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시간에 맞춰 아넨엘베에 오면, 가게 안에는 금발의 여성이 있었다. 자주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이였기에 어색하진 않았으나 오픈시간 전 그녀가 이 곳에 있는것은 신기한 일이였다. 가게 직원인 랜서씨와 얘기하던 그녀는 내가 온것을 눈치챈 듯 인사를 하였다.


"실명씨, 안녕하십니까."

"세이버씨...이 시간에 왠일이세요?"

"아르바이트야."


어느새 곁으로 온 랜서씨가 그녈 대신히니 대답하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세이버씨는 아넨엘베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난 그 때 출근일이 아니여서 없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가게에서 처음부터 일을 배우는 것보단 아는 곳에서 일하는 게 나으니까,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그치만 왜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거지? 


"실은...시로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달 식비가 떨어져 직접 돈을 벌러 오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제게 재산이 있다면 시로를 간호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마스터를 걱정하는 세이버씨를 보니 나도 아파왔다. 기운 없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위로를 보냈다.


"세이버씨 걱정마세요. 독감철도 지났으니까 금방 나을거에요. 이따 일 끝나면 죽 만들어드릴테니까 그거 가져가세요."


세이버씨는 기운이 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훗훗한 분위기에 옆에 있던 랜서씨도 시원스럽게 웃으며 이제 그만 일을 시작하자고 말하였다.


"세이버씨는 서빙담당이셨으니까, 오늘은 그 쪽을 부탁드릴게요. 아 일단 의자부터..."

"실명씨, 잠깐 말씀드릴 것이...아니, 혹시나 싶어 사과드리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과요? 무슨..."

"세이버! 짐이 몸소 행차하였도다!"



아. 아무래도 세이버씨가 말하려고 했던 일이 바로 이 놈이였던 것 같다. 바로 인류 최고(最古)의 왕인 길가메쉬. 그 고귀하신 존재는 아직 열지도 않는 가게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영웅왕...! 또 당신입니까!"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세이버...훗, 하찮은 고민이구나. 내 여자가 된다면 돈따위 걱정할 필요가 없거늘!"

"거절한다!"


언제봐도 구애가 아닌 구애에 세이버씨와 영웅왕은 투닥이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영웅왕이 그녀에게 치근덕 거리는 거지만. 그러나 웨이트리스 옷을 입은 그녀를 보며 칭찬을 하던 그는 나를 보더니 이내 웃음을 지워버렸다. 마치 벌레를 본 마냥 일그러진 그 표정이 무서웠다.


"...잡종, 네 놈도 있었느냐."

"여긴 내가 일하는 곳이니까."

"세이버, 이 잡종과 곁에 있지 말거라. 네 가치가 떨어진다."

"...아무래도 좋은데, 아직 가게 문 열 시간이 아니니까 나가주세요."

"어디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게 말을 거느냐! 네 놈이 정녕 오늘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게 으름장을 놓는 길가메쉬는 금방이라도 검으로 날 찌를 기세였다. 그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세이버씨는 보호하듯 내 앞을 가로막곤 길가메쉬를 노려보았다. 영웅왕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실명씨의 말이 맞습니다. 영웅왕, 가게를 열기엔 아직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흥. 운이 좋구나, 잡종. 이번에는 물러가지."


아무리 세이버씨의 말이라 하여도, 끄떡도 안하던 영웅왕은 왠일로 순순히 꼬리를 접었다. 랜서씨를 포함한 우리 셋은 가만히 가게를 나가는 그 뒷모습을 향해 의문의 싹을 틔웠다.

그 오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길가메쉬가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다니. 혹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까? 꺼름직한 무언가가 가슴 한켠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길가메쉬에 대해서 신경쓰기엔, 그의 난리통에 허비한 시간이 많아 재빠르게 오픈준비를 시작할 수 밖에 없어 금세 그 의문은 까먹고 말았다.



적어도 그가 다시 이 곳에 돌아오기 전에는.


"세이버! 이번에야 말로 짐이 왔도다!"

"영웅왕...!"


역시나. 그렇게 고분고분 떠날리가 없지. 길가메쉬는 가게를 나간지 한두시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가게를 연 지 십분이 지났을 때였다. 아침시간이라 손님이 없어 한적한 것이, 자기 맘에 든 듯 길가메쉬는 한껏 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실명."

"엘...엘키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릴 뻔 했다. 아니 왜 엘키두가 여기에 있지? 오늘 분명히 나갈 일이 없다고 집에 있을거라고 했는데.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으면 영웅왕은 성큼성큼 엘키두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팔 뒤로 그를 감춰버렸다. 또다시 아픈 눈초리가 느껴졌다.


"엘키두, 물러서거라. 이 잡종과 네가 같이 있는 꼴은 보기도 싫다."

"길, 그만해. 실명인 내 마스터란 말이야."


아무리 길이라도 실명이한테 심하게 대하면 싫어. 엘키두는 외모에 맞지 않는 단호한 소리로 영웅왕에게 말했다. 길가메쉬에게 그것이 들은 듯,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으로만 날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실명, 미안. 잠깐 거리에 나갔는데 길이랑 마주쳐서 여기에 오게 됐어."

"이 잡종이 여기에 있다는 걸 기억했다면 널 데려오지 않았을텐데..."

"혹시 일 방해했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 아냐 괜찮아. 느긋히 있어."


사실 맘 같아선 길가메쉬때문에 엘키두에게 당장 가게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 사슴같은 눈망울 탓에 도저히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며 나는 엘키두를 향해 웃었다. 엘키두가 있는 건 나도 좋지만, 좋지만...금삐까가 있는 건 진짜 싫은데. 왜 엘키두는 이런 남자랑 친구인 걸까.


"이, 일단 자리에 앉아 엘키두."

"세이버! 지명이다! 당장 날 안내해라!"

"거절한다!"

"실명, 여기서 제일 맛있는 게 뭐야?"

"으음? 글쎄......역시 제일 비싼게 아닐까..."

"그래? 그럼 길, 난 그걸로 할래."

"잠깐, 엘키두. 너 돈 있어?"

"아니? 그치만 내 껀 전부 다 길이 내는 걸?"


아, 지금 좀 알 것 같다. 왜 엘키두가 길가메쉬하고 친구인지. 애초에 길가메쉬를 행동은 이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엘키두니까. 자신을 향해 저항하는 세이버씨를 향해 길가메쉬는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 앙탈이 귀엽다고 웃었다. 저 쯤되면 병일텐데. 세이버씨에게 미안하지만 저 남자와 엮이기 싫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엘키두만 자리로 안내했다. 엘키두는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더니 실실웃으며 내게 말했다.


"실명이가 일하는 곳은 이런 곳이구나."

"그렇지 뭐. 주문 다 되면 불러줘."

"어이, 실명~!"


카운터 쪽에서 날 부르는 랜서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버씨는 여전히 영웅왕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 그를 도울 수 없어 날 부른 거겠지. 엘키두에게 메뉴를 다 고르면 주문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고 하면,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실명, 저 사람 누구야?"

"어? 랜서씨? 직장 동료야."

"흐음............"


엘키두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입을 다물곤 가만히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불러도 내가 오지 않자 카운터로 나온 랜서씨와 그가 눈을 마주쳤지만 엘키두는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고 랜서씨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 하는 랜서씨가 내게 빨리 오라는 몸짓을 하였다.


"에, 엘키두."

".........엇? 왜?"

"이것 좀 놔줄래? 나 지금 일해야 되서..."


엘키두는 그제서야 생각의 늪에서 벗어난 듯 랜서씨에게서 눈을 떼었다. 놀란표정을 한 그는 자신이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것 같았다. 천천히 내게서 손을 뗀 엘키두는 내 팔을 잡고있던 손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하였다. 평소와 다르게 그 행동이 이상해 그가 걱정되었지만, 다시금 나를 부르는 랜서씨의 목소리에 재빨리 그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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