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계기는 간단했다. 누가 좀 도와달라며 힘 없는 시민이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마음씨 착한 히어로가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전래동화에 나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적으로 부터 위협받고 있다면, 나는 연휴동안 쌓인 과제에 맥을 못추리고 있는 거지만.


".........클락?"


나는 분명히 도움을 부르긴 했다. 믿지 않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까지 끌어 모아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 과제를 누군가 끝내주길 빌었지.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며 간절하게. 그리고 설마 그 결과가 눈 앞에 슈퍼맨을 불러오게 될 걸 누가 알았겠는가.


눈 앞에 남자는 슈퍼맨으로써 입는 수트가 아닌 평상복이였다. 검정색 목티 위에 모닝코트를 입은 아주 말끔하였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후드티 차림에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었다. 단정한 차림새와 늘어진 꼬라지가 아주 잘 비교 되었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길래..."


클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걸 내게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재빠르게 달려...날아왔는 데 눈 앞에는 책상에 좀비처럼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가 있었으니까. 적잖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나도 당황했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던 건 물론이고, 항상 그에게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완벽하게 화장도 마친 상태로 만났었는데 이 꼴이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평소와 똑같이 상냥하겠지만 이건 그저 내 만족감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그 어느 여자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냥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좋을텐데. 슈퍼맨이 들으면 놀랄 생각을 접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이미 그에겐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그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어야지 어쩌겠어. 이제와서 화장을 한다던가 옷을 갈아입는 건 난리 피우는 꼴이 된다. 나는 민망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와줘서 고마워요...그치만... 어쩌죠, 그냥 난 과제가 너무 많아서...으, 미안해요.. 사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어요."

"실명씨, 마음 쓰지 말아요. 오히려 무턱대고 온 제 잘못이에요."


클락은 내게 사과를 건네었다. 흐려지는 그 말 끝이 그가 미안쩍음을 나타내었다. 물론 정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 마냥 도움을 부른 것은 아니고, 그저 개미만한 목소리로 투정부리 듯 말을 꺼낸 것은 사실이지만...엄연히 그가 날 걱정해서 온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괜찮아요...생각보다 클락이 걱정이 많은 편이란 건 좀 놀랐지만."


솔직한 심정이였다. 일반인의 청력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그는 중얼 거리는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기색이 다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감이 임박한 내 과제를 서둘러야 하는 건 맞지만, 적어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사람의 애원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았을텐데. 곧장 달려오는 모습이 뜻밖이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그의 일면이였던 걸까?


"당신의 요청을 듣자마자 경황이 없어져서...미안해요.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 쳐해진 게 아닐까 하고..."



그렇구나.

그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에 그 조그만한 목소리에도 날아온 것이였다. 만약 위협을 가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다급한 목소리조차 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을 둔 것이겠지. 날 생각 해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곤혹해하는 청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클락, 으음......당신이 어떤 걸 걱정하는 지는 알지만...전 별로 당신에게 지켜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히어로의 주변인은 언제든 위협받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였다. 그가 걱정하고 보살피는 존재 보단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애석하게도 나는 과제 하나에 끙끙 앓는 보잘것 없는 대학생이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새끼 병아리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삐약거리는 걸로 보일 것이다. 그 증거로 클락의 표정이 바뀌었으니까. 그치만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클락이 날 생각 해주는 것도 기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싶지도 않구요."


앗, 물론 클락이 지키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짐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허둥지둥 거리며 나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선한 마음이 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이 날 위해서 한 걸음에 와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나보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우선 해도 괜찮아요."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특별함을 얻고 싶진 않았다. 나에 대한 마음과 책임을 전부 다 벗어던지라는 소리는 아니였다. 그저 그의 선함과 힘이 나 때문에 다른 이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음...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절 위해서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무거운 이야기 였다면 사과할게요."


그에게 꺼낸 말이 쌀쌀맞은 느낌이 들어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날 구해주는 건 정말 기쁘지만...클락이 나의 히어로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에게 구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클라크 켄트라는 남자를 원한다. 우리 둘 사이에 슈퍼맨이 존재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물론 클라크 켄트가 바로 슈퍼맨이긴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중점이 되는 건 싫다.


"만약 당신이..."


말이 없는 청년 덕에 어색해진 분위기는 미성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는데도 내가 구하지 못한다면, 난..."


점점 슬픔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뒤를 말하는 것 조차 버거운 듯 입을 다물었다. 상상만으로도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를 안았다.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클락, 괜찮아요. 만약에 그런 상황이 와도...다른 히어로가 있잖아요?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나도 날 지킬 수 있어요."


그러나 번지르르한 말이다. 만약 슈퍼맨에게 적의가 있는 외계인 같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상대가 온다면 나는 위험하겠지. 그치만 그 적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슈퍼맨이 나를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였다. 누구든지 구해주는 슈퍼맨을 사랑했기에 누구든지 구해주길 바랬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상관없다. 죽는 건 역시 무섭지만, 견뎌내야 하며 견딜 것이다.


클락은 대답없이 나를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숨겼다. 감싸안는 그 손은 마치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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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루, 너 방과후에 약속 없지?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같이 가자."


카오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복도를 떠났다. 옆에 있던 신지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지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교실로 몸을 옮겼다.


어제는 카지씨에게 많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울음을 다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카지씨에게 사과를 하면 그는 멋쩍스런 웃음으로 답하였다. 진정은 좀 됐니?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 목소리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었지.


"와 방금 대단했어, 실명아."

"어? 뭐가?"

"나기사군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

"고작 같이 하교하는 거 뿐이잖아...데이트는 무슨..."

"그치만 너 옛날엔 같이 하교하는 거도 눈치 봤었잖아."



친구의 말에 나는 예전 일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보니 옛날엔 그랬었지, 1학년 땐 카오루는 거의 학교에 스타라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떠돌았으니까.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앨 피하고 다녔었지.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2학년 말 까진 학교에선 말도 잘 안했으니까. 카오루가 졸업생이 될 때 즈음부터 학교에서 대화를 했었던 거 같다.



"이제 애들 눈은 신경 안쓰여?"

"아니 쓰여."

"뭐야...근데 왜 같이 가자고 했어?"

"신경이 쓰여도 오늘 꼭 해야 할 얘기가 있거든."



머리를 긁적이며 친구에게 말하면 그녀는 웃었다. 뭔진 몰라도 일이 좋게 해결 되는 거 같네. 그럼 다행이야. 진심을 담은 그 눈빛이 쑥스러웠지만 고마웠다.


"잘 안 해결 될 수도 있고. 일단 봐야 알 거 같아."

"만약 안 되면 어쩌게?"


음, 글쎄. 사실 우선 이야기만 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뒤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만약에 카오루랑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어봐도 안 된다면...뭐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를 무작정 내 곁으로 끌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것. 그거 뿐이다. 그저 겸허히 카오루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여기서 기다릴 줄은 몰랐네."

"반에 가도 네가 없었거든. 그럼 돌아갈까?"

"응."


교문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카오루와 함께 하교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의 반으로 가면 카오루는 이미 하교하고 난 뒤였다. 설마하니 날 두고 도망쳤을린 없으니,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띄는 은발이 교문 앞에 있었다. 분명 우리 반 보다 늦게 끝났을 텐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간거지?



"네가 혹시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뭐?"


그 말은 즉슨 내가 카오루를 내버려 둔 체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나보다 빠르게 학교를 나선거고. 뭐야 그게. 아무 말 없이 표정을 찌푸리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그런 표정 짓지말라고 말하였다.



"내가 너한테 먼저 말해놓고 도망가겠어? 아님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거야?"

"설마, 그런 일은 없어."


어쨋든 내가 도망갈거라고 생각한 거 잖아. 확신은 아니고 그저 일말의 가능성으로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결투장을 건넨 사람이 바보같이 그 결투를 피하겠냐고.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는 눈치챈 듯 나를 슥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과는 커녕 위로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거다. 그래 비꼬지 않는 게 어디야.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천천히 걷던 도중 우연히 어린아이들이 놀 법한 작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자주 드나들던 곳 이였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낡은 놀이기구 들이 녹슨 몸을 보이며 말해주었다. 하기사 요즘은 다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서 노니까. 이렇게 모래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놀이기구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



"여기서 자주 놀았었니?"

"옛날엔 그랬었지. 그러고보니 너랑 놀이터에 온 적이 없네."



항상 그와 놀 땐 집 안에서 였다. 카오루의 방엔 항상 놀 것이 많아 정신이 팔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비노라 그런가, 햇빛에 약해서 밖에서 모래장난을 한 적은 없었지. 머릿속을 헤쳐내며 몇 기억들을 떠올려봤지만 기껏해야 부모님들 끼리 밖에 나갈 때 빼곤 전무했다. 그래서 카오루가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비밀친구 같은 느낌이여서.



"우리 여기 앉자."

"여기가 좋은 거니?"

"옛날 생각 나서 좋아."



그를 두고 먼저 공원으로 들어가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옛날엔 여기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쳤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곤 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론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카오루랑 오다니. 이렇게 될 줄은 그 땐 꿈에도 몰랐을 거야. 


"실명아."

"응?"

"할 얘기가 뭐니?"


카오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상대를 놀릴 때 간혹 올라가던 입꼬리는 수평이였다. 나는 그를 마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하늘은 윗자락부터 어둠이 기웃거렸다.


"너한테 사과하려고."

"사과?"


저번에 내 방에서 같이 얘기 했을 때 있잖아. 카오루에게 넌지시 말하면 그는 기억하는 듯 작게 수긍의 소리를 내 뱉었다. 



"저번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 있잖아. 너한테 괜히 화내고 놀라게 한 거. 미안해."

"그건..."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 같아."

"...뭘 말이니?"

"너랑 제일 오래 지내왔던 게 나 잖아. 그래서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지. 몇 없는 너의 주변 사람이란 것에 같잖은 책임감을 느끼고 카오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믿었었다. 카오루가 나한테 특별한 만큼 나도 네게 특별한 믿음을 주고 싶었어. 



"바보같이 그렇게 믿은 결과는 완전 꽝이였지만. 나한텐 말야,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게 말이야, 잘 이해가 안갔어."



어느 동화책에 나올법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자길 껴맞추지 않는 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소모품인 것 마냥 말하는 게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되나. 너랑 내가 지내온 시간이 몇인데 그것마저 가볍게 여기는 거 같아서 싫기도 했고.


"뭐, 넌 아니라고 그랬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아는데...납득이 안갔어. 자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애한테 그게 제대로 들렸을리도 없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을 빛에 산수유 같은 눈동자가 빛을 담았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져 작게 헛 기침을 내뱉어 버렸다. 남부끄러운 자기 반성을 고해하는 이 순간조차 설렘을 느끼다니. 나는 이 애를 참 좋아하는 구나. 징하기도 하다.



"나도 내 마음을 가끔 모를때가 있는데, 남에 대해서 다 알고 이해한다고 잘못 믿고 있었어.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닌걸.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카지씨가 말했어. 저번에 시내에서 만났거든. 어색한 웃음을 그에게 내보이면 카오루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지씨 덕분에 깨달은 거 같아. 실은, 나 널 이해 못하는 게 너한테 상처주는 게 아닐까 겁먹고 있었어. 네 곁에 있어도 되나 무서웠어.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죄책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카지씨가 아니래. 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대. 우리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 안다면, 이해 못해도 괜찮은 거야."


목석같이 앉아만 있는 카오루는 반응 조차 없다. 그에게 듣고있냐는 물음을 던지면 카오루는 무겁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지금부터 카오루에게 해야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이 부끄러운 말을 도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 까.


"실명아?"

"왜."

"이제 끝이니?"

"...아니."


카오루가 보채듯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무말도 안하는 내가 참을 수가 없던 게 아닐까. 하얀 속눈썹이 천천히 두어번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입을 움직였다. 왜 쓸 데 없는 곳에서 성질이 급한 걸까. 결정적인 말이야, 언제든지 소리낼 수 있는데. 그 잠깐 망설이는 걸 기다리지도 못하다니.


"그러니까...내가 하고싶은 말은...너한테 사과도 하는 김에 화해하자는 뜻이였어. 나는 카오루 곁에 계속 있고 싶어. 솔직히 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네 곁에 내가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바싹 마른 입술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 남은 건 카오루의 대답 뿐이다. 바람 한줄기조차 가려울 만큼 내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저 입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나올까? 목울대를 두드리는 심장소리는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곁에있을지 말지는, 나는 실명이가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단다."

"그런가...그렇구나."


약간 싱거운 대답을 끝으로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그런건가. 내가 곁에 있고 싶어서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거구나. 지금껏 깊은 굴을 파면서 썩혀왔던 생각들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등줄기를 누르던 무게에 해방된 느낌이였다. 정말 단순한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있는 건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닌거야. 하고싶은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다.



"실명아."

"왜."

"얼굴이 빨갛네."

"그야...너 같으면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하는 게 안 쪽팔리겠어?"

"실명이가 많이 말썽을 피우긴 했지."

"동네 골목대장처럼 얘기하지마."

"그래도 조금은 리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거 같아."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노을마저 저 밑자락으로 내쫓은, 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춰졌다. 옅은 어둠속에 그의 얼굴은 오히려 또렷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미소에 가슴이 간지러운 게 미칠 것만 같았다.



"리린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이 갈 수록 상처 받는 게 나는 너무 안쓰러웠단다. 사람과 닿는게 두려우면서도 외로움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기에 사랑스러웠지만, 사랑했기에 그 슬픔을 멎게해주고 싶었어.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라면, 아마 카오루의 순정의 대상을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내가 카오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이 남자가 목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카오루를 고민에 빠트리고 이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쥐어잡는 그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다.



"그 애는 항상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며 상처를 받았단다. 그래서 사람들과 멀어졌지만  고독과 쓸쓸함을 잊지못해서 결국은 누군가를 원하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어. 하지만 오늘 네 얘기를 듣고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거 같아."



빙긋 올라간 입술은 심술을 부리지 않고 감사함을 표했다. 나도 카오루에 맞춰 웃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 수 없는 그지만, 이 애가 기뻐한다면 나도 기쁘다.



"너 꼭 말하는 게 신같아."

"...후후, 사실 난 천사란다."

"웃기지마. 이렇게 내숭떠는 천사가 세상에 어딨어..."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웃을 뿐이였다. 대답없는 그 모습에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뻔 했지만 실 없는 농담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순수하고 깜찍하지 못했다. 그저 그 미소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맞받아 칠 뿐이였다.



"그래, 뭐 니가 외계인이든 천사든 신이든.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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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도 마실래?"
"아니, 괜찮아."


친구를 내 쫓고 방으로 들인 카오루는 가만히 바닥에 앉아있었다.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워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짧은 거절 뿐이였다.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무거운 공기는 변함없이 나를 짓눌렀다. 카오루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꺼낼 지 긴장하면,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즘 실명이가 이상해서."
"난 맨날 이상하다며."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야! 이럴 땐 아니라고 해야지!"
"...요즘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니?"


핵심을 찌르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민이 있냐고 묻는 게 아니라, 아예 고민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구나. 대답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실명이랑 대화하고 난 뒤였지. 태도가 이상해진게."
"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게 눈에 보이던 걸. 날 볼때마다 괴로워 보이던데."

카오루는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괴로웠다고? 확실히 카오루와 얘기할 때마다,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결코 괴롭지는 않았다. 카오루는 내 표정을 괴로워 보인다고 생각한 걸까? 


"괴롭다니...그런 건 아닌데."
"무언가 참고 있었다는 건 맞구나."


카오루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아버렸다. 그것도 카오루가 지적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테지. 하여간 쓸 데 없이 눈치만 좋아가지고. 무겁게 입을 다물었지만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입술이 말라갔다. 물론 나도 그에게 제대로 내 감정들을 얘기하곤 싶었다. 이렇게 우물쭈물 해 하는 것도, 카오루를 보면서 자꾸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카오루와 대화할 수록 그가 나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카오루가 껄끄러웠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를 알아갈 수록 애정이 식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불안했다. 카오루의 마음을 들을 수록 이 애정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싶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그의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끝에 다다르고, 내가 그를 계 좋아할 지 결정하고 싶었다.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은 하지 못했고 답도 얻지 못했다. 서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른 체 이 사랑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실명, 예전에 네가 했던 말 기억하니?"
"무슨..."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대전시합 전에 일을 말하는 건가. 카오루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카오루가 멀게 느껴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 나기사 카오루는 알아갈 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물론 카오루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전해야 된다고. 감정이란 건 안 보이는 거니까 더욱 보여줘야 되는 거라고 나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고 싶은 마음의 경우다. 나는 카오루에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친구가, 자신을 꺼려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게 실망을 할까? 그건 무섭다.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 또 만약, 카오루가 내 마음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내가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면 어떡하지? 무기력하게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실명이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친구로써...그러니까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려줬으면 좋겠단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표정이였다. 그건 맞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보낸 카오루를 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 안에 깊숙히 숨어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모를거야.
그리고 우정도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카오루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카오루가 듣고 싶은 말은 바로 그 가능성에 대한 것이였다.

나를 직시하는 그 눈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망설임과 함께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테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곤 그에게 말했다.


"꼭 듣고싶어?"
"내 말에 거짓은 없어."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근데...그게 너한테 말하기 너무 무서워."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오루는 어루듯 내게 물었다. 무얼 말이니? 그 말에 나는 빠르게 대답한다.

"내가 말하면 우리 관계가 다 부숴질 거 같아."

그래서 망설여지고 더욱이 숨기고 싶다. 카오루와 계속 지내기 위해선 이 말을 꼭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일까. 그저 모르는 것 마냥 영원히 저 밑바닥 속으로 숨겨버리고 싶은데, 마치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실명아, 그럴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나인데. 충분히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 보다 더욱 허탈했다. 남의 마음이란 건 직접 마주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네가 무서웠어.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위해서 죽어도 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갔거든.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게 무섭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정말 죽어도 되는 거야? 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너무 미웠어. 넌 죽으면 끝이지만 나는 아니잖아. 네 주변 사람들이 남겨졌을 때 생각해 봤어? 내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 안했어?"


너한테는 내가 네 사랑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말 같은 존재였냐고. 그렇게 끝을 내면 카오루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 말은 진심일 것이다.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마음 안 으로 들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게 사람을 쉽게 버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럴거잖아. 만약 네 목숨을 버려야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난 말야, 네 그런 점이 무서웠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그 점이 사람같지가 않았어. 아무 욕망도 없는 거 같아서 겁이 났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처음 보는 사람 같았어."

이런 날 넌 이해할 수 있어?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실명아."
"어, 카지씨!"


오랜만에 번잡한 번화가로 나오면 낯 익은 얼굴과 조우했다. 요즘들어 번화가에 나오는 카지씨랑 마주치게 되는 거 같다. 솔직히 번화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건 이번을 포함해서 고작 두번밖에 안되지만. 카지씨는 외국에 자주 나갔다 오는 사람이라 워낙 만나기 힘들어서, 만날 때마다 인상이 깊었다.


"혼자 여기서 뭐하니? 쇼핑이라도 하려고?"
"책 좀 사려구요. 카지씨는요? 언제 귀국한거에요? 오늘은 아스카하고 같이 안 왔네요?"
"실명아...한개씩 물어보렴."


그나저나 아스카하고는 언제 친해진 거니? 카지씨가 놀란 듯 물어보면 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여자애들은 원래 금방 친해지는 거라고 대답했다. 카지씨는 그저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실명이 만났는 데 어디가서 차라도 마실래? 뭐, 한창 좋을 여자애가 아저씨한테 데이트 신청 받으면 별로일려나?"
"중학생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아저씨는 좀 위험하지만 카지씨는 특별히 봐줄게요."
"아스카를 만나서 실명이가 좀 차가워졌나...?"
"카지씨! 우리 저기 가요!"


카지씨를 기운좋게 끌고 근처의 분위기 좋아보이는 까페로 향했다. 언젠가 친구와 인테리어도 멋지고 커피도 맛있을 거 같지만 비싸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함께 낙심한 곳이였다. 설마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이야. 역시 남의 돈으로는 뭐든 지 할 수 있구나.


"실명이랑 이렇게 둘이서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니?"
"저야 뭐 쌩쌩하죠. 카지씨는요? 원래 방학마다 일본에 오시잖아요. 왜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아, 실은 외국에 나가지 않았단다. 잠깐 회사 일 때문에 말이야. 뭐 카오루 일도 있고."
"그랬구나."
"실명아."


카지씨는 평소에 거들먹 거리는 목소리는 생각조차 안 들정도로 찬찬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언가 얘기하려는 그 눈은 장난스러운 느낌은 전혀 감돌고 있지 않았다. 일하는 카지씨의 모습은 이런 모습일려나. 저것은 명백히 진지한 어른의 눈동자였다.


"카오루랑 싸웠니?"
"카지씨, 저랑 걔랑 싸울 거 같아요? 제가 삐지고 걔는 무시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무슨일은 있었구나. 아, 요즘들어 카오루가 이상한 거 같아서."


곤란해 하며 빨대를 씹는 내게 카지씨는 손을 뻗더니 빨대를 가져가 버렸다. 안 좋은 버릇이라며 살짝 웃는 그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이상하다고 해야 될까...그 애가 그렇게 말하더구나. 역시 사람 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그, 그래요?"
"실명이는 카오루가 남들하고 조금 다른 건 알고 있었지?"


마치 특이한 반 친구를 이해시키려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카지씨는 말했다. 남들과 다른 건 확실하지. 그 차이가 큰지 작은 지는 잘 모르고 애초에 그 차이를 구별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앤 사람 마음을 잘 몰라. 예전부터 그랬거든.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 느낌이랄까? 어릴적에, 그 애 부모님이 카오루를 걱정해서 병원에 데려가셨단다. 남들 보다 공감능력이 좀 떨어진다더구나."


만화같은 표현을 하시네.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다니. 그나저나 카오루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이건 정말 처음듣는 소리였다. 다만 크게 놀라지 않는 이유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그 앨 병원에 데려가신 이유가 납득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잘 지내지만 예전엔 큰일이였어. 사람의 목숨과 벌레의 목숨도 동일시하고, 식욕을 느끼거나 수면욕을 느끼는 걸 기분나빠하고 말이야. 마치 사람으로 지내는 게 어색한 거 처럼. 그래서 친구도 없었어."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었지. 어릴 적 카오루 곁엔 아무도 없었고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의 행동을 헤아리는 사람도 없이, 그 앤 철저한 고독 속에서 지내왔어.


"카지씨, 마치 카오루가 된 것 마냥 잘 아시네요."
"거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무엇보다 그 애가 더 이상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마치 포기한 것 처럼 주변에 맞춰가더군."


어느새 음료가 나온 듯 점원이 우리들에게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카지씨는 찻잔을 들어 이내 한모금 마셨다. 헤이즐넛 향이 은은하게 났다.


"카지씨."
"응?"
"근데 왜 카오루의 과거를 얘기하는 거에요?"


카지씨는 카오루와 있었던 일에 대해, 피하는 내게 나기사 카오루에 대해서 얘기하였다. 흡사 고기를 잡기 위해 조금씩 먹이를 깔아놓는 사냥꾼 같았다.  


"실명이가 카오루랑 있었던 일이 대충 뭐였는 지 알 거 같으니까."
"...정말요?"
"실명아, 난 어릴적에 카오루를 보면서 진심으로 사람이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렇지 않니?"


정확하게 내 속을 꿰뚫어 본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하지 않아도 카지씨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순간 만큼 카지씨와 나는 같은 생각을 공유한 일심동체였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느끼곤 하지만. 적어도 이질감은 많이 없어졌어. 나는 그게 실명이의 영향이라고 생각해?"
"저요?"
"카오루는 실명이랑 지내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카지씨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 좀 기분 나빴을려나? 실험쥐처럼 말해서. 나는 카지씨를 향해 고개를 가로로 가로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카오루와 처음으로 속 내를 얘기했던 그 날에 바로 그와 헤어졌겠지. 카오루가 나를 실험체로 삼았다 해도 싫지 않았다. 지금 카오루가 내게 느끼는 건 틀림없이 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쁠테니까. 이유는 무엇이든 그것이 나와 카오루가 만나게 된 계기이다.


"앞으로 실명이는 카오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겠지. 사람과 신이 다른 점이 뭔 줄 아니? 바로 영향이야.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받는단다. 카오루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이 되가는 거라고 생각해. 물론 실명이도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실명이가 카오루랑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카오루가 내게 영향을 받고, 그 애도 내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사람이 되간다. 흡사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이처럼. 카오루를 사람이 아니라는 그 결론이 조금 꺼려졌지만 카지씨의 말은 내 가슴을 울렸다. 카오루와 그런 사이가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뭐든지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애를 미어내고 말았다. 카오루에게 진심을 터 놓은 날, 나는 카오루에게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했고 그 애는 말 없이 방을 나섰지. 아직까지도 카오루가 떠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 지 신경이 쓰인다. 그 애를 한 번 거절한 내가 카오루에게 다시 다가가도 될까?


"그치만...내가 카오루 옆에 있어도 될까요? 무얼 하든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할 거 같아요. 그러면 카오루가 상처받잖아요. 그건 싫어요."


카지씨의 깊은 말에 저도 모르게 그 속내를 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뜨겁게 눈이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지씨는 내 눈가에 손을 갖다대더니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카지씨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실명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니야.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카오루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은 나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 애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애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곁에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왜 이렇게 간단한 답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얽매였던 것일까? 그의 곁에 오래 있었다는 자부심으로 괜한 책망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였을까. 자만이 화를 부른다는 말은 아마 이런 말일지도 모른다.

히잉, 거리면서 훌쩍이는 나를 보며 카지씨는 그제서야 당황해 했다. 주변 사람들이 카지씨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카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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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내가 카오루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은 아니였다. 평소처럼 만나면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며평소와 다름 없이 그를 대하였다. 하지만 꺼림직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카오루와 평범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이따금씩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카오루를 보내고 난 뒤, 혼자남은 방에서 나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에서 카오루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봤다.
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난 죽어도 괜찮아.

떠올릴 수록 카오루의 말은 나를 옭아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범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쉽게 죽어도 좋다는 말을 떠올리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 나를 짓누른 것은 카오루의 알 수 없는 말 보다 그에게 저도 모르게 배신감이 든 자신이였다.

찰나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배신감을 느낀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을 씹어 넘기려고 해도, 마치 알사탕이 목에 걸리는 것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죽어도 된다니, 그 애 만을 위해 살아도 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카오루와 내가 보내왔던 추억은 그의 아름다운 사랑에 한번에 꺾일 만큼 연약한 것이였을까? 그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을 다짐할 때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걸까?
나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친구들도.
그는 떠올리지 않았던 걸까.

질투를 느낀 건 아니였다. 카오루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있는 사람에 대해서. 왜냐하면 난 그 아이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날 위해서 죽겠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저 나기사 카오루의 결정이 너무 미웠다. 모든 것을 두고 사랑을 위해서 떠난다니.
그게 뭐야.

카오루가 어째서 동화속에서 나올 것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걱정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였다.
무서움, 꺼림직함. 도저히 사람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을 꺼내는 그가 기분나빴다.
물론 다들 사랑에 빠지면, 널 위해서 죽을 수 있어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마치 자신의 존재자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것 마냥 말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기분 나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거북해 했다.

그런 마음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한낱 호감에 도취되어 있던 거고, 그 감정을 카오루에게 강요한 건 아닐까.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만으로 머릿속이 가득찬 자신이 너무 싫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정말 카오루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을까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움을 느낀다니, 그 헌신적인 사랑에 걱정이 아닌 배신감을 느낀다니.
어느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런 감정을 가지겠는가.


하루종일, 아니 그 일 직후 계속 나를 덮치는 그 생각을 마치 나를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사랑이냐고.
그리고 제대로 답할 수도 없었다.


"실명아."
"왜?"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수업중에 왜이렇게 눈쌀을 찌푸려? 무슨 일 있었어?"

선생님이 네가 자꾸 자기 노려본다고 무섭데. 친구가 우스운 농담을 던지며 넌지시 내게 물어봤다. 남의 방을 마치 자기 집 거실마냥 퍼질러져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카오루 앞에서는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그와 눈이 안 마주치게 되면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려지는 구나.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친구는 말을 가로채 버렸다.

"너 고민있지. 나기사군?"
"아 무슨 맨날 걔 얘기야, 그런거 아,"
"나기사군이랑 뭔 일 있었어? 요즘 순탄한 거 같은데...?"
"나기사 카오루 얘기 아니라고."
"아니든 어쨋든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하네."

친구는 입술을 슬쩍 올리며 말했다. 꼭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낸 문제를 맞춘 게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남자 아이 같았다.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귀신같이 그런 건 잘 맞추네..."
"니가 고민이 없었으면 바로 고민 없다고 했겠지. 그래서 뭔데?"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하는 친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마쉬고는 나와 카오루 사이에 있었던 일을 A와 B라고 칭하며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히익, 나기사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왜 거기서 나기사 카오루가 나오는 건데?!"
"아무리봐도 A랑 B는 너랑 나기사군 얘기잖아...차라리 딴 친구 이름을 거론해라."

하긴 나 같았어도, 친구와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 라는 건 대부분 자기 이야기 라는 거니까. 그게 설령 A나 B라는 알파벳으로 바뀌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요즘 내 고민은 카오루에 대한 것들이였으니까.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인 거지.

"음...목숨을 다 바쳐 사랑한다라...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해주면 기쁘긴 하지만, 진짜로 그러면 끔찍할 거 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슬픈데, 나 때문에 죽는다니. 나 같으면 살기 싫겠다."
"응...나도 그래..."
"그리고 그거 좀 자기만족 아니야? 남겨진 사람은 어쩌려구. 막말로 죽으면 자기는 끝이지,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니잖아."
"야, 그건 말이 너무 심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난 좀 ...아닌 거 같아."

친구는 고개를 가로 지으며 내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도 친구와 비슷했다. 친구처럼 그건 사랑이 아닌 거 같아,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랑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답해야 할 말은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겠지.

"무서웠어."
"무서웠다고?"
"그냥...맨날 옆에서 봤던 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고, 왠지 꺼림직해서 무서웠어......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싫고...제일 무서운 건 내가 걔한테 배신감을 느꼈어."
"배신감?"
"......나나 가족들 두고 어쩜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할 수 있는거냐고...배신감이 들었어."

친구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다물곤 입속으로 생각하는 소리를 내었다. "음......" 점점 길어지는 소리에 왠지 모르게 초조함이 들었다.

"왜, 왜?"
"그래서 네 고민이 뭔데?"
"뭐?"
"나기사군한테 배신감이 들든 뭐든, 너가 계속 골치아파 했던 게 뭔데?"
"그, 그게......"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서운 말이였다. 만약에 꺼냈을 때, 친구가 단호하게 내 고민에 부정을 던지면 더 이상 카오루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덕적으로 안되는 짓을 해버린 스스로와 대면할 것 같았다.

"답답하게 하지말고 빨리 말해봐. 말해야 알지."
"그, 그게.........카오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진지하게 꺼낸 얘기에 너무 철 없게 그런 생각을 한게 믿기지가 않았어...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내가 진짜 카오루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꺼려하다니. 그게 진짜 애정일까?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가벼운 호감이 아닐까. 나는 카오루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친구는 그야 당연히 그딴 소리를 내뱉는 데! 라며 소리를 쳤지만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네 말은 뭔 진 잘 알겠는데...음, 일단 나기사군이 사람 식겁하게 할 만한 말을 한 건 맞는 거 같아. 나도 뭐지? 싶었다니까."
"응..."
"그러니까 너 말은 나기사군의 말에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잊어버릴 정도로 겁을 먹었다는 거지? 그리고 고작 그런걸로 사랑이 식은 거 같아서 그런 자신이 싫은 거고."
"아니, 식은 건 아니고..."
"식을만 하지. 보통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나기사군 좀...어디 아픈거 아니야? 너무 자기애가 없잖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저도 모르게 친구에게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욱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 친구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미안하다 말하면, 친구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이 식은 건 아닌 거 같네."
"미안하다니까..."
"어쨋든 순간 사랑이 식을 만큼 걔가 기분 나빴다는 거 맞잖아. 친한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 무섭긴 하지. 간단하게 생각해, 연인사이에서도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 애정이 식어서 헤어지는 사람도 있잖아.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한 순간에 그러는 경우가 있는 거라구. 행동 하나에도 그러는 데 하물며 가치관이 다르면...그럴 만 하지."
"가치관?"
"넌 나기사군 좋아할 때 그렇게 목 맬 수 있어? 아님 나기사군이 너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래?"
"...아니."

카오루를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그가 나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있어주길 바라진 않는다. 나 또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리고 카오루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그냥 가치관의 문제인 걸까?

"배신감이야...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 데 음...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랑이란게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신뢰가 바탕이잖아. 또 바치는 게 아니라 주고 받는 거고. 그 신뢰를 주고 받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런데 네 입장에선 나기사군이 그 신뢰를 깨게 된 셈이고. 음, 이렇게 생각하니 니가 조금 이해 된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뭐 어때, 무서워 하거든 배신감을 느끼든. 그리고 애정이 식어도 뭐 어때. 거기서 끝날 인연이면 인연인 거지.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잖아. 나기사군한테 니 인생 평생 바칠 거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정을 변호해주는 저 말이 맞다고 믿고 싶었다. 그치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맹목적으로 변하는데, 나는 카오루에게 그 맹목적인 모습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실명아."
"어? 엄마?"
"실명이 친구 아직 있니? 카오루군이 왔는데..."

과자를 깨작이던 나는 문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 먹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카오루가 우리집에 오는 건 볼 일이 있어서, 거실까지 오는 게 전부였는데. 왜 내 방까지 직접 온 거지? 초코가 묻힌 과자를 씹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입안에는 쓴맛이 가득했다.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뭐 일단...나기사군이랑 얘기해봐. 내 생각엔 나기사군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 알아야 니가 걜 좀 이해할 거 같아."

친구는 방문을 열더니, 카오루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카오루를 문 앞에 내버려둔 엄마는 친구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고. 나기사 카오루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려고 왔어. 들어가도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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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그 인형들."
"친구한테 받았어."

인형이 내게 안겨있는지 내가 안고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솜뭉치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카오루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창황한 얼굴은 꽤나 기묘했다. 동아리 대회 후, 카오루는 그 동안 미루두었던 공부를 하는 지 학교 쉬는 시간에도 참고서만 봤으니까.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바닥에 뒹구는 인형을 같은 종끼리 모아 정리하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면 어느새 놀란가슴이 진정되었는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는 또르르 내 손을 따르고 있었다. 무릎을 꿇어 그가 토끼인형을 들어올렸다. 축 쳐진 귀를 만지작 거리던 카오루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이......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대회같은 걸 했었지."
"어, 나기사가 그걸 알아?"
"신지군한테 들은거야, 오늘 친구들하고 같이 간다고 했었는데...흐음, 실명이도 참가했니?"
"나 말고 친구가. 걔가 우승했어. 자긴 인형 싫다고 나한테 줬는데...너무 많네 이거...나기사, 주변에 여자애들 많아?"
"그건 왜? 글쎄, 별로."
"나눠줄려고 그랬지...그래? 의외네. 잘생겼으니까 당연히 많을 줄 알았는데......아, 이건 내꺼."

토끼와 고양이 밑에 깔려있는 부엉이 인형을 꺼내 품에 꼭 안았다. 이건 뽑느라 무진장 고생했으니까 상관없겠지. 친구에게 이 인형을 뽑아 달라고 떼를 쓰며 돈을 갖다바친게 떠오른다. 이래서 인형뽑기는 하는 게 아닌데. 초등학교때도 일주일 용돈을 인형뽑기에 하루만에 써버려서 엄청 혼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땐 진짜 아빠한테 죽는 줄 알았지. 지금은 다행히 친구가 한번에 뽑아서 본전 뽑았지만.

"부원 애들한테 나눠줄까? 음...그래도 남겠네."
"살명아, 남자애들한테도 줄 생각이야?"
"귀여운 걸 좋아하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나기사군, 남녀차별하면 안 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음...근데 여자애들 중에도 별로 안 좋아할 애들 있겠지? 어림잡아 반 애들하고 동아리 애들 세어보면......여섯? 일곱? 너무 적은데..."
"친구가 너무 적네, 실명이는."
"니가 인기가 넘쳐 흐르는 거겠지!"


너 보단 친구 많거든! 쉬는시간에도 신지군이 아니면 별로 남들과 떠들지 않는 카오루를 떠올렸지만, 이내 그말은 목을 넘기지 못했다. 나기사 카오루가 친구를 사귀지 않는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였다.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 라고 저번에 내게 진지하게 말했으니까. 학교생활도 잘하고, 신지군하고도 잘 지내는 걸 보면 그 말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묘하게 사람에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면 납득이 가긴했다. 예전부터 철벽치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때 카오루는 '내가 그를 어떻게 행복으로 끌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때 그 에게 대화를 해보라고 대답했지. 카오루는 그 애랑 제대로 얘기를 나눴을 까?
그리고 그 애는 도대체 누구일까? 말 하는 걸 보면 신지군인 거 같긴 하지만, 신지군이랑 카오루는 지금도 행복해 보인다. 그럼 신지군은 아닌 거 같고. 어떤 사람이지, 카오루랑 무슨 사이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카오루에게 무참히 묻힌 고백아닌 고백의 충격에 그제서야 카오루와 나눴던 그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그 사람이 카오루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실명? 무슨 생각해?" 

잠자코 인형을 든 체로 바닥을 쳐다보는 것이 별 일인지 무슨일이냐며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든 듯 인형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물어볼까 고민하던 때에 말을 붙이다니.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저기, 있잖아."
"왜 그러니? 답지 않게 운을 띄고."
"나는 뭐 진지하면 안 돼?"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뗀 내게 카오루는 시건방진 소리를 내던졌다. 약간의 울컥함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진정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질까봐 말을 서슴는 나를 다독이는 것이겠지.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놀리곤 하지만, 이 정도의 상냥함은 있다.

"나랑 그 때 했던 얘기 기억나?"
".........어떤 얘기?"
"그게......"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무겁게 입술을 움직인 카오루가 내게 물었다. 카오루에게 그와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었을 때의 일을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K고등학교에 가려고 한 이유. 나기사 카오루가 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했던 말.
머릿속에서 그 일이 지나치자 마자, 나는 카오루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 녀석이 모르는 척 넘어가고 하는 게 맞다면, 적어도 말끔하게 그를 잊을 수 있게 거절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거기다 아주 만약의, 기적이 일어나서, 카오루가 자기도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감정을 직접 말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로,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지만 지금 카오루에게 물어야 할 말은 따로 있을 거다. 카오루도 사람이니까, 이따금씩 고민을 끌어 안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때 서글퍼 보였던 표정이 카오루가 그 사람에 대해 정말로 애를 태우고 있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친구로써,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사람으로써 그가 그 고민을 잘 풀어나가고 있는 지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말이야, 나 걸레물 뒤집어쓰고 했을 때."
"아...그 때 말이니?"
"너 그 때 나한테 같이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얘기 해봤어?"
"응. 해봤어."
"진짜? 그래서 그 애 뭐라고 했어?"

카오루는 생각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안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나 싶어 그러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행복하다고...아니, 행복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불행한 거 같진 않다고 했어."
"그럼 됐지 뭐. 사는 게 우울하지 않으면 된 거아니야?"
"...실명.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원래 행복이란 게 그런 거 잖아.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거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한 거고.
어차피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파지는 거니까...제일 좋은 게 행복이고 뭐고 생각없이 그냥 잘 사는 거지.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거 보단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카오루는 왜 그,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사람을 마치 불행하다는 것 마냥 말하는 걸까? 신지군은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았는데. 신지군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보통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니까. 나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돼, 이렇게 말하는 건 연인이 아닌 이상 마치 불행한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같다.

"카오루...있잖아, 너 그 애랑 사귀는 사이야?"
"...실명, 아무리 네가 사춘기 소녀라고 하지만 너무 연애론적인 사고방식 아니니?"
"나도 사랑이 굳이 연애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그냥 단지, 네가 너무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서. 아니면 너, 그 애를 불행하다고 생각해?"
"불행...? 그렇진 않아. 그저 단지...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사람의 마음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던 카오루는 그 때와 똑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카오루의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였다. 자기 존재가 사라져도 상관 없다는 것 마냥, 카오루는 본심을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카오루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왜 질투를 하지 않는 지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질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카오루는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해 하길 바라는 것 뿐이다. 나 처럼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지만 연애감정은 아니다. 카오루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미래에 자기는 없다. 없어도 상관이 없다. 나기사 카오루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가? 뭐지 이 아가페적인 사랑은. 사랑에 굶주린 애정결핍자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들으면 소름끼쳐할 감정이다. 받지 않고 카오루의 마음을 두 귀로 듣고 있는 나도 그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카오루는 그 앨 사랑하지만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럼 카오루는 그 애가 혼자서만 행복해져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
"너가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아?"
"난 죽어도 괜찮아."

설사 이 몸이 부숴진다고 해도, 그 애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야. 카오루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웃는 그 표정이, 더욱이 황홀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카오루가 왠지 모르게 무서워 졌다. 자길 내다버리고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 붓는 건, 이야기 속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건 이야기 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주 희생의 아이콘으로 나오곤 하지만, 카오루의 희생은 무언가 달랐다. 부모의 사랑이라기 보단, 오히려 신 같았다. 흔히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말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은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고 만다. 너무나도 다르니까. 신의 사랑은 인간을 독에 빠트리고 만다. 인간과 신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오루와 시선이 맞으면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 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심...이야?"
"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 정말이야."

그게 뭐야. 보통 사람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다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는 미래를 생각하잖아?
나는 어릴적 부터 지내왔던 친구에게 뭔지모를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런 거 단순히 자기만족이잖아? 라고 몰아세우고 싶었고, 그의 사랑이 경이로운 탓에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아니,  카오루와 있는 이 상황이 무서워 졌다. 

"...실명? 왜 그러니?"
"어? 아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프니?"
"아니야, 안 아파. 괜찮아."

방금전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카오루가,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 아이와 지낸 세월을 오래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의 이런면은 처음 보는 것이였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오랜 지인에게 이런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일을 겪곤 하지만. 그건 보통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겠지. 감정적으로 그 면을 공감한다는 이해가 아니라,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이해의 것일 거다. 하지만 카오루의 행동은 내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오루는 절대 아가페적인 자신의 사랑에 도취된 것도 아니였고, 그걸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였다. 그저 자기 안에 그런 사랑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바치기만 하는 사랑. 사람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나기사 카오루가 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실명? 얼굴이 새하얘. 속 안 좋은 거 아니니?"
"괜찮,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다독이는 듯 카오루에게 연신 탈이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듯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갖다대곤 안색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열이없는 손은,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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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만 있으면 2학년애들 수학여행가겠네...부럽다."
"우리도 작년에 갔잖아."
"학교 안가서 좋겠다~..." 


이따금씩 음악수업 때문에 밑층으로 내려가면 2학년 소식이 들려온다. 요즘은 수학여행이 얼마남지 않아 복도에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그래봤자 교토에 가는거지만 여행이란 왠지 모르게 사람을 설레게 한다. 촌스럽게 장소가 그 모양이냐며 입술을 삐죽이던 아이들도 버스에 타면 웃음꽃이 활짝핀다. 나도 그랬었고. 갔다오면 평범한 여행이고 그닥 추억거리도 없지만 여행 순간에는 잘 즐기고 있단말이야, 참.

"여행 갔다오면 축제 준비 때문에 시끌벅적 하겠네."
"수험생의 좋은 점은 축제에 참가 안해도 된다는 거지. 얼마나 안 귀찮고 좋아?"
"너 그러면서 찻집했을 때 엄청 열심히 했잖아."
"그야...농땡이 피우면 안되니까.'

아무리 내가 나태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남한테 욕먹으면서 까지 게으름을 부릴 생각은 없다고. 설득력 없는 내 단언에 친구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어련하시겠다고 말했다. 넌 다행인게 배짱이여도 새가슴이라서 남한테 민폐는 못 끼치지. 네 보기좋은 장점은 어쩔 수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사람을 칭찬하는 건지 헐뜯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곰곰히 듣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결국 제대로 반항은 못하는 소심한 게으름뱅이라는 거 아냐.

"칭찬할 건지 욕할 건지 한가지만 하지."
"애매한 칭찬이야. 설마 욕을 하겠어?"
"거하게 욕 한 사발 들이킨거 같은데."
"어? 저기 나기사군이다."

말 돌리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친구에게 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도 친구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복도에서 이카리 신지군과 즐겁게 얘길 나누고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이야, 나기사군 저런표정도 짓는구나."
"그러게."
"우리 실명이는 평생 못 볼 얼굴이지."
"내 팔자가 그렇지. 야, 매점이나 가자."
"뭐야, 너 연적이 저러고 있는거 가만 냅둘 셈이니?"
"이카리군이랑 나랑 싸워도 이백퍼센트 내가 진다."
"패기없긴...얘, 가서 본처 티 좀 내봐. 너 소꿉친구잖아."
"본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그렇게 나기사군 앞에서 끙끙 앓아봤자 누가 알아줘. 친구는 가만히 있는 나를 나무라며 한 소리 내뱉었다. 누가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거야. 내가 요즘 얼마나 카오루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친구의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 무심한 소녀에게 뜨거운 손바닥을 날렸다. 내 불타는 열정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고 친구는 맞은 등이 아픈 듯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실명, 뭐하니?"
"엇. 카오루...아, 안녕."
"친구를 때리다니, 실명이는 역시 폭력적이구나."
"역시라니, 보기보다겠지."
"내가봐도 너 맨날 나만 때리는거 같아. 나기사군 말이 맞아."
"방금까지 네가 내 욕했잖아."
"실명, 게임 좀 줄이렴. 매일 몬스터 헌터같은거만 하니까 그런거야."
"왜 게임 탓인데!"
"신지군, 이 쪽은 내 소꿉친구야."
"아, 안녕하세요."

약간 말을 더듬으며 그 신지군이 내게 수줍게 인사하였다. 이카리 신지라고 합니다. 앳 된 그 목소리가 귀여운 소년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먹힐 거 같았다. 카오루는 이런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는 구나. 약간 어색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맞인사 하였다. 깍듯한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이카리군은 멋쩍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얘기 하고 있었니?"
"그냥 수학여행이랑 축제. 아 이카리군은 2학년이라 둘다 참가하지? 축제 때 뭐해?"
"예? 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요. 수학여행 끝나고 바로 정할거 같아요."
"작년에 우리반이 일찍 정한거 뿐이야. 원랜 다 저 맘때쯤 정할 걸."

아 그렇구나. 친구의 말을 들으며 작년의 축제기간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우리반만 여행 전부터 테마를 정했구나. 딱히 반에 학생회 임원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아이들도 그닥 의욕을 보이지 않아서 계획을 빨리 짜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까딱하면 암막 뺏기는 거 부터 테마까지 다른 반이 다 차지할 지도 모르고. 작년에 반장이 얼마나 고생했었을 지를 떠올리자, 아까까지 귀찮다고 내뱉었던 말을 주워담고 싶어졌다.

"그래도 훗카이도로 수학여행 가지? 부럽다. 나도 게먹고 싶어."
"아, 이번엔 게 요리 코스를 안 들어가서 그건 못 먹는 거 같아요."
"아냐, 이카리군. 우리 때도 그건 없었어."
"맞아. 그 때 같은 방에 있었던 애들끼리 뭉쳐서 몰래 나가서 산 다음에 택배 부친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카오루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한심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카오루가 모르는 게 있다면, 수학여행을 마치고 온 다음 날 그를 집으로 초대해 내가 사온 게를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너 분명히 맛있다고 했거든. 모르고 먹었을 테지만.

"신지군, 가자."
"어? 으, 응. 저, 안녕히 계세요."

카오루는 이내 이카리군의 어깨를 끌어안곤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태와 일탈의 대표인 내가 성실하고 순수한 이카리군을 물들일 까봐 걱정하는 듯 보였다. 다소 과장된 감이 있지만 날 쳐다보는 눈이 더 이상 신지군에게 그런 얘긴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내가 한심하다는 것도 있고. 이 인간, 이카리군이 사춘기의 일탈을 저지르면 집에가서 혼자 울지나 모르겠네. 아니, 신지군에게 푹 빠져 있으니까 그러고도 남을 거다.

그리고 모든 수업이 끝난 방과후. 하교길에 오르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자신또한 볼일을 마친 듯 집에 가려는 카오루와 마주쳤다. 같이 집에 가자며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내가 신발을 다 신을 때 까지 카오루는 기다려 주었다. 애초에 옆집이니까 가는 길도 똑같아서, 결국 같이 돌아가는 꼴이 되지만. 가방을 챙겨 걸어가는 내 옆에 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보폭을 맞춰 걸었다.


"카오루 너 정말 볼 때마다 팔불출인거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니?"
"신지군 데리고 피신하는 거 말야. 누가 보면 내가 양아친 줄 알거 같애."
"양아치...는 아니더라도, 신지군에게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칠 거같진 않아, 실명이는"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눈에 힘을 주어 그에게 뜻을 되물었지만 새침한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가 확실히 게으르고 노는 걸 좋아해도 지탄받을 만큼 불 성실한 건 아닌데. 아니 것보다 카오루가 지나치게 완벽한 거 아닐까. 보통 내가 정상이잖아.

"아, 그러고보니 아까 신지군이. 카오루군한테 얘기 들었어요, 라고 말했잖아."
"응?"
"무슨 얘기 한거야?"
".........별로, 아무 얘기 안했어."
"안했으면 그런말은 보통 안하지 않나?"

어째서인지 카오루는 정적을 띄고는 짧은 답변은 하였다. 지레 찔리는 눈치인가 싶지만, 그랬다간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며 놀려대겠지. 저건 잘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아니란 뜻이다.

"카오루가 먼저 내 얘길 꺼냈을 거 같진 않고."
"...토우지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널 알고 있는 지 아이들 앞에서 너에 대해서 얘기하길래 잠깐 응해준 거 뿐이야."

흐음,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 말을 아낀게 맞구나. 예전부터 카오루와 오랜 인연으로 이래저래 주변에 관심을 받던지라 서로 알고 지낸 사이를 밝히는 건 사실 꺼름직한 일이였다. 심하게 눈길을 받은 건 아니지만 적잖이 성격 안 좋은 여자아이들에게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고. 대범치 못한 성격에 홀로 그걸 신경 쓰고 있으면 귀신같이 카오루는 그걸 알아내고는 무슨 수를 썼는 진 몰라도 소문을 잠재웠다. 생각해보니 얘 정치가가 되도 잘 할거 같은데. 뭐, 예전에 내가 좀 학을 떼다 보니 카오루도 가능하면 나에 대해서 얘기를 꺼낸 거 같지 않다. 토우지라는 애는 귀가 참 밝군. 그나저나 그럼 신지군한테도 내 얘기를 안 꺼낸 건가. 하기사 그 애한테 다짜고짜 내 얘길 꺼낼 성격은 아니지만.


"그럼 그 때 신지군도 날 알게 된거야?"
"응, 그렇지."
"그렇구나. 그래서, 그 때 뭐라고 했는데?"
"........."
"응?"
"실명...끈질기네. 아무 소리 안했다니까."
"이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무말도 안했지만, 지금부터 해주길 바란다면 신지군에게 이것저것 말해줄게. 확실히 신지군이라면 여러가지 말할 맘은 드네."
"앗, 잠깐만. 어차피 이상한 소리 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저 실명의 행동을 말하는 거 뿐이야."
"악의 가득찬 장난이랑 몰아세우는 게 무슨 본연의 행동이냐!"


성을 내며 그에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건 시침을 뚝 대답 뿐이였다. "내가 언제 그랬니?" 진짜 정치하면 성공할 놈이라니까, 얘. 어쩜 연기까지 이렇게 잘할 수가 있는 건지. 새초롬, 힐끗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내가 꽤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아무말도 안 해."
"그 신지군이 말해달라고 하면 당장 말할거면서, 무슨."
"신지군이라도 말 안해."
"...진짜?"
"응."


솔직히 신지군이라면 내 얘길 해도 괜찮은데. 남 입에서 오르락 거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 애라면 날 유흥거리로 씹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 질리게 군 것 가지고 또 몰아세우는 카오루의 꼴을 보니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하지만 카오루의 대답을 들으니 아까까지 오르던 화가 가라 앉았다. 조금 감동도 받고. 카오루 성격상 내 얘길 안 꺼내는 배려심이 있는 건 알지만 자기가 죽고 못사는 신지 군 앞에서도 날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였다. 순간이나마 신지군보다 우위에 선 기분이 든 것이 기쁘다.


"...왜 이럴 때만 배려심이 넘치고 그런대."
"별로 실명을 위한 일이 아닌걸?"
"...어, 뭐?"

따뜻한 감동을 느끼고 있던 와중 카오루가 갑작스럽게 찬 물을 끼얹었다. 물론 카오루가 진짜로 날 우선순위에 둘거라곤 생각 안했지만 사람이 좀 착각을 할 시간은 주면 안되겠냐.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던 화가 다시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퉁명스런 말투로 그에게 그럼 뭐냐고 물으면 소년이 대답한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
"말하자면?"
"......솔직히 난 신지군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 질투를 느끼지만...그래도 왠지 신지군에게 그런 얘길 듣고 싶진 않아서."
"그런...얘기?"
"실명이 말야."


그런 얘길 듣고싶지 않다니,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신지군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듣고 싶지 않다는 건가. 신지군이랑 있는 동안은 그가 자길 봐주길 바래서? 엄청난 팔불출이다.이 정도면 꽤나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십 면년지기 친구에게서 새삼스런 면을 발견하게 된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그에게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이쯤 되면 무섭다, 나기사 카오루.


"그러고보니, 실명이는 나랑 있을 땐 신지군 얘길 많이 꺼내네."
"그야 네가......으응, 아냐. 미,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왜 그러니?"
"카, 카오루 니가 신지군 엄청 좋아하니까 꺼낸 건데...이젠 농담으로도 안 꺼낼게."
"...확실히, 네가 장난으로 신지군 얘길 꺼내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신지군 얘길 하는 건 싫어하는 건 아냐."


생각보다 아량 넓은 그 말에 나는 조금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그에게 거리를 좁혔다.음, 이렇게 까지 무서워 하진 않아도 되는 거겠지. 카오루도 분명히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고. 그치만 생각해보니 내가 신지군 얘길 진지하게 꺼내도 장난스럽게 말해도 카오루는 항상 별로 기분 좋아보이진 않았다. 지금 껏 내게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소유욕은 그럼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거 치곤 너 맨날 표정 굳어있잖아."
"흠, 그거야......."
"뭔데?"
"나랑 둘이 있을 때 신지군의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카오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자전거가 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나와 그는 발걸음을 옮겼고, 자전거가 지나간 후엔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소리와 내 어깨를 감싼 카오루의 큰 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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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함께 있고 싶어!
그 날, 나는 카오루에게 장르가 단숨에 순정만화로 바뀔만큼 노골적은 말을 꺼냈었지만 그 후 우리 둘에겐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마치 서로간의 대화가 없었던 것 마냥 행동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어색해하며 피하는 것은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유순히 넘어갈 뿐이였다...아니, 유순히 넘어가는 건 적어도 일이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아니다. 내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새카맣게 까먹은 것 처럼, 인지를 못하고 있다. 마치 어제 친구와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 마냥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에 친구하고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할 테니까.
아마 카오루에게 있어서 내가 죽을만큼 짜 낸 용기는 그 정도의 뜻을 갖는다는 거겠지.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무시를 당하면, 적어도 내게 아무런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똑똑히 느끼게 되면 울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할 것이다.
그야 애써 사람이 부끄러움도 무서움도 꾹 참고 말한 걸 점심메뉴판을 보는 것 마냥 흘려보낸 것이니까. 나는 성심성의껏 준비했는데 그게 막상 상대방에게 가게에서 파는 물건 취급도 못받는 다면 억울할 것이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에 굴하지 않았다. 느끼지 않았다.나기사 카오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잘생긴 미모에 온 여자애들이 홀려, 가벼운 호감 확인부터 적극적인 어필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는 아이니까.
척 봐도 연예인보다 더 예쁜 여자애들을 정중히 거절한 아이니까.
고작 소꿉친구라고, 평범한 여자애가 흘린 말을 진지하게 들었을리가 없다. 게다가 고백도 더욱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나는 되려 시점을 바꾸어 생각하였다.
그 때 나는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어줍잖은 대쉬를 날렸다. 귀엽게 말하자면 순수한 호감 발산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푼수를 떤 발언이다.
어쨌든 간에, 적어도 그 애에게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표현해야 하는 첫 과제를 끝마친 셈이다.
나기사 카오루의 마음을 얻는 다는 끝을 향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빌어, 나는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반 정도나 했다는 뜻이다.

어때 이 정도면 나름 대단하지? 그 궁상맞고 미련 넘치게 옆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순정만화 여자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다.
적어도 자기 마음은 제대로 밝히는 당찬 여자 주인공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우선 만족하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진짜 짜증나..."

는 개뿔이.
보는 사람 화를 돋굴정도로 화창한 이 날씨에 나는 등교길에 오르면서 소꿉친구를 욕했다.
오늘은 둘째주 일요일, 즉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모교에 향하는 이유는, 오늘이 바로 우리 동아리가 대전시합을 벌이기 때문이였다.
원래 3학년은 동아리 활동에 자율참가지만, 워낙 동아리에 재능있는 사람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나기사 카오루가 참가하게 되었다는 구닥다리한 얘기이다.
그리고 그 소꿉친구에게 홀딱 빠진 멍청한 여자애가 그 뒤를 졸졸 쫓아간단 후일담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진짜 바보인거 같아.
왜 카오루한테 그런 무시를 당하면서 그렇게 따라다니는 거지.

그래서, 아까까지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힘찬 정신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교길에서 새치 소년의 뒷담을 까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그 때 이후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너무 못마땅했기 때문이였다.
상큼하게 내가 이루어낸 과정을 중시하려고 해도, 눈 앞에 카오루의 행동,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니 수틀릴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함께 있고 싶다고 대 놓고 말했는 데 이렇다 할 대답이 없으니 그 누가 화가 안나겠어?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하기라도 했냐고. 선배 여친 있어요? 이런식으로 물으면서, 여친이 없다면 그 여친 제가 하고 싶은데요,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어려운 말을 하기라도 했냐고. 단순하게 그대 곁에 늘 머물고 싶어요 라고 말한 거잖아. 내가 물론 그렇게 고풍 스럽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나는 몇발자국 걷다가 잠시 멈춰서 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시각은 8시 25분이다. 시합은 9시에 시작이고, 늦어도 딱히 상관없으니 이렇게 늦장부려도 괜찮겠지. 원래는 일찍 가서 카오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한 거니까.


생각한다. 그 눈치 빠른 나기사 카오루가 어물쩍한 말도 아니고,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강한 호감의 표시를 못 알아챘을리가 없는데.
아니면...간접적으로 차인 걸까?
그래서 그 자식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 마냥 행동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소꿉친구의 남자친구가 될 마음은 없지만, 그 우정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능구렁이 처럼 넘어가는 나기사 카오루...음, 이건 아니다.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가 넘쳐 흐르는 나기사 카오루가, 두루뭉술한 태도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을 대하면 얼마나 피를 보는 지 잘 알고 있을테니까. 상대방이 고백을 받아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면, 나도 모르는 척 옆에서 부벼도 되는 거잖아? 넘어갈 때 까지.

그리고 카오루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하도 그건 절대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딱 잘라 말하며, 타인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제대로 긋는 그 애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리 없다.

그럼 도대체 뭐지? 도대체 뭐니, 카오루.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이해가 간다는 사정이라는 건 있다지만, 이건 정말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는 답이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데, 풀릴 생각이 없는 문제에 머리가 더 아파온다.
머리는 그만 쓰자. 에너지도 없는 뇌를 돌려봤자 남는 건 고통이다.
그저 입을 쓰면서 속 안에 가득찬 홧덩어리를 내뱉을 수 밖에.

"진짜, 내가 왜 그 나르시스트 피프스까지 보러가야 되는 거야?"

바로 이런 식으로. 아마 피프스라는 단어를 카오루로 대체한다면 내가 내뱉을 뻔한 말이 되었을 것이다.

"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속 시원한 말로 내 가슴을 때렸다. 그 목소리에 주인은 누군가 하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였다.
지난 주말 즈음, 시내에서 카지씨와 함께 있었던 그 소녀였다. 잠깐의 인사를 나눈 것 뿐인데 내가 똑똑히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소리의 주인은 엄청나게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였다.

"앗..."

뒤를 돌아보면 역시나 붉은기가 도는 금방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양갈래가 맞나 저 머리? 어쨌든 그 때 보았던 어엄청나게 예쁜 소녀였다.
잠깐 눈이 맞았을 뿐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소류씨는 나를 보더니 바로 눈썹을 찌풀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만 교환한 것 뿐인데 그렇게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짓다니. 그런데도 그 표정마저 예쁜 아이이다.

"...누구?"
"피프스의 소꿉친구. 설마 또 만날 줄은 몰랐네."

소류씨는 누군가의 물음에 새초롬 대답하며 여전히 날 노려봤다. 나는 그제서야 소류씨 옆에 또 다른 소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면, 하늘색 머리칼이 부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소녀였다.

"...안녕."
"아, 안녕..."

그저 투명하고 하얗고, 예쁘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 아이는 내게 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인사에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맞인사를 하였다.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사람이 아닌 것 처럼 신비로운 소녀다. 옆에 소류씨가 활기찬 소녀라고 말하자면, 이 아이는 햇볕에도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운 결정같은 아이였다. 마치 자연 속에 사는 아름다운 요정같은 느낌이다.
이 소녀들을 보니 아까부터 찾고있던 답이 단박에 풀리는 것 같았다. 카오루가 내 고백아닌 고백을 무시했던 이유는 사실 이 소녀들 때문이 아니였을까?
그래,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주변에 있는 데 나처럼 평범한 애가 눈에 들어오겠어? 방금 전까지 카오루에게 온갖 욕을 지껄였던 걸 취소하고 싶다. 카오루도 사람이고 남자애다. 나 같아도 얘네들을 보느라 시선이며 정신이며 팔려있을 거다.
카오루, 미안해.

"마, 말해두겠는데. 피프스에 대해서 험담한 건 사과 안할 거니까!"
"피프스...?"
"나기사 카오루 말이야."
"별로 상관없는데."

소류씨는 내 말에 놀란 듯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옆에 있는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였다.
두 사람에게 넋이 나가있어서 지금 만원만 빌려달라고 말했어도 나는 건네줬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였지만, 나는 진심이였다. 애당초 나기사 카오루의 행동은 충분히 욕 먹을 만 하다. 내게 시비를 걸거나 비꼬곤 하니까. 소꿉친구인 나한테도 태도가 나쁜데,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그를 욕한다면, 그건 분명히 카오루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가 남자애 험담을 하는 경우도 드무니까. 카오루가 자초한 일일거야.

"걔가 좀 괜히 사람 건드리고 놀리고 아주 못된 버릇이 있으니까."
"마, 맞아. 너 잘 아네."
"틈만 나면 지 잘난거 내세워서 너는 왜 그런식으로 행동하니? 이렇게 낮잡아 보고 말야. 상냥하게 말해줘도 될 걸 굳이 사람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고."
"뭐야, 너 말이 통하는 구나?"

소류씨에게 지지 않게 카오루에 대해 헐뜯으면, 그녀는 마치 동지를 만난 것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양 손을 붙잡았다. 밝게 웃으며 소류씨가 말했다.

"피프스의 소꿉친구라고 해서 똑같은 녀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소류씨가 날 나기사와 비슷한 부류라고 착각하는 건 당연하다. 내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카오루하고 친구하는 건 심사숙고 해야 하나? 보통 친구 사이라면, 제 친구의 뒷담에 화를 낼법도 하지만 나는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고. 나르시스트 맞잖아, 소류씨도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걸 보면 뭔가 당한 게 분명해.

"쇼류씨랑...둘은 어디 가는 거야?"
"너네 학교. 오늘 대전 시합 있다면서? 아, 얜 아야나미 레이야. 퍼스트, 너 사람한테 자기소개 정돈 먼저 하는 게 어때?"
"...잘 부탁해."

소류씨는 아야나미라 불리는 소녀에게 타박을 주며 말했다. 음, 애시당초 아야나미씨가 말하기 전에 소류씨가 먼저 말해버려서 자기소개를 안 한거 같은데. 아야나미씨는 소류씨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오늘 대전 시합 있는 건 맞는데...누구 응원 가려구? 상대편 학교가 소류씨네 학교야?"
"...이카리군이 피프스의 응원을 갔으니까, 따라가는 거 뿐이야."

이카리? 아, 신지군을 말하는 건가? 아야나미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류씨의 얼굴이 여름햇살에 익은 것 마냥 붉게 오르게 시작했다. 그렇구나, 소류씨는 신지군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카오루가 아니였어. 아까까지 소류씨가 카오루의 험담을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니 뭔가 실망스러운 기분이였다. 거대한 히어로가 무너진 걸 본 느낌이랄까. 그 잘생긴 얼굴에 모든 여자애들이 넘어가는 건 아니였어.

"잠, 퍼, 퍼스트!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길을 잃고 있어. 도와줄래?"
"어, 응..."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아야나미씨에게 나는 놀랐다. 거의 말이 없었으니까, 의사표현을 잘 안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러나 이 시간까지 길을 헤매고 있다는 건 꽤 일찍부터 학교에 가기 위해 나왔다는 거고, 그건 그만큼 빨리 도착하고 싶기 때문 일 것이다. 주말, 집에서 늦잠잘 수 있는 유혹도 뿌리치고 빨리나온 이유라...아야나미씨도 혹시 신지군을 좋아하나? 그래서 빠르게 집을 나왔다면,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였다.

이 아름다운 소녀들이 모두 신지군에게 빠져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애길래 그런 걸까? 어떻게 이 애들을 매료 시킨 거지. 게다가 이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그 나기사 조차 신지군을 위해서라면 별까지 따올 정도다. 나기사 카오루까지 함락시키고. 사실 이 소설은 이카리 신지군의 하렘이 본 스토리고 나는 엑스트라 같은 게 아닐까? 문득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세컨드랑 퍼스트가 실명이랑 함께 있다니 별일이네, 무슨 얘기했니?"
"세컨드? 소류씨 말하는 거야?"

얘넨 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갖다 붙인 걸까? 가족놀이마냥 엄마, 할머니, 이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퍼스트 세컨드 라니, 꼭 첫번째 여자친구, 두번째 여자친구 이런거 같잖아. 예를들면 나기사는 신지군의 다섯번째 애인이니까 피프스.

"...그냥, 이 딴 행동하는 남자는 진짜 나쁜 놈이야~이런 얘기했어."
"예를들면?"
"사람 낮잡아보고 굳이 띠거운 말투 써가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사람?"
"흐음, 이런 이성은 만나기 싫어, 이런식으로 말하는 거 보단 이런 이성만큼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반성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실명이도 그러지 않니?"

능구렁이 같은 카오루의 말에 나는 속으로 화를 눌러 담을 뿐이였다. 역시 내가 소류씨하고 자기 뒷담까고 있던 건 눈치 챘구만. 소류씨와 아야나미씨,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기사 근처에 여자아이들이 가득가득 해 있었다. 소녀들은 용감하게 그 속을 파헤쳐 원하던 신지군의 옆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활을 쏘는 카오루가 적당히 보일만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중간에 선생님이, "실명아, 부원인데 왜 이런 곳에 있어~" 라며 나를 안 쪽으로 끌고가려 했지만 화장실을 가는 척 도망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카오루에게 매료된 여자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가 걱정되니까. 만약 그 안에서 내가 카오루의 소꿉친구라는 걸 아는 애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마 손들의 눈초리는 모조리 나에게 향할 것이다. 

시합을 멋지게 끝낸 카오루는 2학년 부원들과 선생님에게 둘려싸여 칭찬과 갈채를 받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비명은 덤으로. 그러나 카오루가 역시 신지군의 칭찬이 제일 기쁜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꼴이 아주 눈꼴 시려웠다. 누가보면 아주 신혼인 줄 알겠네. 소류씨 또한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 지, 카오루와 신지군을 떼 놓았다. 소류씨가 카오루를 싫어하는 이유, 신지군한테 달라 붙어서 그런 거구나. 그리고 카오루도 의외로 성질 있으니까 소류씨한테 핀잔 주고. 저 둘은 멀리서 지켜보아도 상성이 좋지 않은 듯 했다.

우리 학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동아리의 영웅인 카오루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것 마냥, 뒤풀이에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실망의 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기사 그 애 성격이라면 그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바로 수긍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부원들을 뒤로 한체 떠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내게 다가왔냐는 것이였다. 동아리 실 근처는 커녕, 떨어진 곳에 있었던 날 발견하고는 성큼 다가온 이유가 알 수 없었다. 시선이 모이는 걸 천연덕 스럽게 무시하고는, 내게 같이 돌아가자며 권유하는 것이 일부러 날 놀리려는 속셈인가 싶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지. 분명 날 이용해서 뒤풀이에 가는 걸 거절하려는 게 분명하다.

"반은 맞았어."
"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능글맞게 웃으며 카오루는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뱉을 지 언정 욕은 날려주고 싶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이렇게 사람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다, 절대 그 얼굴에 속으면 안된다.

"내가 무슨 니 방어막이야? 사람 취급이 뭐 그래?"
"별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걸?"
"바로 입 싹 씻는 거 봐. 네가 아까 맞다고 그랬잖아."
"반은 맞다고 했지, 다른 반은 무슨 뜻인 지 물어봤니?"

그러고보니 카오루가 반쯤은 맞다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괜히 자기 성격 나쁜 걸 대놓고 티내고 싶지 않아서 내뱉은 말이 아닌가? 난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거야? 카오루의 옆 모습을 노려보며 그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실명이가 그랬잖니."
"뭐가?"
"나랑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뭐?"
"그래서 같이 돌아가려고 한 거 뿐이야."

앞으로 걸어가는 카오루를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얘가 방금 뭐라 그랬지? 분명히 내가 저번에 말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 데 그게 아니였나? 멀거니 서 있는 모양새에 카오루가 날 부르며 손짓하면, 나는 그제서야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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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카지씨!"
"어 실명아, 잘 지내고있어?"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을 사러 시내로 나가면 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는 카지씨와 마주쳤다. 꽤 오랜만이네. 한 작년 쯤에 만났던거 같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그 눈을 바라보았지만 내 시선은 이내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붉은기를 띈 금발이 풍성한 소녀였다. 누구지, 엄청 예쁘네. 어디서 본거같기도 하고. 허나 카지씨와 있을땐 본 적이 없다. 눈이 마주치자 끼고있던 팔짱을 더욱 옥죄는 소녀는 눈썹을 세우며 나를 째려봤다. 연인이나 뭐 그런건가. 많게 보아도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데. 카지씨 내일 모래면 계란한판이시잖아.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긴하지만. 소녀를 보며 눈썹을 모으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 불쾌한 목소리였다.

"카지씨! 이 앤 누구?"
"어어, 아스카, 카오루 친구야. 실명, 이쪽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나와 같이 독일에 있을때 알고 지내던 애야."
"아...안녕, 저 난 실명이야."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류씨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차갑게 무시할 뿐이였다. 그녀의 옆에 착 달라붙은 카지씨가 겸언쩍은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대놓고 도외시 당하다니 너무 무안한데. "아스카, 사람 인사는 제대로 받아야지." 카지씨가 소류씨에게 훈계하듯 타일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카오루, 너 독일은 언제가?"
"대전시합이 끝난 다음주에 갔다 올 생각이야."


카지씨는 예전부터 카오루네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카지씨의 능력에 눈독을 들인 카오루네 할아버지께서 등록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것이 시초였다. 그 후 아르바이트로 그 회사에 일하시면서 나기사 집안과 친목을 쌓아왔다.
카지씨는 국제변호사로 현재 카오루네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 일본본사를 맡기 위해 귀화하신 카오루의 아버지를 도우시며 독일과 일본을 오가곤 하신다. 워낙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라 집안 문제까지 개입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카오루가 연휴마다 독일에 갈 때는 꼭 카지씨가 보호자 역할로 같이 움직였다. 때문에 카지씨가 일본에 오는 건 카오루가 독일에 간다는 뜻이 되었다.  


"있잖아, 독일가면 또 그 과자 사다와 주면 안될까?"
"실명, 살찔텐데?"
"......"
"농담이야, 그리고 선물 살 정도로 오래 있진 않을거니까. 하루정도 머물고 올거야."
"하루? 너무 빠르지 않아? 표 아깝게."
"글쎄, 별로."


담담하게 그가 대답하면서 책을 넘겼다. 하긴, 카오루 입장에선 오히려 가고 싶지 않겠지. 어째서인지 그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 독일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어른들 앞에선 싹싹하게 굴어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어릴적에 처음으로 그의 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었지만 카오루가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말도 못 걸었었지. 남인 내가 봐도 카오루가 희한한데 얘네 부모님은 오죽하실까.


"아, 그럼 오늘 카지씨 너네 집에서 묵으시겠네?"
"뭐, 그러시지 않을까."
"아까 카지씨 옆에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고 어떤 여자애 있던데, 너도 알아?"
"아, 세컨드 말이니?"
"세, 세컨...?"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카오루는 "소류, 씨 말하는 거지?" 정정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왠지 그 호칭엔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 애, 신지군의 소꿉친구야. 나하고는 카지씨 일로 알게 된 사이이고."
"흐음~그랬구나....혹시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뭐 그런거야?"


이어지는 질문에 응하려는 듯 그가 책을 덮고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글쎄, 세컨드는 카지씨를 열렬히 좋아하는 거 같지만, 잘 모르지."
흠, 그렇구나. 하긴 그 새초롬해 보이던 얼굴이 카지씨만 보면 활짝 펴졌는걸. 맘껏 좋아한다고 티내는 모습이 부럽기도, 멋지기도 하구만. 나도 좀 보고 배워야 하나. 근데 그래봤자 카오루는 이마를 누비기만 할 거같은데. 생각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면 무정한 얼굴만이 눈에 보인다. 


"왜?"
"아니, 음 그냥 그렇게 이쁜 애한테 맹렬히 사랑받는 카지씨가 대단하게 느껴져서. 아! 그 애 이카리군 소꿉친구랬지? 나기사도 연적이 엄청나서 큰일..."
"......"
"음, 농담이 심했지? 미안." 


질린듯 찡그려진 그의 눈살에 어색한 웃음을 내밀었다. 솔직히 카오루가 이카리군 일이라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니까 내가 이따금씩 농담을 던지는 거라고. 평소엔 감정표현도 잘 안하면서. 반응도 없는 애가 가끔 저렇게 눈에 힘을 주니까 나도 모르게 허망한 말들을 내뱉는 거라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은 잦게 짓지만. 그건 내가 수다스러워서 겠지. 


"실명."
"응?"
"더 할 말 없으면 가봐도 될까?"

카오루는 불편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는 아니였지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 들고 말았다.
그야 그럴만도 하지. 카오루도 내 방에 별로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닐테니까. 카오루에 우리 집에 오게 된 경위는, 단순히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선물을 갖다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다 거실로 내려 온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담담하게 내게 인사만 건네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아 방에 데려온 것이였다. 그야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같이 더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무슨 대화를 할 지 몰라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다 결국 그 대화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고. 왠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억지로 집에 데려가 못생긴 집 강아지를 보여주며 귀엽지를 강요하는 초등학생 남자애가 된 기분이였다.

사실 친구의 말을 줄곧 생각해 봤다. 도대체 나기사한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답은 간단했다. 연인사이가 되고 싶고, 더 가까이 있고 싶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고. 설령 카오루가 내게 아무런 연애 감정이 없다해도 말이야.
그렇다면 답을 향한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소꿉친구와 어떻게든 함께 있으며 더 알아가야 한다.
좀 더 마음을 전해야 한다.
벽 처럼 단단한 나기사 카오루를 쓰러트릴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해야한다.
그래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꺼내며 카오루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별로 나와 얘기하는 거에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하지. 아까부터 계속 가벼운 맞장구만 쳤으니까. 오히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참아왔을 지도 모른다.

그치만 더 있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좋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눈을 깜빡이며 카오루를 다시 시선에 담으면, 아까처럼 변함 없는 무표정이였다.
다행히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다음 주 부터 대전 시합 준비를 하느라 방과후에도 동아리에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미리 공부 좀 해 놔야 해."
"어, 응...공부 열심히 하네."
"실명이는 안 하니? 아, 하기사 실명이는 공부에 별로 뜻이 없으니까."
"나도 하거든!"

이 눔이. 아무리 내가 탱자탱자 노는 것 처럼 보여도 나름 공부는 하고 있다고! 너랑 같은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단 말야!
물론 이렇게 소리지르진 못한다. 그저 가만히 카오루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물론 고고하신 나기사님께선 내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봤던 시험 보니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더라."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복도에 걸려있잖니? 이름이랑 성적. 그걸 보고 알았지."
"왜 내 성적을 보는거야!"

카오루는 시큰둥하게 실명이 이름이 눈에 띄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에게 내 성적을 들켰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다. 왜 남의 성적을 멋대로 보고 난리야? 학생한테 성적이 얼마나 민감한 건지 저도 잘 알면서. 

"실명이도 내 성적 알잖니?"
"몰라! 일부러 안 본다고! 남한테 성적 보이는 거 기분 나쁘잖아.
"나는 별로 신경 안쓰는 걸."
"그야 넌 성적이 좋으니까 그런거겠지..."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며 카오루를 흘겨보았지만 카오루는 그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낼 뿐이였다.


"그러고보니..."
"응?"
"실명이 넌, 어느 고등학교로 갈거니?"
"나?"

갑자기 그건 왜? 당황한 말투로 내가 다른 대답을 하면 카오루는 그냥, 그래서? 고집있게 물어보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보통 그런 건 물어보지도 않는 주제에. 여전히 입을 꾹 다물며 카오루를 질시하였다. 다만 그 눈초리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실명?"
"K고등학교."
".........흐음, 그렇구나."
"너 지금 내가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세우는 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 적 없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평소 실명이는 적당히 잘사는 주의잖니. 갑자기 성적을 높이길래, 어디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나 싶어서."
"응...뭐 그렇지. 나기사는?"
"나도 K고등학교야."

어째 나를 조금 무시하는 것 처럼 들렸지만 이번엔 군말없이 카오루에게 수긍했다.
여기서 똑바로 고하자면 카오루는 알지 못하지만, 난 진작에 이 애가 K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걸 알고 있었다. 공부도 그것 때문에 해왔던 거고. 2학년때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께 상담했었지. 교무실에 심부름으로 우연히 그것을 들은 나였다. 카오루는 전교 탑이니까 그 학교를 치는 것도 당연하다. 

친구의 말마따나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별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떻게든 그의 주변에 있고 싶었다. 지금도 사이가 좋은 친구도 아닌데 학교마저 달라지면 관계는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떨어질 수도 있지.
영영 멀어질 수도 있는 거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나한테 소꿉친구가 있었어. 이렇게 기억도 나지 않는 추억속에 파묻힐 수 있다.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지만 욕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에, 없는 집중력을 모아서 수험공부에 임했었다. 그 결과는 카오루가 보기에도 성적이 많이 오른 축이지만, 여전히 못 미친다.

"그래서..."
"응?"
"왜 K고등학교니?"

핵심을 뚫어보는 그 질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카오루에게 진실을 얘기 못하겠다면, 그냥 어설픈 거짓말로 대충 떼워도 되지만 여전히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나기사 카오루에게 갑작스레 마음을 전한다.
이건 무리다. 아직 고백은 커녕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어.
그렇지만 솔직하게 카오루에게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라고 전하면 눈치밥을 말아먹지 않은 이상 그 말이 품은 뜻을 모를리가 없다.
더욱이, 눈치 9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기사 카오루가 그걸 못 알아차릴 리 없다.


"카, 카오루는?"
"나 말이니? 신지군도 거길 목표로 잡고 있고, 무엇보다 신지군의 어머님께서 그곳을 다니셨으니까."
"아하, 신지군하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였구나. 역시 나기사야."
"놀리는 거니?"
"아니, 오히려 그 집념이 감탄스럽다."

질린 얼굴로 카오루에게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면 무참히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반응 조차 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카오루를 밉다는 듯 노려보고 있으면 그가 영문모를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뭐가?"

뭐야, 뭘 물어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이면, 이번엔 카오루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진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관찰 당하는 기분이였다.

그 시선에 어렴풋이 아까 카오루와 K고등학교 얘기를 하고
"어, 그러고보니까 카오루는 공부도 되게 잘하는 데 수험공부도 하는 구나. 당연한 거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대전시합도 있으니까, 연습 끝나고 씻으면 거의 잘 시간이니까."
"그렇구나...너 진짜 고생이 많다."
"실명이가 조금만 운동을 잘했다면 날 도와줬을텐데 말이야."
"애초에 운동도 못하는 날 끌고 간 게 누군데?"


같은반도 아닌 날 방과후까지 기다리던 1학년 나기사군을 떠올렸다. 볼 일없으면 잠깐 시간 좀 내달라는 모습에 아무생각 없이 졸졸 따라갔지. 주번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임시반장으로 뽑혀서 할 일이 많은가. 뭔가 내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르면 도착한 곳은 교무실이였다. 그리고 손에 쥐어주는 것이 입부신청서. 내가 당황한 얼굴로 카오루를 바라보자 그는 예사로운 말투로 "어차피 실명이, 귀가부지?" 이딴 말을 내뱉었다. 물론 클럽이나 위원회같은건 귀찮아서 별 관심없었지만 권위적인 그 모습이 여간 꼴보기가 싫었다. 왜 카오루가 멋대로 정하냐며 울컥 쏘아붙이면 되려 앉아계신 고문선생님이 당황해 하셨다. 그 뒤 카오루가 뭐라 했는진 기억안나고, 정신차려보니 부활동을 나가고 있었지.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은 당시에도 참 우스웠다. 그 나마 2학년 때까지 타 학교랑 시합이 없는게 다행이였지. 운동은 제대로도 못하는 내가 궁도부에 들다니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나기사 카오루군께서도 내가 지지리도 몸치인걸 지극히 아실텐데 왜 날 끌고 갔는지 알 수도 없고. 


"그러고보니...어릴적에 실명이랑 축구를 했을 때도 항상 공도 제대로 못쳤었지? 생각해보면 내 판단 미스였어."
"카오루도 실수 할 때가 있구나."

남 얘기 하듯이 흘려보내면 카오루는 한숨을 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운동을 못하는 게 잘못이 아니야, 그걸 알면서 나를 끌고온 네 잘못이지. 도대체가, 운동회마다 달리기 꼴찌를 했던 애를 왜 궁도부에 데리고 온거지.

"음...그러고보니까 있잖아."
"응?"
"진짜로 왜 날 데려온 거야?"

카오루의 비아냥 소리에 맞받아칠 속셈으로 꺼낸 말이였지만, 갑자기 정말 궁금해졌다. 베스트 프랜드 까진 아니더라도, 나와 카오루는 어느정도 서로가 뭐를 잘하고 뭐를 못하는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뻔히 내가 운동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 왜 나한테 궁도부에 들자고 한 거지?

"인원 수...? 는 아니였잖아, 그땐 이 삼학년들 많았고. 할 사람이 없어서...? 너 그런거 신경 안 쓰잖아?"

나는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카오루의 뜻과는 전혀 다른 답이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1학년 때 선배들에게 신입부원이라며 둘러쌓였던 것도 기억하고, 카오루가 남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는 애는 죽어도 아니니까.

카오루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아까처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였다. 진득한 그 시선에 왠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져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알고 싶니?"
"응? 뭐 그야...신경 쓰이 잖아."
"그럼 먼저 실명이가 말해줘."
"어?"
"K고등학교에 지원하려는 이유 말이야."

카오루의 말과 동시에 심장이 내려 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보통 그 즈음에서 잊어버리지 않나? 내가 왜 K 고등학교에 가려는 걸 저렇게 신경쓰는 거지. 평소처럼 날 놀리는 것과는 달리, 카오루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대답을 들어야만 겠다는 결심을 한 것 마냥. 나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아연실색하여 입만 다물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해도 된단다."
"아니, 그...저기, 왜 알고 싶은 건데?"
"네가 나한테 답해주기 전까진 뭘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아."

카오루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비록 말투는 똑 부러졌지만 그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왜 나한테 굳이 그 이유를 듣고 싶은 걸까? 당사자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 말이였기 때문에, 나는 카오루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게 동아리를 권유했던 그 때 같았다. 어쩌면 그 이유도 똑같을까. 출구가 없는 미로 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에 생각을 품었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내게 카오루의 속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신경은 그에게 K고등학교에 가려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 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말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카오루에게 내 감정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저 단순히 우정이나, 친구가 없는 건 싫은 외로움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오루에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첫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다가가는 한 발짜국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밝혀야 되는 생각은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너는 나기사 카오루랑 뭐가 하고 싶은 거야? 문득 친구가 내게 꺼낸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마음 속으론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카오루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러나 그의 앞에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언제나 속으로 중얼거린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 카오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 감정만은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고백은, 나기사 카오루에게 들리지 않으니까.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나...나는...그..."
"그러니까........."

겨우 입을 떼고 카오루를 쳐다보면, 여전히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 거북하다. 만약에 여기서 카오루가 내 뜻을 다 알고 날 차버리면 어떡하지? 두루뭉실한 관계조차 깨져버리고, 영영 카오루가 날 어색해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결심과 함께 입은 떼어져 버렸고, 카오루는 그걸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 뺄 수는 없다. 앞으로 나서는 것 밖에는.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걷는 사람마냥 그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너랑, 카오루 너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었어."


드디어 그 한마디를 말하면 카오루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칠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마치 고백하는 거 같잖아! 아니 마음은 똑같지만, 적어도 그에게 다른 여지를 생각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부리면서 말해야 되었는데.
나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빌었다. 고백도 한 게 아닌데, 고작 그에게 작은 마음 하나를 밝힌 게 이렇게나 부끄럽다니. 도대체 고백을 하는 애들은 어떤 용기로 그 마음을 전한 걸까? 살포시 눈을 뜨고 그제서야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무슨 뜻으로 대답한 건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카오루의 대답은 어떨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입을 열 때 까지 기다리면,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얘 실명아! 엄마 잠깐 나갈테니까 빨래 좀 널어라!"

갑작스레 활짝 열린 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세우고 말았다. 열린 문 너머로는 밖에 나가려는 듯, 화장을 한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는 카오루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는 줄은 몰랐다는 듯, 그를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오루에게 잘 놀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가 닫고 나간 문 너머로 얼마나 민망한 공기가 흐르는 지도 모른 체.


"........."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진짜 이만 가야겠어."
"어?"

잠깐만, 그냥 가려는 거야? 카오루가 날 왜 데려왔는 지는 대답도 듣지 못하고, 그는 유유히 내 대답만 듣고 사라지려고 했다. 보통 같으면 왜 너만 내빼냐면서 소리를 지를법 했지만, 부끄러움에 내 몸은 이미 녹아 카오루에게 제대로 된 말 조차 하기 어려웠다.

"맞다, 실명아, 대전시합 보러 올거지?"
"으? 으, 응...명색에 고참멤버 이기도 하고...선생님도 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난 이만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낼 학교에서 봐..."

카오루는 그 말과 함께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발소리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코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방 안에서 꿈쩍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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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잘랐어..."
"실명, 안녕."
"머리를 잘랐어..."
"내 말 듣고 있니?"
"으, 응......있잖아."
"신지군하곤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이상한 오해하지마."

카오루에게 착잡한 마음으로 말을 걸면,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아직도 차이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 주말동안 못봤던 카오루는 짧게 머리를 자르고 왔다. 시원하게 드러낸 목덜미는 햇빛에 닿으면 금방 벌게질 것 처럼 새하얗았다.
뒷머리 만져도 돼? 카오루에게 눈을 빛내며 말하면, 그는 단호하게 안 돼. 라고 말했다. 저번엔 내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무슨 풍선이냐. 마음이 왜이렇게 가벼워? 이랬다 저랬다 하게.

"카오루, 그러고보니까 우리 대전시합은 정해졌어?"
"아마 8월 넷째쭈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일거야. 출전선수는 일 이학년 중심이지만 삼학년도 참가 가능해."
"너 나갈거야?"
"아마도, 고문 선생님이 나가라고 하실테니까."


카오루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기사, 동아리 에이스니까. 시합에 나가는 건 당연하겠지. 우리 동아리가 아무리 시합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명색의 시합이고. 고문 선생님이 보여주기 식으로 카오루에게 출전을 권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대외 활동이 있어야 학교에 동아리 활동비도 얻을 수 있으니까.
만약 우리 부에 좋은 인재가 있다면 분명 그 인재가 시합에 나가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동아리에서 실력있는 사람은 나기사 카오루 뿐이였다. 왜냐하면 시골 학교인 탓에 인원이며 활동비가 적어 지원물품을 그닥 못 얻었기 때문이였다. 동아리 인원보다 적은 활로는 열심히 연습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러니 당연히 인재가 없을 수 밖에.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카오루가 대단한 것이다.
맘 같아선 고문 선생님도 3학년인 카오루를 보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주목하고 있는 우등생이니까. 고작 인지도 없는 동아리의 출전멤버로 나가는 것 보단 수험공부를 하길 바라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믿을 게 쟤 밖에 없는데. 카오루도 그걸 알고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인 걸꺼다.


"힘들겠네, 수험준비는 괜찮겠어?"
"실명이랑 다르게 난 며칠 쉬어도 괜찮아." 


저를 위로하는 말에도 카오루는 굳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보였다. 그 심성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풀여진다. 전생에 난 카오루에게 돈이라도 빌린 걸까? 왜 구태여 내 성을 내게 만드는 소리를 내뱉는거야? 이맛살을 내보이며 카오루를 바라보지만 그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여자애들에게 가버렸다. 나기사군, 있잖아. 상냥하게 웃으면서 여자애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 저 대단한 내숭엔 내가 혀를 내둘룰 수 밖에 없다니까. 


"나기사군이랑 무슨 얘기 했어?"
"어? 우리 동아리 대전시합. 다른학교랑 같이 하거든."
"너 3학년인데 출전하는 거야?"
"설마, 나기사만 나가는 거야."

3학년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로 친구는 말을 꺼내더니, 잠시 침묵을 잇고는 이내 수긍을 하였다.

"하긴. 나기사군이 너네 동아리 에이스니까. 너네 동아리 딱히 궁도 잘하는 애도 없고 말야."
"응, 그렇지 뭐. 나기사가 빠지면 대전시합도 곤란할 테고..."
"그나저나 나기사군 3학년인데 고생이 많네. 공부하랴 시합도 나가랴..."

오히려 양쪽 다 해내려는 모습이 대단한 걸. 원래 완벽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나기사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친구는 감탄만 내뱉을 뿐이였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눈썹을 올렸다. 

"그러고보니..."
"응?"
"다른학교랑 대전시합 하는 거잖아?"
"어...그렇지?"
"그럼 다른 학교 여자애들도 나기사군을 보겠네?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그야 뭐..."
"그럼 나기사군 노리는 여자애들 더 늘어나는 거 아냐?"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친구의 한 마디에 불현듯 초등학생 때 일이 떠올랐다. 그 때는 축구였던가. 축구부 감독의 질긴 권유로 인해 나갔던 대전시합 때였다. 분명 자신의 학교를 응원하려고 왔던 여자애들이 어느샌가 카오루가 골을 넣을 때마다 함성을 지르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앞에서 카오루를 보러 온 아이들이 여럿 있었지. 얘는 정말 생각할 수록 살아온 인생이 순정만화 주인공 같다. 물론 그에 따른 고충은 알긴 알지만, 보통 적군을 아군으로 바꿀 정도로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나?

"비슷한 일이 있었어. 4학년 때인가?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상대편 학교 응원하러온 여자애들이 카오루한테 흠뻑 빠져가지고..."
"생각만 해도 귀 아프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정문에 그 학교 애들이 카오루를 보려고 버티고 있는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결국 그 학교 선생님이 와서 애들 데리고 갔어."
"...나기사군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그리고 친구는 바로 입을 닫았다. 솔직히 그 정도 인기면 감탄하다 못해 황당함에 말을 잃을 것이다. 이런 반응이 보통이지. 

"뭐 걔가 인기 많다는 건 진작 알고있었지만 나도 그 땐 놀랬어. 역시 넘 볼 나무가 아니라니까."

시답잖게 우스갯소리를 던지면, 곧 이마살은 눈썹을 찡그리는 모양새로 변했다.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친구에게 무슨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이마살을 양 손으로 펴주면, 그제서야 그 입술이 움직였다.

"또 그 소리다."
"어?"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에 몸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친구의 시선을 살폈다. 화난 것은 아니였으나 길게 뜬 눈은 마치 질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쉬며 친구는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너 말야."
"...나?"
"나기사군을 좋아한다면서 아무것도 안하네?"
"뭐...뭐가?"
"아니, 예전부터 그랬던 거 같아. 나기사군이랑 잘 지내지만, 너 정작 그 애한테 네 감정을 비친 적은 없잖아."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만큼 가슴을 꿰뚫는 그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차이는 게 무서워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찌풀이고 있으면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너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나기사군이야 확실히 너랑 소꿉친구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거잖아. 너가 같은 고등학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건 알지만, 솔직히 그건 니가 노력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고등학교 못 들어가면? 어쩌려고? 아예 접점이 없잖아. 옆집사는 거라 해도 고등학생이면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걸? 그럼 적어도 같이 있을 수 있는 핑계거리라도 만들어야지.연애라는 게 노력하면 꼭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런 노력도 안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 나기사군의 마음을 얻으려고 아무것도 안하는 거 같아."
"옛날부터 그렇게 폭풍같이 사람 애정을 얻어온 나기사군인데, 덩그러니 있으려고? 그러다가 뺏기면 어쩌려고? 강에 가서 눈물 흩뿌리게?"
"가끔 너 어차피 나기사는~하면서 말하는데, 너 진짜 나기사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 적은 있어? 그냥 걔 마음을 알기 무서우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고 단정짓는 거 아니야?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본 적은 있어? 떠본 적도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멍청하게 있는 거면 너 진짜 심각한거야. 단지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걸로 만족하는 거야? 너 그 애랑 같은 고등학교 공부하려는 거 아니였어? 못하는 과목도 죽어라 공부하고 있잖아."
"그럼 그 노력으로 나기사군한테 왜 안 다가가는데? 너 혼자서 노력하는 건 쉽게 할 수 있지만 남에게 시도하는 노력은 죽어도 못하겠어?"
"그게 얼마나 미련하기 짝이없는 건데.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걔가 얼마나 남한테 사랑받는 지 지켜봐왔잖아. 가만히 있다가 빼앗기고 아 역시 나는 안되는 구나 하고 바보같이 납득할래? 그러고 끝낼래?"
"나 네가 진짜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지 잘 모르겠어."
"너 도대체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게 뭐야? 그 말 한마디가 글자 모양 그대로 뇌 속에 박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기사 카오루랑 하고 싶은 것? 그게 뭘까. 어렸을 적엔 그저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도 기억할 만큼 그 애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지. 초등학교 땐 여러가지 일이 있어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곧바로 후회할만큼 좋아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지금도 투덜거리면서 그가 하는 말은 다 따르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변명하지 않고 나는 나기사 카오루를 좋아한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애정을 얻으려고 하는 일은 없었다.
고작 샤프로 교과서의 내용을 적어내려가는 거 뿐이였다.
적어도 마음을 써내린 적은 없었다. 감정을 눌러담은 촌스러운 러브레터조차 건넨 적도 없었다.


"정신차려."
"어, 어어."
"...말이 좀 심했나? 그래도 맞는 말이 잖아."

어느새 친구의 표정은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약간 말 끝을 흐리는 그 어투에 이젠 엄격함은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미안한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너가 너무 답답해서 그래...차이면 뭐 어때? 나기사군이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딴 사람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뭐 말이야 쉽지만...너가 나기사군을 좋아한 만큼 다른 사람도 못 좋아할 거 뭐 있어?"

그리고 너가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도 뭐가 있어?

나기사군이랑 있어서 그런지 너 좀 자신감이 없는 거 같아. 너 충분히 괜찮은 애야. 그런데 왜 청승맞게 9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 처럼 굴고있어?
요조숙녀처럼 굴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언제 순정만화 처럼 굴었다는 거야. 굳이 덧 붙여도 되지 않을 말을 듣다보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뚱해졌다.
그러나 친구의 말은 솔직히 맞는 말이였다. 정론이였다. 누군갈 좋아하면서 그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조차 안하는 인간을, 나기사 카오루가 좋아할리 없다. 아니 그 누구라도 돌아볼리가 없다. 신지군이라며 입에 내가 아닌 사람을 걸고 다니는 놈이지만. 저거 사람 편애하는게 아주 대단하신 벽창호지만.
사람이니까 눈이라도 여러번 마주친 사람을 기억하겠지.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노력하는 인간을 더 좋아하겠지.

부정할 수 없는 말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웠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순간이였다. 소꿉친구를 멋대로 판단하고 애정을 표현 하나 하지 않는다.
아니 그냥, 나는 나태한 사람이 분명하다. 소꿉친구니까 걸핏하면 만나니까. 옆에 계속 있으면 두고두고 볼 수 있어서 기회만 엿보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기회만 있어서 되는게 아닌데. 찬스도 노력한 사람한테만 온다고 하잖아. 변명따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게 좋을텐데. 그래, 그게 옳다.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는 거다. 노력도 하지않는 어설픈 애정의 끝은 미련과 자기혐오 밖에 없을테니까.
친구의 말마따나, 90년대 순정만화를 따라해봤자 의미가 없다. 아무리 카오루가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인물이라 해도 사랑은 그렇지 않을테니까. 다가가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따운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명아, 진짜 미안해! 괜찮아?"
"어, 어 응 괜찮아..."
"진짜 미안, 아 어떡하지? 체육복 있어?"
"응 있어.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방과후, 동아리 실로 가려고 하면 위에서 갑자기 걸레빤 물이 나를 덮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물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면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반 학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찢어질만큼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내게 사과와 상태를 물어보는 울음소리에 그제서야 학우의 단순한 실수인 걸 깨달은 나는 분노를 넘어선 허탈함을 맛보았다. 이미 젖은 걸 어찌할 수도 없고, 얘가 이렇게나 사과하는 데. 급하게 스포츠 타올로 내 몸을 닦아주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솔직히 눈물이 나오는 건 난데, 얘도 어쩔 수가 없지.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면 카오루가 "아, 실며..." 나를 쳐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저렇게 뜨면 무서울 지경인데. 굳은 얼굴로 내게 빠르게 다가와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무슨일이야? 왜 그러니?"

꽉 잡은 팔에 냄새나는 걸레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나 신경도 안쓰는지 그는 내 손목이 아프도록 세게 힘을 주었다. 


"잠깐, 아파, 아, 아야야야야"
"...누구한테 당한거니?"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프니까 좀 놔!"

카오루의 손목을 붙잡으며 화를 내면 그는 그제서야 작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곤 손을 떨어뜨렸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잡은거야?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화가 묻어나 있었다. 이건 좀 진정 시켜 줘야 겠다.

"같은 반애가 벌로 창문 닦는 중이였어. 걸레빤 물이 너무 무거워서 잠깐 창문 틀에 기댔는 데 손이 미끄러져서 떨어트린 거야........내 말 믿지?"
".........그래."

꺼림직한 표정을 짓는 그는 억지로 내 대답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다소 황당한 소리지만 정말 사실인 걸 어쩌겠어. 오히려 울면서 자기 교복을 입고 가라고 하는 걸 말리고 왔다.


"...그런데 그 꼴로 여기까지 온 거니?"
"그야 샤워실이 여기 밖에 없는 걸.........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이야."
"체육 수업 없어서 안 가져왔는데......카오루, 니 체육복 좀 빌려줄래?"
"...정말이지..."
"미안, 고마워."

카오루가 계속 한숨을 쉬면서 탈의실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는 데.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건가. 당사자는 이제 괜찮은데, 카오루는 여전히 초등학교 때 일이 신경쓰이는 듯 하였다.

카오루 입장에선 자기도 가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사실 그런 이야기를 그의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한다는 건 알지만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그때나 이제나 여전히 잊지 못하는 구나. 그 모습에 오히려 카오루에게 잊고싶은 기억을 준 것같아 미안했다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카오루의 체육복을 받으면 카오루 역시 안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마, 냄새 별로 안나니까." 그거 때문이 아닌데. 그런게 아니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카오루,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좀 늦을지도 몰라."
"먼저 가라니...........됐어. 기다릴게.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아니, 늦을 거같으니까 먼저 가라니깐."
"실명, 빨리 들어가."

카오루가 화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아, 알겠어. 오랜만에 보는 찡그린 미간을 보고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옛날에 베란다 넘어서 오지 말라고 혼났을 때 이후로 보는 건 오랜만이다. 무슨 이런 상황에서만 저러니까 꼭 아빠같네. 이따가 편의점에서 봉투라도 하나 사야겠다. 집에가서 얼른 교복 빨아야지. 뜨뜻한 샤워 물줄기를 맞으며 썩은내를 씻어냈다. 생각보다 걸레 냄새가 잘 안빠지네. 도대체 얼마나 더러운 걸레였던 거야. 냄새가 가실 때 쯤 샤워기를 끄고 몸을 닦아 받은 체육복을 입고 나오면 시간은 꽤나 흐른 듯 하늘이 어둑어둑 했다. 벽에 기대서 핸드폰을 보던 카오루는 내가 나오면 액정화면을 끄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명, 아주머니께 연락했어. 좀 늦을 거라고." 얘가 그런 거 까지 하고 있었나.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다. 아주 조금 내가 얘한테 붙잡혀 사는가 하는 배은망덕감도 있지만. "아...고마워, 뭐라셔?" 가방과 교복을 들어 그에게 다가가면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칠칠치 못하다고 그러시더라." 참, 아무리 우리 엄마라도 그건 좀 심하진 않나.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걱정끼친 내가 나쁘긴 하지만. 툴툴 거리면서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 카오루도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맞는 말이잖아, 실명인 너무 조심성이 없어. 평소에도 자주 듣던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어 나는 시선만 돌릴 뿐이였다.

"아주머니께서 저녁 먹고 오라고 하셨어. 먹고 싶은거라도 있니?"
"입맛 없는데......"
"실명...그러면서 사면 먹을 거 잖아."
"야...뭐 맞는 말이긴 하지...내가 탐욕스러운 돼지지..."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잖아...그래서? 어디가고 싶어?"
"난 모르겠어, 음, 음음. 카오루는?"
"그럼 무난하게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자."
"오, 좋다."


노을은 별들에게 쫓겨 어느새 산봉우리 밑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해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달님이 고개를 쏙 내밀듯 하다. 시계를 보면 8시를 넘어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근데 곧 여름인데 왜 이렇게 해가 빨리 저물지. 마지막 노을을 맞으며 황금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카오루를 바라보면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악재에 악재가 겹친 듯 했다. 친구와 있었던 일은 악재가 아니였지만, 정면으로 자신과 바라보는 건 꺼름직한 일이였다. 그런 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받아들여야 할 때 하는 짓이니까.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지만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깨닫는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순정을 바친 상대가 가만히 와주길 바랬던, 그가 변해주길 바라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통감했다.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렇지만 제일 짜증나는 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희미하게 속삭이는 자기합리였다. 어쩔 수 없잖아, 만약에 친구라는 관계조차 깨지면 끝이야. 최악을 떠올리며 스스로 끝을 만들어내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니?"
"어? 왜?"
"표정이 안 좋길래."
"아니...그런 일 없었는데."


이번에는 억지로 수긍조차 안하는 카오루의 표정은 기가 막혀 보였다. 적어도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는 얼굴이다. 맘 같아서야 무슨 일인지 조잘조잘 이야기 하고 싶지만, 본인에 관한 일이니 쉽사리 입을 열기 어려웠다. 별로 얘기해봤자 좋을 거도 없고. 시선을 피하며 입을 우물거리지마나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게 얼굴을 찔러온다.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쳐다볼 지경이였다.


"음...그게...오늘 친구한테 게으르다는 얘길 들었어."
"그건 평소에도 듣는 소리 아니니?"
"너 방금 뭐랬어?"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게으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울컥 화가 치솟았다. 왜 저렇게 얄궂은 말만 꺼내는 거지? 성이 난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나기사 카오루는 내가 욱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인간 관계 같은 거 있잖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나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왜 먼저 다가가지 않냐고. 가만히 있냐고. 멍청하게 있다가 끝나면 납득하고 냅둘거냐고..."

카오루는 흠, 하고 말 끝을 흐렸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 모습에 괜시리 부끄러워졌다. 난 왜 이런 얘길 얘한테 하고 있는 거지? 당사자인데. 카오루는 이게 자기 얘기란 걸 알면 어떻게 반응 할까.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재빠르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래서 그냥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거 같아서 좀 우울해하고 있었어. 그게 다야. 끝."

머리를 긁적이는 걸로 쑥스러움을 씻어내려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역시 괜히 말했나. 아까부터 왜 계속 보기만 하는 거야?

"실명."
"으, 응?"
"남이 와주기 만을 바라는 게 어리석은 거니?"
"어?"
"너가 생각하기엔 어때?"

카오루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였다. 유난히 진지해 보이는 얼굴은 정말 그 답을 알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마치 수학문제에 정해진 답을 찾는 것 마냥. 부드럽게 내 의견을 묻는 그 목소리는, 평소에 카오루 같지 않았다. 왠지 내가 모르는 나기사 카오루를 보는 듯 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글쎄...난......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는 내 감정을 알고 있어도 상대방은 모르는 거니까......물론 서로 상호간에 애정이 존재하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순 있겠지만...정말 중요한 건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그리고 내가 남을 좋아해서 같음 감정을 느끼가 바란다면, 적어도 남이 날 좋아할 수 있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 데? 도저히 내 말을 끝맺을 수 없어 그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 감정이란 건 너무 복잡해서,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상처 입는 걸 두려워 하기 때문일 거야. 그건 그 누군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서일 수도 있고, 자기혐오로 주저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 나는...그게 안타깝고 불쌍하지만...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사람은 한 순간의 마음으로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마음을 소중히 여기니까."

마음이 상처 받으면 살아갈 수 없을정도로 외로운 거 뿐이야. 카오루는 나지막히 그런 말을 꺼내었다.

"사실...잘 모르겠어."
"뭐가?"
"너와 신지군을 보면서, 리린의 감정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지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리린의 마음, 리린의 삶을. 지금도 리린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어."

리린?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 그는 알 수 없는 단어를 꺼냈다. 독일어인가? 내용으로 보면 사람을 말하는 거 같은데. 그나저나 카오루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니. 처음 안 사실이였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니까. 물론 사람에게 벽을 치는 성격이지만, 나나 신지군을 대하는 걸 보면 카오루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카오루, 사람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거야?"
"맞아."
"그런거 치곤 너 엄청 잘 지내잖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지는 알지만 그 이면은 모르겠어. 내가 그를...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지. 무엇이 그를 위한 행복이고 옳은 건지, 알 수가 없어."


카오루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자신 없어보이는 눈이였다. 카오루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거야...그걸 알면 이 세상에 안 행복한 사람이 어딨겠어?"

내가, 남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을리 없다. 원하는 물건이나 명예, 금전은 쉽게 알 수 있지만 행복은 감정이니까. 나만 해도 오늘 친구에게 너는 뭐가 하고 싶은데? 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남의 진정한 속내라는 건 그렇다.
카오루를 좋아한다고 넌지시 얘기를 들은 그녀도 내 행동을 보고 그 말을 의심하였다. 마음이란 보여줘도 금방 흐지부지 되는 거다. 계속 보여주고 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쉽게 알 수 있겠어?

"아무도 진정한 행복같은 건 모르고 옳은 것도 모르지. 그냥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거 잖아?  옆에 있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같이 생각하는 거 아냐? 원래 행복이란 게 주관적인 거 잖아. 너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남은 행복이라고 생각 안 할수도 있지."


카오루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그런 건 혼자 정하는 게 아니잖아.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지. 상대방이 무얼 생각하는 지 알아야지.
...그리고 계속 알려주고 들어야 하는 거 잖아. 끊임없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알려줘야 하고, 신뢰를 잃기 전 까지 계속 보여줘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귀찮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까 어떻게든 계속 알려줘야 한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아야 한다.

"결국...음 대화가 중요하다는 거 아닐까?"
"대화?"
"카오루는 그 알고 싶다는 사람하고 그런 얘기 해봤어? 행복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카오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질렀다. 얼핏 얼굴에 슬픈 빛이 맴돌았다. 왜 그걸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드디어 깨달았다는 표정인 것도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루의 속 내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사람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티비에 나오는 사기꾼이나 설득가들도, 가만보면 다 상대방의 대화를 엄청 듣기만 하던 걸.
어느 틈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고 시답지 못한 농담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웠다.

"실명."
"으, 응?"

입을 삐죽이며 카오루에게 고개를 돌리면 그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나는 오히려 긴장을 느꼈다. 처음으로 카오루와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지 알아서 좋았지만, 그 반응은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내게 핀잔을 주려나? 아니면 덕분에 좋은 얘길 들었다고 고마워 할려나?

"패밀리 레스토랑, 도착했어."
"......아, 그래..."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싱거운 평범한 대화였다. 방금까지 그렇게 무거웠던 분위기가 주전자의 김이 빠지는 것 마냥 사라진다. 내 긴장감도. 보통 저런 대화를 하고 나면 무언가 말하지 않나? 왜 얘는 없던 일 마냥 치부하는 건데. 괜히 떨던 내가 바보 같았다.

"아, 맞다. 카오루, 체육복 빌려준 거랑, 엄마한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아깐 경황이 없어서 대충 말한 거 같아서. 너 아니였으면 큰일 났을 거야. 그 꼴로 어떻게 돌아가? 약간 자조하듯 웃으며 동아리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카오루는 별말씀을. 이라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실명인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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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목 뒤를 넘는 카오루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만해도 시원스럽게 목을 내놓던 그 머리는 어느새 다시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초등학생 때도 저 머리모양이였지. 잘 모으면 묶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머리 묶어도 돼?"
슬며시 카오루의 뒤에서서 말을 걸면 그는 고개를 돌리며 "너 말이니?" 라고 물어보았다. 뭐야, 내가 내 머리를 묶는 데 그걸 너한테 왜 물어보냐? 어이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풀이자 그는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슨 네 노예야? 내 머리 묶는데도 너 한테 허락 받아야 되냐."
"그러게."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 말에 기운이 빠졌다. 카오루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도복을 곱게 접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고무줄을 꺼내 그의 머리를 묶기 시작했지만 카오루는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적어도 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오, 꽤 잘 어울리네!"
"그래?"
"내 작품 멋지다."
"내 얼굴은 네 작품이 아니지."
"나르시시스트."
"농담이야."

이쁘게 뻗친 머리가 꽁지를 내어 묶이니까 보기가 아주 좋았다. 깔끔하게 정돈된게 단정한 멋이 난다. 거 봐, 잘생긴 애들은 머리 묶어도 잘 어울린다니까. 뭐 그거같이. 그, 아티스트같잖아. 세련되어 보여.
 토끼꼬리 처럼 쭉 삐져나온 꼬랑지를 내보이며 카오루는 그게 뭐냐며 작게 웃었다. 나는 그의 꽁지머리를 쓸어내리듯 만져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진짜 잘 어울린다."
"넌 머리묶은 남자는 별로 라고 하지 않았니?"
"그치 긴 머리는 좀...뭐 잘생기면 다 잘 어울리지만."

미소지으며 카오루의 머리카락을 사락 만지지만 그는 흥미없는 표정을 했다. 하긴 잘생긴 사람이 맨날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감흥은 없으려나. 다른 반의 종례가 끝난 듯 동아리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은 나기사에게 인사를 한다. 그 다음은 나. 평소처럼 그 인사를 돌려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목소리는 반응없이 나기사의 주변에서 꺄르륵 떨기 시작했다.

"나기사군 그 머리 뭐야? 어울린다!"
"나기사군이 한 거야?"
"아, 응. 조금."
"귀엽다~아니, 멋있으려나?"

역시 잘생긴 사람의 조그만한 변화에도 여자들은 재빨리 알아차리는 구나. 아니 미소년이니까 더 잘 알아차리는건가. 그렇겠지. 나는 그녀들의 나기사에 대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며 자리를 옮겼다. 사과머리로 했으면 분명 한대 맞았을거야. 눈에 선하다. 그 혼잣말이 저에게 들린 듯 나기사가 뒤에서 당연하지 라고 쏘아붙였다. 

"나기사군은 멋있으니까 무슨 머리든 잘 어울려~"

 부원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카오루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기묘하게 사람 피부보다 흰 머리카락에 점점 그녀의 손 끝이 닿을 듯 하다. 그러나 카오루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피했다.

살짝 몸을 뒤로 빼는 행동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역시 손을 뻗었던 당사자는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다. 나 또한 카오루가 부원의 손을 피한 것을 눈치챘으니까. 대화에 열이 오른 다른 부원만이 눈치 못채고 있었다. 나기사의 행동을 깨달은 우리 둘만이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찰나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간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손을 거절하면 어떡해! 하지만 나조차도 잘 모르는 누군가가 만진다면 싫어했을 거다. 그래도 넌 부장이잖아, 부원한테 그러면 어떡하니! 그렇지만 부장이라고 다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
나기사군, 머리모양 바꿀 생각 없어? 다른 부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당황해하던 아이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 그러게. 이제 3학년이니까 머리 검사도 안하고...머리 길러보는 것도 어때?"
"응응, 아니면 펌하는 것도 멋있을 거 같아!"
"그, 그거 좋다."
"거봐 역시, 실명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대걸레를 두어개 갖고 오면서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곤 각각 부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다행이다. 어찌저찌 카오루의 행동은 넘어간 것 같다. 근데 왜 당사자도 아닌 내가 신경을 써야하는 거야? 힐끔 쳐다본 카오루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잠깐 나 고문 선생님께 갔다 올게."
"응, 나기사군 잘 갔다와."


동아리실을 떠나는 카오루를 부원들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였다. 고문선생님이 나기사를 부를 일이 있었나? 없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설령 카오루가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동아리실에 있는 건 거북할테니까. 아무리 뻔뻔함에 극치인 나기사 카오루라고 해도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할 것이다.

"실명이는 말야."
"어, 어?"
"좋겠다. 나기사군이랑 친해서."

약간 부러움이 섞인 앙증맞은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다행히 별 질투는 없어보였다. 

"그런가...? 너도 그 농구부 에이스랑 친하잖아. 걔 잘생기고 인기 많던데."

나는 다른말로 그 부러움에 대답한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 부끄러운듯 한명이 가볍게 나를 치며 웃었다. 원래 이런식으로 이 관계에 부러움을 나타나면 나는 상대방의 인간관계로 맞받아치곤 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회피는 대화주제를 손쉽게 바꾸고 관심도 돌려냈다. 솔직히 나랑 나기사가 남들한테 부러움을 살정도로 애틋하거나 뭐 그런건 아닌데. 무신경 하면 더 했지. 학교에서도 서로 말은 잘 안하는데, 나기사가 여학생들에게 눈길을 받으면 어느새 우리 관계는 소문으로 퍼지고 나는 좋건싫건 한번쯤 입에 오르게 되었다. 연예인하고 친분있는 사람은 이런 느낌일려나.

"실명아, 이쪽은 우리가 닦을게."

"그래, 그럼 난 탈의실 할게."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 대걸레를 물통에 넣고 있으면, 귓가를 소녀들의 말소리가 톡톡 건들였다.

아, 그러고보니 말야. 환기를 시키려 반쯤 열어둔 여자 탈의실 문틈으로 그것이 들어온다. 


"나기사군 무슨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도 있던데."
"아 진짜? 있을법하네. 모든지 다 가진 사람인가. 멋지다."
"어어 맞아. 근데 좀 무섭지 않아? 오히려 그렇게 완벽하니까 더 큰 결점이 있을거 같아."
"뭐야, 드라마냐? 근데 그것도 상상이 가서 무섭네."
"아까도 그랬고..."
"아까? 뭐?"
"내가 만지려니까 피했어."

아냐, 그건 너가 잘못한 거 잖아. 사람 무안준 건 맞긴 하지만! 용기있게 그녀에게 말을 꺼내진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그 말을 부정하였다. 

"그건 네가 잘못했네. 사람 함부로 만지면 기분 나쁘지."
"그래도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갑자기 그렇게 거부하니까 놀랐단 말야. 평소엔 상냥한데."
"흠, 하긴 좀 놀라긴 하겠다. 그러고 보니 나기사군 상냥하긴 한데 묘하게 사람들하고 안 어울리는 거 같아."
"그지? 가만보면 우리반에서도 단짝친구 같은 거도 없고."

방금전 까지만해도 나기사에 대해 연심을 피워내었던 여자애들이 어느새 어두운 대화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쟤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그나저나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은 또 뭐야. 남의 가정재력은 어떻게 알았대?

"나기사군, 멋있는 데 좀 무서운 거 같아."
"알거 같아. 좀...뭐랄까 나도 나기사군 개인적인 얘기 들은 적 없어."
"우린 같은 동아리 부원이니까 그나마 대화나눈 거야."
"나누는게 이 정도야? 진짜 모르겠네."
"혹시 평소에 상냥한 거도 다 연기 아닐까? 사실 막..."
"얘들아, 청소 다 했어?"

부원들에게 다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표정은 잘 유지하고 있나? 목소리도 감추려곤 했지만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올라간 입술이 딱딱하다. 아이들은 놀란 듯 나를 보며 커다랗게 뜬 눈을 내보였다. 그래 얘들아, 내가 있었단다.

"다, 다 했어!"
"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뒷정리 내가 할게. 먼저가도 돼."
"으, 응...저기..."
"어?"
"아, 아냐. 고마워. 우리 먼저 갈게."

재빠르게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곤 동아리실을 떠났다. 역시 누군가의 뒷 얘기를 듣는 다는 건 불편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카오루라니, 최악이다. 카오루도 저런 소릴 많이 들었을까?
물론 나도 잘나가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른 적은 있지만, 카오루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울면서 카오루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카오루도 이런 기분이였나.

나기사도 꽤 고생 하겠구만. 아무짓도 안했는데. 없는 꼬리를 남들이 만들고 있어. 나중엔 나기사군은 사실, 이러면서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는 게 아닐까.
좁은 시골인 만큼 소문은 허항되고 빨리 퍼진다. 우리학교가 심한편이긴 하지만 걔도 행동 하나에 입방아 상대가 되니 피곤하겠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스스로만 신경쓰느라 그는 맘편히 생활한다고 오해해버렸다. 실은 진짜 그런진 모르지. 카오루는 남 신경 안쓰니까. 그래도 미안한 감이 다소 들었다. 한동안은 말 대답하지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들을까?

그래도 카오루의 얼굴은 보면 결국 화를 내고만다. 얘가 만약 차분한 여성이 이상형이면 난 당장 대상 밖이 되버리고 말거야. 그치만 맨날 먼저 시비거는 건 다름아닌 나기사군인걸. 언제 머리끈을 풀었는지 본연의 머리모양을 한 카오루가 내게 다가왔다. 자, 여기. 그가 주먹쥔 손으로 내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놓는다. 머리끈이였다.



"머리 왜 풀었어..."
"아니...왜 그런걸로 화내니."
"화내는 건 아니고 그냥 아까워서."
"그런 머리 난 별로 안 좋아하거든."
"고문 선생님 하고 무슨 얘기 했어?"
"설마 그 말을 믿었니?"

역시 도망간거구나. 알면서도 속아준거야! 카오루에게 심통을 부리면 그가 가볍게 웃으며 거짓말, 이라고 말했다.

"오늘 신지군하고 같이 돌아가?"
"네가 신지군이라고 부르지 말아줄래?"
"하여간 저 독점욕 진짜."

오늘은 같이 안가. 나기사가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솔직하게 대답할 것을 굳이 남 신경을 긁어야 하나?


"아 그래?"
"그건 왜 묻니?"
"돌아가는 날이면 오늘은 혼자 정리할려고 그랬지."
"뭐?" 

칼날같이 카오루가 내 말에 대답한다. 내 입에서 나올거라고 생각 못했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니 솔직히 나도 그런일 없을거라곤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도 그 반응은 좀 그렇지 않나. 내가 눈살을 작게 구겼지만 그는 반응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내 행실 탓이긴 한데. 반응이 너무하다. 남의 호감을 마치 신기루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다니. 그나저나 내가 나기사한테 그렇게 인색했나? 얘가 놀랄만큼. 나름 잘해준 거 같은 데 그것도 아니였나.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어느샌가 다시 나를 보고있던 그가 말했다. 

"고맙기는 하지만 실명이 혼자 맡기기엔 걱정돼."
"아, 진짜."

역시 사람은 친절도 사람을 보고가며 베풀어야 한다. 그 증거로 나기사 카오루가 도와준다는 내 말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제부턴 상냥하게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만 도와줄거야. 두번 다시 얘한텐 도움따위 주나봐라.



"됐다 됐어. 이렇게 사람 무시하는 거면 안 그러는 건데. 괜히 말 꺼냈어!"
"글쎄, 언젠간 실명이가 필요할지도 모르잖니."
"때 지났어 이미. 친구 좋은게 뭐냐고 도와줄려는데..."
"난 친구라고 생각한적 없는데." 




뭐.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나기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키가 커서 내려다 보는거겠다만 저런 말을 들으면 그 행동에도 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상처받고 문제가 아니라 매정한 그 행동에 화가 난다. 기껏 좋은뜻 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까탈스럽지. 눈썹을 길게 떨어트리며 나기사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이 마주치면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인색 그 자체야. 


"나 간다."
"같이 가자."
"싫어, 따라오지 마."
"같은 아파트면서, 무리야 그건."
"......몰라. 방금까지 얼음 쏘는 듯 말한 주제에. 같이가자고 하는건 도대체 무슨 심보래?"
"내가? 글쎄, 실명이 너 혼자 착각한 거 아니니?"
"퍽이나!"

이를 들어낼 듯 카오루의 말에 신경질을 냈다. 상냥한 나기사군은 무슨. 참말로 상냥하시면 저런 말을 면전에다 뱉어내실까!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긴 다리를 쭉 뻗으며 다가오는 카오루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뭐야 황새하고 법새도 아니고. 어느샌가 내 옆에 선 카오루가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아." 듣기 귀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애 같긴"
"...뭐야, 나 아니라도 다른사람도 그런 말 들으면"
"가자. 그리고, 다리 아플테니까 그렇게 걷지마. 속도 맞출테니까."
"저게 뭔 생색이야?"
"가방 이리 줘."

나기사는 내게서 가방을 집어 제가 들기 시작했다. 말 반마디를 꺼낸 순간이였다. 뭐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지만 평소와 다르지않은 얼굴로 그는 대응했다. "안 걷니?" 능구렁이처럼 행동하는 그 모양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분위기를 따라갔다. 여기서 그를 무시한다면 정말 카오루가 말한대로 유치한 어린아이가 될 것 같았다.
아무말 없이 카오루와 함께 걸어가면, 남의 속도 모른 체 천연덕 스럽게 그가 이야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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