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루, 너 방과후에 약속 없지?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같이 가자."


카오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복도를 떠났다. 옆에 있던 신지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지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교실로 몸을 옮겼다.


어제는 카지씨에게 많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울음을 다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카지씨에게 사과를 하면 그는 멋쩍스런 웃음으로 답하였다. 진정은 좀 됐니?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 목소리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었지.


"와 방금 대단했어, 실명아."

"어? 뭐가?"

"나기사군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

"고작 같이 하교하는 거 뿐이잖아...데이트는 무슨..."

"그치만 너 옛날엔 같이 하교하는 거도 눈치 봤었잖아."



친구의 말에 나는 예전 일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보니 옛날엔 그랬었지, 1학년 땐 카오루는 거의 학교에 스타라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떠돌았으니까.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앨 피하고 다녔었지.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2학년 말 까진 학교에선 말도 잘 안했으니까. 카오루가 졸업생이 될 때 즈음부터 학교에서 대화를 했었던 거 같다.



"이제 애들 눈은 신경 안쓰여?"

"아니 쓰여."

"뭐야...근데 왜 같이 가자고 했어?"

"신경이 쓰여도 오늘 꼭 해야 할 얘기가 있거든."



머리를 긁적이며 친구에게 말하면 그녀는 웃었다. 뭔진 몰라도 일이 좋게 해결 되는 거 같네. 그럼 다행이야. 진심을 담은 그 눈빛이 쑥스러웠지만 고마웠다.


"잘 안 해결 될 수도 있고. 일단 봐야 알 거 같아."

"만약 안 되면 어쩌게?"


음, 글쎄. 사실 우선 이야기만 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뒤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만약에 카오루랑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어봐도 안 된다면...뭐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를 무작정 내 곁으로 끌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것. 그거 뿐이다. 그저 겸허히 카오루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여기서 기다릴 줄은 몰랐네."

"반에 가도 네가 없었거든. 그럼 돌아갈까?"

"응."


교문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카오루와 함께 하교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의 반으로 가면 카오루는 이미 하교하고 난 뒤였다. 설마하니 날 두고 도망쳤을린 없으니,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띄는 은발이 교문 앞에 있었다. 분명 우리 반 보다 늦게 끝났을 텐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간거지?



"네가 혹시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뭐?"


그 말은 즉슨 내가 카오루를 내버려 둔 체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나보다 빠르게 학교를 나선거고. 뭐야 그게. 아무 말 없이 표정을 찌푸리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그런 표정 짓지말라고 말하였다.



"내가 너한테 먼저 말해놓고 도망가겠어? 아님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거야?"

"설마, 그런 일은 없어."


어쨋든 내가 도망갈거라고 생각한 거 잖아. 확신은 아니고 그저 일말의 가능성으로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결투장을 건넨 사람이 바보같이 그 결투를 피하겠냐고.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는 눈치챈 듯 나를 슥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과는 커녕 위로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거다. 그래 비꼬지 않는 게 어디야.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천천히 걷던 도중 우연히 어린아이들이 놀 법한 작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자주 드나들던 곳 이였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낡은 놀이기구 들이 녹슨 몸을 보이며 말해주었다. 하기사 요즘은 다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서 노니까. 이렇게 모래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놀이기구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



"여기서 자주 놀았었니?"

"옛날엔 그랬었지. 그러고보니 너랑 놀이터에 온 적이 없네."



항상 그와 놀 땐 집 안에서 였다. 카오루의 방엔 항상 놀 것이 많아 정신이 팔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비노라 그런가, 햇빛에 약해서 밖에서 모래장난을 한 적은 없었지. 머릿속을 헤쳐내며 몇 기억들을 떠올려봤지만 기껏해야 부모님들 끼리 밖에 나갈 때 빼곤 전무했다. 그래서 카오루가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비밀친구 같은 느낌이여서.



"우리 여기 앉자."

"여기가 좋은 거니?"

"옛날 생각 나서 좋아."



그를 두고 먼저 공원으로 들어가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옛날엔 여기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쳤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곤 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론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카오루랑 오다니. 이렇게 될 줄은 그 땐 꿈에도 몰랐을 거야. 


"실명아."

"응?"

"할 얘기가 뭐니?"


카오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상대를 놀릴 때 간혹 올라가던 입꼬리는 수평이였다. 나는 그를 마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하늘은 윗자락부터 어둠이 기웃거렸다.


"너한테 사과하려고."

"사과?"


저번에 내 방에서 같이 얘기 했을 때 있잖아. 카오루에게 넌지시 말하면 그는 기억하는 듯 작게 수긍의 소리를 내 뱉었다. 



"저번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 있잖아. 너한테 괜히 화내고 놀라게 한 거. 미안해."

"그건..."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 같아."

"...뭘 말이니?"

"너랑 제일 오래 지내왔던 게 나 잖아. 그래서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지. 몇 없는 너의 주변 사람이란 것에 같잖은 책임감을 느끼고 카오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믿었었다. 카오루가 나한테 특별한 만큼 나도 네게 특별한 믿음을 주고 싶었어. 



"바보같이 그렇게 믿은 결과는 완전 꽝이였지만. 나한텐 말야,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게 말이야, 잘 이해가 안갔어."



어느 동화책에 나올법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자길 껴맞추지 않는 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소모품인 것 마냥 말하는 게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되나. 너랑 내가 지내온 시간이 몇인데 그것마저 가볍게 여기는 거 같아서 싫기도 했고.


"뭐, 넌 아니라고 그랬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아는데...납득이 안갔어. 자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애한테 그게 제대로 들렸을리도 없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을 빛에 산수유 같은 눈동자가 빛을 담았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져 작게 헛 기침을 내뱉어 버렸다. 남부끄러운 자기 반성을 고해하는 이 순간조차 설렘을 느끼다니. 나는 이 애를 참 좋아하는 구나. 징하기도 하다.



"나도 내 마음을 가끔 모를때가 있는데, 남에 대해서 다 알고 이해한다고 잘못 믿고 있었어.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닌걸.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카지씨가 말했어. 저번에 시내에서 만났거든. 어색한 웃음을 그에게 내보이면 카오루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지씨 덕분에 깨달은 거 같아. 실은, 나 널 이해 못하는 게 너한테 상처주는 게 아닐까 겁먹고 있었어. 네 곁에 있어도 되나 무서웠어.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죄책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카지씨가 아니래. 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대. 우리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 안다면, 이해 못해도 괜찮은 거야."


목석같이 앉아만 있는 카오루는 반응 조차 없다. 그에게 듣고있냐는 물음을 던지면 카오루는 무겁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지금부터 카오루에게 해야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이 부끄러운 말을 도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 까.


"실명아?"

"왜."

"이제 끝이니?"

"...아니."


카오루가 보채듯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무말도 안하는 내가 참을 수가 없던 게 아닐까. 하얀 속눈썹이 천천히 두어번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입을 움직였다. 왜 쓸 데 없는 곳에서 성질이 급한 걸까. 결정적인 말이야, 언제든지 소리낼 수 있는데. 그 잠깐 망설이는 걸 기다리지도 못하다니.


"그러니까...내가 하고싶은 말은...너한테 사과도 하는 김에 화해하자는 뜻이였어. 나는 카오루 곁에 계속 있고 싶어. 솔직히 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네 곁에 내가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바싹 마른 입술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 남은 건 카오루의 대답 뿐이다. 바람 한줄기조차 가려울 만큼 내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저 입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나올까? 목울대를 두드리는 심장소리는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곁에있을지 말지는, 나는 실명이가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단다."

"그런가...그렇구나."


약간 싱거운 대답을 끝으로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그런건가. 내가 곁에 있고 싶어서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거구나. 지금껏 깊은 굴을 파면서 썩혀왔던 생각들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등줄기를 누르던 무게에 해방된 느낌이였다. 정말 단순한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있는 건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닌거야. 하고싶은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다.



"실명아."

"왜."

"얼굴이 빨갛네."

"그야...너 같으면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하는 게 안 쪽팔리겠어?"

"실명이가 많이 말썽을 피우긴 했지."

"동네 골목대장처럼 얘기하지마."

"그래도 조금은 리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거 같아."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노을마저 저 밑자락으로 내쫓은, 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춰졌다. 옅은 어둠속에 그의 얼굴은 오히려 또렷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미소에 가슴이 간지러운 게 미칠 것만 같았다.



"리린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이 갈 수록 상처 받는 게 나는 너무 안쓰러웠단다. 사람과 닿는게 두려우면서도 외로움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기에 사랑스러웠지만, 사랑했기에 그 슬픔을 멎게해주고 싶었어.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라면, 아마 카오루의 순정의 대상을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내가 카오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이 남자가 목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카오루를 고민에 빠트리고 이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쥐어잡는 그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다.



"그 애는 항상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며 상처를 받았단다. 그래서 사람들과 멀어졌지만  고독과 쓸쓸함을 잊지못해서 결국은 누군가를 원하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어. 하지만 오늘 네 얘기를 듣고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거 같아."



빙긋 올라간 입술은 심술을 부리지 않고 감사함을 표했다. 나도 카오루에 맞춰 웃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 수 없는 그지만, 이 애가 기뻐한다면 나도 기쁘다.



"너 꼭 말하는 게 신같아."

"...후후, 사실 난 천사란다."

"웃기지마. 이렇게 내숭떠는 천사가 세상에 어딨어..."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웃을 뿐이였다. 대답없는 그 모습에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뻔 했지만 실 없는 농담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순수하고 깜찍하지 못했다. 그저 그 미소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맞받아 칠 뿐이였다.



"그래, 뭐 니가 외계인이든 천사든 신이든.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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