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월말이라니...내 방학은 밑독이 뚫렸나...뭐가 이리 줄줄새지?"

"새기는. 나기사군하고 알콩달콩 공부했잖아."
"알콩달콩은 무슨..."

괜히 좋으면서 심술을 부린다며 친구는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왠일로 카오루가 나한테 방학 때같이 공부하자고 말해서 좋았지만, 정말 공부말곤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였다. 내가 카오루네 가면, 공부하고 모르는거 물어보고 배우고 공부가 끝나면 집에간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건 누구나 꿈꾸는거지만, 내가 생각했던거랑은 많이 달라 달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것이였다. 조금은 친해져서 상냥해질 줄 알았는데, 더하면 더했지 절대 유해지지 않는 나기사 카오루 였다. 오히려 기초지식도 없는 날 가르쳐서 애를 힘들게 해서 화난거 같고. 카오루는 화났다곤 안했지만 나였으면 짜증내고도 남을거야. 게다가 그 인간 가끔 날 보면서 한숨도 쉬는 걸. 머리 나쁜 날 보며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길 바랄뿐이다.

"실명, 너 이번 축제 갈거야?"
"...아니."
"뭐야, 나기사군이랑 안 가?"
"뭐 어차피 이카리군이랑 가지 않을까? 그리고 더워서 나가기 귀찮아."
"괜한 변명은."
"아 몰라, 너는?"
"나 다음 주에 학원에서 시험 봐서 안 돼."


가볍게 참고서를 넘기며 친구가 말하였다. 뭐야, 주말에도 공부 하려고? 내가 그녀에게 놀란 목소리로 물으면,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뜻한 그 목소리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스물거린다. 난 주말에는 티비보면서 놀고만 있었는데.

"뭐야. 넌 공부하면서 친구한테 공부하지 말고 놀라는 거야?"
"어차피 넌 계속 공부해봤자 나기사군하고 같은 고등학교 못가..."
"방금 뭐랬냐?"
"이 기회에 나기사군 하고 더 친해지라고 그랬지~"

이미 친구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걸 똑똑히 들었지만 그녀는 시치미를 뗐다. 천연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이 눈꼴사납다.


"뭐 난 남자랑 가는 건 글렀고. 너라도 가서 청춘사업 해."
"내가 나기사 뒷꽁무니 쫓아다닐 동안 넌 공부를 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구?"
"갈 남자가 없어서 안가는 거라니까?"

샤프 펜으로 친구의 볼을 찌르면 귀찮은 듯 그녀가 성을 냈다. 쌀쌀맞게 쳐다보는 눈빛에 겁을먹어 펜을 내려놓으면 그제서야 시선이 거두어졌다.

"나기사군 한테 차이면 내가 위로해줄 테니까 한번 권유는 해보는 게 어때?"
"으, 으음...거절당하면 어떡해. 간접적으로 차이는 거 같아서 무서워."
"뭐가 무서워. 죽는 것도 아닌데. 자신감 좀 가져봐."

친구는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였다. 그 응원에 용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약한 용기지만.
그래. 솔직히 나기사한테 어디 놀러가자며 권해도 그 정작 받아들여진 적은 드물고. 카오루도 그 때마다 태도가 똑같았으니까.
친구 말마따나 차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카오루한테 가냐고는 한번 물어볼까.
주말에 큰맘먹고 정한 결정을 월요일에 행하면 굉장히 산뜻한 답이 날아왔다.


"카오루, 너 오늘 축제 갈거지?"
"아니, 별로."
"뭐? 진짜? 신지군때문에 꼭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신지군이 유카타입은 모습은 보고싶지만...아무래도 그가 다른여자애하고 둘이 갈거같아서 말이야."
"아.........힘내."
"그래."

나기사도 신지군한테 차였구나. 사랑하는 이에겐 동정을, 연적에겐 질투를 표한다. 애초에 신지군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까워 하는 내가 심기에 거슬린듯 카오루가 무뚝뚝하게 샤프로 내 문제집을 두드렸다. 알겠다니까. 샤프를 집어 영어 문제를 풀고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뜻밖이였다.

"실명이는?"
"어...나? 글쎄 별로...유카타 사둔것도 없고..."
"여자애답지 않구나 역시."
"야,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야 그건. 갈 약속도 없고...사람많은거 싫어하잖아, 나."
"그렇지. 운치있게 불꽃놀이 소리들으면서 공부하는건 어때?"
"운치가 아니라 울지...불꽃놀이는 보고싶다. 여긴 빌딩때문에 안보이잖아."

매년 축제는 집근처 공원에서 이루어졌지만 항상 우뚝솟은 건물들 탓에 끄트머리 불꽃만 보고 말았었다. 예쁘게 밤하늘에 수놓아진 불꽃들은 참 예쁜데. 사람들하고 부딪치는건 싫은걸. 밖에나가기도 귀찮고. 올해도 역시 아쉽지만 불꽃이 터지는 소리로 배를 채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기사군이 딴 여자하고 팔짱끼며 축제에 안간다는건가.

"그러고보니, 초등학교때 실명이랑 축제에 갔었는데 네가 울었었지. 잉어잡기에 열중해서 용돈 다 써버려서, 혼날거라고 울던게 떠올라."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혹시 그 일때문에 축제에 안가는거니?"
"...그럴리가 있겠냐."

하여간 기억력도 좋다니깐. 소년은 씩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지금은 과소비가 아니라 과하게 빈둥거리는게 문제라고. 거 참 능글맞은게 구렁이라니깐. 그치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결국 잉어를잡긴했지만 500엔을 다 써버려서 울고말았지.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게 뻔했으니까. 울던 나를 카오루는 어떻게 했더라. 다독여줬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나. 그나마 희미하게 크게 안 혼난건 떠오르는데.

"그 때 잘 기억은 안나는데 별로 안 혼난건 생각나...하기사 그렇게 처량맞은데 화낼까 싶지만."
"...실명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나쁘니까 도박은 안하는게 좋을거같아."
"여러가지라니, 뭐야?"

머리나쁜건 인정하겠지만, 그건 공부하는 머리일 때 얘기다. 그거 아니면 나 꽤 똑부러지는데, 나기사 카오루군 정도는 아니지만. 도대체 뭘보고 멍청하다는거야. 맹목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는 그의 험담에 저절로 미간이 찌풀여졌다. 카오루는 이런 나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문제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진짜 차갑네. 그의 단호함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공부 안 하니?"
"해..."


무심코 시곗바늘을 보면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낼시간이네. 별로 집중이 안된다. 축제가 6시에 시작이였던가. 한 일곱 여덟시 쯤에 불꽃놀이가 시작하려나. 지금쯤 친구는 준비하고 나가느라 급급하겠지. 강물마냥 흐르고있던 생각을 멈추면 카오루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라 뭐지.

"오늘은 이 쯤하자."
"어? 어.......미, 미안...화났어?"
"화 안났어."

내가 너무 딴 생각을 한 게 거슬렸나. 카오루는 평소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공부하자고 부른애가 딴청만 피우면 나같아도 화날거 같은데, 양심에 찔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지만 카오루는 이런 나를 배려한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실명. 내일까지 단어100개랑 문법80문제 풀어와."
"........."
"안 풀어오면 벌금 알지?"
"...네이......"


밤하늘에 떠다니는 불꽃 조각마냥 내 정신도 흩어지겠군. 하지만 나기사 카오루군은 나보다 더 풀어오면 풀어왔지, 절대 숙제를 안해올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카오루가 정말 사람일까 궁금해질때가 있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애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열면 또 까칠한 말투로 나를 건들일게 뻔하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도 그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자기 딴에는 티를 안낸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다 보이는 걸. 카오루는 이런 말을 싫어한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난 뒤 책상 앞에 앉으면 왠일로 핸드폰이 울려 대었다. 스팸 메일인가 싶어 메시지함을 확인하면 착신자의 이름이 명확하게 써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놀란 마음에 잽싸게 문자 내용을 보지만 극히 짧은 문장만 써 있었다. '옥상으로 와.' 내가 무슨 부르면 달려나가는 애완견인 줄 아나. 하지만 심심해서 남을 부르는 성격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투덜 거리면서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왜 갑자기 옥상으로 부른걸까. 옥상에서 볼 일이 있을 건 아닐테고, 보통은 방에서 대화를 할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장소가 옥상인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이 영 개운하지가 않아. 무슨 일이지. 조심히 옥상문을 열고 발을 내딛으면 익숙한 또래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름 해는 꿋꿋하게 하늘에 떠 있어, 단숨에 누군지 알아채었다.


"카오루?"
"아, 왔니? 이쪽으로 와."
"왜 옥상으로 부른거야? 무슨......어, 불꽃놀이 세트?"

솔직히 장난으로 결투같은 걸 떠올리긴 했지만, 내가 연애감정을 품은 상대는 이카리군이 아니라 그럴 일은 없었다. 정답은 무얼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왠지 기운이 쭉 빠지는 듯 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네가 갖고 온거야, 물어보면 카오루는 대답했다.

"설마, 카지씨가 갖고오신거야."
"하기사......네가 사올리는 없지."

아, 카지씨. 아직 일본에 계셨나. 카오루는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물이든 양동이를 곁으로 옮겼지만 카지씨가 무슨 말을 했을진 대충 가늠이 갔다. 젊은 나이가 아깝다며 탄식을 내뱉었겠지. 특유의 가벼운 미소가 떠오른다. 카오루는 라이터를 바닥에 놓곤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왠지 모르게 장난끼가 돈다.

"라이터? 카오루 너 담배펴?"
"........."
"미안, 미안. 사실 말야, 니가 옥상으로 불러서 무슨 결투라도 하는 줄 알았어. 보통 옥상으로 안 부르잖아."
"결투?"
"뭐......그런 거 있잖아, 비오는 날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싸우는 남자 둘...같은 거. 너 같은 경운 이카리 신지군일려나. 신지군을 두고 너랑 나랑 싸울린 없지만."

조금 심기가 거슬린듯 카오루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농담도 못하나. 그래, 나도 반성하니까 이제 더 이상 이카리 신지군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카오루와 같이 나 또한 포장을 뜯어 막대기를 꺼냈다. 카지씨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른스러운 일을 하는 구나. 위험한 분수나 로켓폭죽은 없었다. 걱정해주는 건 좋지만 왠지 초등학생 취급 받는 거 같아.


"실명, 이리 줘."
"어? 아, 고마워......근데 있잖아, 왜 갑자기 불꽃놀이 하려고 하는 거야? 나기사 이런 거 좋아했던가?"
"가끔씩은 좋잖아."
"아까 운치 있게 폭죽소리 들으면서 공부하라고 했으면서."
"조심해."


카오루가 라이터로 막대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화약과 함께 내 말은 불꽃에 태워져 버린 것이다. 사람 말 끊는 건 선수라니까. 옹졸맞게 끝자락에 피어있던 불꽃은, 점점 심지를 타고 올라와 반짝이며 톡톡 불꽃을 터트렸다. 분홍색 불빛이 꼭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인다. 카오루 또한 자신의 심지에 불을 붙이곤, 이내 주황색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을 받는 부드러운 은색은 마치 석양빛에 비춘 것 마냥 갈색을 띄워냈다. 마치 갈색머리를 한 카오루를 보는 것 같다. 빨간 눈동자 안에 솟아오르는 오렌지 빛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빛깔을 마음껏 뽐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이 아닌 자신을 보는 게 의아한 듯 카오루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수줍어져,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게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 생각났다."
"뭐가?"
"잉어뽑기로 돈날렸을 때. 니가 울지말라고 나한테 사과사탕 사줬었던거. 넌 기억 안나나?"
"기억나. 먹다가 갑자기 울고 멈추고 그랬지."
"그러고는 같이 우리집 가줬지? 카오루가 돈 잃어버려서 내가 빌려줬다고 거짓말 해줬던거 같아."
"실명이 답지 않게 잘 기억하는구나."
"야아......됐다, 됐어. 그땐 고마워."
"그날 밤에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괜찮아."


무덤덤하게 그가 인사치례를 했다. 하여간 나한텐 부드럽게 말 안한다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 나름대로의 배려인 걸 알아, 아무 볼맨소리 없이 가만히 환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하늘을 향해 불꽃이 커다란 함성을 터트렸다. 놀란 우리 둘은 등을 돌려 멍하니 남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왠일인지 예쁘게 퍼지는 폭죽이 깔끔하게 보였다. 쏘는 위치를 바꾼건가. 이번엔 빌딩에 안 가려지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카오루가 붙여준 폭죽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늦게 시선을 돌린 그가 내게 신기한 듯 물었다.



"실명, 저거 안 보니?"
"...난 이게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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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한번 크게 몰아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시끄럽게 소리치지만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듯 했다. 그래, 이미 어쩔 수 없다. 그녀에게 옥상으로 오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 서로는 원하는 것이 일치하니까. 그리고 그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존재다. 반드시 누구 하나는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흑백싸움이다.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을 옷으로 닦고선 문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면 새하얀 시멘트와 퍼런 하늘, 그리고 눈에 지울 수 없는 보랏빛 소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그래."



대화는 곧 단절 되었다. 말을 꺼낼 필요 조차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녀가 나를 불러낸 이유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긴 말 안하고 짧게만 말할게요. 선배한테서 떨어지세요."

"내가 왜?"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아내면 소녀의 이맛살이 치몰린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너하고 하쿠노,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니?"

"어머, 보기보단 다르게 꽤 성격 있으시네요."




그야 당연하다. 본래 내 성격은 사람과 말 다툼 조차 어려워 했지만, BB의 견제 덕에 적어도 그녀에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하쿠노와 어디 놀러가거나, 재밌는 얘기를 나누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 받을 때 항상 뒤에서 노려보았다. 불러내서 협박도 했었다. 보통 여고생이 기껏해야 으름장을 내놓는 것이 무슨 협박이라고 하겠지만, 그걸 들은 본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꼈으니 협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이 선배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미모, 운동, 공부 재색겸비 그 자체인 저한테 아무리 노력해봤자 수준 떨어지지 않나요?"

"너 말야, 하쿠노가 수준을 나눠서 사람을 본다고 생각하는 거니?"

"윽..."

"거기다, 하쿠노는 네가 사람 불러놔서 으름장 놓는 거 알면 바로 화낼텐데. 하쿠노는 네가 착한 애가 아니란 건 알지만 나쁜짓을 하는 걸 눈 감아주는 무른 사람은 아니거든."



물론 하쿠노는 BB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끼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 횡포를 모른척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혼내면 혼냈지. 그리고 눈 앞의 소녀는 하쿠노가 자신을 꾸짖는 걸 무서워한다. 혹시 그에게 미움 받지 않을 까 하고. 이것이 바로 그녀의 약점이다.

하지만 하쿠노에게 여지껏 내게 으름장을 놨다는 사실이 알려질지라도, 하쿠노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각오겠지. 그 위험성을 안고갈 정도로 하쿠노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내 각오가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BB는 분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 뻔뻔한 말투...선배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도군요!"

"누가 뻔뻔하다는 거야. 애초에 맨날 하쿠노한테 내숭 부리는 건 누군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쁜 짓 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안 돼!"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아주 웃기고 있어. 자기는 맨날 하쿠노한테 말 끝마다 하트를 붙이고, 보는 사람 녹을 정도로 애교 피우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음마냥 차갑고. 그게 내숭이 아니면 뭐가 내숭이야?




"...다음 주에 해수욕장 근처에서 불꽃놀이 축제 열리는 거 알죠?"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그 축제를 말하는 건가? 나는 짧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BB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곤 의지깊은 눈동자로 말하였다.




"저하고 내기해요."

"내기? 무슨 내기?"

"그 불꽃놀이 축제에, 선배랑 누가 같이 갈지 내기해요. 만약에 제가 이기면, 당신은 이제 선배한테 떨어져 주세요."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해야 되는 건데?"

"대신, 제가 지면 선배한테서 떨어질게요."




BB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을 내걸며 내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가 하쿠노한테 떨어지면 나한테야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질 경우의 패널티가 너무 크다. 완전 모 아니면 도잖아? 항상 BB가 방해하는 바람에 하쿠노랑도 겨우 약속 잡아서 놀러가고 하는데. 만약 내기에서 진다면 하쿠노한테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다는 거잖아? 그건 싫다. 내가 내기 결과를 무시하고 다가가려고 해도, 이 소녀는 죽을 힘을 다해 날 방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질지도 모르는 경기는 거절하는 게 나을거다. 애초에 난 도박 같은 건 싫어하니까.

 



"...아니, 그건 불이익이 너무 커. 난 안해."

'흥, 저한테 선배를 빼앗길까봐 무서운가 보네요? 그렇게 자신이 없나요? 뭐 제가 당신부터 백배 천배 선배한테 어울리긴 하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야 당연하지. 누구하고 사귈지 결정하는건 하쿠노니까. 하쿠노의 선택을 내가 어떻게 막아? 네가 아무리 사람 골탕먹이고 협박하는 무서운 여자지만, 하쿠노는 그런 너라도 선택할지 모르잖아."

"...말이 꽤 험해지셨네요. 예전엔 으름장만 줘도 울먹거렸으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인데?"


BB를 향해 원망을 가득담은 눈초리를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해버렸다. 역시 이 소녀 아주 무서운 여자다.



"좋아요, 그럼 내기 결과내용을 바꾸죠. 진 사람이 선배하고 일주일동안 접촉하지 않는 거에요. 당신하고 선배는 같은 반이니까 인사까지. 제가 선배 옆에 꼭 달라 붙어도 지켜만 보는 거죠."

"아까부터 네가 이길것 처럼 얘기하네?"

"흥, 그야 이렇게 귀여운 후배를 버리고 당신같이 개성없는 동급생을 고를리 없잖아요?"

"허세부리긴. 너 그러면서 하쿠노한테 차이는 거 무섭지?"



그리고, 하쿠노가 진작에 그런 끼부림에 넘어가는 애라면 진작에 너한테 넘어갔을걸? BB를 향해 조롱을 던지면 그녀는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속이 약간 뚫리는 기분이였다.




"좋아, 그 조건으로 내기 받아들일게. 8월 1일은 일요일이니까, 토요일 방과후까지 하쿠노에게 선택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어때?"

"좋아요. 대신, 선배가 그 전에 누군가를 선택해도 승패는 뒤집을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흥! 반드시 이겨서 선배옆에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있는 당신 얼굴을 떼어버릴 거에요!"

"혀 내두룰 정도로 붙어있는 게 누군데? 연하인 거 어필하면서 알랑거리면서!"

"어머, 제가 선배보다 어린게 부러우신 가 봐요? 그러고보면 선배는 연하가 취향인 거 같던데."

"웃기네! 내가 물어봤는데 상관없다 그랬거든? 그리고 난 하쿠노랑 동급생인 게 아아주 좋아.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반이니까 매일 얼굴도 볼 수 있고."




만화 속에서 나올 것 마냥 그녀와 나는 이글거리는 불꽃을 등 뒤에 맨 체 서로를 못마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구겨진 이맛살이 그대로 주름으로 남을 것만 같다.



"토요일 날 당신에게 승리의 선언을 날릴테니까 각오하세요!"

"너야말로 졌다고 집에가서 일기쓰면서 울지나 마!"



그렇게 BB와 나의 목숨을 건 대결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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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사, 나기사. 있잖아
"..."
"쫌. 무시하지 말고! 나 저번에 신지군 봤는데, 걔 되게 귀엽더라."
"...?"

나기사 카오루가 관심을 가질 이름을 입에 올리면 그는 눈썹을 약간 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니가 신지군을? 의외네."하지만 그도 잠시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활의 대림끝을 닦았다.
이카리 신지의 이야기를 꺼내면 관심을 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 반응이 없네.


"반응이 뭐 저래...생각보다 안 낚이네..."
"... 내가 무슨 물고기니?"
"소중한 이카리 신지의 이름을 꺼내면 화내거나 기뻐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거든."
"신지군이 누굴 만나든 난 그의 뜻을 존중할 뿐이야."

무표정으로 먼오금을 닦는 그를 보며 저도모르게 손뼉을 쳤다. 역시 나기사 카오루의 아카페 사랑은 대단하시다.
그의 성스러운 성애 덕분에 일부러 떠본 내가 죄책감이 들 정도니 원. 얜 분명 사람이 아니라 인외존재일 거야. 

"잡담할 시간 있으면 너도 도와줄래?"

말투는 고운데 그 뜻은 상냥하지 않은 그의 말이 화살촉처럼 나를 찔렀다. 확실히 윤리적으로 눈 앞에 친구가 혼자서 동아리 일을 하고 있으면,
아니 같은 동아리 부원으로써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카오루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티끝만큼도 없었다. 왜냐면 내가 도와줄 걸 당연시 하며 자처한 일이니까!


"카오루, 있잖아."
"뭐니?"
"난 너 도와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활 닦는 걸 나하고 둘이서 하겠다고 쌤한테 말한거야?"
"...실명. 같은 부원이 혼자서 이 많은 활을 닦고 있는 데 도와줄 생각도 없던거니?"
"아니 내말은, 이 일은 원래 2학년 애들이 모여서 하는 건데 왜 날 시키는 거냐고!"


도대체가 말야. 왜 하필 나냐고. 나기사 카오루님께서 일손이 부족한 데 누구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 부원애들, 아니 전교의 여학생들이 이리저리 모일텐데.
그리고 솔직히 활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동아리 인원도 간당간당해서 열 몇개조차 안되는 데. 허나 맘 같아선 활이고 나발이고 다 부셔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왜냐면 카오루한테 온갖 볼맨소리를 내뱉어도 정작 이 놈의 부탁은 거절 못하니까. 참 나도 멍청한 사람이다. 이러니까 계속 종 취급받는 거지. 딱잘라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기다 날 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찬 인간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이건 완전 답이 없다.
인간은 흔히 발전하는 동물이라곤 하는데, 내가 있으니 그 말은 분명 틀릴거야. 아니 나만 성장 못하는 사람인가. 몇년 째 이 냉혈한. 더욱이 따뜻한 말 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소년을 좋아하다니 말야.


"실명? 무슨 생각하니? 손이 멈췄는데."
"...굳이 부장이신 카오루군이 후배들 꺼 까지 닦을 필요는 없는데. 왜 하나 궁금해서요."
"비꼬는 거 너무 티난다."
"남이사."
"활은 조심히 다뤄야 하는 거니까. 우리학교 활은 좀 비싸잖니."
"...그런가."

조심히 다뤄야 하는 거랑 네가 직접 활을 닦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거냐고. 확실히 카오루가 우리 동아리에서 에이스긴 한데 말야. 화살의 명중률과 활을 잘 닦는 거랑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건가.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 영향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이미 활을 닦고 있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떠올리면, 카오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번에 2학년 애가 활을 닦다가 떨어트려서. 고문 선생님이 내게 부탁하셨어."
"어? 뭐? 그런 일이 있었나?"
"...아, 실명인 요즘 동아리 참석도 안하고 곧장 집으로 가서 몰랐겠구나."
"나기사, 너 좀 말에 가시가 있다?"
"그랬니?"


왠지 말에 가시가 박힌 듯한 말투에 눈이 찌푸려진다. 이거 이거. 대놓고 나한테 면박을 주는구만. 집에가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데 동아리에 나오지도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아까처럼 말하는 경우엔 그냥 하는 말이라고 넘어가겠지만. 카오루가 말하는 건 명백히 핀잔을 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저번에 면전에다가 "할 일도 없어보이는 데 동아리에 나오는 게 어떻니?" 라고 들었으니까.
애초에 운동은 죽어라도 못하는 내가 누구씨의 강요에 가입한 동아리인데. 출석까지 일일히 감시받아야 한다니.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지 감옥을 다니고 있는건지.

거기다, 나는 이제 3학년이다. 즉 고등학교 수험으로 바쁠 뿐더러, 눈치봐야 할 선배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동갑인 카오루의 눈치를 봐야한다니. 이 얼마나 꼴불견인가.
카오루에게 수험 공부 해야한다고, 동아리에 안나간다면 분명히 화뜰짝 놀라겠지. 네가 성적을 신경쓰고 있었냐고. 평소 성적이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아서 몰랐다고. 이런식으로 사람 성을 돋구울 게 뻔하다.

"나 요즘 수험공부 하느라 동아리 안 나가잖아."
"음? 그랬니? 네 성적은 전혀 그런 거 같지 않던데..."
"아 진짜, 그 말 할 줄 알았다..."

예상이 너무 적중하니 오히려 맥이 빠진다. 화낼 힘도 없군. 그의 놀림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묵묵히 활을 닦아냈다. 그러면 카오루가 갑자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머지도 다 하면 저녁 지날 거 같은데."
"어? 그럼 나머진 언제 할려고?"
"내일 내가 아침에 일찍 나와서 할게. 실명인 안 나와도 괜찮아. 여기까지 도와줬으니까."
"...됐어. 어차피 선생님한테 나도 같이 한다고 말했다며. 나도 내일 일찍 나오지 뭐."
"응 그래. 그럼 나오렴."
"...잠깐, 너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거 기다렸던거 같은데?"
"뭐, 그렇지."


그게 뭐야. 눈살을 구기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새초롬 하게 "너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날 도와주잖니." 말하였다.
보통 저 상황에서는 괜찮다고 사양하지 않나. 어쩜 뻔뻔하게 이럴수가 있지.
아, 이래서 평소에 사람이 행실을 똑바로 해야되는 구나. 내가 카오루의 말에 너무 잘 따르니까 당연히 내가 자길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어차피 할거면 바로 도와주면 될텐데. 실명은 불만투쟁이라니깐."
"얘 진짜 성격 나쁘다니까.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나기사가 이런 애란 걸 알아야 할텐데."
"글쎄, 실명보단 내 성격이 더 좋은 거 같은데."

금방이라도 이를 갈 것처럼 꽉 치아를 깨물며 그를 노려봤지만 소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냐 난 안 그래. 누굴 능구렁이 처럼 부려먹지도 않고, 도움 받으면 정중하게 감사인사도 하고.
또 나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둥 깔보진 않는다고.


"실명.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활 좀 원래 자리에 갖다 놔 줄래? 슬슬 돌아가자."
"...내가 이거 갖다 놓는 동안 너 먼저 가고 그러는 거 아냐?"
"실명...유치한 생각은 그만 해."


카오루가 이제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눈을 한 카오루의 말은 아무 불평 없이 고분고분 하게 따르고 만다. 이 이상 더 틱틱거렸다간 화내고 말테니까.
근데 내가 얘한테 혼나야 할만큼 불만을 쏟아 부었나. 카오루가 내게 빈정거리는 말에 대답한 거 말곤 없잖아. 난 맞받아 쳤을 뿐인데 왜 불평쟁이란 소릴 들어야 하는 거지.

모든 활을 다 비품실에 두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면 내 가방까지 들고 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제대로 두고 왔니?" 마치 엄마가 손톱깎이를 쓰고 난 내게 말하는 말투이다.
군소리 없이 응 이라고 대답하며 카오루의 근처로 다가간다.

"아 맞다. 우리 부실 청소는 안해도 돼?"
"그건 아까 실명이 오기 전에 일 이학년 애들이 했어."
"음, 그렇구나."

카오루에게 가방을 받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화면을 풀면, 소년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용무가 있으면 바로 말 걸텐데. 왜 쳐다보는 거지?


"어? 카오루 왜?"
"아니...그냥. 오늘은 같이 돌아가겠다 싶어서."


그거야 네가 날 지명해서 남긴 탓이잖아. 저도 모르게 또 투정을 부릴 뻔 했지만 부드럽게 웃는 카오루의 미소에 그 말은 목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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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 한지 얼마 안되서 캐붕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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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벤 그 칼이라면 몰라도, 복제품에게 영력을 기대해서 어쩌자는거지?"

아 진짜. 또 저 말이다. 이 사람도 슬슬 저런 말은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나.
관광비자로 놀러온 일본에서, 우연히 사니와라는 직업을 얻게 된 내가 고른 초기도는 야만바 쿠니히로 였다. 보통은 성능을 보고 유심히 고른다곤 하지만, 나는 날카롭지만 예쁜 저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를 고르고 말아버렸다. 이렇게 이쁜 얼굴을 매일 보며 살 수 있다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은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툭하면 꺼내는 말이, 자기보고 예쁘다고 말하지 말라는 둥 자기한테 뭘 기대하냐는 둥 온통 부정적인 말 밖에 없기 때문이였다.
처음엔 이 사람 좀 소심한 사람인가 싶어서. 매일 만바에게 이것저것 칭찬을 하였다. 예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리 혼마루에서 만바쨩이 제일 세, 멋있어. 이런 식으로.
허나 그 칭찬은 그 특유의 어두운 어투로 돌아올 뿐이였다. 자기한테 신경쓰지 말고 다른 대원이나 신경쓰라고.
만바의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늘 항상 그를 애지중지 해왔지만 말하는 것이 항상 저러면 짜증이 솟구친다.

아니 내가 내 검보고 이쁘다고 한게 죄야? 그리고 만바가 혼마루에서 제일 센 건 사실이잖아. 레벨이 제일 높잖아. 그리고 내가 맨날 멋지다고 해도 어차피 날 복제품으로 뭐 이렇게 말하고,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뭐야? 아님 뭐, 내 칭찬을 들을 필요 조차 없다는 거야? 물론 만바가 이런 음습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린 없지만. 저 말을 계속 들으면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만다.
그렇다고 만바를 근시에 두지 않거나 출전에 안 보낼 순 없다. 왜냐면 난 만바가 무지 좋으니까.


만바어록(만바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난 뒤 몇 시간이 흘렀나. 출전하고 돌아온 그는 KBO를 만났는 지 심한 상처를 입어 왔다. 이 정도는 거의 파괴 되기 직전이다.
걷는 것 조차 어려워 하세베에게 부축을 받은 그를 울망이며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상처가 없거나, 몇은 경상이다. 아마 운 나쁘게 그가 집중 공격을 받은 거 같다.

"만, 만바쨩! 괜찮아?"

내 꽃같은 애를 이 꼴로 만들어 버리다니. 내가 좀만 셌더라도 그 놈들을 내 손으로 다 부숴버릴텐데. 눈 조차 뜨기 어려운 듯 만바는 실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어서 빨리 치료해야 겠어.
하세베에게 만바를 내 방까지 부축해 달라고 부탁하면 만바가 한 마디를 꺼냈다.

"이걸로, 됐...어...너,덜너덜해지...면, 나를 비교하는.... 녀석 따위, 없어.지니까..."

평소와 똑같은 말투다. 자기 자신을 안 좋게 말하는 모양새.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허나 만바의 말을 평소와는 다르게 무시할 수 없었다.


"너 말야 내가 널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 줄 알아? 맨날 근시도 너로 하고 장비도 뭐 좋은 거 만들면 바로 너한테 주고 강화도 맨날 시켜주는데! 뭐? 다쳤는데 뭐? 이걸로 됐어 뭐? 너덜너덜 해지면 비교하는 녀석 없어진다고? 아니 다쳤는데 그게 뭔 소리야? 너 다쳐서 내 맘이 얼마나 아픈데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누가 너 비교해? 데리고 와! 내가 영력이든 맞짱이든 뭐든 붙어서 때려 눕혀줄게! 아니, 나 말야. 평소에 니가 뭐 예쁘지 않다던가 그런 소리 하는 건 괜찮아. 난 네가 제일 멋있고 예쁘다곤 생각하는데 부담스러워서 듣기 싫은 걸 수도 있겠지. 내가 너 매일 칭찬하는 거도 안 듣고 넘어가는 거도 좋아. 그래 다 좋다고! 근데 너 다쳤는데 그런 식으로 말해야 겠어? 그럼 내가 얼마나 슬픈 줄 알아? 너 다쳐서 지금 너무 맘 아픈데 니가 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 끝 말을 맺지 못한다. 이미 눈물은 차 올라 흐르고 있는 데 울먹임까지 참으려니 목이 끊어질거 같아서. 주변의 도검들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남 앞에선 체면 깎여서 우는 적은 없지만
만바의 일이라 그런지 자존심이고 뭐고 저도 모르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젠장. 내가 이렇게 맘바를 아끼는 데 이 자식은 그딴 말이나 내뱉고!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이 나쁜 자식아아아아아아."
"아니, 난 그,"
"내가, 흑, 널 어떻게 키웠는데, 흐엉, 그딴 소리나 하고오."


보통 수리는 내 방에서 하지만. 지금은 만바를 후딱 수리하고 방으로 들어가 이 기분을 풀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만바를 마당에서 수리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가 만바를 많이 애정하긴 하지만 방금 전 소리를 들으니 지금은 얼굴도 보고싶지 않다. 자식한테 이렇게 키울거면 날 왜 낳았냐 라며 큰 소릴 듣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거 참 기분 엿같네.


"잠깐, 당신 오해가, 콜록."
"몰라! 나 찾지마아아아!"

엉엉 울면서 만바의 상처 부위를 닦고, 솜방망이로 분칠을 한다. 몇 시간동안은 커녕 일분 일초라도 만바의 얼굴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 거 같아 도움표(手伝い札)를 던진다. 그러면 만바의 몸은 마치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치료 되었다. 얼굴을 적시는 눈물 줄기를 옷으로 훔치며 그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더 이상 상처가 없는 게 확실하다. 시야로 아연실색한 만바와 다른 도검들의 얼굴이 흐리게 지워진다. 멀뚱히 서 있는 그들을 뒤로한 체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결계를 치곤 자리에 누워 버렸다.





-----------------
만바가 잘생기고 장비 안깨부시고 성격도 귀엽고 존쎄라서 제일 좋다.
만바가 예쁘다고 말하지마 라고 말할 때마다 아닌데^^ 난 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하고 놀려주고 싶다
난 가짜가 아니야 라고 할때마다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 
근데 수리할 때마다...경상은 그렇다 치고 중상은...진짜 이대로, 썩어 문드러져도, 상관없었는데. 이거 듣고 울뻔했다 내 예쁜 맘바 왜 그런 말을 해 내 맘 아프게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튼 맘바는 더 이상 저 소릴 안했음 좋겠다...들을 때마다 내 마음이 찢어진다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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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너 카오루한테 차가운 거 아니니?"
"...뭐? 내가 언제...오히려 차가운 건 나기사 카오루 걔죠."
"싸운건 아무래도 좋은데, 화해는 해라."
"안 싸웠...아니 내가 차가운게 아니라 카오루가 차가운 거라니까요.""
"그럼 니가 먼저 살갑게 굴던가. 예전엔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녔던 애가."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빠 머릿속에 나와 나기사 카오루의 관계는 아직도 유치원 시절인 듯 했다. 하기사, 아빠는 지방근무시니까 카오루를 잘 못봤을 테니까. 부엌에서 나를 옹호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애가 사춘기라 그런가부지. 냅둬."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한 듯 내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가 아니라 걔가 원래 성격이 그렇다니까. 어렸을 땐 그냥 내가 뭣 모르고 걜 쫄랑쫄랑 따라다닌 거고. 솔직히 그 때도 나기사 카오루는 은근히 차가웠지만. 입술을 이죽이며 텔레비전 음량을 키우면 아빠가 나가시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였다. 나가시게요? 서류가방을 아빠에게 드리며 내가 물어보면 아빠는 나를 쭉 내려다 보셨다. 아 이런. 저런 눈빛은 꼭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하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아빠 입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왔다.


"너 등교 안하냐? 카오루는 항상 이 시간에 등교하던데."
"나기사 카오루군은 모범생이니까요. 전 좀 있다 나가려구요."
"등교해."
"아, 아빠~!"
"등교해, 어서. 카오루랑 같이 가."


결국 아빠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나는 집을 나왔다. 삐죽이는 표정으로 대문의 자동문에게 화풀이를 했지만 가까이서 보이는 흰 뒷통수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였다. 아 이런. 내가 왜 학생회도 아닌데 이렇게 일찍 나가는 거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좋은 일이라곤 없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나기사 카오루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그가 눈이 마주쳤다. "아, 실명. 안녕." 짧게 그가 아침인사를 했다.


"별일이네, 일찍 일어나고."
"......원래 일찍 일어나. 나가는 게 일찍인게 별일인거지."
"그래? 일찍 일어났으면 학교 일찍 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그래~그렇긴 하지...나 먼저 간다."
"어, 잠깐만. 어차피 같은 길이 잖아. 같이 가자."
"...뭐?"
"자전거 갖고 올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그러니까 나기사 카오루가 자전거를 갖고 오겠다고? 자전거를 저 혼자 타고 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끌고 가겠다는 건가. 설마, 설마 같이 타자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온갖 걱정을 가슴속으로 세고 있으면 어느샌가 나기사가 자전거를 끌며 다가왔다. 하얀색 자전거였다. 하얀소년이 하얀 것을 끌고 온다. 우습게도 그 상황에서 실없는 생각을 하였다. 아 잠깐만, 진짜로 저거 같이 타자는 건 아니지. 내가 죽어가는 얼굴로 자전거를 내려다보면 카오루는 나를 쓱 한번 바라보았다. "안타니?" 야 너 같으면 삼삼오오 모여서 친구들이랑 가는 등교길에 타고 싶겠냐. 타도 상관없어서 갖고온거겠지만. 으악 안돼. 이걸 타면 또 여자애들이 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볼게 틀림없다. 가끔씩 나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여자애들에게 뒷담화의 상대가 되곤했었다. 요새는 나도 조심하고 카오루도 내게 안다가오니까 그런 말은 없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좋은데 나기사 카오루께서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나이까. 솔직히 이젠 내게 다가와서 나기사 카오루하고 무슨 사이냐고 묻는 여자애들에게 한 소리할 배짱은 생겼지만, 그냥 뒷담화 대상이 되는 게 귀찮을 뿐이다. 뭐가 되었든 남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 타? 여기?"
"그러라고 갖고온건데."
"카, 카오루...교칙에 걸리지 않을까?""
"저기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내릴 거니까 괜찮을 거야."
"아, 잠...잠깐만. 나 아침 안 먹어서 도시락 좀 사갈테니까 먼저 가."
"학교 매점에 팔 잖니. 거기서 사. 실명이 너 그 매점 싸고 맛있다고 좋아하잖아."


카오루는 내가 애써 생각한 변명거리들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소거해주었다. 나 이거 타기 싫어. 애들한테 이상한 소문나잖아. 이런식으로 말하면 분명히 차갑게 나를 쳐다보면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것같은데. 별 수가 없나. 근데 타고가는 건 역시나 좀 그런데. 속으로 눈물을 짜내며 자전거 앞에 서 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아, 잠깐만." 그는 매너있게 손수건을 뒷자리에 깔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럴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오루는 나를 멍청한 학우 취급을 하다가도 때때로 이렇게 친절하게 굴고는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모르겠네. 솔직히 단순히 몸에 벤 예의범절인 건 알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취하는 센스있는 태도를 표할 때면 괜시리 부끄러워진단 말이다. 날 여자로 보지도 않는 주제에. "자, 타." 깔끔하게 그 한마디를 카오루가 말했다. 이 손수건을 던지고 싫어 걸어가겠습니다. 이렇게 매정하게 말 할 단호함도 없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그의 뒷자리에 탔다.


"실명."
"어, 어어...?"
"허리 좀 더 붙잡아. 위험하잖아."
"뭐, 뭐?"
"이렇게."


카오루의 목소리가 멈추면 그는 내 팔을 잡아 자신의 배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떨어져있던 카오루와 내가 가까워 진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모양새에 나는 균형을 잃어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이제 됐네, 출발할게." 강렬하게 그의 등에 얼굴도장을 찍는 나를 아랑곳 하지도 않고 카오루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숨을 한번 들이키면 카오루의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익숙한 그 냄새에 놀라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덥다. 하복으로 갈아입어서 그런지 여름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야. 여름햇살때문에 내 얼굴은 점점 빨게지고 말았다.
신지군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하는거지. 평소엔 우연히 팔이라도 닿으면 눈살을 찡그리더니. 진짜 별일이야. 카오루를 슥 한번 바라보지만, 나보다 한두뼌 큰 그의 뒷모습만 보인다. 그는 곧 들어오는 열차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만 휘날릴 뿐이였다

나아르으시스트. 문득 그 단어를 손가락으로 그의 등에 써내렸다. 알아 들을려나 이거. 예전에 친구가 나한테 해줬을 때 난 전혀 못 알아먹었는데. 기대를 가지고 카오루가 무슨말을 할지 기다리면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실명, 화낸다?" 이런 알아들었네. 미안. 짧게 그에게 사과를 하면서 울고있는 이모티콘을 등에다가 그렸다. 카오루는 귀찮은 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기사, 내가 뭐라고 쓰는 지 다 알아 맞출 수 있어?"
"글쎄...대강은 다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
"와, 대단하네. 난 못 맞췄는데."
"실명은 머리가 나쁘니까."
"아 진짜, 그만하지?"


끝말을 높이며 그의 등에 바보라고 적으면, 카오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듣는 기분 생각해봐." 아 예, 전교1등님께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잘난척쟁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꾸욱 등에 글씨를 쓰면 그가 또 심드렁하게 말했다. " 실명 보다 머리가 좋은 건 확실하니까." 얘기할 수록 점점 지쳐간다. 그의 등을 한대 때릴까 생각이 들었지만 나보다 마른 듯한 그 등을 때릴 수는 없어 가볍게 포기하고 말았다. 얘는 왜 남잔데 나보다 마른건데. 나기사는 쉽게 화를 가라앉힌 내가 신기한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 뭐, 뭐, 뭐 됐어 말시키지마. 속에 천불을 삼킨듯한 목소리로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면 더 이상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 지금까지 등에 적었던 글자 중 가장 약하게 그 단어를 썼다. 운전에 집중하는 카오루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자전거라 해도 얻어타는 입장인데 마구 장난치면 안되겠지. 늦어지만 미안. "카오루, 방해 안돼? 그걸 생각 못했네, 미안." 그의 뒷통수를 흘끔 보며 말을 전하면 카오루는 건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뭐, 이제와서 그러니." 말투는 정말 곱게 쓰는 데 마음씨가 그렇지 않다. 한 대 치고 싶다니까 정말. 하지만 문득 보이는 나보다 얇은 손목을 보곤 그 생각을 다시 접었다. 얘 한대치면 진짜 부러질지도 몰라. 사실은 내가 자전거 운전해야 되는 거 아닐까. "그래그래, 미안해." 나는 별말없이 그에게 불만이 담긴 사과를 하였다. 카오루의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실명, 지금 몇시니?"
"여덟시 구분."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쓰인 커다란 숫자를 보고 대답해주었다. "평소보다 더 일찍가려나." 의외인 듯 나기사가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 감정은 딱히 담겨있지 않았다.나는 손가락을 들어 이번엔 그의 등에 다른 글자를 적었다. 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글자 끝 부분이 지저분하게 늘어지도록 이었다. 내 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등허리까지 가 있었다. 손가락을 떼고나면 초여름 햇살이 더 뜨겁게 느껴져 얼굴이 조금 익은 것 같았다. 역시나 이건 좀 부끄럽군. 이 글자를 쓴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기가 소녀만화에 나올법한 짓을 했다는 게 부끄럽다. 오늘 집에가서 이불에다가 화풀이를 할지도 몰라. 아니, 할 거 같다. 윽. 아, 왜 하면 지 부끄러운 게 당연할걸 알면서도 이런짓을 했을까. 나한테도 아직까진 소녀감성이 남아있었구나. 후회의 화끈함을 곱씹으며 그의 등에 다시 손가락을 얹었다. 스키, 어, 스키, 스키야키. 스키야키나 써야지.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저녁메뉴. "실명."
갑작스럽게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자전거를 멈처 세웠다. "어, 어어?" 깜짝 놀라 세우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느라 그의 등에 다시 얼굴을 묻은 내가 고개를 들어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맞닿는다. 나는 그보다 더 진한색을 품으며 고민했다. 뭐지. 알았나. 글자 눈치챈건가. 이제와서 갑자기 나 오늘 스키야키가 먹고 싶은데. 알아맞췄어? 이렇게 물어보는 건 너무 바보같아보이는데. 남은 아무생각 안하는 데 괜히 나 혼자 설레발 치는 거 같잖아. 근데 얜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야. 뭐 할말 있길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알은건가? 읽은거냐구. 이럴수가, 역시 괜히 이런 멍청한 짓을 해가지고 나란 애는! 갑자기 미안하지만 널 그런식으로 생각한 적 없다는 둥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지. 그냥 무슨 소리야, 스키야키가 먹고싶다고. 나르시스트. 이런식으로 치부해버리면 될려나? 근데 그러면 내일부터 또 얼굴보기가 거북해질거 같은데. 아 이럴수가, 제가 괜한 짓을 해가지고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던지다니, 인생이시여. "안내리니?"


"뭐...뭐, 뭐?"
"편의점 도착했어. 여기서 계속 타고 가면 교칙위반이라고 혼날거야."
"아...아, 그래...어, 응. 그래..."
"조금 더운가? 실명, 얼굴이 좀 붉지 않니?"
"자! 잠을 못자서 그래, 내가 원래 피부가 그렇거든. 피, 피곤하면 이래."
"흐음, 그래. 그럼 가자."


나는 카오루의 자전거에서 내려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와, 다행이다. 와, 진짜 부끄럽다. 정말 오만가지 상상을 다했구나, 정작 본인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런식으로 마구잡이 망상을 펼쳐내는 내 자신이 싫다. 머리를 싸매며 후회와 자기 혐오를 음미했다. 곰팡이처럼 우울하고 축축한 맛이야. 정신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마른세수를 하는 내가 이상한 듯 카오루가 나를 부른다. 그는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어 자전거를 끌기 시작했다. 활기없는 얼굴로 총총 그에게 뛰어가면 카오루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 표정, 얼굴 더 못생겨 지겠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대꾸할 기력도 없거든. 나는 묵묵히 그의 옆을 걸을 뿐이였다. 기운없는 내가 이상한 듯 나기사가 흘끔 나를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오늘 저녁은 스키야키 해 달라고 해야지..."
"...아침도 안먹었는데, 벌써부터 너는 저녁생각을 하는 구나."
"시, 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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