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월말이라니...내 방학은 밑독이 뚫렸나...뭐가 이리 줄줄새지?"
"새기는. 나기사군하고 알콩달콩 공부했잖아."
"알콩달콩은 무슨..."
괜히 좋으면서 심술을 부린다며 친구는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왠일로 카오루가 나한테 방학 때같이 공부하자고 말해서 좋았지만, 정말 공부말곤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였다. 내가 카오루네 가면, 공부하고 모르는거 물어보고 배우고 공부가 끝나면 집에간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건 누구나 꿈꾸는거지만, 내가 생각했던거랑은 많이 달라 달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것이였다. 조금은 친해져서 상냥해질 줄 알았는데, 더하면 더했지 절대 유해지지 않는 나기사 카오루 였다. 오히려 기초지식도 없는 날 가르쳐서 애를 힘들게 해서 화난거 같고. 카오루는 화났다곤 안했지만 나였으면 짜증내고도 남을거야. 게다가 그 인간 가끔 날 보면서 한숨도 쉬는 걸. 머리 나쁜 날 보며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길 바랄뿐이다.
"실명, 너 이번 축제 갈거야?"
"...아니."
"뭐야, 나기사군이랑 안 가?"
"뭐 어차피 이카리군이랑 가지 않을까? 그리고 더워서 나가기 귀찮아."
"괜한 변명은."
"아 몰라, 너는?"
"나 다음 주에 학원에서 시험 봐서 안 돼."
가볍게 참고서를 넘기며 친구가 말하였다. 뭐야, 주말에도 공부 하려고? 내가 그녀에게 놀란 목소리로 물으면,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뜻한 그 목소리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스물거린다. 난 주말에는 티비보면서 놀고만 있었는데.
"뭐야. 넌 공부하면서 친구한테 공부하지 말고 놀라는 거야?"
"어차피 넌 계속 공부해봤자 나기사군하고 같은 고등학교 못가..."
"방금 뭐랬냐?"
"이 기회에 나기사군 하고 더 친해지라고 그랬지~"
이미 친구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걸 똑똑히 들었지만 그녀는 시치미를 뗐다. 천연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이 눈꼴사납다.
"뭐 난 남자랑 가는 건 글렀고. 너라도 가서 청춘사업 해."
"내가 나기사 뒷꽁무니 쫓아다닐 동안 넌 공부를 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구?"
"갈 남자가 없어서 안가는 거라니까?"
샤프 펜으로 친구의 볼을 찌르면 귀찮은 듯 그녀가 성을 냈다. 쌀쌀맞게 쳐다보는 눈빛에 겁을먹어 펜을 내려놓으면 그제서야 시선이 거두어졌다.
"나기사군 한테 차이면 내가 위로해줄 테니까 한번 권유는 해보는 게 어때?"
"으, 으음...거절당하면 어떡해. 간접적으로 차이는 거 같아서 무서워."
"뭐가 무서워. 죽는 것도 아닌데. 자신감 좀 가져봐."
친구는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였다. 그 응원에 용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약한 용기지만.
그래. 솔직히 나기사한테 어디 놀러가자며 권해도 그 정작 받아들여진 적은 드물고. 카오루도 그 때마다 태도가 똑같았으니까.
친구 말마따나 차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카오루한테 가냐고는 한번 물어볼까.
주말에 큰맘먹고 정한 결정을 월요일에 행하면 굉장히 산뜻한 답이 날아왔다.
"카오루, 너 오늘 축제 갈거지?"
"아니, 별로."
"뭐? 진짜? 신지군때문에 꼭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신지군이 유카타입은 모습은 보고싶지만...아무래도 그가 다른여자애하고 둘이 갈거같아서 말이야."
"아.........힘내."
"그래."
나기사도 신지군한테 차였구나. 사랑하는 이에겐 동정을, 연적에겐 질투를 표한다. 애초에 신지군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까워 하는 내가 심기에 거슬린듯 카오루가 무뚝뚝하게 샤프로 내 문제집을 두드렸다. 알겠다니까. 샤프를 집어 영어 문제를 풀고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뜻밖이였다.
"실명이는?"
"어...나? 글쎄 별로...유카타 사둔것도 없고..."
"여자애답지 않구나 역시."
"야,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야 그건. 갈 약속도 없고...사람많은거 싫어하잖아, 나."
"그렇지. 운치있게 불꽃놀이 소리들으면서 공부하는건 어때?"
"운치가 아니라 울지...불꽃놀이는 보고싶다. 여긴 빌딩때문에 안보이잖아."
매년 축제는 집근처 공원에서 이루어졌지만 항상 우뚝솟은 건물들 탓에 끄트머리 불꽃만 보고 말았었다. 예쁘게 밤하늘에 수놓아진 불꽃들은 참 예쁜데. 사람들하고 부딪치는건 싫은걸. 밖에나가기도 귀찮고. 올해도 역시 아쉽지만 불꽃이 터지는 소리로 배를 채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기사군이 딴 여자하고 팔짱끼며 축제에 안간다는건가.
"그러고보니, 초등학교때 실명이랑 축제에 갔었는데 네가 울었었지. 잉어잡기에 열중해서 용돈 다 써버려서, 혼날거라고 울던게 떠올라."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혹시 그 일때문에 축제에 안가는거니?"
"...그럴리가 있겠냐."
하여간 기억력도 좋다니깐. 소년은 씩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지금은 과소비가 아니라 과하게 빈둥거리는게 문제라고. 거 참 능글맞은게 구렁이라니깐. 그치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결국 잉어를잡긴했지만 500엔을 다 써버려서 울고말았지.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게 뻔했으니까. 울던 나를 카오루는 어떻게 했더라. 다독여줬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나. 그나마 희미하게 크게 안 혼난건 떠오르는데.
"그 때 잘 기억은 안나는데 별로 안 혼난건 생각나...하기사 그렇게 처량맞은데 화낼까 싶지만."
"...실명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나쁘니까 도박은 안하는게 좋을거같아."
"여러가지라니, 뭐야?"
머리나쁜건 인정하겠지만, 그건 공부하는 머리일 때 얘기다. 그거 아니면 나 꽤 똑부러지는데, 나기사 카오루군 정도는 아니지만. 도대체 뭘보고 멍청하다는거야. 맹목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는 그의 험담에 저절로 미간이 찌풀여졌다. 카오루는 이런 나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문제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진짜 차갑네. 그의 단호함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공부 안 하니?"
"해..."
무심코 시곗바늘을 보면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낼시간이네. 별로 집중이 안된다. 축제가 6시에 시작이였던가. 한 일곱 여덟시 쯤에 불꽃놀이가 시작하려나. 지금쯤 친구는 준비하고 나가느라 급급하겠지. 강물마냥 흐르고있던 생각을 멈추면 카오루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라 뭐지.
"오늘은 이 쯤하자."
"어? 어.......미, 미안...화났어?"
"화 안났어."
내가 너무 딴 생각을 한 게 거슬렸나. 카오루는 평소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공부하자고 부른애가 딴청만 피우면 나같아도 화날거 같은데, 양심에 찔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지만 카오루는 이런 나를 배려한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실명. 내일까지 단어100개랑 문법80문제 풀어와."
"........."
"안 풀어오면 벌금 알지?"
"...네이......"
밤하늘에 떠다니는 불꽃 조각마냥 내 정신도 흩어지겠군. 하지만 나기사 카오루군은 나보다 더 풀어오면 풀어왔지, 절대 숙제를 안해올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카오루가 정말 사람일까 궁금해질때가 있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애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열면 또 까칠한 말투로 나를 건들일게 뻔하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도 그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자기 딴에는 티를 안낸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다 보이는 걸. 카오루는 이런 말을 싫어한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난 뒤 책상 앞에 앉으면 왠일로 핸드폰이 울려 대었다. 스팸 메일인가 싶어 메시지함을 확인하면 착신자의 이름이 명확하게 써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놀란 마음에 잽싸게 문자 내용을 보지만 극히 짧은 문장만 써 있었다. '옥상으로 와.' 내가 무슨 부르면 달려나가는 애완견인 줄 아나. 하지만 심심해서 남을 부르는 성격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투덜 거리면서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왜 갑자기 옥상으로 부른걸까. 옥상에서 볼 일이 있을 건 아닐테고, 보통은 방에서 대화를 할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장소가 옥상인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이 영 개운하지가 않아. 무슨 일이지. 조심히 옥상문을 열고 발을 내딛으면 익숙한 또래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름 해는 꿋꿋하게 하늘에 떠 있어, 단숨에 누군지 알아채었다.
"카오루?"
"아, 왔니? 이쪽으로 와."
"왜 옥상으로 부른거야? 무슨......어, 불꽃놀이 세트?"
솔직히 장난으로 결투같은 걸 떠올리긴 했지만, 내가 연애감정을 품은 상대는 이카리군이 아니라 그럴 일은 없었다. 정답은 무얼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왠지 기운이 쭉 빠지는 듯 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네가 갖고 온거야, 물어보면 카오루는 대답했다.
"설마, 카지씨가 갖고오신거야."
"하기사......네가 사올리는 없지."
아, 카지씨. 아직 일본에 계셨나. 카오루는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물이든 양동이를 곁으로 옮겼지만 카지씨가 무슨 말을 했을진 대충 가늠이 갔다. 젊은 나이가 아깝다며 탄식을 내뱉었겠지. 특유의 가벼운 미소가 떠오른다. 카오루는 라이터를 바닥에 놓곤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왠지 모르게 장난끼가 돈다.
"라이터? 카오루 너 담배펴?"
"........."
"미안, 미안. 사실 말야, 니가 옥상으로 불러서 무슨 결투라도 하는 줄 알았어. 보통 옥상으로 안 부르잖아."
"결투?"
"뭐......그런 거 있잖아, 비오는 날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싸우는 남자 둘...같은 거. 너 같은 경운 이카리 신지군일려나. 신지군을 두고 너랑 나랑 싸울린 없지만."
조금 심기가 거슬린듯 카오루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농담도 못하나. 그래, 나도 반성하니까 이제 더 이상 이카리 신지군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카오루와 같이 나 또한 포장을 뜯어 막대기를 꺼냈다. 카지씨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른스러운 일을 하는 구나. 위험한 분수나 로켓폭죽은 없었다. 걱정해주는 건 좋지만 왠지 초등학생 취급 받는 거 같아.
"실명, 이리 줘."
"어? 아, 고마워......근데 있잖아, 왜 갑자기 불꽃놀이 하려고 하는 거야? 나기사 이런 거 좋아했던가?"
"가끔씩은 좋잖아."
"아까 운치 있게 폭죽소리 들으면서 공부하라고 했으면서."
"조심해."
카오루가 라이터로 막대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화약과 함께 내 말은 불꽃에 태워져 버린 것이다. 사람 말 끊는 건 선수라니까. 옹졸맞게 끝자락에 피어있던 불꽃은, 점점 심지를 타고 올라와 반짝이며 톡톡 불꽃을 터트렸다. 분홍색 불빛이 꼭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인다. 카오루 또한 자신의 심지에 불을 붙이곤, 이내 주황색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을 받는 부드러운 은색은 마치 석양빛에 비춘 것 마냥 갈색을 띄워냈다. 마치 갈색머리를 한 카오루를 보는 것 같다. 빨간 눈동자 안에 솟아오르는 오렌지 빛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빛깔을 마음껏 뽐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이 아닌 자신을 보는 게 의아한 듯 카오루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수줍어져,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게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 생각났다."
"뭐가?"
"잉어뽑기로 돈날렸을 때. 니가 울지말라고 나한테 사과사탕 사줬었던거. 넌 기억 안나나?"
"기억나. 먹다가 갑자기 울고 멈추고 그랬지."
"그러고는 같이 우리집 가줬지? 카오루가 돈 잃어버려서 내가 빌려줬다고 거짓말 해줬던거 같아."
"실명이 답지 않게 잘 기억하는구나."
"야아......됐다, 됐어. 그땐 고마워."
"그날 밤에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괜찮아."
무덤덤하게 그가 인사치례를 했다. 하여간 나한텐 부드럽게 말 안한다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 나름대로의 배려인 걸 알아, 아무 볼맨소리 없이 가만히 환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하늘을 향해 불꽃이 커다란 함성을 터트렸다. 놀란 우리 둘은 등을 돌려 멍하니 남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왠일인지 예쁘게 퍼지는 폭죽이 깔끔하게 보였다. 쏘는 위치를 바꾼건가. 이번엔 빌딩에 안 가려지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카오루가 붙여준 폭죽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늦게 시선을 돌린 그가 내게 신기한 듯 물었다.
"실명, 저거 안 보니?"
"...난 이게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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