 뒤에서 소리를 쳤지만 바쿠고의 몇마디에 그는 줄행랑을 쳤다.

바쿠고가 자신을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얼랭이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놀랄 땐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바쿠고는 그 상황에서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였다. 항상 그가 보았던 표정은 시무룩해 하거나, 들떠있는 표정 뿐이였으니까.


발걸음을 얼랭이에게 옮기면,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 어느새 그녀의 등에 벽이 닿았다. 딱히 얼랭이를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으나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으니 딱 좋다.

당황함과 불안함이 가득한 그 얼굴을 향해, 바쿠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야, 쟤 말고 내 고백에 먼저 대답해. 너, 나랑 연애할 생각 있냐?"



얼랭이의 대답을 들은 사람은 바쿠고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들 그 고백에 대답이 어떻게 되었는 진 알 수 있었다.

얼랭이에게 바쿠고가 고백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얼굴만 붉힐 뿐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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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키군, 미코링 왜 저래?"

"여자친구랑 싸웠대."


미코시바 근처를 수첩과 펜을 들고 어슬렁 거리던 노자키가 말했다. 제 아무리 친구라 할지여도 사랑에 관한 건 프로의식을 발휘하는 구나, 치요는 노자키를 보며 생각했다.


미코시바와 얼랭이가 사귀는 건 그의 주변인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얼랭이와 행복한 연애생활을 즐기던 미코링이 저렇게 기운 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였다. 아무래도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코링 얼랭이하고 싸운거야?"

"싸운거라니, 그냥 좀...내 아기고양이가 잠깐 토라진 거 뿐이야."

"왜 싸웠는데?"


이미 미코시바의 입발린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치요의 말에 방금까지 한껏 빛나던 미소가 다시 축 쳐지고 말았다. 미코시바는 치요에게 저번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여자애 피규어가 많다곤 들었지만...죄다 수영복에! 팬티도 보이잖아! 미코시바 변태야? 실망이야."


다시한번 얼랭이가 자신에게 쏘아붙인 말을 겨우겨우 꺼내면, 미코시바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금방이라도 그 주변에서 비가 쏟아질 기세다. 치요야 미코시바가 어떤 취향을 가지던 말던, 그는 노자키가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지만...미코시바의 연인인 얼랭이의 관점에서 그의 피규어 취향은 확실히 충격일 것이다.


그렇다고 미코시바의 취향을 갑자기 개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취향이 바뀌는 거면 미코시바는 진작에 바꿨을 것이다. 세상모두가 마음에 드는 이를 위해 취향을 쉽게 바꿨겠지. 그러나 그게 녹록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방과 후, 힘 없는 걸음으로 집으로 가던 미코시바에게 문자 메세지가 왔다.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집에 가겠다는 얼랭이의 것이였다.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집으로 간 그는 자신의 방에 있던 피규어들을 모조리 벽장안으로 넣었다. 얼랭이를 위해 버리기엔 너무나 피 같은 아이들이였다.


"........."

얼랭이는 휑한 미코시바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무뚝뚝한 표정에 더해져 방 안에 공기는 더욱 썰렁해졌다. 미코시바가 얼랭이를 향해 웃으며 앉으라 하면, 그녀는 벽장문을 열어제꼈다. 미코시바가 고이 넣어둔 피규어들이 드러났다.


"안 버렸네."

얼랭이는 피규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얼랭이가 버리라고 한 적 없으니까...! 미코시바는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물론 얼랭이가 버리라고 했었어도 버리진 않았을 거다. 저기, 얼랭아... 피규어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심지어 치맛 속까지 꼼꼼히 보는 얼랭이를 향해 미코시바가 말했다. 그러나 얼랭이는 미코시바의 말을 무시할 뿐이였다.


훌쩍, 하고 미코시바는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게 좋아?"

왠지 여기서 대답을 했다간 헤어지자고 할 것만 같아, 미코시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랭이가 대답을 재촉하듯 그를 한번 째려보았다. 미코시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 얼랭이는 한숨을 쉬었다.


"왜?"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으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피규어로 현실에 구현되었기에 산 것 뿐이다. 그리고 남성향물이다보니 좀 노출이 많은 거 뿐! 딱히 노출이 많아서 그 피규어를 산 것은 아니다! 물론 노출이 없는 피규어가 나왔다면 미코시바는 실망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얼랭이에겐 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데 왜 이런걸 아직까지 모으는 거야?"


그러고보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남자친구가 AV를 보는 것도 바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얼랭이도 그런 부류인걸까? 그렇다면 확실히 말하고 싶었다.


"아, 아냐! 내 3D 아기고양이는 너 밖에 없어!"

"3D? 뭔진 모르겠지만 그거 말곤 다른 애도 있다는 거네?"

"엇,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얼랭이의 눈이 더 사납게 올라간다. 차라리 이런 용어가 통하는 사람이였으면 좋았을텐데! 만화나 애니에 대해선 지브리나 디즈니밖에 모르는 얼랭이가 그런 용어를 알아들을리가 없다. 자신이 말 실수를 했다는 걸 안 미코시바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가 이런거 입으면 이제 안 모을거야?"

"어?"

"그러니까...내가 미코링 앞에서 이런 옷을 입으면, 이제 이런거 안 모을거야?"


얼랭이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미코시바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안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미코시바의 얼굴은 폭발할 지경이였다.


"왜, 왜 대답을 안해?"


얼랭이는 약간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미코시바는 속으로, 아니 겉으로도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얼랭이가 저런 차림을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아니, 그냥 좋다! 그러나 여기서 응이라고 하면 왜인지 얼랭이에게 야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나쁜 남친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얼랭이의 그런 차림은 무척 보고싶지만 그와 동시에 얼랭이를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복잡하게 얽힌 생각은 미코시바의 말문을 더욱 막아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얼랭이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라! 남자친구로써 해줘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미코시바는 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얼랭이의 그런 차림은 보고 싶다. 그러나 얼랭이에게 그걸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녀에 대한 성욕은 있지만 절대 그것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고, 그녀를 아끼고 싶은 마음을 함께 보이며...


그러나 당황한 미코시바에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괜찮아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날 미코시바는 얼랭이와 헤어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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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적인 태도라던가, 상대방의 눈살을 찌풀이게 하는 말투라던가, 내려다 보는 시선. 말 그대로 도저히 타인에게 호감을 살만한 인상이 아닌 그를 얼랭이는 좋아했다. 이따금씩 얼랭이에게 누군가 왜 그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지만, 뭐 별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얼랭이와 이츠키의 마음이 통하냐는 것이다.


마음을 주고 받는 관계야 말로 가장 행복한 관계라 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얼랭이는 이츠키의 눈이 자길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얼랭이를 대하는 이츠키 슈의 태도를 보면 그녀의 확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친절과 관심을 끊임없이 베푸는 게 세간의 사랑이니까. 그러나 이츠키의 행동은 아니였다. 나즈나와 함께 있을 땐 시선은 늘 먼저 그를 향하고,  입술도 타인을 먼저 부른다. 


이츠키 슈가 사람을 꺼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얼랭이를 대하는 그 모습은 그가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 뿐이였다. 사랑은 턱 없이 부족하다. 이츠키의 주변인들이 얼랭이에게 그걸로 만족하냐는 걱정에 얼랭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무심한 얼랭이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맹목적인 사랑을 얼랭이가 부담스러워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부 다 아니다.

아무도 얼랭이와 이츠키 슈에 대해선 모른다.


물론 얼랭이는 이츠키가 자신을 방치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다. 무관심하게 자신을 대하는 눈은 아주 멋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제일 좋은 것은, 그의 세계에 얼랭이 혼자 들어왔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이츠키의 눈동자였다.


방과 후, 이츠키와 얼랭이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수예부 부실.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는 커튼은 노을색으로 물들어간다. 열린 창문 너머로 학생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바느질을 하고있는 이츠키를 얼랭이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올라간 눈매는 언제나 멋있었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 눈은 더욱 멋있었다.

음,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얼랭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자신을 바라 볼 그 눈동자를 떠올리면 심장이 고동친다.


얼랭이의 시선을 눈치챈 듯 이츠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만 남겨진 공간. 마치 세상엔 둘 밖에 없는 듯 했다. 이츠키는 들고 있던 바늘과 천을 내려놓곤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손짓을 하는 이츠키를 향해 얼랭이는 다가갔다. 그의 곁에 앉아 시선을 올려다본다. 해가 저무는 이 시간, 달과 함께 별들이 하늘을 곧 비추겠지. 그와 함께 이츠키의 눈에서 세상이 저물어 갔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떠오른다. 자신만이 담겨진 눈동자가 얼랭이를 향해 휘어진다. 얼랭이도 따라 웃었다.


아무도 얼랭이와 이츠키 슈에 대해선 모른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이 없는 곳에서 은밀히 나누어 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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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간에 맞춰 아넨엘베에 오면, 가게 안에는 금발의 여성이 있었다. 자주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이였기에 어색하진 않았으나 오픈시간 전 그녀가 이 곳에 있는것은 신기한 일이였다. 가게 직원인 랜서씨와 얘기하던 그녀는 내가 온것을 눈치챈 듯 인사를 하였다.


"실명씨, 안녕하십니까."

"세이버씨...이 시간에 왠일이세요?"

"아르바이트야."


어느새 곁으로 온 랜서씨가 그녈 대신히니 대답하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세이버씨는 아넨엘베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난 그 때 출근일이 아니여서 없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가게에서 처음부터 일을 배우는 것보단 아는 곳에서 일하는 게 나으니까,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그치만 왜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거지? 


"실은...시로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달 식비가 떨어져 직접 돈을 벌러 오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제게 재산이 있다면 시로를 간호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마스터를 걱정하는 세이버씨를 보니 나도 아파왔다. 기운 없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위로를 보냈다.


"세이버씨 걱정마세요. 독감철도 지났으니까 금방 나을거에요. 이따 일 끝나면 죽 만들어드릴테니까 그거 가져가세요."


세이버씨는 기운이 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훗훗한 분위기에 옆에 있던 랜서씨도 시원스럽게 웃으며 이제 그만 일을 시작하자고 말하였다.


"세이버씨는 서빙담당이셨으니까, 오늘은 그 쪽을 부탁드릴게요. 아 일단 의자부터..."

"실명씨, 잠깐 말씀드릴 것이...아니, 혹시나 싶어 사과드리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과요? 무슨..."

"세이버! 짐이 몸소 행차하였도다!"



아. 아무래도 세이버씨가 말하려고 했던 일이 바로 이 놈이였던 것 같다. 바로 인류 최고(最古)의 왕인 길가메쉬. 그 고귀하신 존재는 아직 열지도 않는 가게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영웅왕...! 또 당신입니까!"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세이버...훗, 하찮은 고민이구나. 내 여자가 된다면 돈따위 걱정할 필요가 없거늘!"

"거절한다!"


언제봐도 구애가 아닌 구애에 세이버씨와 영웅왕은 투닥이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영웅왕이 그녀에게 치근덕 거리는 거지만. 그러나 웨이트리스 옷을 입은 그녀를 보며 칭찬을 하던 그는 나를 보더니 이내 웃음을 지워버렸다. 마치 벌레를 본 마냥 일그러진 그 표정이 무서웠다.


"...잡종, 네 놈도 있었느냐."

"여긴 내가 일하는 곳이니까."

"세이버, 이 잡종과 곁에 있지 말거라. 네 가치가 떨어진다."

"...아무래도 좋은데, 아직 가게 문 열 시간이 아니니까 나가주세요."

"어디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게 말을 거느냐! 네 놈이 정녕 오늘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게 으름장을 놓는 길가메쉬는 금방이라도 검으로 날 찌를 기세였다. 그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세이버씨는 보호하듯 내 앞을 가로막곤 길가메쉬를 노려보았다. 영웅왕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실명씨의 말이 맞습니다. 영웅왕, 가게를 열기엔 아직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흥. 운이 좋구나, 잡종. 이번에는 물러가지."


아무리 세이버씨의 말이라 하여도, 끄떡도 안하던 영웅왕은 왠일로 순순히 꼬리를 접었다. 랜서씨를 포함한 우리 셋은 가만히 가게를 나가는 그 뒷모습을 향해 의문의 싹을 틔웠다.

그 오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길가메쉬가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다니. 혹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까? 꺼름직한 무언가가 가슴 한켠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길가메쉬에 대해서 신경쓰기엔, 그의 난리통에 허비한 시간이 많아 재빠르게 오픈준비를 시작할 수 밖에 없어 금세 그 의문은 까먹고 말았다.



적어도 그가 다시 이 곳에 돌아오기 전에는.


"세이버! 이번에야 말로 짐이 왔도다!"

"영웅왕...!"


역시나. 그렇게 고분고분 떠날리가 없지. 길가메쉬는 가게를 나간지 한두시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가게를 연 지 십분이 지났을 때였다. 아침시간이라 손님이 없어 한적한 것이, 자기 맘에 든 듯 길가메쉬는 한껏 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실명."

"엘...엘키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릴 뻔 했다. 아니 왜 엘키두가 여기에 있지? 오늘 분명히 나갈 일이 없다고 집에 있을거라고 했는데.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으면 영웅왕은 성큼성큼 엘키두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팔 뒤로 그를 감춰버렸다. 또다시 아픈 눈초리가 느껴졌다.


"엘키두, 물러서거라. 이 잡종과 네가 같이 있는 꼴은 보기도 싫다."

"길, 그만해. 실명인 내 마스터란 말이야."


아무리 길이라도 실명이한테 심하게 대하면 싫어. 엘키두는 외모에 맞지 않는 단호한 소리로 영웅왕에게 말했다. 길가메쉬에게 그것이 들은 듯,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으로만 날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실명, 미안. 잠깐 거리에 나갔는데 길이랑 마주쳐서 여기에 오게 됐어."

"이 잡종이 여기에 있다는 걸 기억했다면 널 데려오지 않았을텐데..."

"혹시 일 방해했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 아냐 괜찮아. 느긋히 있어."


사실 맘 같아선 길가메쉬때문에 엘키두에게 당장 가게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 사슴같은 눈망울 탓에 도저히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며 나는 엘키두를 향해 웃었다. 엘키두가 있는 건 나도 좋지만, 좋지만...금삐까가 있는 건 진짜 싫은데. 왜 엘키두는 이런 남자랑 친구인 걸까.


"이, 일단 자리에 앉아 엘키두."

"세이버! 지명이다! 당장 날 안내해라!"

"거절한다!"

"실명, 여기서 제일 맛있는 게 뭐야?"

"으음? 글쎄......역시 제일 비싼게 아닐까..."

"그래? 그럼 길, 난 그걸로 할래."

"잠깐, 엘키두. 너 돈 있어?"

"아니? 그치만 내 껀 전부 다 길이 내는 걸?"


아, 지금 좀 알 것 같다. 왜 엘키두가 길가메쉬하고 친구인지. 애초에 길가메쉬를 행동은 이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엘키두니까. 자신을 향해 저항하는 세이버씨를 향해 길가메쉬는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 앙탈이 귀엽다고 웃었다. 저 쯤되면 병일텐데. 세이버씨에게 미안하지만 저 남자와 엮이기 싫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엘키두만 자리로 안내했다. 엘키두는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더니 실실웃으며 내게 말했다.


"실명이가 일하는 곳은 이런 곳이구나."

"그렇지 뭐. 주문 다 되면 불러줘."

"어이, 실명~!"


카운터 쪽에서 날 부르는 랜서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버씨는 여전히 영웅왕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 그를 도울 수 없어 날 부른 거겠지. 엘키두에게 메뉴를 다 고르면 주문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고 하면,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실명, 저 사람 누구야?"

"어? 랜서씨? 직장 동료야."

"흐음............"


엘키두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입을 다물곤 가만히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불러도 내가 오지 않자 카운터로 나온 랜서씨와 그가 눈을 마주쳤지만 엘키두는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고 랜서씨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 하는 랜서씨가 내게 빨리 오라는 몸짓을 하였다.


"에, 엘키두."

".........엇? 왜?"

"이것 좀 놔줄래? 나 지금 일해야 되서..."


엘키두는 그제서야 생각의 늪에서 벗어난 듯 랜서씨에게서 눈을 떼었다. 놀란표정을 한 그는 자신이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것 같았다. 천천히 내게서 손을 뗀 엘키두는 내 팔을 잡고있던 손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하였다. 평소와 다르게 그 행동이 이상해 그가 걱정되었지만, 다시금 나를 부르는 랜서씨의 목소리에 재빨리 그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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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계기는 간단했다. 누가 좀 도와달라며 힘 없는 시민이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마음씨 착한 히어로가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전래동화에 나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적으로 부터 위협받고 있다면, 나는 연휴동안 쌓인 과제에 맥을 못추리고 있는 거지만.


".........클락?"


나는 분명히 도움을 부르긴 했다. 믿지 않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까지 끌어 모아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 과제를 누군가 끝내주길 빌었지.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며 간절하게. 그리고 설마 그 결과가 눈 앞에 슈퍼맨을 불러오게 될 걸 누가 알았겠는가.


눈 앞에 남자는 슈퍼맨으로써 입는 수트가 아닌 평상복이였다. 검정색 목티 위에 모닝코트를 입은 아주 말끔하였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후드티 차림에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었다. 단정한 차림새와 늘어진 꼬라지가 아주 잘 비교 되었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길래..."


클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걸 내게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재빠르게 달려...날아왔는 데 눈 앞에는 책상에 좀비처럼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가 있었으니까. 적잖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나도 당황했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던 건 물론이고, 항상 그에게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완벽하게 화장도 마친 상태로 만났었는데 이 꼴이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평소와 똑같이 상냥하겠지만 이건 그저 내 만족감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그 어느 여자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냥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좋을텐데. 슈퍼맨이 들으면 놀랄 생각을 접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이미 그에겐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그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어야지 어쩌겠어. 이제와서 화장을 한다던가 옷을 갈아입는 건 난리 피우는 꼴이 된다. 나는 민망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와줘서 고마워요...그치만... 어쩌죠, 그냥 난 과제가 너무 많아서...으, 미안해요.. 사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어요."

"실명씨, 마음 쓰지 말아요. 오히려 무턱대고 온 제 잘못이에요."


클락은 내게 사과를 건네었다. 흐려지는 그 말 끝이 그가 미안쩍음을 나타내었다. 물론 정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 마냥 도움을 부른 것은 아니고, 그저 개미만한 목소리로 투정부리 듯 말을 꺼낸 것은 사실이지만...엄연히 그가 날 걱정해서 온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괜찮아요...생각보다 클락이 걱정이 많은 편이란 건 좀 놀랐지만."


솔직한 심정이였다. 일반인의 청력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그는 중얼 거리는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기색이 다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감이 임박한 내 과제를 서둘러야 하는 건 맞지만, 적어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사람의 애원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았을텐데. 곧장 달려오는 모습이 뜻밖이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그의 일면이였던 걸까?


"당신의 요청을 듣자마자 경황이 없어져서...미안해요.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 쳐해진 게 아닐까 하고..."



그렇구나.

그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에 그 조그만한 목소리에도 날아온 것이였다. 만약 위협을 가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다급한 목소리조차 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을 둔 것이겠지. 날 생각 해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곤혹해하는 청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클락, 으음......당신이 어떤 걸 걱정하는 지는 알지만...전 별로 당신에게 지켜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히어로의 주변인은 언제든 위협받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였다. 그가 걱정하고 보살피는 존재 보단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애석하게도 나는 과제 하나에 끙끙 앓는 보잘것 없는 대학생이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새끼 병아리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삐약거리는 걸로 보일 것이다. 그 증거로 클락의 표정이 바뀌었으니까. 그치만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클락이 날 생각 해주는 것도 기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싶지도 않구요."


앗, 물론 클락이 지키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짐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허둥지둥 거리며 나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선한 마음이 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이 날 위해서 한 걸음에 와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나보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우선 해도 괜찮아요."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특별함을 얻고 싶진 않았다. 나에 대한 마음과 책임을 전부 다 벗어던지라는 소리는 아니였다. 그저 그의 선함과 힘이 나 때문에 다른 이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음...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절 위해서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무거운 이야기 였다면 사과할게요."


그에게 꺼낸 말이 쌀쌀맞은 느낌이 들어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날 구해주는 건 정말 기쁘지만...클락이 나의 히어로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에게 구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클라크 켄트라는 남자를 원한다. 우리 둘 사이에 슈퍼맨이 존재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물론 클라크 켄트가 바로 슈퍼맨이긴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중점이 되는 건 싫다.


"만약 당신이..."


말이 없는 청년 덕에 어색해진 분위기는 미성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는데도 내가 구하지 못한다면, 난..."


점점 슬픔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뒤를 말하는 것 조차 버거운 듯 입을 다물었다. 상상만으로도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를 안았다.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클락, 괜찮아요. 만약에 그런 상황이 와도...다른 히어로가 있잖아요?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나도 날 지킬 수 있어요."


그러나 번지르르한 말이다. 만약 슈퍼맨에게 적의가 있는 외계인 같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상대가 온다면 나는 위험하겠지. 그치만 그 적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슈퍼맨이 나를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였다. 누구든지 구해주는 슈퍼맨을 사랑했기에 누구든지 구해주길 바랬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상관없다. 죽는 건 역시 무섭지만, 견뎌내야 하며 견딜 것이다.


클락은 대답없이 나를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숨겼다. 감싸안는 그 손은 마치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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