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키군, 미코링 왜 저래?"
"여자친구랑 싸웠대."
미코시바 근처를 수첩과 펜을 들고 어슬렁 거리던 노자키가 말했다. 제 아무리 친구라 할지여도 사랑에 관한 건 프로의식을 발휘하는 구나, 치요는 노자키를 보며 생각했다.
미코시바와 얼랭이가 사귀는 건 그의 주변인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얼랭이와 행복한 연애생활을 즐기던 미코링이 저렇게 기운 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였다. 아무래도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코링 얼랭이하고 싸운거야?"
"싸운거라니, 그냥 좀...내 아기고양이가 잠깐 토라진 거 뿐이야."
"왜 싸웠는데?"
이미 미코시바의 입발린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치요의 말에 방금까지 한껏 빛나던 미소가 다시 축 쳐지고 말았다. 미코시바는 치요에게 저번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여자애 피규어가 많다곤 들었지만...죄다 수영복에! 팬티도 보이잖아! 미코시바 변태야? 실망이야."
다시한번 얼랭이가 자신에게 쏘아붙인 말을 겨우겨우 꺼내면, 미코시바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금방이라도 그 주변에서 비가 쏟아질 기세다. 치요야 미코시바가 어떤 취향을 가지던 말던, 그는 노자키가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지만...미코시바의 연인인 얼랭이의 관점에서 그의 피규어 취향은 확실히 충격일 것이다.
그렇다고 미코시바의 취향을 갑자기 개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취향이 바뀌는 거면 미코시바는 진작에 바꿨을 것이다. 세상모두가 마음에 드는 이를 위해 취향을 쉽게 바꿨겠지. 그러나 그게 녹록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방과 후, 힘 없는 걸음으로 집으로 가던 미코시바에게 문자 메세지가 왔다.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집에 가겠다는 얼랭이의 것이였다.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집으로 간 그는 자신의 방에 있던 피규어들을 모조리 벽장안으로 넣었다. 얼랭이를 위해 버리기엔 너무나 피 같은 아이들이였다.
"........."
얼랭이는 휑한 미코시바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무뚝뚝한 표정에 더해져 방 안에 공기는 더욱 썰렁해졌다. 미코시바가 얼랭이를 향해 웃으며 앉으라 하면, 그녀는 벽장문을 열어제꼈다. 미코시바가 고이 넣어둔 피규어들이 드러났다.
"안 버렸네."
얼랭이는 피규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얼랭이가 버리라고 한 적 없으니까...! 미코시바는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물론 얼랭이가 버리라고 했었어도 버리진 않았을 거다. 저기, 얼랭아... 피규어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심지어 치맛 속까지 꼼꼼히 보는 얼랭이를 향해 미코시바가 말했다. 그러나 얼랭이는 미코시바의 말을 무시할 뿐이였다.
훌쩍, 하고 미코시바는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게 좋아?"
왠지 여기서 대답을 했다간 헤어지자고 할 것만 같아, 미코시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랭이가 대답을 재촉하듯 그를 한번 째려보았다. 미코시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 얼랭이는 한숨을 쉬었다.
"왜?"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으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피규어로 현실에 구현되었기에 산 것 뿐이다. 그리고 남성향물이다보니 좀 노출이 많은 거 뿐! 딱히 노출이 많아서 그 피규어를 산 것은 아니다! 물론 노출이 없는 피규어가 나왔다면 미코시바는 실망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얼랭이에겐 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데 왜 이런걸 아직까지 모으는 거야?"
그러고보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남자친구가 AV를 보는 것도 바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얼랭이도 그런 부류인걸까? 그렇다면 확실히 말하고 싶었다.
"아, 아냐! 내 3D 아기고양이는 너 밖에 없어!"
"3D? 뭔진 모르겠지만 그거 말곤 다른 애도 있다는 거네?"
"엇,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얼랭이의 눈이 더 사납게 올라간다. 차라리 이런 용어가 통하는 사람이였으면 좋았을텐데! 만화나 애니에 대해선 지브리나 디즈니밖에 모르는 얼랭이가 그런 용어를 알아들을리가 없다. 자신이 말 실수를 했다는 걸 안 미코시바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가 이런거 입으면 이제 안 모을거야?"
"어?"
"그러니까...내가 미코링 앞에서 이런 옷을 입으면, 이제 이런거 안 모을거야?"
얼랭이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미코시바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안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미코시바의 얼굴은 폭발할 지경이였다.
"왜, 왜 대답을 안해?"
얼랭이는 약간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미코시바는 속으로, 아니 겉으로도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얼랭이가 저런 차림을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아니, 그냥 좋다! 그러나 여기서 응이라고 하면 왜인지 얼랭이에게 야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나쁜 남친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얼랭이의 그런 차림은 무척 보고싶지만 그와 동시에 얼랭이를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복잡하게 얽힌 생각은 미코시바의 말문을 더욱 막아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얼랭이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라! 남자친구로써 해줘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미코시바는 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얼랭이의 그런 차림은 보고 싶다. 그러나 얼랭이에게 그걸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녀에 대한 성욕은 있지만 절대 그것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고, 그녀를 아끼고 싶은 마음을 함께 보이며...
그러나 당황한 미코시바에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괜찮아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날 미코시바는 얼랭이와 헤어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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