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교류회에 가져갈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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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한 내용을 찾아보았어요. 지금 현재 부족한 봉사시간이…대략 50시간 정도 되네요."

전학온 아모로트 학교는 에스컬레이터 전형이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치루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다만 한가지 간과한 사항이 있었는데, 이 학교는 명문학교이기 때문에 유난히 봉사시간 이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이었다.

일반 학교와 학년당 시간이 50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니…이 쯤 되면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지 않나?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연계된 학교니까요. 초등학생은 연간 5~8시간 정도 봉사시간을 이수하지만 이 곳은 10시간 정도는 되요."

"휴…그래도 50시간 정도면 2년 안에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네요."

"어머? 다른 학생보다 부족한 시간이 50시간이라는 거에요. 거기에 추가로 50시간을 2년동안 이수해야 하는 걸요. 3학년때도 봉사활동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보통 그 즈음엔 다들 졸업시험이나 논문 쓰기로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2년 안에 100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거죠. 베네스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100시간…?! 그게 무슨 뉘 집 똥개 이름이라도 되나! 아무리 명문 학교라지만 봉사에 대한 집요함이 도를 넘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졸업생 시기에도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우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스러웠다. 거의 쫓겨나듯 오게 된 전학. 그마저도 당장 자취할 돈이 없어 친척인 베네스 선생님 집에 주소지를 옮겨 겨우 통학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전 학교에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말고, 자취방도 천천히 알아보라고 해주셨지만…. 16살이나 먹었는데 자신의 집안 사정을 모르는 학생이 어디있겠는가. 철없이 살 수 있는 풍족한 머저리라면 가능하지만 가난과 서민의 사이에 걸쳐있는 나는 모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기억보다 좁아져가는 집안. 제철 야채나 과일은 눈에띄게 밥상 위에 줄어들고 인스턴트가 올라온다. 부모님이 입고있던 옷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누가봐도 집안 기둥이 휘어가고 있단 증거인데. 눈 앞에 징거를 무시할 정도로 사리가 어둡진 않았다.

"하………."

"걱정말아요, 해결방법까지 찾아보고 알려준 거에요."

"저, 정말요?!"

역시나 고민의 해결사, 베네스 이모. 실의에 빠진 조카를 바로 구원해주셨다.

이모는 어릴적부터 집안의 자랑이었다. 예쁘고, 상냥하며 똑똑하고, 뭐든지 해내는 수재. 좀 괴짜같은 면이 있어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었지만, 원래 머리 좋은 애들은 나사가 빠진 곳이 있다며 조부모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물론 나도 항상 내게 친절히 대해주는 이모를 맨날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리곤 했다. 이모는 그야말로 아젬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이자 나의 은인이었다.

"나마에가 유난히 다른 학생들과 시간이 차이가 나는 건, 봉사과목을 듣지 않아서에요. 이 학교는 아이들이 중간에 수강철회를 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을 못 채워서 졸업을 못하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강의를 이수하면 추가로 5시간씩 더 주거든요. 1학년때부터 세어보면 대략 45시간…딱 당신이 부족한 숫자죠."

그런 꼼수를 쓰고 있었구나. 역시나, 아무리 모범생과 우등생이 득실거리는 학교라 해도 그 정신나간 숫자는 학생이 채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봉사과목은 학생회에 소속된 사람은 들을 수 없어요. 매주마다 학생회 임원들은 회의를 하는데 그 시간이 봉사과목 시간과 겹치거든요. 그리고 추가시간을 얻기 위해선 강의를 고등학교 2학년까지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학생회 아이들은 입부하자마자 봉사시간을 50시간 받는답니다.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요."

"그럼……"

"네! 나마에도 학생회에 들면 바로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울 수 있어요!"

"어……그런데, 학생회는 지금도 뽑나요?"

그렇게 이득이 있는 학생 활동이면 지원자가 적을리 없다. 이상한 소문 때문에 내쫓겨난 낯선 전학생을 요 고지식한 학교가 잘도 받아줄까? 전혀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내 걱정을 꿰뚫었다는 듯 베네스 이모는 싱긋 웃었다.

"학생회 멤버는 그 소속인의 추천으로도 될 수 있어요. 마침 지금 시간이면 음악실에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볼래요?"

처음보는…사람한테 다짜고짜 학생회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라는…뜻인가요? 그러나 베네스 이모에게 되묻기도 전에 이모는 봉사상담부에 가봐야 한다며 교무실을 그대로 떠나버렸다. 지도교사는 바쁜걸까. 그런것 치곤 자리를 피하는 것 처럼 보였는데…. 뭐 아무렴 어때. 앉아만 있어봤자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움직이고 봐야 하는 법. 혹시 몰라, 운 좋게도 학생회 결원이 있어 입부자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나는 최대한 근심을 집어던지고 음악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음악실은 동관 3층에 있었다. 3층은 거의 졸업생들 전용이라 1학년인 내가 들어가기엔 많이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그러나 2학기를 막 맞이한 3학년 교실은 한산했다. 이게 베네스 이모께 들은 모습인가. 각 학생들은 원하는 과에 맞춰 졸업시험이나 작품, 논문을 쓰느라 학교에 거의 오지 못한다고…했던 것 같다. 1학년 음악 수업이 왜 2학기에 몰려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3학년 눈치 보지 말고 음악실을 마음껏 사용하라는 뜻이였구나.

당당한 걸음으로 음악실을 열자 벽에 잔뜩 걸린 상패가 반겨주었다. 중앙에 놓인 드럼과 심벌즈를 지나면 창문 옆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있는 백발의 소년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안녕."

샛별처럼 파란 눈이 마주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섬뜩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단정한 얼굴이다. 부드러운 눈썹과 함께 휘어진 눈매가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애가 실제하는 구나. 연예인을 직접 보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며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흰 피부가 무척이나 매끄러워 보인다. 남자애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입술을 한껏 올렸다.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빛이 뚜렷한 보석같았다. 그는 그대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큰 눈을 접으며 웃었다. 웃는 상은 꼭 강아지 같은게 무척 귀엽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 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손을 붙잡히고 말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보고싶었어. 그동안――"

"아………그, 누, 누구세요…?"

잘생긴 놈 처음보냐? 부끄러운 짓 그만 하고 정신 차려라. 나는 머리를 뒤 흔드며 그제서야 남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유해보이는 얼굴은 어림잡아 동갑이나 연하로 보이지만…외모로 사람의 나이를 판단할 수야 없지, 선배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학생회에 들어가게 해달라며 잘 보여야 하는 인물에게 버릇없게 굴 순 없으니, 당연히 여기선 존댓말이다!

"저,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누구냐면―"

"………그렇구나, 날 기억 못하는 건가…"

학생회 인물로 보이는 소년은 상심한건지 고개를 숙였다. 언뜻 스쳐간 얼굴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뭐지? 아까 중얼거리는 말도 그렇고 날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이런 미소년을 내가 잊어버렸을리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응? 어…그 쪽이 베네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생회 소속 인거…죠?"

"아…맞아. 학생회 부회장인 1학년, 엘리디부스라고 해. 편하게 테미스라고 불러."

 

엘리디부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동갑이구나, 어려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묘하게 어른스러운 태도때문에 선배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이름으로 부르라고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이런 미소년을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며 친한척 굴고 싶진 않다. 나는 너스레 괜찮다고 거절하며 곧이 곧대로 그를 성으로 불렀다.

 

"베네스선생님이 도울 일이 있을거래서 왔는데, 무슨 일이야?"

"아………정말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물어본건 분명히 용건인데 어째서인지 미소년은 이름을 고집하며 내 눈치를 슬쩍 보고 있었다. 귀엽게 데굴, 올라간 눈동자가 꼭 토끼처럼 귀여운게…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엘리디부스에게 되물었다.

 

"엘리디부스, 학생회를 도울 일이라는 게, 뭘까?"

"1학년 에리쿠토니오스를 아니? 그의 집을 방문하는 거야. 꽤나 학교에 오지 않고 있거든."

"아……에리쿠토니오스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이사장…라하브레아의 아들이었던가? 언젠가 애들이 떠들어대던 이야깃속에서 나온 단어인 듯 했다. 학교에 오지 않는다라…학생회가 찾아갈 정도면 불량학생이라기보단 등교거부 학생인건가.

 

"그 애 집에 가면 되는거야?"

"응, 수업 필기물과 기타 프린트물 같은 거. 우리와 상담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찾으러 갈 때마다 만나주지 않네."

 

엘리디부스는 정말 아쉬운건지 쓴 웃음을 지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가만보자…이거, 기회 아냐? 만약 에리쿠토니오스를 방 밖에 나오게 하면, 적어도 엘리디부스와 얘기할 수 있도록 도우면 학생회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좋은 인상은 남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엘리디부스는 에리쿠토니오스의 집으로 향했다.

훗날, 우리의 만남이 어떤 날개짓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체.  

오리주까진 아니고 귀찮아서 매일 게임하면서 넣는 이름을 그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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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아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아쳐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쳐는 나를 마스터로 생각해주고 있을까. 서번트로 소환 된 이상 마스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내게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 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그에게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많았군...랜서뿐만 아니라 멜트리리스의 건도 있고 말야."

"응."

"...마스터?"

"응?"

"내 착각인 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이 쪽을 쳐다보지 않는거 같은데."

"이 쪽?"

"마스터."

 

아쳐가 타이르듯 나를 부른다. 아이템과 소지금을 확인하고 있던 내 팔을 붙잡고는 똑똑히 자신을 보도록 내 몸을 돌렸다. 이거야 어쩔 수 없이 아쳐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행운이 높아진 대신 근력이 낮아졌다 하여도 서번트와 마술사의 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까. 저도 모르게 놀라 시선을 돌려 버리면 아쳐의 이마가 이그러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왜 내 눈을 피하지?"

"아니...보통 그렇게 진하게 쳐다보면 놀라잖아..."

 

그 말을 내뱉고는 다시 아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검정색 눈동자 안에 내가 비춰지는 것이 보인다. 웃기지도 않는 내 변명에 무명의 서번트는 "내가 물은 건 최근의 일일텐데." 핵심을 꼭 집으면서 내 팔을 더욱 붙잡았다. 이쯤되면 아파오기 시작하지만, 사내로써 그정도는 참으라고 마초 서번트가 으름장을 내놓을게 뻔하니 가만히 있는다.

 

"그런 적 없는데."

"내게 거짓말이 통할거라고 생각하는 가?"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해도 그거야..."

"그거야?"

"......아쳐가 나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목 아파서 안 본거겠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쳐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진다. 아무래도 화난 거겠지. 히익. 저도 모르게 아쳐에게 잡힌 팔에 통증에 짧은 비명을 질러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서번트가 마스터를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닌가? 원래 이 자식이 좀 이런 놈이긴 했지만. 고통과 아쳐에 대한 음울한 마음이 뒤 섞여 목 부근까지 차오른다. 이런걸 욱한다고 하는건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괴상한 말이였다.

 

 

"그거야......아쳐가 씹스트니까 그렇지!"

"...뭐?"

"엇, 아니 방금껀 미안. 잊어.........라고 말해도 전혀 안듣네, 아쳐."

 

이번엔 맥이 풀린 듯 아쳐가 내 팔을 놓고는 한숨을 쉰다. 바보취급당한 건가. "마스터, 때때로 네가 무슨 소릴 하는 지는 몰랐지만. 이 정도로 바보일 줄은..." 역시 그렇구나. 어리석은 사람 취급받은 것은 괜시리 화가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쳐의 눈을 피하게 된 계기를 떠올린다. 하쿠노, 그러니까 내 친구(남자)가 아닌 소녀와 함께 있던 서번트. 그녀를 보호하고 함께 싸우는 남자는 소녀에게 때때로 핀잔을 주고 타박을 굴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것 보다 훨씬 상냥한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함께하고 있는 순간의 표정도, 더욱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였다. 그야 물론 나도 여자가 좋고, 아니 당연히 좋지만. 어쩜 저렇게 성별에 따라서 행동과 말이 싹 바뀌는 거지. 아쳐의 편애적인 모습에 왠지 모를 질투와 함께 그에 대한 짜증이 몰려왔었다. 나도 아쳐에게 많이 폐를 끼치고 있다곤 생각해도 나름에 애정과 친절을 주고 있는데, 그야 물론 귀엽지 않고 퀴퀴한 사내놈한테 애정을 주고싶지 않겠지. 부드러운 소녀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경을 함께 거처온 마스터인데, 성별에 상관없이, 그래도 애정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인가?

 

린과 마력공급을 했을 때도 그렇다. 솔직히 그 땐 그에게 믿음만 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마스터인 나하고 할 생각을 안하고 린을 고르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보통은 마스터를 먼저 생각하지 않냐고. 그리고 하고 난 뒤 그 말과 표정은 무엇이더냐. 린이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그리 좋더냐. 아쳐의 이상형이 린 처럼 기세고 귀여운 여자아이란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마스터?"

"어? 엇......"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점점 우중충한 기운이 도는데."

"......아쳐..."

"무슨 일이지?"

 

기운 없이 그를 불러보면 앞엔 자신을 걱정하는 듯 표정을 바꾸는 서번트가 보인다. 이런 얼굴을 보면 그에게 저도 모르게 두근 거리지만, 그 표정을 다른 여성에게도 보여줬을 거란 생각을 하자 역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세이버한테 시집이라도 갈 걸 그랬나..."

"마, 마스터?!"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안 맞춘다는 거래. 그게 뭐? 그래도 싸움은 잘 하고 있고, 대화도 잘 하고 있잖아."

"사회에선 눈 스킨쉽또한 신용과 애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눈맞춤의 빈도가 떨어진다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죠."

"저, 정말인가?!"

"그치만, 소우마씨 평소랑 전혀 다른게 없는 걸요? 평소처럼 아쳐씨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걱정도 하고..."

"이게 다 잡종 네 놈이 편식을 해서 그런 것이다."

 

 

길가메쉬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학생회는 정적을 맞이했다. 편식이라. 자신이 좋아하는 싫어하는 음식을 가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바보같은 놈, 맛만 좋으면 될 것을. 뭐, 어차피 네 놈은 꽉막힌 놈이니 자신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길...그게 무슨 뜻이야?"

"그걸 알려주면 재미가 있겠느냐? 하쿠노. 뭐, 요컨대 나 처럼 행동하라는 거다."

"아쳐가 길처럼 변하면 유우키는 울 걸."

"뭐라고?! 잡종, 요즘 간이 아주 커졌구나?"

"죄송합니다..."

"...뭐, 난 대충 무슨 소리인진 알거 같지만."

 

 

험악한 길가메쉬와 하쿠노의 만담속에 린이 말을 꺼내었다. 얕은 한숨을 쉬고는 아쳐를 보며 "걱정할거 없어. 서번트와 마스터간의 신뢰가 깨질일은 없으니까. 아쳐가 인간적으로 윳키를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냥 냅둬도 되는 일이야." 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하쿠노와 라니를 냅두고 사쿠라 또한 "아...그런거였군요." 린에게 긍정을 하였다.

 

 

"잡종...네 놈의 이해력은 덜떨어진 놈 답게 같잖지도 않구나."

"엣, 뭐야, 나 지금 왜 길한테 모욕받는 거야?"

"선배는 그런 쪽으론 감이 떨어지니까요."

"...그런 일이군요. 저도 알아들었습니다."

"하긴 저 초식계 동물 애호 남자애가 이런 걸 알리 없지."

"쯧...하찮구나, 하쿠노여. 친우의 고민 조차 이해 못하는 네 놈을 보니 실로 웃음이 나는 군! 하하하!"

"나 왜 비웃음 당하는 거야?! 것보다 라니도 이해한 거야?!"

 

 

소우마 유우키의 이상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하쿠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알몸으로 자고있는 자신의 왕의 품에 안겨있을 때 였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의 이상의 원인을 왠지 모르게 깨달은 아쳐는 마이룸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우키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동성애 자체는 아쳐 또한 그리 꽉 막힌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고 있었다. 본인이 거기에 흥미가 없었던 것 뿐.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지만.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 동료중에서도 동성애자는 뭇 되었으니.

 

세계 여러나라를 누비고, 많은 사람을 만나던 터라 아쳐 또한 동성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의 감정은 당혹함, 왠지 모른 미안함. 아주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스터의 마음을 떠올리는 감정은. 잘 모르겠다. 저항감이 크게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끌리는 것은 아니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아주 꼴사나운 것이기 때문에 아쳐는 결국 마이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미닫이 문을 열고 "마스터, 안에 있는가?" 들어가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흑발의 소년이 붉은 여성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 여성?

 

 

"호오, 네 놈이 바로 이 소년의 서번트인겐가? 아주 부러운 남자이군."

"아, 아쳐어..."

"?! 네놈, 도대체 누구냐?!"

 

자신의 마스터를 여성에게 보호하려고 싶지만, 그는 이미 그 여성에게 폭 안겨있는 꼴이였다. 아쳐의 쌍검을 들고 여성에게 위협을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고 고양이같은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서번트 세이버, 소년의 부름에 응하여 이곳에 현세하게 되었다."

 

 

"부름...? 마스터, 도대체 무슨짓을."

"아냐 잠깐!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무슨 소릴 하는 가! 소자여! 소자가 어제 '세이버에게 시집이라도 갈 걸...'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젯밤(솔직히 이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없지만.) 자신의 마스터가 내뱉었던 터무니 없는 말을, 여성은 홀로 주장하며 소년을 꼬옥 안았다. 그 때 아쳐는 그 세이버가, 학생회장의 서번트 '가웨인' 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소년이 내뱉었던 그 세이버가 바로 이 여성이란 말인가.

 

"아니, 솔직히 적밥폐하를 부른 건 맞긴 한데...진짜 말이 이뤄질 줄은,"

"주자의 뜨거운 고백에 짐은 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년이면 짐은 두말할 것도 없지! 주자여, 짐의 비가 되겠느냐?"

"아니, 폐하, 저기, 저 남잔 데,"

"그대같은 영혼의 소유자면 성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대는 비가 좋느냐? 왕이 좋느냐? 마음이 따르는 대로 고르도록 하여라!"

"......그거, 혹시, 내가 여자든 남자든...날 좋아해주겠다는 거?"

"물론이고 말고!"

 

 

붉은 여성, 세이버의 터무니 없는 말에 아쳐는 그녀를 말릴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스터가 볼을 붉히며 "엣."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였으니. 마스터의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아쳐는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트릴 뻔 하였다. 소년의 수줍은 모습을 세이버는 그저 귀엽다며 애지중지 하고 있었다.

 

 

"저...정말로?"

"왕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 그대같은 강인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비로 삼고 싶지 않겠느냐."

"아니...저...그런 강렬한 고백은 처음 들어서..."

 

소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곤 부끄럼을 떨고 있다. 저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마스터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다. 언제나 엉뚱한 말을 하곤, 수치라곤 없던 소년이 지금은 저리도 한껏 쑥스러워 하고 있다니.

 

"소자여, 짐의 고백을 받겠느냐?"

"......저기...그...나도 날 그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면..."

"마스터는 못 넘긴다!!!"

 

정신을 놓고 가만히 그 둘의 열렬한 사랑의 대사를 보고 있던 중, 아쳐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곤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세이버에게 안겨있는 소년을 자신의 품에 감추곤 그녀를 향해 눈초리를 주면, 소녀 또한 아쳐를 향해 눈을 부릅 떴다.

 

 

"마스터! 정신 차려라. 저런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함부로 휘둘려져서는 안 돼! 애초에 넌 너무 헛점이 많아, 정말이지 내가 눈을 뗄 수가."

"하하! 정말이지 들어줄 수 가 없는 잔소리구나! 주자는 계속 저걸 듣고 지냈는가? 참으로 딱하도다. 그러고보니 주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 소우마 유우키라고 합니다..."

"마스터어! 정신차려! 그렇게 쉽게 답하지 마! 정말이지! 넌 지금 몹쓸 마술에 걸려있는 건가?! 왜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거야!"

"이미 결정은 났다! 소자여, 저 남자는 이만 끝내고 짐을 맞이 하여라!"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마스터가 세이버를 바라본다. 저건 이미 홀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등장한 세이버 탓에 마스터에게 버림받을 지도 모르는 아쳐는 화가났다. 지금까지 마스터와 겪어온 고난은, 고작 저런 말 쪼가리에 버려지는 것이였는 가. 그 때 느꼈던 믿음도, 우정도, 애정도,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자신의 마스터는 고작 아쳐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그건 안 돼! 마스터가 좋아하는 건 바로 나란 말이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스터가 아쳐를 바라보았다. 그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쳐의 말이 사실인 듯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말을 더듬으며 "뭐!뭔 소리야?!" 자신의 서번트에게 대꾸를 하지만 마스터의 그 얼굴을 본 이상 아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술술 말을 꺼내었다.

 

 

"나하고 눈을 계속 마주치지 않은 것도, 내게 질투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멜트 리리스에게 구애받은 후로, 아니 그 보다 더 훨씬 전인가. 키시나미 하쿠노, 그녀와 있던 또 다른 나를 보았던 이후인거 같군.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모습에 화가난 건가. 마스터."

"린하고 마력공급을 한 후에도, 그 때 마스터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거 같군. 기억난다. 그거 때문에 화가나서 날 보지도 않은 거 아닌가? 유우키."

 

 

아쳐의 눈사태 마냥 쏟아지는 말에 세이버와 소년은 가만히 있었다. 조금은 뿌뜻 했는지 내 말이 맞지? 하며 그가 마스터에게 대답을 물었다. 하지만 싸늘한 표정의 소년은 아쳐의 득의양양한 얼굴에서 눈을 떼었고 세이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쳐를 바라보았다.

 

 

"...네 놈, 그걸 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냐?"

"아니, 그런 일은,"

"됐다. 소자여, 그대도 정말 가련하구나. 저런 되 먹지도 못한 남자에게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농락 당하고...그대가 받은 상처, 짐이 다 헤아려 주고 싶구나."

"그러게, 아쳐,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린하고 상성이 좋다는 둥 별 소릴 했던 거네."

"마스터, 난 그런 게 아니라"

"됐어."

 

 

지금 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스터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 딴에는 마스터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듣기엔 그저 알면서도 일부러 마스터를 간보았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였다. 세이버는 고개를 저으며 "하여간 근육덩어리인 남자들은 어쩔 수 없군." 아쳐에게 폭언을 날려댔다. 마스터와 세이버의 오해에 아쳐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니라고 큰 소리를 지었지만 소년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미안, 세이버."

"마, 마스터?"

"저렇게 짜증나고 말하는 것도 버터 바른 거 마냥 번지르르하고 느끼하고 근력도 낮아서 데미지는 안먹히는 주제에 내구는 약해서 맨날 죽기 바쁘고 스킬을 쓰려고 하면 투영횟수가 필요해서 상대방의 가드마다 투영하고 보구도 데미지 효과 없고 옷 입는 센스도 떨어지는 데다가, 성차별은 엄청나게 심하는 말도 못한 마초지만."

"마스터?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래도 꽤 상냥하고 이런 날 마스터로 인정해주고, 내가 믿을 수 있고, 무엇보다...내가 좋아하는 남자니까 말야."

 

 

소년이 세이버를 향해 얕은 미소를 지으면 그녀는 납득한 듯 "그렇군." 소년을 품에서 떼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버가 아쳐를 향해 말했다.

 

 

"거기, 이 가련하고 강인하고 귀여운 마스터에게 험악한 말만 내뱉는 서번트여."

"뭔가 오해가 있는거 같은데, 난 거기까진..."

"짐은 마음에 들지 않느나, 어쩔 수 없지. 주자가 그대를 원한다면야. 꽃은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아름다운 법. 비록 그 사람이 짐이 아닌게 아쉽지만, 내 특별히 그대에게 양보하겠네."

 

 

아쳐는 약간 떨떠름한듯 말끝을 흐렸지만 똑똑히 알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주자여, 짧은 기간이였지만 만나서 즐거웠네. 짐의 마스터도 그대와 같은 사람이면 좋겠군." 사라지는 듯, 그녀의 주변에서 푸른 색 빛이 맴돌았고, 세이버는 소년의 손등에 작별의 입맞춤을 맞추었다. 아쳐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어라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였으니 더 이상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럼 잘있게나, 유우키. 될 수 있다면 또 보았으면 하는 군."

 

 

귀여운 미소를 짓는 소녀는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이룸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의 마스터와 그 일뿐. 한동안 조용한 정적을 헤메고 있던 것을 깬 건, 바로 아쳐의 목소리였다.

 

"...마스터."

"응."

"아무래도 BB의 짓인 거 같군, 그 티켓처럼 말이야. 구교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그러네."

 

 

무안한듯, 아쳐가 줄줄이 말을 하였지만 마스터는 짧게 그의 말에 대답하고는 가만히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마스터를 봐도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어째서인지 아쳐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이였다. 소년의 감정을 상상했을 때 떠올렸던 감정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묘한 기분이 든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의 입으로 밝혔고. 소년 또한 거기에 시인하였다. 지금 아쳐가 꺼내야 할 말은 무엇인가. 혹은 마스터는 과연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고요히 자신만을 보는 소년에게서 아쳐는 긴장감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로.

 

 

"아쳐."

"아, 아아."

"오늘은 밖에서 자."

"알겠......뭐? 뭐라고?"

 

 

자신이 상상했던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마스터는 그를 아까와 같이 차가운 말투로 얘기하였다. "남의 마음을 다 알면서 능욕한 게 말이야, 어지간히 짜증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동안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밖에서 자든가 해."

 

 

"마, 마스터?!"

"빨리 나가줄래? 나 피곤하거든."

 

 

마이룸 밖으로 쫓기게 된 아쳐는 방문을 두드리며 "어째서?!" 마스터에게 물었지만 소년은 가볍게 무시한 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말도 안하는 거래. 싸움은 잘하고 있고, 전략도 얘기하고 있지만..."

"그건 아쳐, 당신이 나쁜 겁니다."

"당연하지 않느냐, 페이커. 이 몸 마저 그 잡종이 가엽다고 여길정도니. 그 붉은 여자에게 넘겼으면 네 놈의 마스터도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잠깐, 다들 그걸 듣고 있었던 건가?!"

"일단은, 만일을 위해서 마이룸을 촬영하고 있으니까요..."

 

 

놀란 아쳐에게 사쿠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자신의 추태를 만천하에 알린 것과 동시에 마스터에게 받는 미움을 자업자득이라고 단언받다니. 아쳐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다를 지경이다.

 

 

"어라? 아쳐, 어디가 있었나 했더니 먼저 학생회실로 왔었네."

"마, 마스터..."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이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등장하였다. 평소와 다름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자신의 서번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듯 보였다.

 

"못봐주겠군. 잡종, 네 놈의 딱하다는 건 짐도 인정하는 격이다. 허나 이 페이커 놈이 늘어지는 추태는 꼴도 보기 싫다. 네 놈이 알아서 달래거나 하여라."

"잠깐, 길!"

"뭐? 나 별로 화같은 거 안났는데? 아, 아쳐. 오늘부터 마이룸에서 같이 자도 돼."

"마스터...!"

 

아쳐가 울망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더 이상은 처음에 보았던 여유만만한 그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다. 여성진 멤버들은 그의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미안. 내가 너무 신경쓰이게 해서. 그래도 이젠 괜찮아."

"뭐, 네 기분이 풀렸으면 되는 거고."

"어, 이제 아쳐 안 좋아할 거니까."

 

 

소년의 말 한마디에 학생회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길가메쉬만이 "호오, 재미있군." 하며 입맛을 다실 뿐이였다.

 

"뭐, 뭐?!?!?!"

"아, 물론 서번트로서 믿고 있고 아쳐 본인한테도 정은 있어. 내가 말하는 건 연애감정이니까. 붉은 세이버를 보고 깨달았는데. 의외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것도 성별에 상관없이. 아쳐는 여자애만 좋아하는 스트레이트니까, 괜히 마음 품어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을거고. 난 내 성별에 상관없이 좋아해줄 사람을 찾을래."

"잠깐! 마스터, 내 대답은?!"

"뭐? 아쳐 마음 말야? 그거야 당연히 처음부터 결정된 거 아냐?"

 

비웃는 얼굴을 보면, 소년의 화는 절대로 누그러진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더 돋구아 졌으면 몰라도. 아쳐의 패닉 속에 소년은 "그럼 미궁 탐색을 가볼 까." 하며 자신의 서번트를 두고 학생회실 문을 열어 재꼈다. 소년의 뒤 끝이 심하긴 하지만, 원인은 아쳐에게 있어. 학생회 멤버는 절망에 빠진 아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화가 그나마 누그러진 건, 미궁탐색이 끝난 후 마이룸에서 아쳐가 무릎을 꿇은 뒤 였다.

점심시간 옥상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였다. 4교시는 여자애들은 수영, 남자들은 야외수업이여서 나마에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먼저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나마에는 늘 항상 내게 미안하다며 한시코 내가 그녀의 도시락을 싸오는 걸 거절한다. 하지만 난 직접만든 음식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다는 욕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반찬을 교환하는 거라도 좋으니까, 한입이라도 먹어줬으면 좋겠어. 토우지, 켄스케와 함께 옥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스카가 나마에에게 무언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엑, 나마에 바보신지가 좋아하는 사람 알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 셋은 발걸음을 멈췄고, 동시에 둘이 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응, 그야 뻔히 보이잖아. 이카리 의외로 알기 쉽던데." 새삼스럽다는 듯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스카에게 대답했다. 나, 나마에가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

설마, 평소엔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내 도시락도 거절한 건가. 그렇다면 어떡, 어떡하지. 새파란 얼굴과 달리 새빨갛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아스카는 놀란 듯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고 반장또한 놀란 소리를 내었다. 잠시 소녀들끼리 대화를 하면 나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 아야나미씨 맞지?"

 

 

그 순간 나는 아찔해졌다.

 

 

 

 

 

 

솔직히 알고 있었다. 나마에는 원래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걸. 그러면서 정작 주변사람이 곤란해 하면 발벗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나 또한 아버지나 에바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그녀가 옆에 있어주곤 했지. 감동은 호감으로 바뀌고 소년의 호감은 사랑이 된다. 남의 마음을 멋대로 휘저으면서 왜 정작 자기는 그런 짓을 하는 줄 까마득히 모르는 걸까. 점심시간은 결국 나마에를 뒤로 하고 교실에서 혼자 지내고 말았다. 아야나미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나마에를 어째서인지 제대로 볼 수 가 없어서 였다. 책상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쉬면, 토우지와 켄스케가 걱정하는 지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어?"

"......응, 아무렇지 않아."

"이카리, 표정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나저나, 묘우지 녀석 아야나미로 착각하다니......선생님, 좀 더 발벗고 나서는 게 어때?"

"나, 나서다니...뭘?"

"큰맘먹고 고백을 한다던지...데이트를 한다던지?"

"오, 켄스케. 너 말 잘하는 구만!"

"고, 고백이라니...별로 그런 건..."

 

 

켄스케의 말에 대답을 하면 옆에 나마에가 지나쳐 갔다. 바로 우리 셋은 얼음을 맞은 것 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나마에는 신경도 안쓰는 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야나미에게 다가간 나마에는 즐거운 듯 자리를 잡고 떠들기 시작했다. 천하태평하긴. 사람 속도 모르고. 무심코 나마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다갈색 눈동자와 갑자기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움직인다. 너,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나마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왜?"

"아, 아니...아무것도..."

"이카리 말야...거짓말 할 때 눈을 꼭 피하더라?"

"뭐?!"

"아니 농담인데...진짜야?"

"노, 놀리지 좀 마! 정말..."

 

 

왜 그런 걸로 화내고 그래. 나마에의 볼멘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없이 나를 놀려대는 나마에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켄스케 말대로, 이것저것 나서서 나마에의 마음을 끌어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우선 내가 그럴 자신이 없을 뿐더러, 자존심도 상한다. 쓸모없이 허세를 부려봤자 가장 골치 아픈건 스스로인 건 알지만, 쉽게 마음이 굳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마에는 왠지 내가 무슨말을 해도 다 착각을 할거 같단 말이지. 아예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가정을 상상조차 못하는 거 같아.

정말 고백이라도 하면 달라질까. 하지만 나마에 성격상 고백을 받으면 나한테서 더 멀어질거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나마에하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친구 중에선 가장 친하지만, 오직 친구로만 따지자면 나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에 쓰러져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면 나기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신지군, 뭐해? 고민?"

"나기사.........별로, 아무것도 아냐."

"아, 그래? 당연히 묘우지씨랑 관련된 건 줄 알았지."

"어? 나기사군, 내가 뭐?"

"그게.........아, 이럴땐 함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랬어. 그치 신지군? 아무것도 아냐."

"나기사아아아아......!"

"...아야나미씨, 우리 도서실이나 갈래?"

"...응."

 

 

 

나기사를 죽일듯이 노려보자 녀석은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보아하니 이가 또 나갈까봐 무서워 하는게 틀림없다. 나기사의 눈치없는 말에 화낼 기력도 사라진 나는 가만히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나마에때문에 점점 지치는 거 같아. 다행히도 나마에는 도서실로 사라졌지만, 보통 조금이라도 신경쓰지 않나. 아니면 나한테 그 정도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건가. 눈을 반쯤 감으면 위에서 나기사가 토우지와 켄스케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카리!"

"...나마에? 아직 안 돌아갔어?"

"잠깐 도서실에 들렸다가 늦어져서. 이카리는? 오늘은 소집안하나 보네."

"응, 그렇지 뭐..."

"같이 안 갈래?"

"어, 어어 응."

"마침 잘됐다. 우산이 없어서..."

 

 

이카리가 없으면 큰일 날뻔 했네. 반갑게 나마에가 웃으면 괜시리 미간이 찌풀여졌다.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 표정이 풀려버릴 거 같아. 나마에는 겁이 난 듯 저때문에 화났냐며 내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나마에한테 닿지 않는데, 걷는 거리도 떨어트릴 필요 없잖아. "그런거 아니야. 나마에, 들어와." 조금 심통난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피면 나마에는 아무말 없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이카리,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아까 있잖아, 나기사군이 말하던거 무슨 얘기였어?"

 

 

 

 

톡 하고 나뭇잎에 고여있던 커다란 물방울이 우산에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나마에에게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겨우 대답했지만 그녀는 성에 안차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설마 내 뒷말이라도 했던거야?" 서운한듯 눈을 찡그리는 나마에에게 나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그럴리가 없잖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진 듯 나마에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또 놀리는 거였나. 한 순간도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욱한마음이 들었다.

 

 

 

"먼저 간다."

"잠깐잠깐 농담이야! 설마, 이카리가 그런 소릴 할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 안하는 걸."

"글쎄, 그건 어떨까."

"진짜라니까, 진짜, 진짜로."

 

 

 

터벅이는 발로 걷고있으면 발걸음에 미치지 못하는 나마에가 쫄래쫄래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약간 비에 젖은 그녀가 이번엔 진심인듯 울상을 지으면 마음약한 나는 화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이카리, 미안해."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목소리를 나마에가 내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도 농담이라며.

 

 

 

"무슨 고민있어?"

"뭐, 뭐?!"

"아니, 오늘 계속 책상위에 쓰러져 있었잖아. 어디 아픈거 같진 않고...괜찮으면 고민 들어줄까?"

"돼, 됐어...그런거 아냐..."

 

 

 

너하고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너한테 말할 수가 있겠어. 지금 여기서 나마에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분명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떨어트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곤란해 하는 모습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고민? 아, 역시 그렇구나."

"무, 무슨..."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면 나마에는 잡아냈다는 듯 개구쟁이마냥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분하고 들켰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빨게지는 게 느껴졌다.

 

 

"음...고백하는 게 어때? 혹시 모르잖아, 그 애도 널 좋아하고 있을 지."

"...그럴일 절대 없어."

"이카리가 그 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들었다면?"

"어?"

"나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는 걸 들었다면?"

 

 

 

한 줄기 빗방울 마냥 땀을 흘리는 나마에의 속은 뻔히 보였다. 아야나미씨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나마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나쁜 건 알고 있지만,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참고로, 아야나미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에게 한마디를 더 꺼내면 나마에는 큰소리를 내며 놀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아니라고......응?!"

"토우지하고 켄스케한테 다 들었어......뭘 멋대로 착각하는 거야."

"...아...미안...이카리, 항상 아야나미씨 잘 챙기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나마에를 챙기는 건 생각지도 않는 건가. 한숨을 쉬며 나마에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째서인지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내가 아야나미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도 슬픈건가. 고개를 푹 숙인 나마에는 건들면 흘러내릴 거 같은 빗방울 같았다.

 

 

 

"그럼...달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거야?"

"......글쎄?"

"이카리는 거짓말은 잘 안하지만 대답은 많이 안 하지. 그런 거라고 생각할게."

"잠, 나마에..."

 

 

생기없는 목소리로 나마에가 수긍하였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겨짚다니.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왠지 저 표정, 처음 나마에를 봤을 때랑 비슷하다. 마치 아무 관심도 없는 것 처럼 보여.

 

 

"...그러는 나마에는?"

"어? 나?"

"나마에가 말한대로, 그 나이대인데 좋아하는 사람정돈 있지 않아?"

".........난..."

 

 

평소의 나마에라면 웃으면서 없다거나, 숙녀에게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말할 텐데. 이상하게 장난기가 없는 그녀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진지한 눈동자이다. 좋아하는 여자애 한테서 본 적없는 여성을 발견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뛰게했다. 나마에가 달라보여. 그녀는 운을 떼더니 조곤조곤 빗소리에 맞춰서 말을 꺼내었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 있어."

".........그래?"

"응. 아,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때?"

"난......"

 

 

툭하면 장난을 걸고, 밝게 웃으면서 언제든지 사라질거 같은 실낱같은 사람. 때때로 정말 옆에 있는게 맞는가 싶은 귀신같은 아이. 아무도 모르는 속이 있지만, 감추는 게 싫지 않은 소녀. 언젠간 그 마음을 알고 싶은 나마에. 나마에의 질문 하나에 나는 여러가지 답을 속으로 읊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를 꺼냈다.

 

 

 

"그냥, 바보같은 애 있어."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2월 길바닥은 수북한 눈덩이가 쌓여있었다. 사람 때를 탄 눈덩이는 발자국을 따라 딱딱한 얼음이 되었고 나무 밑에 숨어있는 저들만이 새하얀 빛을 띄웠다. 겨울 바람은 여전히 볼을 매섭게 찌를 뿐이다. 사람들이 분잡하게 모여있는 틈을 파고 들어가 위를 바라보면 예상하던 번호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꽤나.

 

 

"카오루군 봐봐! 합격했어!"

"아, 정말이네요. 잘됐다."

"카오루군, 이 학교 시험친건 너 잖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별로, 시험도 많이 힘들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요."

 

 

카오루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기사 머리가 아주 좋으시니까 그러시겠지. 난 이 학교 올려고 학원에서 썩어갔는데. 그의 잘난척에 기분이 상할법 했지만 귀엽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을 보니 그것도 풀려버렸다. 귀여워. 단추를 목까지 채운 떡볶이코트가 아주 잘 어울린다. 카오루군은 자신의 머리칼보다 훨씬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꼭 백설기 같다. 눈만 빨간 그가 더욱 집중되었다.

 

 

"카오루군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는 건가...응, 아주 좋네!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 블레이저가 멋지기로 꽤 유명하니까. 카오루군이 입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두근두근 거려."

"나마에씨, 이제 성인인데 미성년자를 건들이는 건 범죄가 아닌가요?"

"나 아무짓도 안했잖아...너무해...맞는 말이라서 더 슬퍼..."

 

 

소년이 싸늘한 말을 꺼내고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그래, 지금껏 카오루군에게 맹렬하게 사랑을 전했지만 그것도 소년법이 지켜주던 때였으니까. 지금부턴 조심해야겠지. 근데 내가 범죄를 저지를 만큼 그렇게 민폐를 끼쳤었나. 그동안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왠지 소년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내가 좀, 여러가지로 쫓아다니곤 했지. 빠순이 마냥.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그의 말마따라 성인답게 구는게 좋고, 무엇보다 대학생인데도 애 같이 구는 건 착한 그라도 싫겠지.

 

 

 

"그러고보니 카오루군, 왜 우리 학교 지원했어? 카오루군이라면 더 좋은데 갈 수 있을 텐데."

"신지군이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군...한 방에 납득이 가네."

 

 

신지도 우리학교로 지원했을 때 예상했지만 역시나 딱 들어 맞는 군. 조금은 나를 따라 학교에 와준 건 아닌가 기대했었는데. 설마는 사람을 잡지 않았다. 오늘은 정시지원자, 어제는 수시지원자 모집발표였다. 카오루군은 수시로 지원해도 붙을텐데 굳이 정시로 한 건 신입생 대표로 뽑힐 확률이 높아서 라고 신지가 말했던 거 같다. 정작 카오루군 본인은 관심이 없지만 학자집안이다 보니 그런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했다. 카오루군과 인파 속에서 짧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싶어 돌아보니 후배 몇이 서 있었다.

 

 

 

"어, 둘이 여긴 왠일이야?"

"부활동 하다가 심심해서 와봤어요. 어~옆은 누구?"

"아, 내 사촌동생 친구야. 카오루군, 이 쪽은 아는 후배."

"안녕하세요."

 

 

음, 공손하게 인사하는 카오루군도 너무 상큼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학교는 매년 미스퀸같은 걸 뽑곤 했었지. 난 당연히 뽑힌 적 없지만, 카오루군이라면 일 삼학년 독점하지 않을까. 왕관과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비식 새어나온다. 카오루군은 그런날 약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은.

 

 

"대학교 가도 경기같은 건 보러와줄 거죠?"

"남친 생기면 못 오겠지~아무래도."

"그럼 계속 오시겠네요."

"야, 너 방금 뭐랬어?"

"나마에씨, 슬슬 시간도 되었고 이만 가보는 게 어떨까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거보다, 카오루군. 얘네한테 뭐라 한마디 해줘. 날 웃기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실을 말하는 사람한테 뭐라 할 순..."

"카오루군이 제일 너무 한 거 알아?"

 

 

 

허나 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후배에게 차분히 인사를 했다. 차가운 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앞에서만 저러는 건 기분 좋지가 않지. 하지만 나를 새초롬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역시나 울분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왠지 이 소년의 얼굴이 있으면 세계 3차대전도 평화종전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학교를 벗어나 길가를 그와 같이 걷는다. 나를 데려다 준다는 기특한 일은 아니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 때문이였다.

 

 

 

"카오루군, 초밥이 좋아 패밀리 레스토랑이 좋아? 아까 신지가 나올 때 물어보던데."

"상관없어요."

"어어? 응, 그럼 고기라도 썰까..."

"........."

 

 

평소라면 살이 찐다던가, 이것저것 괜한 핀잔을 주는 소년인데 왠일인지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면 다를거 없이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단박에 그의 기분을 알아채었다. 뭔지 몰라도 카오루군이 화난 것이다. 아니 근데 왜 화가났지. 아까 내가 심한 말이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후배들이 무슨 말이라도.

 

 

"저기...카오루군?"

"무슨일이죠?"

"어어...있잖아, 혹시 화났어?"

"...아뇨."

 

 

야, 화난 거 맞잖아. 딱 봐도 그 대답없는 여운이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걸로 보면 화났다기 보다, 그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삐친듯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지만 잘 생각이 안 난다. 카오루군에게 심한 핀잔을 주거나 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했다면 이 꼬맹이가 했지. 근엄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은 모델같지만 분위기는 을싸년스러웠다. 왠지 내가 바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거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화가났는지도 모르는데, 성의없는 사과를 했다간 오히려 화를 부추길 것 같고.

 

 

"나마에씨는, 고등학교 때 유도부 매니저셨나요?"

"어어...? 으, 응. 아니. 매니저하고 친한 사이였지. 오히려 운동은 젬병이여서...매니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그런가요."

"............그, 그래서. 그 매니저랑, 아까 그 애들하고 자주 놀러가고 그랬어. 친구중에 매니저, 음, 미나코랑 친한애가 있었거든. 그 애가 날 되게 따라줘서 친해졌는데..."

"그렇군요."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그렇냐고 대답하는 그 입이 당혹스러울 뿐이였다. 그치만 아까 유도부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애들을 만났을 때 무슨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솔직히 짐작가는 바는 없다. 카오루군을 제대로 소개 안해줘서? 그건 아니겠지. 그런걸로 화내는 아니다. 그럼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 설마 친한 남자애가 두명이나 있어서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닐테고...

 

 

"카...오루군. 혹...혹시 말야 질"

"질투에요."

"그렇지 질투일리가 없...뭐, 질투?!"

 

 

무심코 목청껏 소리를 질러버렸다. 카오루군은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질책받을만한 짓이긴 하지. 하지만 그 눈빛에 아랑곳없이 가슴은 붕 뜬 기분이였다. 카오루군이 질투를 해주다니. 나를 생각해주다니! 아니, 설마 나를 질투한 건 아니겠지.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현실감 없는 그의 말에 의식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난 몇년동안 그에게 퍼 준 사랑이 조금 결실이 맺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헤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카오루군이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귀담지 않았다.

 

 

"카오루군...결혼할까?"

"나마에씨는 언제나 그런 소릴 하네요."

"미안, 무심코 기뻐서...오늘 집에가서 울어야지. 카오루군 사진 보면서 울거야."

"왜 그런 일을..."

"카오루군은 몰라도 돼."

 

 

사실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나올 거 같지만. 길가에서 갑자기 눈물을 왈칵쏟는 여잘 보면 다들 기함하며 사라지겠지. 카오루군에게 그런 싸늘한 시선은 받고 싶지 않다. 평소처럼 하찮은 농담을 내던졌지만 말이 없는 그는 이질적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동자는 아니다. 왠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지금이 서사마냥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다. 카오루군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마에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

"언제나 제게 그런 소릴 하지만, 정작 그 진심은 알 수 없네요. 정말로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늘 진심인듯 농담인듯 애매모호하게 말을 툭 던지는 당신이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있는 지 알 수 없어요. 나마에씨는 늘 제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정작 진심을 다하지는 않죠."

"......"

"저는 당신의 소모품에 불과한건가요? 당신의 소원은 저를 향하고 있는 건가요. 나마에는 나와 함께 할 마음이 있는걸까. 늘 내 대답을 듣지 않아요."

"카, 카오루군..."

"너는 겁쟁이구나. 내게 너를 보여주지 않아."

 

 

상처받은건가 슬픈건가 분노한건가. 눈썹을 떨어트린 카오루군만 보인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빨간 눈동자는 일렁거렸다.

 

 

 

"카오루군...그럼 내가 만약에 좋아한다고, 카오루군한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하면 뭐라 할꺼야?"

"싫네요, 나마에씨. 전 제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대답하진 않아요."

"카오루군이 만약 거절하면...이도저도 아니게 되잖아. 카오루군을 다시 만날 정도로 그렇게 당당한 사람은 못 돼, 난."

"저는 상관없어요. 나마에씨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연애감정과 별개로 당신에겐 정을 붙이고 있어요."

"그런게 듣고 싶은게 아냐. 그리고...카오루군이 좋다고 해도 내가 싫어. 만나봤자 상처받을 사람을 내가 뭐하러 만나?"

"나마에씨는 저보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거군요."

"그런거 아냐...왜 그런 소릴 하는거야?"

 

 

질질끄는 발걸음을 멈추고 먼저 앞선 그를 보면, 무덤덤한 얼굴로 소년이 "도착했어요. 들어가죠." 태평한 말을 꺼냈다. 목구멍으로 짠 울음이 출렁거렸다.

 

 

"...안 가. 이렇게 카오루군이랑 있어봤자 기분만 상할거야."

"......나마에씨."

"카오루군은 바보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실 건가요? 감기걸려요. 나마에씬 호흡기가 약해서 감기에 자주 걸리시잖아요."

"뭐야 그건...왜 이럴때 뜬금없이 말해..."

"뜬금없지 않아요. 내일 아르바이트도 가야 되잖아요."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걱정하고 있어요."

 

 

 

자극의 반응하는 물체마냥 내가 말만꺼내면 카오루군이 재빠르게 대답을 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면 어느새 키가큰 듯 눈높이가 올라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엇비슷했었는데, 이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건가. 카오루군이 발을 내딛어 거리를 좁혀왔다.

 

 

"나마에씨는 고집불통이네요."

"카오루군도 충분히 그러잖아. 맨날 내가 뭐만 해도 고집부리면서..."

"그런가요. 나마에씨, 고집부리는 사람이 싫다고 했었는데. 제가 고집 부리면서 많이 싫었겠네요."

"...싫은 적 없어."

"........."

"싫을리가 없잖아, 카오루군이 뭘 하든 다 좋은데. 어떤 점이든 다 좋단 말야."

 

 

겨울바람이 코끝을 벤 것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고집불통인 카오루군은 똑같이 목을 움직여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미처 떨어지는 걸 막지 못한 케잌조각 마냥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나마에씨, 울지마세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뒤적이고 있으면 소년이 천으로 눈물 범벅을 닦아주었다. 고개를 돌려 피해보려고 하지만 팔을 붙잡지 않아서 인가, 카오루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찾아 모두 다 닦아내었다. 울음에 잠긴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모든것이 좋니? 나마에."

"........."

"왜? 어째서 그런거니?"

 

 

그거야 카오루군이 좋으니까. 오랜만에 보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고 마는 걸.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더듬더듬 말을 찾아 소년을 좋아한다고 웅얼거리면 그는 흡족한 듯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 표정은 여지껏 어른스러운 카오루군이 짓던 것이 아니였다. 제 소년티가 나는 귀여운 미소였다.

 

 

"네 전부를 내게 줄 만큼 나를?"

".............응..."

 

 

욱욱 흘러나오는 딸꾹질을 참고 열심히 대답하면 그가 나를 양 팔로 꼬옥 안아주었다. 비릿한 겨울냄새가 그의 체취에 감싸 사라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등을 쓰다듬은 듯 딸꾹질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가 내 어깨의 고개를 묻곤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마에씨, 저번에 봤던 영화 기억 하나요?"

"여, 영......영화....?"

"네가 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난 전부 필요 없어."

 

 

그 말이 끝나면 카오루군은 내게서 떨어졌다. 진지하게 나를 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왠지 딸기주 같은 저 눈동자에 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뭐야 그...거..."

"나도 나마에씨를 좋아해요. 아니, 내가 나마에를 좋아해."

"어...어...?"

"겨우 말했네요. 나마에씨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바로 말하면 될 걸, 너무 오래 끈 거 같아."

 

 

눈물과 딸꾹질과 그의 말에 범벅이 되어 얼떨떨한 표정이 된 내 볼을 그가 쓰다듬었다. 나를 끌어안느라 차가워진 손은 어깨를 흠칫 떨게 했지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포게었다. 카오루군의 손이 따뜻해지고 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마에씨, 가게에 들어갈까요?"

"...아니...역시 안 갈래."

 

 

그도 그럴게 카오루군이 너무 날 몰아세웠잖아. 오늘은 가만히 집에 있을 거야. 그에게 애꿎은 타박을 농담으로 던지면, 소년은 "그럼 저도 나마에씨 방에 갈게요." 또다시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말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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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몇년전에 썼던 소설들을 제가 업로드를 안 했던것 같습니다

중복일시 삭제합니다

 

"난 너 아니면 못 사는데 왜 넌 아닌건데!!"
"아니, 사토루 좀 진정..."
"왜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말도 안돼! 너도 날 좋아해야 하는거 아냐?!"
"진짜 돌아버리겠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
"너도 날 좋아해! 지금 당장 사귀자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



2005년 일본 하라주쿠. JR의 최강 집결지 중 하나로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젊은이들의 거리.
...를 고죠 사토루는 길 바닥에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이 더러워지든 말든,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든 말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왜 이럴 때 책에서 자주 봤던 도입부가 떠오르는 걸까. 그건 아마 내가 현실도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증스런 인간은 죽어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멀쩡한 허우대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쓸고 있다.
귓가가 무척 따갑다.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 부족한 거 없어보이는 학생이 왜 저러고 있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사토루는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팔 다리를 휘두르는 와중에 날 놓지 않는걸 보고 누가 그 거짓말을 믿겠는가.



"제발, 사토루, 좀, 일어나!! 야악!!!! 일어나라고!! 너 갑자기 왜 이래!! 난 하라주쿠에 쇼핑하러 온 거지 190cm 다 되가는 남고생 돌보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내 고백에 대답해!! 좋아한다고 대답하라고!!"



그래, 갑자기 사토루가 고백을 해왔다. 별 시덥지도 않은 잡몹(라고 사토루가 말한다)용 임무를 끝내고 쇼핑을 가려하자 사토루가 따라왔다. 나도 데려가, 라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같이 전철에 탔는데...
별 생각 없이 데려가선 안됐다. 살 것도 없는 지 계속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사토루는 방해였다. 차라리 쇼코처럼 따로 행동하던가, 스구루 처럼 조용히 따라오던가 할 것이지. 뒤에서 옷을 고르면 그건 너무 짧다느니, 안 어울린다느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옷을 입냐. 해가 서쪽에서 뜨냐...등, 거슬리는 소리만 일삼았다.


여기서 고죠 사토루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간 고전에 돌아가 괴롭힘을 당할게 뻔했으므로...나는 별 수 없이 쇼핑을 포기하고 스타벅스에 들렸다. 입에 초코 프라프치노를 물려주자 조용해진 고죠 사토루. 이걸로 겨우 조용해졌나 싶었으나...문제는 여기서 시작 되었다.



"저...멀리서 지켜봤는데......혹시 옆에 여자친구 인가요?"
"맞아."
"아니에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YES를 대답한 사토루와 NO를 대답한 나. 무슨 농담이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페 안 분위기가 얼음장으로 덮였다. 눈빛으로 말려 죽는 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특급 주령을 노려보는 것 마냥 날 쳐다보는 사토루를 피해 재빠르게 밖으로 도망쳤으나 속수무책이였다. 세걸음도 못 걷고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너, 내가 여자친구라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뭘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난 그런 거짓말 싫어해.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럼 내가 싫다고?"
"어어...?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건......아니지?"



그리고 눕게된 것이다. 각종 구두와 운동화의 때가 묻은 이 하라주쿠 길바닥에. 3만엔 샤넬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사고 버리는 고죠가문 도련님이 누운 것이다.
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이 고죠 사토루를? 이 나이스 가이를?
평소같으면 단어선택이 촌스럽다고 말했겠지만 굉장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맞은 지네처럼 입도 못 열고 고개만 끄덕였다.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치던 사토루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1학년의 그......그 자식이 좋은거냐?" 첫마디가 괴상망측한 소리였다. 1학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난 사토루랑 달리 유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구루처럼 사람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동창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다. 눈살만 찌푸리며 골치를 앓자 참다못한 사토루가 대신 말했다.



"...나나미 켄토! 너도 알 거 아냐."
"아.........아, 그 애? 저번에 하이바라군이랑 같이 있는 거 봤지. 근데 왜?"
"......네 이상형이잖아?"
"뭐? 걔가?"
"키 174이상의, 숫기없고 무서워 보이지만 다정한 성격에! 머리색은 옅은 편이고, 목소리는 츠다 켄! 작년에 스구루한테 네가 대답했잖아!"
"뭐야 그런거 기억할 리 없잖아!!"



그치만 고죠 사토루는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작년 봄 즈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죠 도련님은 제쳐두고 나머지 다른 동급생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은 내가 스구루에게 물어본 것 같은데...솔직히 그걸 이제와서 기억하는 사람이 신기한 거다. 보통은 잊어먹기 마련이라고! 게다가 그 때 사토루는 없었는데 얜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몰라 기억 안 나! 그리고 나나미 켄토라는 애는 만난 적도 없고...만나도 솔직히 금방 반할리도 없잖아. 이상형이랑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거라고."
"뭐야 그럼 나랑 사귀면 되겠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사람이라도 죽일 것 처럼 살벌하던 사토루는 온순해졌으나 내 말에 다시 날카롭게 눈썹을 올렸다. 왜 안되는데?! 아니, 되겠냐고...보통 그런 식으로 사람하고 사귀진 않는다고...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날 좋아하게 될 거 아냐."
"와~! 고죠 사토루 유아독존 나왔다! 아니거든! 내가 너랑 사귀지 않는 이유 3번째가 그거야! 이 자기중심적 인간아!"
"뭐...? 이유가 세 개나 있다고..?!"
"당연하지!!"



첫째. 날 너무 괴롭힌다. 그건 그냥 네가 너무 약해서 별 거 아닌 일에도 신경질 부리는 거잖아. 응 아냐, 입 다물어 사토루.
둘째. 사람들을 너무 깔본다. 적어도 지나가는 선생님한테 인사조차 하지 않는 예의 없는 사람하고 사귀진 않아요. 조용히해 사토루.
셋째. 천상천하 유아독존. 뭐 이건 스구루한테 물어보던가. 야! 그 녀석도 만만치 않거든?! 그래도 스구루가 너보다야 낫지.
넷째. 얼굴이 너무 잘생겼어. 난......굳이 따지자면 올리브 보단 간장파 얼굴이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사실 열거하자면 많지만 대충 이 정도로 끝내고."
"여기서 더 있다고?!"
"사토루...너는 장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네 특징이 내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뭐 이건 변명이고 그냥 너랑 사귀면 고죠 가문이고 뭐고 귀찮을 거 같아서 싫지만! 난 딩크족이거든!"




그리하여 하라주쿠를 넘어 오다이바까지 퍼져나가는 최악의 생떼소리가 태어난 것이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사토루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왜 나랑 안 사귀어 주냐고!! 억지를 부렸다.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가 날 놔줄리 없지. 이 자존감 사나이는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럽기는 커녕 이렇게 해서라도 OK를 받아내면 원만히 해결했다고 좋아할 걸?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고죠 사토루가 내게 수치를 끼얹고도 모자라서 날 이긴다고? 어림도 없지.



"싫어! 떼쓰는 남자는 싫고 그냥 싫어! 내가 질 거 같아!! 평소에 날 비웃은 건 언제고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그건 네가 날 두고 스구루랑 사이좋게 얘기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알까보냐! 그리고 너처럼 뭐든지 가진 남자한테 쉽게 넘어갈 거 같아?! 배알 꼴려서 그건 못 봐주지!!"
"네가 좋아하는 츠다 켄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너 나캄이잖아! 선배 목소리 따라하지마!"




30분을 넘어가는 이 말싸움은 결국 사토루가 오지 않자 마중인으로 불려나간 스구루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이를 악물다 못해 갈고 있는 고죠 사토루를 보면, 아무래도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 했다...

 

 

 

 

 

 

유카가 '모리스케' 라는 이름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오늘 낮부터 였다.

야쿠 모리스케. 시모카와 유카의 자랑스러운 남자친구의 이름이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사랑스러운 사람, 늘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퍼붓는 다정한 소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외우고, 누군가가 속삭이면 어디서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언제든지 입에 올리는 건 연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즉 의식하는 건 세상의 이치, 사랑의 도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카가 모리스케란 단어를 의식하는 건 조금 다른 이유였다.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성이 아닌 온전히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연인이 되고 나서도 조차!



유카와 야쿠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절대 아니였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연인은, 이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것 마냥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대낮에 학교에서 서로를 얼싸안을 용기는 커녕 아직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 조차 부끄럽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느 연인보다 짙은 빨강색이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큰 사건은 아니였다. 점심시간을 맞이해 야쿠의 반으로 갔던 유카가 그토록 신경쓰는 소년의 이름을 들은 것 뿐이였다.

조금, 아주 조오금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애였다는 건 걸리지만. 사실 많이 걸리지만, 중요한 건 연인인 자신이 야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부름을 통해 그녀는 그제서야 깨닫고 만 것이다.



그리고 야쿠 또한 자신의 이름을 담은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모카와, 라고 말했지만 한번도 유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수줍게 야쿠와 손을 잡고 볼에 입맞춤을 하는 단계 까지 겨우겨우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연인의 이름을 불러도 되지 않을까?



물론 유카 본인은 언제든지 모리스케 선배, 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무런 부끄럼을 보이지 않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또 세상 누구보다도 달콤하게 연인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모리스케, 모리스케, 모리스케 선배...

말의 무게따위 있을리가 없는데, 단어를 입에 머금을 때마다 마치 입술에 내려앉는 기분이였다. 단어는 이윽코 불꽃이 되어 유카의 얼굴위로 펑, 하고 터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정말로 그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다면 물어보면 될 것이다. 선배, 왜 이름으로 안 부르세요? 아니면 조금 투정을 부리며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하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유카 자신이 먼저 모리스케를 부르고 싶었다.



손을 먼저 잡은 것도, 조심스레 뺨에 입을 맞춘 것도 야쿠가 먼저 해주었다. 아이들 속에 파묻혀 보일리 없던 자신과 눈을 맞춰 주었던 것도 야쿠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주었다.

모든 처음은 그가 늘 선사해주었다, 그렇담 적어도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건 자신이 하고 싶었다.



"시모카와?"

"아, 네, 네! 듣고 있어요!"


그리고 때는 흘러 하교시간. 오늘도 야쿠는 자신의 연인을 데려다주고 유카는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짐했던 의지는 시도조차 해내지 못했다. 하교길을 걸으며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입술을 열어보려 했지만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고 조용해진 순간을 눈치 챈 야쿠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였다.


한 낮의 태양만큼 뜨거웠던 결심은 해가 져물어가는 노을 빛마냥 바래졌다. 겨울을 타는 하늘은 어느새 샛별을 내보인다.

망설임을 비웃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은 집 앞에 우뚝 서 유카를 마중나왔다. 이제 그와 헤어질 시간이다. 작별을 건네려는 야쿠는 아쉬운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서, 선배! 저, 저기!"

"으, 으응?"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는 유카에게 놀란 듯 소년이 말을 더듬었다. 그 상황이 조금 부끄러워 소녀가 귀까지 빨게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야쿠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자, 자, 잘 가시라고...인사 하려고..."

"응, 그래. 잘 들어가고..."

"아뇨, 잠시만요..."


작게 웃음 소리를 내는 야쿠의 손이 유카에게 꼭 잡혀버렸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면서 궁금하기도 한 야쿠는 유카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유카는 조용히 속으로 주문을 외듯 사랑스런 이름을 불렀다.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조!"

"....조?"

"조심히...가세요...!"

"........."

"조심히 가세요, 모리스케 선배!"


설렘과 다짐, 사랑을 담아서 유카는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야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유카. 내일보자." 대답해주었다.


이 사랑스런 연인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쁨과 함께 그 설렘을 연인의 이름을 외면서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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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본은 집중이다. 눈과 귀, 그 모든 감각을 상대방에게 집중하여야 한다. 그 유명한 빨간머리 해적단의 선장이 많은 이들에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샹크스는 이따금씩 그 집중을 싸움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쏟아부었다. 아니, 이따금씩이 아니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이 소녀가 눈 앞에 나타날 때 마다였다.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그 예리한 감각은, 소녀가 다른 이와 마주볼때, 대화를 할 때, 웃을 때 마다 살아났다. 언제나 시선은 그 얼굴을 향했고 귀는 목소리를 향해 열렸다.

사랑을 처음 해보는 어린 남자마냥, 샹크스는 행동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누구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였다. 배를 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많은 감정을 나눴었지.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조용한 사랑도 해보았다.

그런데 왜 저 소녀 앞에선, 이 불 같은 사랑을 감당치 못하는 소년처럼 굴고 마는 걸까? 자신이 끌어안은 불덩이를 감당치 못하는 어리숙한 아이처럼...제어되지 않는 스스로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샹크스는 또 다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작은 입술이 웃음소리를 흘린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은 자신의 동료인 벤이였다. 감각은 또 다시 살아나고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른다. 가장 믿는 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대에게 조차 눈을 흘기고 마는 샹크스 였다. 저 남자에겐 언제든 등을 맡길 수 있는데, 왜 소녀에 관해선 그럴 수가 없는 걸까. 소녀가 누구와 대화하든 그 상대에게 화가 났다. 결국 그 화는 시덥잖은 질투를 하는 스스로를 향해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 뿐 만은 아니였다. 그저 사랑에 대해 쪼잔하게 구는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였다면 이런 착잡함 따윈 들지 않았을 거다.
샹크스가 사랑하는 연인은 소녀였다. 그의 마음을 흔드는 손길은,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린 여자의 것이였다. 그리고 그 어린 여인의 몸짓과 말 하나하나에 괜한 의미를 붙여보았다가 혼자 실망하고, 멋대로 이상한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저 눈빛은 필시 다른 이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저 말은 묘하게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고. 가만히 있는 소녀의 주위를 맴돌며 혼자 휘둘려져 버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샹크스가 자신을 보고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소녀가 손을 흔든다. 방금까지 그 남자와 즐겁게 웃고 있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야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안했다. 방긋 웃는 저 얼굴은 샹크스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지 모를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를 원망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

성큼성큼 소녀는 샹크스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씩, 소녀가 저에게 가까워지면 마치 자신의 마음을 여인이 허락한 것만 같아 샹크스는 가슴이 떨렸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소녀는 그 동안 벤과 무슨 얘길 하고 있었는 지에 대해 얘기하였다. 온 신경을 기울여 대화를 엿들은 샹크스는 알고 있었지만 처음듣는 얘기마냥 소녀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적어도 소녀의 앞에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유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아 참. 샹크스씨는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나? 갑자기 왜?"
"샹크스씨가 뭘 좋아하는 지 궁금해서요."


소녀의 그 한마디는 특별한 게 아니였다. 벤과 나눴던 대화 중, 미처 듣지 못한 사이 오고갔던 말일 수도 있고 다른 동료에게도 물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서 기둥처럼 꼿꼿히 서 있으려던 샹크스는 그 말에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아니다, 어느 애틋한 감정이 담겨져 있지도 않고 그저 샹크스를 좋은 지인으로 대하는 거겠지. 

샹크스는 알고 있다. 소녀에게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자신을 향하는 시선, 목소리는 언제든 남을 향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괜한 기대를 품고 혼자 실망하고 철가면을 씌운 마음이 흔들린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바다를 샹크스는 동경했다. 파도는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 점이 좋았다. 바다는 샹크스에게 있어 세상이였다.
그리고 소녀 또한 바다 같았다.
그 작은 물결은, 언제든지 샹크스를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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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요즘 흡혈귀 사이에서 소문 도는 거 알아요?"

"무슨 소문?"

 

서린과 오붓하게 차를 마시던 실명이 그에게 물었다. 인간과 테트라 아낙스의 다과회를 누군가 보게 된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진마 사냥꾼 한세건도 건드리지 못하는 둘의 관계를 함부로 건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형이랑 누나랑 사귄다는 소문이요."

"...뭐?"

"참고로 세건이 형이에요."

 

서린은 실명이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끼 넘치는 말이였지만, 그의 말에 웃을 순 없었다. 설령 그게 농담이라 할지라도.

 

"누나, 미간 찌풀이면 주름진데요."

"그게 문제냐!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그것도 왜 갑자기? 지금?"

"글쎄요? 세건이 형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무슨일은...아무일도 없었는 걸."

 

가끔씩 마법도구를 구매하러 한세건이 집을 찾아오거나, 아르쥬나에서 만난다거나, 한세건에게 볼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간다는 건 이미 평범한 일이다. 특별한 일이라고 하기엔 비즈니스적으로 만나는 것 뿐이라 오해를 받을 일은 더욱이 없다. 게다가 만약 실명과 한세건이 만나는 걸 이유로, 그런 소문이 돌았다면 그 소문은 진작에 흡혈귀 헌터들 사이에서 돌아야함이 마땅하다.

 

"음...그래요? 난 또 진짠 줄 알고 놀랐는데. 에이, 아니네."

"너 방금 에이 라고 했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나저나 날 오늘 부른 것도 그 소문 때문에 부른거야?"

"설마요. 솔직히 진짜 일거라곤 생각안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말 꺼낸거에요."

"근데 너 그 소문 어디서 들은거야?"

"글쎄요...? 그냥 다들 지나가는 얘기로 하는 걸 들었던거 같아요."

 

 

 

 

 

사태는 심각했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지만...한세건과 연인이라는 소문은 솔직히 말해 달갑지않았다. 

한세건이 싫어서, 관심없는 상대와 풍문이 난 게 싫은 건 아니였다. 다만 그는 월야의 세계에서 아이돌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다. 비스트라는 별명이 정말 아이돌 비스트 처럼 모르는 사람이 드물어 잘 어울릴 정도로. 때문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과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도는 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원래 이런건 본인들이 해명을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어 부풀어지는 법이니까. 하물며 상대는 흡혈귀로 실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족들이였다. 타인일수록 더 무심하고 거칠게 말할 수 있는 법.

서린은 그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지만 소문의 당사자로썬 무시할 수 없는 것이였다.

 

 

"무슨 바람이 분거야?"

"뭐가?"

"갑자기 흡혈귀 사냥에 자길 데려가 달라 하지 않나...연금술사는 그만 두고 헌터로 이직하게?"

 

실명이 내린 결론은 흡혈귀 하나를 잡아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자는 것이였다. 한세건과 같이 다녀봐야 소문이 더 불거지면 불거졌지 잦아들린 없다. 더욱이 흡혈귀와 대화할 시간도 없이 보이는 대로 다 죽일게 뻔하니. 한세건과 달리 서현은 여유가 있어 몰래 하나정도 빼오는 건 괜찮을 거고, 서현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줄 것이다.

 

"궁금해?"

"음, 그렇지 뭐?"

".........그러고보니...너 린이하고 동갑인데 왜 나한테 반말이야?"

 

서현은 실명을 보던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소문에 대해 설명하는 건 크게 곤란한 일은 아니였으나, 소문이 한세건에게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한세건과 투닥이면서 저도 모르게 내뱉을 수도 있으니까.

 

 

실명과 눈을 못 맞추던 서현이 갑자기 고갤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실명은 바로 흡혈귀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인 그녀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라이칸슬로프는 분명 다르다. 새삼 그가 풋내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너도 싸울거야?"

"일단은...근데 난 한 놈이면 되거든. 그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돼."

 

0세대 라이칸슬로프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너 밖에 없을거다. 서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림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뭐가 긴장되는 지 한껏 얼굴을 찌풀이고 있었다.

밝히기 싫은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보는 걸 그만뒀지만 정말로 뭔가 사정이 있어보이는 표정이였다.

 

 

기척이 가까워진다.

서현은 실명에게 등을 돌리고 앞을 바라봤다.

 

 

 

//////////////

이래놓고 쓰던 사람이 뒷내용을 잊어버렷네요

죄송합니다;

그저 같은반 학생이라고 여겼었다.

'같은 반 친구'라는 말을 하기엔, 마츠자카 잇세이는 그녀를 몰랐다. 밑에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반에서 그녀가 누구와 친한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그런 사소한 것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접점이라곤 같은 반인 것 뿐인 흐릿한 사람. 마츠자카 잇세이에게 얼랭이는 자신의 반에 인원수를 채우는 학생일 뿐이였다.

 

싫은 것도 아니였고, 좋은 것도 아니였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사이. 

 

 

그러나 그녀를 몰랐던 오랜시간이 우스울만큼, 그 존재가 눈에 들어온 건 한 순간이였다.

 

 

방과 후, 마츠카와는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남아있었다. 이상하게 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서 꺼낸 공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놓고간 옷 한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재차 확인하며 그것을 들어본다. 학교 체육복이였으나 딱 봐도 작아보이는 그 크기는 여학생용이였다. 부원이 놓고간 옷이라곤 볼 수 없다. 체육수업 때 여학생 중 누군가가 잃어버린 걸까?

 

“그거 내 옷이야.”

 

갑자기 뒤에서 낯선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츠카와가 놀라 고개를 돌리면,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본 적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아이다. 얼떨한 마츠카와의 표정은 그녀를 모른다고 똑똑히 써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마츠카와를 향해 빙긋 웃을 뿐이였다.

 

“같은 반이야.”

“어?”

“너랑 나 같은 반이라구.”

 

마츠카와의 손에 들려있던 체육복을 가져가며 그녀가 말했다. 소년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본디 타인에게 무심한 성격이 아니였다. 보통 학생이면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아이도 5월 즈음엔 그 존재를 외운다. 마츠카와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묘하게 얼랭이는 기억에 남지 않았었다. 소년이 얼굴에 머쓱함을 씌우면 얼랭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원래 애들이 날 잘 기억 못하거든.”

 

그녀는 익숙한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아이였다. 마츠카와는 그 말에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 그거 만져봐도 돼?"

"뭐?"

"배구공 말야."

 

살갑게 말을 거는 얼랭이는 소년이 옆구리에 끼워놓은 배구공을 가리켰다. 그는 조용히 배구공을 건네주었다. 얼랭이는 이리저리 그것을 만져보며 흠,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드렁한 그 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배구공은 처음 만져봐."

"그, 그래?"

"축구공이나 농구공하곤 느낌이 많이 다르네."

 

마츠카와가 양 손안에서 배구공을 돌려보는 얼랭이에게 시선을 맞추면, 공에 집중되어 있던 눈동자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츠카와는 저도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 이만 가야겠다. 안녕.”

 

아무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얼랭이는 싱겁게 작별인사를 남기곤 떠나버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단순한 착각인 듯 했다. 그저 남과 대화할 때 똑바로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츠카와도 곧 그녀를 잊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난 부원들을 반겼다.

 

 

 

 

“연습 중이야?”

 

그렇게 얼랭이에 대해서 잊어갈 때쯤 만남은 갑작스레 다시 찾아왔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있던 도중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느낌이 들어 뒤 돌아보면 얼랭이가 서있었다. 마츠카와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츠카와의 짧은 대답을 들으며 얼랭이는 그의 옆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손은 군더더기 흙이 묻어있었다. 뭘하느라 저렇게 흙투성이가 된걸까? 조용히 손을 씻던 얼랭이를 향해 마츠카와가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마츠카와가 자신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였다.

 

“음...나 원예부거든.”

“왜 장갑을 안 끼고 해? 손 다치잖아.”

“어...그게...장갑이 다 떨어져서. 1학년이나 2학년은 아직 서툴러서 다칠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맨손으로 한다 했어.”

“고문 선생님껜 말씀 드렸어?”

“응...곧 가지고 오신대.”

 

그 말을 끝으로 얼랭이는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분위기에 마츠카와도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얼랭이가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그는 당황해했지. 어째서인지 이번엔 반대가 되어버렸다.

 

“저......마츠카와는 잘 몰랐는데 사교성이 좋네.”

“어?”

“그냥, 잘 모르는 애한테 선뜻 말도 걸고 그래서...좀 더 과묵한 성격인 줄 알았거든.”

 

물론 아무하고나 수다를 떨만큼 친화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계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리는 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츠카와는 얼랭이의 말을 되받아 쳤다.

 

“너야말로, 난 네가 낯가리는 성격인 줄 알았어.”

“응? 나 낯가리는 타입이야. 모르는 남자애한텐 말도 잘 못거는 걸.”

 

얼랭이는 마츠카와의 말에 반박하였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그녀를 오해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생각이 오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때, 얼랭이는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자신과 얼랭이는 눈빛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사이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먼저 마츠카와에게 다가간 걸까?

 

“마츠카와는 날 잘 모르겠지만 난 너 알고 있었어. 눈에 띄잖아.”

 

얼랭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라면 조금 납득이 간다. 신장이 큰 탓에 그는 어딜가나 시선을 받긴 했었다. 부드러운 성격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녹아들긴 했지만, 대부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음...그냥, 처음봤을 때부터 계속 네가 내 눈에 띄었어. 아, 역시 키가 커서 그런가?””

 

그녀는 스스로 납득을 하며 몸을 돌려 손을 털었다. 그러곤 이만 늦었다며 훌쩍 가버리는 그녀를 보며, 마츠카와는 얼랭이가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얼랭이와 보냈던 시간은 묘하게 인상에 남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평범한 것이였다. 이대로 얼랭이도 마츠카와도 서로에 대한 것을 바로 잊어버릴 만큼. 마츠카와는 아마도 두 번다시 그녀와 그 때와 같이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심사도, 무리도 맞지 않으니까.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얼랭이를 잊고 살던 나날 중 그는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고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얼랭이를 보며 그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떠올렸다.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보고 있으면 갑작스레 얼랭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뭐, 같은 반 친구라고 반드시 살갑게 인사해야 할 필욘 없으니 그도 얼랭이의 시큰둥한 반응을 받아들였다. 근처에 있는 책장 옆에 다가가 제목들을 훑고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자 책을 내려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던 얼랭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


소리를 죽이며 조그맣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입술은 천천히 눈과 함께 휘어졌다.

그 순간, 마츠카와는 세상이 숨을 멈추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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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상냥하며 항상 태양같은 그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마치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 마냥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동경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이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세찬이의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당하게 올라간 눈썹은 부끄러운 듯 살짝 내려가 있었고, 그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세찬이는 누구에게나 상냥하였다. 그 점에 반했는데, 왜 지금은 그 이유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는 그를 좋아했고, 남들처럼 서로 좋아 죽는 연애를 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건조한 연애관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제대로 된 연인관계를 확립했을 때 경우이다. 어떤 연애관을 추구하고 행할지는, "과연 서로 상대방을 연인으로써 확실히 보고 있는가" 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세찬이가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도 없이 고백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얼랭이는 이따금씩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불안하였다. 이 연애관계는 아무리봐도 저 혼자만 화살을 쏘는 기분이 들었다. 세찬이에게 제대로 묻고 싶었다. 오빤 날 정말로 좋아하나요?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 만약에, 만약에 그 때 보여줬던 미소와 정 반대의 것이라면, 이 설움이 폭발해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갈까 무서웠다. 세찬이의 여자친구로 있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신을 잡아 먹었다.


그리고 얼랭이는 속상한 마음을 삼켰다. 자꾸만 물 밖으로 떠오르는 그 설움을 애써 참아왔다. 세찬이를 좋아하고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자신만 참으면 세찬이의 미소는 계속 얼랭이를 향한다. 그 사실이 얼랭이를 견뎌내게 했다. 그러나 세찬이는 얼랭이에게만 웃어주는 게 아니였다. 모두에게 같았다. 모두에게 친절하면서 얼랭이에게도 다정했다. 얼랭이는 그 '모두'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그의 주변인이기만 한 것 같았다.


세찬이는 자신에게 있어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인데, 그의 눈에 자신은 어떤 색일까? 색을 띄우고 있을까? 그저 평범한 회색빛이진 않을까.


세찬이의 미소가 보고 싶어 설움을 참아왔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갔다.


눈 앞에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미안한 듯 머리를 긁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였다. 얼랭이는 세찬이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찬이에게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세찬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양해를 구하며 친구에게 가봐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가 곤경에 빠지면 언제든지 달려나갈 세찬이의 성격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몇 번이나 세찬이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왜 오랜만에 그와 오붓하게 있는 지금 이때에 그런 일이 생긴 걸까?


얼랭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는 지, 아니면 그저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 진 알 수 없었다. 얼랭이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진 알 수 없었다.

그를 좋아했고, 곁에 있고 싶어 얼랭이는 혼자 앓으며 참아왔다.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게, 연애에선 더욱이 옳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찬이의 말을 듣자마자 얼랭이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감정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얼랭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세찬이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세찬 오빠."

"어, 어어."

"좋아해."


담담한 고백과는 반대로 얼랭이는 세찬이와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세찬이는 갑작스레 얼랭이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서 놀랐는 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세찬이의 온도는 얼랭이를 더욱 부추겼다. 


자, 이제 늪에 빠져있던 얼랭이가 수면위로 나와 모든 것을 전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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