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본은 집중이다. 눈과 귀, 그 모든 감각을 상대방에게 집중하여야 한다. 그 유명한 빨간머리 해적단의 선장이 많은 이들에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샹크스는 이따금씩 그 집중을 싸움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쏟아부었다. 아니, 이따금씩이 아니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이 소녀가 눈 앞에 나타날 때 마다였다.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그 예리한 감각은, 소녀가 다른 이와 마주볼때, 대화를 할 때, 웃을 때 마다 살아났다. 언제나 시선은 그 얼굴을 향했고 귀는 목소리를 향해 열렸다.

사랑을 처음 해보는 어린 남자마냥, 샹크스는 행동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누구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였다. 배를 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많은 감정을 나눴었지.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조용한 사랑도 해보았다.

그런데 왜 저 소녀 앞에선, 이 불 같은 사랑을 감당치 못하는 소년처럼 굴고 마는 걸까? 자신이 끌어안은 불덩이를 감당치 못하는 어리숙한 아이처럼...제어되지 않는 스스로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샹크스는 또 다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작은 입술이 웃음소리를 흘린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은 자신의 동료인 벤이였다. 감각은 또 다시 살아나고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른다. 가장 믿는 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대에게 조차 눈을 흘기고 마는 샹크스 였다. 저 남자에겐 언제든 등을 맡길 수 있는데, 왜 소녀에 관해선 그럴 수가 없는 걸까. 소녀가 누구와 대화하든 그 상대에게 화가 났다. 결국 그 화는 시덥잖은 질투를 하는 스스로를 향해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 뿐 만은 아니였다. 그저 사랑에 대해 쪼잔하게 구는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였다면 이런 착잡함 따윈 들지 않았을 거다.
샹크스가 사랑하는 연인은 소녀였다. 그의 마음을 흔드는 손길은,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린 여자의 것이였다. 그리고 그 어린 여인의 몸짓과 말 하나하나에 괜한 의미를 붙여보았다가 혼자 실망하고, 멋대로 이상한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저 눈빛은 필시 다른 이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저 말은 묘하게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고. 가만히 있는 소녀의 주위를 맴돌며 혼자 휘둘려져 버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샹크스가 자신을 보고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소녀가 손을 흔든다. 방금까지 그 남자와 즐겁게 웃고 있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야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안했다. 방긋 웃는 저 얼굴은 샹크스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지 모를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를 원망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

성큼성큼 소녀는 샹크스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씩, 소녀가 저에게 가까워지면 마치 자신의 마음을 여인이 허락한 것만 같아 샹크스는 가슴이 떨렸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소녀는 그 동안 벤과 무슨 얘길 하고 있었는 지에 대해 얘기하였다. 온 신경을 기울여 대화를 엿들은 샹크스는 알고 있었지만 처음듣는 얘기마냥 소녀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적어도 소녀의 앞에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유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아 참. 샹크스씨는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나? 갑자기 왜?"
"샹크스씨가 뭘 좋아하는 지 궁금해서요."


소녀의 그 한마디는 특별한 게 아니였다. 벤과 나눴던 대화 중, 미처 듣지 못한 사이 오고갔던 말일 수도 있고 다른 동료에게도 물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서 기둥처럼 꼿꼿히 서 있으려던 샹크스는 그 말에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아니다, 어느 애틋한 감정이 담겨져 있지도 않고 그저 샹크스를 좋은 지인으로 대하는 거겠지. 

샹크스는 알고 있다. 소녀에게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자신을 향하는 시선, 목소리는 언제든 남을 향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괜한 기대를 품고 혼자 실망하고 철가면을 씌운 마음이 흔들린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바다를 샹크스는 동경했다. 파도는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 점이 좋았다. 바다는 샹크스에게 있어 세상이였다.
그리고 소녀 또한 바다 같았다.
그 작은 물결은, 언제든지 샹크스를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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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요즘 흡혈귀 사이에서 소문 도는 거 알아요?"

"무슨 소문?"

 

서린과 오붓하게 차를 마시던 실명이 그에게 물었다. 인간과 테트라 아낙스의 다과회를 누군가 보게 된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진마 사냥꾼 한세건도 건드리지 못하는 둘의 관계를 함부로 건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형이랑 누나랑 사귄다는 소문이요."

"...뭐?"

"참고로 세건이 형이에요."

 

서린은 실명이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끼 넘치는 말이였지만, 그의 말에 웃을 순 없었다. 설령 그게 농담이라 할지라도.

 

"누나, 미간 찌풀이면 주름진데요."

"그게 문제냐!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그것도 왜 갑자기? 지금?"

"글쎄요? 세건이 형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무슨일은...아무일도 없었는 걸."

 

가끔씩 마법도구를 구매하러 한세건이 집을 찾아오거나, 아르쥬나에서 만난다거나, 한세건에게 볼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간다는 건 이미 평범한 일이다. 특별한 일이라고 하기엔 비즈니스적으로 만나는 것 뿐이라 오해를 받을 일은 더욱이 없다. 게다가 만약 실명과 한세건이 만나는 걸 이유로, 그런 소문이 돌았다면 그 소문은 진작에 흡혈귀 헌터들 사이에서 돌아야함이 마땅하다.

 

"음...그래요? 난 또 진짠 줄 알고 놀랐는데. 에이, 아니네."

"너 방금 에이 라고 했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나저나 날 오늘 부른 것도 그 소문 때문에 부른거야?"

"설마요. 솔직히 진짜 일거라곤 생각안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말 꺼낸거에요."

"근데 너 그 소문 어디서 들은거야?"

"글쎄요...? 그냥 다들 지나가는 얘기로 하는 걸 들었던거 같아요."

 

 

 

 

 

사태는 심각했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지만...한세건과 연인이라는 소문은 솔직히 말해 달갑지않았다. 

한세건이 싫어서, 관심없는 상대와 풍문이 난 게 싫은 건 아니였다. 다만 그는 월야의 세계에서 아이돌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다. 비스트라는 별명이 정말 아이돌 비스트 처럼 모르는 사람이 드물어 잘 어울릴 정도로. 때문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과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도는 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원래 이런건 본인들이 해명을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어 부풀어지는 법이니까. 하물며 상대는 흡혈귀로 실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족들이였다. 타인일수록 더 무심하고 거칠게 말할 수 있는 법.

서린은 그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지만 소문의 당사자로썬 무시할 수 없는 것이였다.

 

 

"무슨 바람이 분거야?"

"뭐가?"

"갑자기 흡혈귀 사냥에 자길 데려가 달라 하지 않나...연금술사는 그만 두고 헌터로 이직하게?"

 

실명이 내린 결론은 흡혈귀 하나를 잡아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자는 것이였다. 한세건과 같이 다녀봐야 소문이 더 불거지면 불거졌지 잦아들린 없다. 더욱이 흡혈귀와 대화할 시간도 없이 보이는 대로 다 죽일게 뻔하니. 한세건과 달리 서현은 여유가 있어 몰래 하나정도 빼오는 건 괜찮을 거고, 서현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줄 것이다.

 

"궁금해?"

"음, 그렇지 뭐?"

".........그러고보니...너 린이하고 동갑인데 왜 나한테 반말이야?"

 

서현은 실명을 보던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소문에 대해 설명하는 건 크게 곤란한 일은 아니였으나, 소문이 한세건에게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한세건과 투닥이면서 저도 모르게 내뱉을 수도 있으니까.

 

 

실명과 눈을 못 맞추던 서현이 갑자기 고갤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실명은 바로 흡혈귀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인 그녀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라이칸슬로프는 분명 다르다. 새삼 그가 풋내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너도 싸울거야?"

"일단은...근데 난 한 놈이면 되거든. 그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돼."

 

0세대 라이칸슬로프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너 밖에 없을거다. 서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림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뭐가 긴장되는 지 한껏 얼굴을 찌풀이고 있었다.

밝히기 싫은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보는 걸 그만뒀지만 정말로 뭔가 사정이 있어보이는 표정이였다.

 

 

기척이 가까워진다.

서현은 실명에게 등을 돌리고 앞을 바라봤다.

 

 

 

//////////////

이래놓고 쓰던 사람이 뒷내용을 잊어버렷네요

죄송합니다;

그저 같은반 학생이라고 여겼었다.

'같은 반 친구'라는 말을 하기엔, 마츠자카 잇세이는 그녀를 몰랐다. 밑에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반에서 그녀가 누구와 친한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그런 사소한 것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접점이라곤 같은 반인 것 뿐인 흐릿한 사람. 마츠자카 잇세이에게 얼랭이는 자신의 반에 인원수를 채우는 학생일 뿐이였다.

 

싫은 것도 아니였고, 좋은 것도 아니였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사이. 

 

 

그러나 그녀를 몰랐던 오랜시간이 우스울만큼, 그 존재가 눈에 들어온 건 한 순간이였다.

 

 

방과 후, 마츠카와는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남아있었다. 이상하게 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서 꺼낸 공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놓고간 옷 한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재차 확인하며 그것을 들어본다. 학교 체육복이였으나 딱 봐도 작아보이는 그 크기는 여학생용이였다. 부원이 놓고간 옷이라곤 볼 수 없다. 체육수업 때 여학생 중 누군가가 잃어버린 걸까?

 

“그거 내 옷이야.”

 

갑자기 뒤에서 낯선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츠카와가 놀라 고개를 돌리면,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본 적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아이다. 얼떨한 마츠카와의 표정은 그녀를 모른다고 똑똑히 써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마츠카와를 향해 빙긋 웃을 뿐이였다.

 

“같은 반이야.”

“어?”

“너랑 나 같은 반이라구.”

 

마츠카와의 손에 들려있던 체육복을 가져가며 그녀가 말했다. 소년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본디 타인에게 무심한 성격이 아니였다. 보통 학생이면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아이도 5월 즈음엔 그 존재를 외운다. 마츠카와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묘하게 얼랭이는 기억에 남지 않았었다. 소년이 얼굴에 머쓱함을 씌우면 얼랭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원래 애들이 날 잘 기억 못하거든.”

 

그녀는 익숙한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아이였다. 마츠카와는 그 말에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 그거 만져봐도 돼?"

"뭐?"

"배구공 말야."

 

살갑게 말을 거는 얼랭이는 소년이 옆구리에 끼워놓은 배구공을 가리켰다. 그는 조용히 배구공을 건네주었다. 얼랭이는 이리저리 그것을 만져보며 흠,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드렁한 그 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배구공은 처음 만져봐."

"그, 그래?"

"축구공이나 농구공하곤 느낌이 많이 다르네."

 

마츠카와가 양 손안에서 배구공을 돌려보는 얼랭이에게 시선을 맞추면, 공에 집중되어 있던 눈동자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츠카와는 저도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 이만 가야겠다. 안녕.”

 

아무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얼랭이는 싱겁게 작별인사를 남기곤 떠나버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단순한 착각인 듯 했다. 그저 남과 대화할 때 똑바로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츠카와도 곧 그녀를 잊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난 부원들을 반겼다.

 

 

 

 

“연습 중이야?”

 

그렇게 얼랭이에 대해서 잊어갈 때쯤 만남은 갑작스레 다시 찾아왔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있던 도중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느낌이 들어 뒤 돌아보면 얼랭이가 서있었다. 마츠카와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츠카와의 짧은 대답을 들으며 얼랭이는 그의 옆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손은 군더더기 흙이 묻어있었다. 뭘하느라 저렇게 흙투성이가 된걸까? 조용히 손을 씻던 얼랭이를 향해 마츠카와가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마츠카와가 자신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였다.

 

“음...나 원예부거든.”

“왜 장갑을 안 끼고 해? 손 다치잖아.”

“어...그게...장갑이 다 떨어져서. 1학년이나 2학년은 아직 서툴러서 다칠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맨손으로 한다 했어.”

“고문 선생님껜 말씀 드렸어?”

“응...곧 가지고 오신대.”

 

그 말을 끝으로 얼랭이는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분위기에 마츠카와도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얼랭이가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그는 당황해했지. 어째서인지 이번엔 반대가 되어버렸다.

 

“저......마츠카와는 잘 몰랐는데 사교성이 좋네.”

“어?”

“그냥, 잘 모르는 애한테 선뜻 말도 걸고 그래서...좀 더 과묵한 성격인 줄 알았거든.”

 

물론 아무하고나 수다를 떨만큼 친화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계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리는 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츠카와는 얼랭이의 말을 되받아 쳤다.

 

“너야말로, 난 네가 낯가리는 성격인 줄 알았어.”

“응? 나 낯가리는 타입이야. 모르는 남자애한텐 말도 잘 못거는 걸.”

 

얼랭이는 마츠카와의 말에 반박하였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그녀를 오해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생각이 오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때, 얼랭이는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자신과 얼랭이는 눈빛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사이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먼저 마츠카와에게 다가간 걸까?

 

“마츠카와는 날 잘 모르겠지만 난 너 알고 있었어. 눈에 띄잖아.”

 

얼랭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라면 조금 납득이 간다. 신장이 큰 탓에 그는 어딜가나 시선을 받긴 했었다. 부드러운 성격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녹아들긴 했지만, 대부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음...그냥, 처음봤을 때부터 계속 네가 내 눈에 띄었어. 아, 역시 키가 커서 그런가?””

 

그녀는 스스로 납득을 하며 몸을 돌려 손을 털었다. 그러곤 이만 늦었다며 훌쩍 가버리는 그녀를 보며, 마츠카와는 얼랭이가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얼랭이와 보냈던 시간은 묘하게 인상에 남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평범한 것이였다. 이대로 얼랭이도 마츠카와도 서로에 대한 것을 바로 잊어버릴 만큼. 마츠카와는 아마도 두 번다시 그녀와 그 때와 같이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심사도, 무리도 맞지 않으니까.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얼랭이를 잊고 살던 나날 중 그는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고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얼랭이를 보며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떠올렸다.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보고 있으면 갑작스레 얼랭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뭐, 같은 반 친구라고 반드시 살갑게 인사해야 할 필욘 없으니 그도 얼랭이의 시큰둥한 반응을 받아들였다. 근처에 있는 책장 옆에 다가가 제목들을 훑고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자 책을 내려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던 얼랭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


소리를 죽이며 조그맣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입술은 천천히 눈과 함께 휘어졌다.

그 순간, 마츠카와는 세상이 숨을 멈추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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