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교류회에 가져갈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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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한 내용을 찾아보았어요. 지금 현재 부족한 봉사시간이…대략 50시간 정도 되네요."

전학온 아모로트 학교는 에스컬레이터 전형이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치루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다만 한가지 간과한 사항이 있었는데, 이 학교는 명문학교이기 때문에 유난히 봉사시간 이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이었다.

일반 학교와 학년당 시간이 50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니…이 쯤 되면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지 않나?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연계된 학교니까요. 초등학생은 연간 5~8시간 정도 봉사시간을 이수하지만 이 곳은 10시간 정도는 되요."

"휴…그래도 50시간 정도면 2년 안에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네요."

"어머? 다른 학생보다 부족한 시간이 50시간이라는 거에요. 거기에 추가로 50시간을 2년동안 이수해야 하는 걸요. 3학년때도 봉사활동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보통 그 즈음엔 다들 졸업시험이나 논문 쓰기로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2년 안에 100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거죠. 베네스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100시간…?! 그게 무슨 뉘 집 똥개 이름이라도 되나! 아무리 명문 학교라지만 봉사에 대한 집요함이 도를 넘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졸업생 시기에도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우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스러웠다. 거의 쫓겨나듯 오게 된 전학. 그마저도 당장 자취할 돈이 없어 친척인 베네스 선생님 집에 주소지를 옮겨 겨우 통학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전 학교에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말고, 자취방도 천천히 알아보라고 해주셨지만…. 16살이나 먹었는데 자신의 집안 사정을 모르는 학생이 어디있겠는가. 철없이 살 수 있는 풍족한 머저리라면 가능하지만 가난과 서민의 사이에 걸쳐있는 나는 모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기억보다 좁아져가는 집안. 제철 야채나 과일은 눈에띄게 밥상 위에 줄어들고 인스턴트가 올라온다. 부모님이 입고있던 옷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누가봐도 집안 기둥이 휘어가고 있단 증거인데. 눈 앞에 징거를 무시할 정도로 사리가 어둡진 않았다.

"하………."

"걱정말아요, 해결방법까지 찾아보고 알려준 거에요."

"저, 정말요?!"

역시나 고민의 해결사, 베네스 이모. 실의에 빠진 조카를 바로 구원해주셨다.

이모는 어릴적부터 집안의 자랑이었다. 예쁘고, 상냥하며 똑똑하고, 뭐든지 해내는 수재. 좀 괴짜같은 면이 있어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었지만, 원래 머리 좋은 애들은 나사가 빠진 곳이 있다며 조부모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물론 나도 항상 내게 친절히 대해주는 이모를 맨날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리곤 했다. 이모는 그야말로 아젬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이자 나의 은인이었다.

"나마에가 유난히 다른 학생들과 시간이 차이가 나는 건, 봉사과목을 듣지 않아서에요. 이 학교는 아이들이 중간에 수강철회를 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을 못 채워서 졸업을 못하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강의를 이수하면 추가로 5시간씩 더 주거든요. 1학년때부터 세어보면 대략 45시간…딱 당신이 부족한 숫자죠."

그런 꼼수를 쓰고 있었구나. 역시나, 아무리 모범생과 우등생이 득실거리는 학교라 해도 그 정신나간 숫자는 학생이 채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봉사과목은 학생회에 소속된 사람은 들을 수 없어요. 매주마다 학생회 임원들은 회의를 하는데 그 시간이 봉사과목 시간과 겹치거든요. 그리고 추가시간을 얻기 위해선 강의를 고등학교 2학년까지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학생회 아이들은 입부하자마자 봉사시간을 50시간 받는답니다.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요."

"그럼……"

"네! 나마에도 학생회에 들면 바로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울 수 있어요!"

"어……그런데, 학생회는 지금도 뽑나요?"

그렇게 이득이 있는 학생 활동이면 지원자가 적을리 없다. 이상한 소문 때문에 내쫓겨난 낯선 전학생을 요 고지식한 학교가 잘도 받아줄까? 전혀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내 걱정을 꿰뚫었다는 듯 베네스 이모는 싱긋 웃었다.

"학생회 멤버는 그 소속인의 추천으로도 될 수 있어요. 마침 지금 시간이면 음악실에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볼래요?"

처음보는…사람한테 다짜고짜 학생회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라는…뜻인가요? 그러나 베네스 이모에게 되묻기도 전에 이모는 봉사상담부에 가봐야 한다며 교무실을 그대로 떠나버렸다. 지도교사는 바쁜걸까. 그런것 치곤 자리를 피하는 것 처럼 보였는데…. 뭐 아무렴 어때. 앉아만 있어봤자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움직이고 봐야 하는 법. 혹시 몰라, 운 좋게도 학생회 결원이 있어 입부자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나는 최대한 근심을 집어던지고 음악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음악실은 동관 3층에 있었다. 3층은 거의 졸업생들 전용이라 1학년인 내가 들어가기엔 많이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그러나 2학기를 막 맞이한 3학년 교실은 한산했다. 이게 베네스 이모께 들은 모습인가. 각 학생들은 원하는 과에 맞춰 졸업시험이나 작품, 논문을 쓰느라 학교에 거의 오지 못한다고…했던 것 같다. 1학년 음악 수업이 왜 2학기에 몰려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3학년 눈치 보지 말고 음악실을 마음껏 사용하라는 뜻이였구나.

당당한 걸음으로 음악실을 열자 벽에 잔뜩 걸린 상패가 반겨주었다. 중앙에 놓인 드럼과 심벌즈를 지나면 창문 옆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있는 백발의 소년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안녕."

샛별처럼 파란 눈이 마주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섬뜩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단정한 얼굴이다. 부드러운 눈썹과 함께 휘어진 눈매가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애가 실제하는 구나. 연예인을 직접 보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며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흰 피부가 무척이나 매끄러워 보인다. 남자애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입술을 한껏 올렸다.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빛이 뚜렷한 보석같았다. 그는 그대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큰 눈을 접으며 웃었다. 웃는 상은 꼭 강아지 같은게 무척 귀엽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 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손을 붙잡히고 말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보고싶었어. 그동안――"

"아………그, 누, 누구세요…?"

잘생긴 놈 처음보냐? 부끄러운 짓 그만 하고 정신 차려라. 나는 머리를 뒤 흔드며 그제서야 남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유해보이는 얼굴은 어림잡아 동갑이나 연하로 보이지만…외모로 사람의 나이를 판단할 수야 없지, 선배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학생회에 들어가게 해달라며 잘 보여야 하는 인물에게 버릇없게 굴 순 없으니, 당연히 여기선 존댓말이다!

"저,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누구냐면―"

"………그렇구나, 날 기억 못하는 건가…"

학생회 인물로 보이는 소년은 상심한건지 고개를 숙였다. 언뜻 스쳐간 얼굴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뭐지? 아까 중얼거리는 말도 그렇고 날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이런 미소년을 내가 잊어버렸을리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응? 어…그 쪽이 베네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생회 소속 인거…죠?"

"아…맞아. 학생회 부회장인 1학년, 엘리디부스라고 해. 편하게 테미스라고 불러."

 

엘리디부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동갑이구나, 어려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묘하게 어른스러운 태도때문에 선배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이름으로 부르라고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이런 미소년을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며 친한척 굴고 싶진 않다. 나는 너스레 괜찮다고 거절하며 곧이 곧대로 그를 성으로 불렀다.

 

"베네스선생님이 도울 일이 있을거래서 왔는데, 무슨 일이야?"

"아………정말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물어본건 분명히 용건인데 어째서인지 미소년은 이름을 고집하며 내 눈치를 슬쩍 보고 있었다. 귀엽게 데굴, 올라간 눈동자가 꼭 토끼처럼 귀여운게…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엘리디부스에게 되물었다.

 

"엘리디부스, 학생회를 도울 일이라는 게, 뭘까?"

"1학년 에리쿠토니오스를 아니? 그의 집을 방문하는 거야. 꽤나 학교에 오지 않고 있거든."

"아……에리쿠토니오스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이사장…라하브레아의 아들이었던가? 언젠가 애들이 떠들어대던 이야깃속에서 나온 단어인 듯 했다. 학교에 오지 않는다라…학생회가 찾아갈 정도면 불량학생이라기보단 등교거부 학생인건가.

 

"그 애 집에 가면 되는거야?"

"응, 수업 필기물과 기타 프린트물 같은 거. 우리와 상담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찾으러 갈 때마다 만나주지 않네."

 

엘리디부스는 정말 아쉬운건지 쓴 웃음을 지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가만보자…이거, 기회 아냐? 만약 에리쿠토니오스를 방 밖에 나오게 하면, 적어도 엘리디부스와 얘기할 수 있도록 도우면 학생회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좋은 인상은 남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엘리디부스는 에리쿠토니오스의 집으로 향했다.

훗날, 우리의 만남이 어떤 날개짓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체.  

오리주까진 아니고 귀찮아서 매일 게임하면서 넣는 이름을 그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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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아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아쳐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쳐는 나를 마스터로 생각해주고 있을까. 서번트로 소환 된 이상 마스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내게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 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그에게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많았군...랜서뿐만 아니라 멜트리리스의 건도 있고 말야."

"응."

"...마스터?"

"응?"

"내 착각인 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이 쪽을 쳐다보지 않는거 같은데."

"이 쪽?"

"마스터."

 

아쳐가 타이르듯 나를 부른다. 아이템과 소지금을 확인하고 있던 내 팔을 붙잡고는 똑똑히 자신을 보도록 내 몸을 돌렸다. 이거야 어쩔 수 없이 아쳐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행운이 높아진 대신 근력이 낮아졌다 하여도 서번트와 마술사의 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까. 저도 모르게 놀라 시선을 돌려 버리면 아쳐의 이마가 이그러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왜 내 눈을 피하지?"

"아니...보통 그렇게 진하게 쳐다보면 놀라잖아..."

 

그 말을 내뱉고는 다시 아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검정색 눈동자 안에 내가 비춰지는 것이 보인다. 웃기지도 않는 내 변명에 무명의 서번트는 "내가 물은 건 최근의 일일텐데." 핵심을 꼭 집으면서 내 팔을 더욱 붙잡았다. 이쯤되면 아파오기 시작하지만, 사내로써 그정도는 참으라고 마초 서번트가 으름장을 내놓을게 뻔하니 가만히 있는다.

 

"그런 적 없는데."

"내게 거짓말이 통할거라고 생각하는 가?"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해도 그거야..."

"그거야?"

"......아쳐가 나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목 아파서 안 본거겠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쳐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진다. 아무래도 화난 거겠지. 히익. 저도 모르게 아쳐에게 잡힌 팔에 통증에 짧은 비명을 질러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서번트가 마스터를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닌가? 원래 이 자식이 좀 이런 놈이긴 했지만. 고통과 아쳐에 대한 음울한 마음이 뒤 섞여 목 부근까지 차오른다. 이런걸 욱한다고 하는건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괴상한 말이였다.

 

 

"그거야......아쳐가 씹스트니까 그렇지!"

"...뭐?"

"엇, 아니 방금껀 미안. 잊어.........라고 말해도 전혀 안듣네, 아쳐."

 

이번엔 맥이 풀린 듯 아쳐가 내 팔을 놓고는 한숨을 쉰다. 바보취급당한 건가. "마스터, 때때로 네가 무슨 소릴 하는 지는 몰랐지만. 이 정도로 바보일 줄은..." 역시 그렇구나. 어리석은 사람 취급받은 것은 괜시리 화가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쳐의 눈을 피하게 된 계기를 떠올린다. 하쿠노, 그러니까 내 친구(남자)가 아닌 소녀와 함께 있던 서번트. 그녀를 보호하고 함께 싸우는 남자는 소녀에게 때때로 핀잔을 주고 타박을 굴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것 보다 훨씬 상냥한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함께하고 있는 순간의 표정도, 더욱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였다. 그야 물론 나도 여자가 좋고, 아니 당연히 좋지만. 어쩜 저렇게 성별에 따라서 행동과 말이 싹 바뀌는 거지. 아쳐의 편애적인 모습에 왠지 모를 질투와 함께 그에 대한 짜증이 몰려왔었다. 나도 아쳐에게 많이 폐를 끼치고 있다곤 생각해도 나름에 애정과 친절을 주고 있는데, 그야 물론 귀엽지 않고 퀴퀴한 사내놈한테 애정을 주고싶지 않겠지. 부드러운 소녀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경을 함께 거처온 마스터인데, 성별에 상관없이, 그래도 애정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인가?

 

린과 마력공급을 했을 때도 그렇다. 솔직히 그 땐 그에게 믿음만 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마스터인 나하고 할 생각을 안하고 린을 고르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보통은 마스터를 먼저 생각하지 않냐고. 그리고 하고 난 뒤 그 말과 표정은 무엇이더냐. 린이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그리 좋더냐. 아쳐의 이상형이 린 처럼 기세고 귀여운 여자아이란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마스터?"

"어? 엇......"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점점 우중충한 기운이 도는데."

"......아쳐..."

"무슨 일이지?"

 

기운 없이 그를 불러보면 앞엔 자신을 걱정하는 듯 표정을 바꾸는 서번트가 보인다. 이런 얼굴을 보면 그에게 저도 모르게 두근 거리지만, 그 표정을 다른 여성에게도 보여줬을 거란 생각을 하자 역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세이버한테 시집이라도 갈 걸 그랬나..."

"마, 마스터?!"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안 맞춘다는 거래. 그게 뭐? 그래도 싸움은 잘 하고 있고, 대화도 잘 하고 있잖아."

"사회에선 눈 스킨쉽또한 신용과 애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눈맞춤의 빈도가 떨어진다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죠."

"저, 정말인가?!"

"그치만, 소우마씨 평소랑 전혀 다른게 없는 걸요? 평소처럼 아쳐씨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걱정도 하고..."

"이게 다 잡종 네 놈이 편식을 해서 그런 것이다."

 

 

길가메쉬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학생회는 정적을 맞이했다. 편식이라. 자신이 좋아하는 싫어하는 음식을 가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바보같은 놈, 맛만 좋으면 될 것을. 뭐, 어차피 네 놈은 꽉막힌 놈이니 자신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길...그게 무슨 뜻이야?"

"그걸 알려주면 재미가 있겠느냐? 하쿠노. 뭐, 요컨대 나 처럼 행동하라는 거다."

"아쳐가 길처럼 변하면 유우키는 울 걸."

"뭐라고?! 잡종, 요즘 간이 아주 커졌구나?"

"죄송합니다..."

"...뭐, 난 대충 무슨 소리인진 알거 같지만."

 

 

험악한 길가메쉬와 하쿠노의 만담속에 린이 말을 꺼내었다. 얕은 한숨을 쉬고는 아쳐를 보며 "걱정할거 없어. 서번트와 마스터간의 신뢰가 깨질일은 없으니까. 아쳐가 인간적으로 윳키를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냥 냅둬도 되는 일이야." 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하쿠노와 라니를 냅두고 사쿠라 또한 "아...그런거였군요." 린에게 긍정을 하였다.

 

 

"잡종...네 놈의 이해력은 덜떨어진 놈 답게 같잖지도 않구나."

"엣, 뭐야, 나 지금 왜 길한테 모욕받는 거야?"

"선배는 그런 쪽으론 감이 떨어지니까요."

"...그런 일이군요. 저도 알아들었습니다."

"하긴 저 초식계 동물 애호 남자애가 이런 걸 알리 없지."

"쯧...하찮구나, 하쿠노여. 친우의 고민 조차 이해 못하는 네 놈을 보니 실로 웃음이 나는 군! 하하하!"

"나 왜 비웃음 당하는 거야?! 것보다 라니도 이해한 거야?!"

 

 

소우마 유우키의 이상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하쿠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알몸으로 자고있는 자신의 왕의 품에 안겨있을 때 였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의 이상의 원인을 왠지 모르게 깨달은 아쳐는 마이룸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우키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동성애 자체는 아쳐 또한 그리 꽉 막힌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고 있었다. 본인이 거기에 흥미가 없었던 것 뿐.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지만.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 동료중에서도 동성애자는 뭇 되었으니.

 

세계 여러나라를 누비고, 많은 사람을 만나던 터라 아쳐 또한 동성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의 감정은 당혹함, 왠지 모른 미안함. 아주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스터의 마음을 떠올리는 감정은. 잘 모르겠다. 저항감이 크게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끌리는 것은 아니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아주 꼴사나운 것이기 때문에 아쳐는 결국 마이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미닫이 문을 열고 "마스터, 안에 있는가?" 들어가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흑발의 소년이 붉은 여성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 여성?

 

 

"호오, 네 놈이 바로 이 소년의 서번트인겐가? 아주 부러운 남자이군."

"아, 아쳐어..."

"?! 네놈, 도대체 누구냐?!"

 

자신의 마스터를 여성에게 보호하려고 싶지만, 그는 이미 그 여성에게 폭 안겨있는 꼴이였다. 아쳐의 쌍검을 들고 여성에게 위협을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고 고양이같은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서번트 세이버, 소년의 부름에 응하여 이곳에 현세하게 되었다."

 

 

"부름...? 마스터, 도대체 무슨짓을."

"아냐 잠깐!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무슨 소릴 하는 가! 소자여! 소자가 어제 '세이버에게 시집이라도 갈 걸...'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젯밤(솔직히 이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없지만.) 자신의 마스터가 내뱉었던 터무니 없는 말을, 여성은 홀로 주장하며 소년을 꼬옥 안았다. 그 때 아쳐는 그 세이버가, 학생회장의 서번트 '가웨인' 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소년이 내뱉었던 그 세이버가 바로 이 여성이란 말인가.

 

"아니, 솔직히 적밥폐하를 부른 건 맞긴 한데...진짜 말이 이뤄질 줄은,"

"주자의 뜨거운 고백에 짐은 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년이면 짐은 두말할 것도 없지! 주자여, 짐의 비가 되겠느냐?"

"아니, 폐하, 저기, 저 남잔 데,"

"그대같은 영혼의 소유자면 성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대는 비가 좋느냐? 왕이 좋느냐? 마음이 따르는 대로 고르도록 하여라!"

"......그거, 혹시, 내가 여자든 남자든...날 좋아해주겠다는 거?"

"물론이고 말고!"

 

 

붉은 여성, 세이버의 터무니 없는 말에 아쳐는 그녀를 말릴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스터가 볼을 붉히며 "엣."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였으니. 마스터의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아쳐는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트릴 뻔 하였다. 소년의 수줍은 모습을 세이버는 그저 귀엽다며 애지중지 하고 있었다.

 

 

"저...정말로?"

"왕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 그대같은 강인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비로 삼고 싶지 않겠느냐."

"아니...저...그런 강렬한 고백은 처음 들어서..."

 

소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곤 부끄럼을 떨고 있다. 저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마스터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다. 언제나 엉뚱한 말을 하곤, 수치라곤 없던 소년이 지금은 저리도 한껏 쑥스러워 하고 있다니.

 

"소자여, 짐의 고백을 받겠느냐?"

"......저기...그...나도 날 그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면..."

"마스터는 못 넘긴다!!!"

 

정신을 놓고 가만히 그 둘의 열렬한 사랑의 대사를 보고 있던 중, 아쳐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곤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세이버에게 안겨있는 소년을 자신의 품에 감추곤 그녀를 향해 눈초리를 주면, 소녀 또한 아쳐를 향해 눈을 부릅 떴다.

 

 

"마스터! 정신 차려라. 저런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함부로 휘둘려져서는 안 돼! 애초에 넌 너무 헛점이 많아, 정말이지 내가 눈을 뗄 수가."

"하하! 정말이지 들어줄 수 가 없는 잔소리구나! 주자는 계속 저걸 듣고 지냈는가? 참으로 딱하도다. 그러고보니 주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 소우마 유우키라고 합니다..."

"마스터어! 정신차려! 그렇게 쉽게 답하지 마! 정말이지! 넌 지금 몹쓸 마술에 걸려있는 건가?! 왜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거야!"

"이미 결정은 났다! 소자여, 저 남자는 이만 끝내고 짐을 맞이 하여라!"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마스터가 세이버를 바라본다. 저건 이미 홀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등장한 세이버 탓에 마스터에게 버림받을 지도 모르는 아쳐는 화가났다. 지금까지 마스터와 겪어온 고난은, 고작 저런 말 쪼가리에 버려지는 것이였는 가. 그 때 느꼈던 믿음도, 우정도, 애정도,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자신의 마스터는 고작 아쳐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그건 안 돼! 마스터가 좋아하는 건 바로 나란 말이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스터가 아쳐를 바라보았다. 그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쳐의 말이 사실인 듯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말을 더듬으며 "뭐!뭔 소리야?!" 자신의 서번트에게 대꾸를 하지만 마스터의 그 얼굴을 본 이상 아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술술 말을 꺼내었다.

 

 

"나하고 눈을 계속 마주치지 않은 것도, 내게 질투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멜트 리리스에게 구애받은 후로, 아니 그 보다 더 훨씬 전인가. 키시나미 하쿠노, 그녀와 있던 또 다른 나를 보았던 이후인거 같군.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모습에 화가난 건가. 마스터."

"린하고 마력공급을 한 후에도, 그 때 마스터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거 같군. 기억난다. 그거 때문에 화가나서 날 보지도 않은 거 아닌가? 유우키."

 

 

아쳐의 눈사태 마냥 쏟아지는 말에 세이버와 소년은 가만히 있었다. 조금은 뿌뜻 했는지 내 말이 맞지? 하며 그가 마스터에게 대답을 물었다. 하지만 싸늘한 표정의 소년은 아쳐의 득의양양한 얼굴에서 눈을 떼었고 세이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쳐를 바라보았다.

 

 

"...네 놈, 그걸 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냐?"

"아니, 그런 일은,"

"됐다. 소자여, 그대도 정말 가련하구나. 저런 되 먹지도 못한 남자에게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농락 당하고...그대가 받은 상처, 짐이 다 헤아려 주고 싶구나."

"그러게, 아쳐,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린하고 상성이 좋다는 둥 별 소릴 했던 거네."

"마스터, 난 그런 게 아니라"

"됐어."

 

 

지금 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스터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 딴에는 마스터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듣기엔 그저 알면서도 일부러 마스터를 간보았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였다. 세이버는 고개를 저으며 "하여간 근육덩어리인 남자들은 어쩔 수 없군." 아쳐에게 폭언을 날려댔다. 마스터와 세이버의 오해에 아쳐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니라고 큰 소리를 지었지만 소년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미안, 세이버."

"마, 마스터?"

"저렇게 짜증나고 말하는 것도 버터 바른 거 마냥 번지르르하고 느끼하고 근력도 낮아서 데미지는 안먹히는 주제에 내구는 약해서 맨날 죽기 바쁘고 스킬을 쓰려고 하면 투영횟수가 필요해서 상대방의 가드마다 투영하고 보구도 데미지 효과 없고 옷 입는 센스도 떨어지는 데다가, 성차별은 엄청나게 심하는 말도 못한 마초지만."

"마스터?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래도 꽤 상냥하고 이런 날 마스터로 인정해주고, 내가 믿을 수 있고, 무엇보다...내가 좋아하는 남자니까 말야."

 

 

소년이 세이버를 향해 얕은 미소를 지으면 그녀는 납득한 듯 "그렇군." 소년을 품에서 떼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버가 아쳐를 향해 말했다.

 

 

"거기, 이 가련하고 강인하고 귀여운 마스터에게 험악한 말만 내뱉는 서번트여."

"뭔가 오해가 있는거 같은데, 난 거기까진..."

"짐은 마음에 들지 않느나, 어쩔 수 없지. 주자가 그대를 원한다면야. 꽃은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아름다운 법. 비록 그 사람이 짐이 아닌게 아쉽지만, 내 특별히 그대에게 양보하겠네."

 

 

아쳐는 약간 떨떠름한듯 말끝을 흐렸지만 똑똑히 알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주자여, 짧은 기간이였지만 만나서 즐거웠네. 짐의 마스터도 그대와 같은 사람이면 좋겠군." 사라지는 듯, 그녀의 주변에서 푸른 색 빛이 맴돌았고, 세이버는 소년의 손등에 작별의 입맞춤을 맞추었다. 아쳐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어라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였으니 더 이상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럼 잘있게나, 유우키. 될 수 있다면 또 보았으면 하는 군."

 

 

귀여운 미소를 짓는 소녀는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이룸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의 마스터와 그 일뿐. 한동안 조용한 정적을 헤메고 있던 것을 깬 건, 바로 아쳐의 목소리였다.

 

"...마스터."

"응."

"아무래도 BB의 짓인 거 같군, 그 티켓처럼 말이야. 구교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그러네."

 

 

무안한듯, 아쳐가 줄줄이 말을 하였지만 마스터는 짧게 그의 말에 대답하고는 가만히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마스터를 봐도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어째서인지 아쳐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이였다. 소년의 감정을 상상했을 때 떠올렸던 감정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묘한 기분이 든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의 입으로 밝혔고. 소년 또한 거기에 시인하였다. 지금 아쳐가 꺼내야 할 말은 무엇인가. 혹은 마스터는 과연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고요히 자신만을 보는 소년에게서 아쳐는 긴장감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로.

 

 

"아쳐."

"아, 아아."

"오늘은 밖에서 자."

"알겠......뭐? 뭐라고?"

 

 

자신이 상상했던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마스터는 그를 아까와 같이 차가운 말투로 얘기하였다. "남의 마음을 다 알면서 능욕한 게 말이야, 어지간히 짜증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동안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밖에서 자든가 해."

 

 

"마, 마스터?!"

"빨리 나가줄래? 나 피곤하거든."

 

 

마이룸 밖으로 쫓기게 된 아쳐는 방문을 두드리며 "어째서?!" 마스터에게 물었지만 소년은 가볍게 무시한 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말도 안하는 거래. 싸움은 잘하고 있고, 전략도 얘기하고 있지만..."

"그건 아쳐, 당신이 나쁜 겁니다."

"당연하지 않느냐, 페이커. 이 몸 마저 그 잡종이 가엽다고 여길정도니. 그 붉은 여자에게 넘겼으면 네 놈의 마스터도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잠깐, 다들 그걸 듣고 있었던 건가?!"

"일단은, 만일을 위해서 마이룸을 촬영하고 있으니까요..."

 

 

놀란 아쳐에게 사쿠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자신의 추태를 만천하에 알린 것과 동시에 마스터에게 받는 미움을 자업자득이라고 단언받다니. 아쳐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다를 지경이다.

 

 

"어라? 아쳐, 어디가 있었나 했더니 먼저 학생회실로 왔었네."

"마, 마스터..."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이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등장하였다. 평소와 다름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자신의 서번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듯 보였다.

 

"못봐주겠군. 잡종, 네 놈의 딱하다는 건 짐도 인정하는 격이다. 허나 이 페이커 놈이 늘어지는 추태는 꼴도 보기 싫다. 네 놈이 알아서 달래거나 하여라."

"잠깐, 길!"

"뭐? 나 별로 화같은 거 안났는데? 아, 아쳐. 오늘부터 마이룸에서 같이 자도 돼."

"마스터...!"

 

아쳐가 울망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더 이상은 처음에 보았던 여유만만한 그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다. 여성진 멤버들은 그의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미안. 내가 너무 신경쓰이게 해서. 그래도 이젠 괜찮아."

"뭐, 네 기분이 풀렸으면 되는 거고."

"어, 이제 아쳐 안 좋아할 거니까."

 

 

소년의 말 한마디에 학생회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길가메쉬만이 "호오, 재미있군." 하며 입맛을 다실 뿐이였다.

 

"뭐, 뭐?!?!?!"

"아, 물론 서번트로서 믿고 있고 아쳐 본인한테도 정은 있어. 내가 말하는 건 연애감정이니까. 붉은 세이버를 보고 깨달았는데. 의외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것도 성별에 상관없이. 아쳐는 여자애만 좋아하는 스트레이트니까, 괜히 마음 품어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을거고. 난 내 성별에 상관없이 좋아해줄 사람을 찾을래."

"잠깐! 마스터, 내 대답은?!"

"뭐? 아쳐 마음 말야? 그거야 당연히 처음부터 결정된 거 아냐?"

 

비웃는 얼굴을 보면, 소년의 화는 절대로 누그러진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더 돋구아 졌으면 몰라도. 아쳐의 패닉 속에 소년은 "그럼 미궁 탐색을 가볼 까." 하며 자신의 서번트를 두고 학생회실 문을 열어 재꼈다. 소년의 뒤 끝이 심하긴 하지만, 원인은 아쳐에게 있어. 학생회 멤버는 절망에 빠진 아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화가 그나마 누그러진 건, 미궁탐색이 끝난 후 마이룸에서 아쳐가 무릎을 꿇은 뒤 였다.

점심시간 옥상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였다. 4교시는 여자애들은 수영, 남자들은 야외수업이여서 나마에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먼저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나마에는 늘 항상 내게 미안하다며 한시코 내가 그녀의 도시락을 싸오는 걸 거절한다. 하지만 난 직접만든 음식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다는 욕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반찬을 교환하는 거라도 좋으니까, 한입이라도 먹어줬으면 좋겠어. 토우지, 켄스케와 함께 옥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스카가 나마에에게 무언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엑, 나마에 바보신지가 좋아하는 사람 알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 셋은 발걸음을 멈췄고, 동시에 둘이 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응, 그야 뻔히 보이잖아. 이카리 의외로 알기 쉽던데." 새삼스럽다는 듯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스카에게 대답했다. 나, 나마에가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

설마, 평소엔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내 도시락도 거절한 건가. 그렇다면 어떡, 어떡하지. 새파란 얼굴과 달리 새빨갛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아스카는 놀란 듯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고 반장또한 놀란 소리를 내었다. 잠시 소녀들끼리 대화를 하면 나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 아야나미씨 맞지?"

 

 

그 순간 나는 아찔해졌다.

 

 

 

 

 

 

솔직히 알고 있었다. 나마에는 원래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걸. 그러면서 정작 주변사람이 곤란해 하면 발벗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나 또한 아버지나 에바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그녀가 옆에 있어주곤 했지. 감동은 호감으로 바뀌고 소년의 호감은 사랑이 된다. 남의 마음을 멋대로 휘저으면서 왜 정작 자기는 그런 짓을 하는 줄 까마득히 모르는 걸까. 점심시간은 결국 나마에를 뒤로 하고 교실에서 혼자 지내고 말았다. 아야나미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나마에를 어째서인지 제대로 볼 수 가 없어서 였다. 책상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쉬면, 토우지와 켄스케가 걱정하는 지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어?"

"......응, 아무렇지 않아."

"이카리, 표정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나저나, 묘우지 녀석 아야나미로 착각하다니......선생님, 좀 더 발벗고 나서는 게 어때?"

"나, 나서다니...뭘?"

"큰맘먹고 고백을 한다던지...데이트를 한다던지?"

"오, 켄스케. 너 말 잘하는 구만!"

"고, 고백이라니...별로 그런 건..."

 

 

켄스케의 말에 대답을 하면 옆에 나마에가 지나쳐 갔다. 바로 우리 셋은 얼음을 맞은 것 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나마에는 신경도 안쓰는 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야나미에게 다가간 나마에는 즐거운 듯 자리를 잡고 떠들기 시작했다. 천하태평하긴. 사람 속도 모르고. 무심코 나마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다갈색 눈동자와 갑자기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움직인다. 너,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나마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왜?"

"아, 아니...아무것도..."

"이카리 말야...거짓말 할 때 눈을 꼭 피하더라?"

"뭐?!"

"아니 농담인데...진짜야?"

"노, 놀리지 좀 마! 정말..."

 

 

왜 그런 걸로 화내고 그래. 나마에의 볼멘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없이 나를 놀려대는 나마에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켄스케 말대로, 이것저것 나서서 나마에의 마음을 끌어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우선 내가 그럴 자신이 없을 뿐더러, 자존심도 상한다. 쓸모없이 허세를 부려봤자 가장 골치 아픈건 스스로인 건 알지만, 쉽게 마음이 굳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마에는 왠지 내가 무슨말을 해도 다 착각을 할거 같단 말이지. 아예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가정을 상상조차 못하는 거 같아.

정말 고백이라도 하면 달라질까. 하지만 나마에 성격상 고백을 받으면 나한테서 더 멀어질거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나마에하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친구 중에선 가장 친하지만, 오직 친구로만 따지자면 나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에 쓰러져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면 나기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신지군, 뭐해? 고민?"

"나기사.........별로, 아무것도 아냐."

"아, 그래? 당연히 묘우지씨랑 관련된 건 줄 알았지."

"어? 나기사군, 내가 뭐?"

"그게.........아, 이럴땐 함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랬어. 그치 신지군? 아무것도 아냐."

"나기사아아아아......!"

"...아야나미씨, 우리 도서실이나 갈래?"

"...응."

 

 

 

나기사를 죽일듯이 노려보자 녀석은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보아하니 이가 또 나갈까봐 무서워 하는게 틀림없다. 나기사의 눈치없는 말에 화낼 기력도 사라진 나는 가만히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나마에때문에 점점 지치는 거 같아. 다행히도 나마에는 도서실로 사라졌지만, 보통 조금이라도 신경쓰지 않나. 아니면 나한테 그 정도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건가. 눈을 반쯤 감으면 위에서 나기사가 토우지와 켄스케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카리!"

"...나마에? 아직 안 돌아갔어?"

"잠깐 도서실에 들렸다가 늦어져서. 이카리는? 오늘은 소집안하나 보네."

"응, 그렇지 뭐..."

"같이 안 갈래?"

"어, 어어 응."

"마침 잘됐다. 우산이 없어서..."

 

 

이카리가 없으면 큰일 날뻔 했네. 반갑게 나마에가 웃으면 괜시리 미간이 찌풀여졌다.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 표정이 풀려버릴 거 같아. 나마에는 겁이 난 듯 저때문에 화났냐며 내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나마에한테 닿지 않는데, 걷는 거리도 떨어트릴 필요 없잖아. "그런거 아니야. 나마에, 들어와." 조금 심통난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피면 나마에는 아무말 없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이카리,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아까 있잖아, 나기사군이 말하던거 무슨 얘기였어?"

 

 

 

 

톡 하고 나뭇잎에 고여있던 커다란 물방울이 우산에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나마에에게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겨우 대답했지만 그녀는 성에 안차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설마 내 뒷말이라도 했던거야?" 서운한듯 눈을 찡그리는 나마에에게 나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그럴리가 없잖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진 듯 나마에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또 놀리는 거였나. 한 순간도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욱한마음이 들었다.

 

 

 

"먼저 간다."

"잠깐잠깐 농담이야! 설마, 이카리가 그런 소릴 할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 안하는 걸."

"글쎄, 그건 어떨까."

"진짜라니까, 진짜, 진짜로."

 

 

 

터벅이는 발로 걷고있으면 발걸음에 미치지 못하는 나마에가 쫄래쫄래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약간 비에 젖은 그녀가 이번엔 진심인듯 울상을 지으면 마음약한 나는 화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이카리, 미안해."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목소리를 나마에가 내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도 농담이라며.

 

 

 

"무슨 고민있어?"

"뭐, 뭐?!"

"아니, 오늘 계속 책상위에 쓰러져 있었잖아. 어디 아픈거 같진 않고...괜찮으면 고민 들어줄까?"

"돼, 됐어...그런거 아냐..."

 

 

 

너하고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너한테 말할 수가 있겠어. 지금 여기서 나마에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분명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떨어트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곤란해 하는 모습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고민? 아, 역시 그렇구나."

"무, 무슨..."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면 나마에는 잡아냈다는 듯 개구쟁이마냥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분하고 들켰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빨게지는 게 느껴졌다.

 

 

"음...고백하는 게 어때? 혹시 모르잖아, 그 애도 널 좋아하고 있을 지."

"...그럴일 절대 없어."

"이카리가 그 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들었다면?"

"어?"

"나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는 걸 들었다면?"

 

 

 

한 줄기 빗방울 마냥 땀을 흘리는 나마에의 속은 뻔히 보였다. 아야나미씨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나마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나쁜 건 알고 있지만,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참고로, 아야나미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에게 한마디를 더 꺼내면 나마에는 큰소리를 내며 놀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아니라고......응?!"

"토우지하고 켄스케한테 다 들었어......뭘 멋대로 착각하는 거야."

"...아...미안...이카리, 항상 아야나미씨 잘 챙기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나마에를 챙기는 건 생각지도 않는 건가. 한숨을 쉬며 나마에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째서인지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내가 아야나미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도 슬픈건가. 고개를 푹 숙인 나마에는 건들면 흘러내릴 거 같은 빗방울 같았다.

 

 

 

"그럼...달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거야?"

"......글쎄?"

"이카리는 거짓말은 잘 안하지만 대답은 많이 안 하지. 그런 거라고 생각할게."

"잠, 나마에..."

 

 

생기없는 목소리로 나마에가 수긍하였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겨짚다니.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왠지 저 표정, 처음 나마에를 봤을 때랑 비슷하다. 마치 아무 관심도 없는 것 처럼 보여.

 

 

"...그러는 나마에는?"

"어? 나?"

"나마에가 말한대로, 그 나이대인데 좋아하는 사람정돈 있지 않아?"

".........난..."

 

 

평소의 나마에라면 웃으면서 없다거나, 숙녀에게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말할 텐데. 이상하게 장난기가 없는 그녀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진지한 눈동자이다. 좋아하는 여자애 한테서 본 적없는 여성을 발견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뛰게했다. 나마에가 달라보여. 그녀는 운을 떼더니 조곤조곤 빗소리에 맞춰서 말을 꺼내었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 있어."

".........그래?"

"응. 아,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때?"

"난......"

 

 

툭하면 장난을 걸고, 밝게 웃으면서 언제든지 사라질거 같은 실낱같은 사람. 때때로 정말 옆에 있는게 맞는가 싶은 귀신같은 아이. 아무도 모르는 속이 있지만, 감추는 게 싫지 않은 소녀. 언젠간 그 마음을 알고 싶은 나마에. 나마에의 질문 하나에 나는 여러가지 답을 속으로 읊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를 꺼냈다.

 

 

 

"그냥, 바보같은 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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