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너 카오루한테 차가운 거 아니니?"
"...뭐? 내가 언제...오히려 차가운 건 나기사 카오루 걔죠."
"싸운건 아무래도 좋은데, 화해는 해라."
"안 싸웠...아니 내가 차가운게 아니라 카오루가 차가운 거라니까요.""
"그럼 니가 먼저 살갑게 굴던가. 예전엔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녔던 애가."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빠 머릿속에 나와 나기사 카오루의 관계는 아직도 유치원 시절인 듯 했다. 하기사, 아빠는 지방근무시니까 카오루를 잘 못봤을 테니까. 부엌에서 나를 옹호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애가 사춘기라 그런가부지. 냅둬."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한 듯 내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가 아니라 걔가 원래 성격이 그렇다니까. 어렸을 땐 그냥 내가 뭣 모르고 걜 쫄랑쫄랑 따라다닌 거고. 솔직히 그 때도 나기사 카오루는 은근히 차가웠지만. 입술을 이죽이며 텔레비전 음량을 키우면 아빠가 나가시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였다. 나가시게요? 서류가방을 아빠에게 드리며 내가 물어보면 아빠는 나를 쭉 내려다 보셨다. 아 이런. 저런 눈빛은 꼭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하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아빠 입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왔다.
"너 등교 안하냐? 카오루는 항상 이 시간에 등교하던데."
"나기사 카오루군은 모범생이니까요. 전 좀 있다 나가려구요."
"등교해."
"아, 아빠~!"
"등교해, 어서. 카오루랑 같이 가."
결국 아빠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나는 집을 나왔다. 삐죽이는 표정으로 대문의 자동문에게 화풀이를 했지만 가까이서 보이는 흰 뒷통수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였다. 아 이런. 내가 왜 학생회도 아닌데 이렇게 일찍 나가는 거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좋은 일이라곤 없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나기사 카오루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그가 눈이 마주쳤다. "아, 실명. 안녕." 짧게 그가 아침인사를 했다.
"별일이네, 일찍 일어나고."
"......원래 일찍 일어나. 나가는 게 일찍인게 별일인거지."
"그래? 일찍 일어났으면 학교 일찍 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그래~그렇긴 하지...나 먼저 간다."
"어, 잠깐만. 어차피 같은 길이 잖아. 같이 가자."
"...뭐?"
"자전거 갖고 올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그러니까 나기사 카오루가 자전거를 갖고 오겠다고? 자전거를 저 혼자 타고 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끌고 가겠다는 건가. 설마, 설마 같이 타자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온갖 걱정을 가슴속으로 세고 있으면 어느샌가 나기사가 자전거를 끌며 다가왔다. 하얀색 자전거였다. 하얀소년이 하얀 것을 끌고 온다. 우습게도 그 상황에서 실없는 생각을 하였다. 아 잠깐만, 진짜로 저거 같이 타자는 건 아니지. 내가 죽어가는 얼굴로 자전거를 내려다보면 카오루는 나를 쓱 한번 바라보았다. "안타니?" 야 너 같으면 삼삼오오 모여서 친구들이랑 가는 등교길에 타고 싶겠냐. 타도 상관없어서 갖고온거겠지만. 으악 안돼. 이걸 타면 또 여자애들이 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볼게 틀림없다. 가끔씩 나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여자애들에게 뒷담화의 상대가 되곤했었다. 요새는 나도 조심하고 카오루도 내게 안다가오니까 그런 말은 없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좋은데 나기사 카오루께서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나이까. 솔직히 이젠 내게 다가와서 나기사 카오루하고 무슨 사이냐고 묻는 여자애들에게 한 소리할 배짱은 생겼지만, 그냥 뒷담화 대상이 되는 게 귀찮을 뿐이다. 뭐가 되었든 남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 타? 여기?"
"그러라고 갖고온건데."
"카, 카오루...교칙에 걸리지 않을까?""
"저기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내릴 거니까 괜찮을 거야."
"아, 잠...잠깐만. 나 아침 안 먹어서 도시락 좀 사갈테니까 먼저 가."
"학교 매점에 팔 잖니. 거기서 사. 실명이 너 그 매점 싸고 맛있다고 좋아하잖아."
카오루는 내가 애써 생각한 변명거리들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소거해주었다. 나 이거 타기 싫어. 애들한테 이상한 소문나잖아. 이런식으로 말하면 분명히 차갑게 나를 쳐다보면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것같은데. 별 수가 없나. 근데 타고가는 건 역시나 좀 그런데. 속으로 눈물을 짜내며 자전거 앞에 서 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아, 잠깐만." 그는 매너있게 손수건을 뒷자리에 깔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럴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오루는 나를 멍청한 학우 취급을 하다가도 때때로 이렇게 친절하게 굴고는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모르겠네. 솔직히 단순히 몸에 벤 예의범절인 건 알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취하는 센스있는 태도를 표할 때면 괜시리 부끄러워진단 말이다. 날 여자로 보지도 않는 주제에. "자, 타." 깔끔하게 그 한마디를 카오루가 말했다. 이 손수건을 던지고 싫어 걸어가겠습니다. 이렇게 매정하게 말 할 단호함도 없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그의 뒷자리에 탔다.
"실명."
"어, 어어...?"
"허리 좀 더 붙잡아. 위험하잖아."
"뭐, 뭐?"
"이렇게."
카오루의 목소리가 멈추면 그는 내 팔을 잡아 자신의 배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떨어져있던 카오루와 내가 가까워 진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모양새에 나는 균형을 잃어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이제 됐네, 출발할게." 강렬하게 그의 등에 얼굴도장을 찍는 나를 아랑곳 하지도 않고 카오루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숨을 한번 들이키면 카오루의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익숙한 그 냄새에 놀라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덥다. 하복으로 갈아입어서 그런지 여름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야. 여름햇살때문에 내 얼굴은 점점 빨게지고 말았다.
신지군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하는거지. 평소엔 우연히 팔이라도 닿으면 눈살을 찡그리더니. 진짜 별일이야. 카오루를 슥 한번 바라보지만, 나보다 한두뼌 큰 그의 뒷모습만 보인다. 그는 곧 들어오는 열차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만 휘날릴 뿐이였다
나아르으시스트. 문득 그 단어를 손가락으로 그의 등에 써내렸다. 알아 들을려나 이거. 예전에 친구가 나한테 해줬을 때 난 전혀 못 알아먹었는데. 기대를 가지고 카오루가 무슨말을 할지 기다리면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실명, 화낸다?" 이런 알아들었네. 미안. 짧게 그에게 사과를 하면서 울고있는 이모티콘을 등에다가 그렸다. 카오루는 귀찮은 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기사, 내가 뭐라고 쓰는 지 다 알아 맞출 수 있어?"
"글쎄...대강은 다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
"와, 대단하네. 난 못 맞췄는데."
"실명은 머리가 나쁘니까."
"아 진짜, 그만하지?"
끝말을 높이며 그의 등에 바보라고 적으면, 카오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듣는 기분 생각해봐." 아 예, 전교1등님께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잘난척쟁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꾸욱 등에 글씨를 쓰면 그가 또 심드렁하게 말했다. " 실명 보다 머리가 좋은 건 확실하니까." 얘기할 수록 점점 지쳐간다. 그의 등을 한대 때릴까 생각이 들었지만 나보다 마른 듯한 그 등을 때릴 수는 없어 가볍게 포기하고 말았다. 얘는 왜 남잔데 나보다 마른건데. 나기사는 쉽게 화를 가라앉힌 내가 신기한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 뭐, 뭐, 뭐 됐어 말시키지마. 속에 천불을 삼킨듯한 목소리로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면 더 이상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 지금까지 등에 적었던 글자 중 가장 약하게 그 단어를 썼다. 운전에 집중하는 카오루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자전거라 해도 얻어타는 입장인데 마구 장난치면 안되겠지. 늦어지만 미안. "카오루, 방해 안돼? 그걸 생각 못했네, 미안." 그의 뒷통수를 흘끔 보며 말을 전하면 카오루는 건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뭐, 이제와서 그러니." 말투는 정말 곱게 쓰는 데 마음씨가 그렇지 않다. 한 대 치고 싶다니까 정말. 하지만 문득 보이는 나보다 얇은 손목을 보곤 그 생각을 다시 접었다. 얘 한대치면 진짜 부러질지도 몰라. 사실은 내가 자전거 운전해야 되는 거 아닐까. "그래그래, 미안해." 나는 별말없이 그에게 불만이 담긴 사과를 하였다. 카오루의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실명, 지금 몇시니?"
"여덟시 구분."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쓰인 커다란 숫자를 보고 대답해주었다. "평소보다 더 일찍가려나." 의외인 듯 나기사가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 감정은 딱히 담겨있지 않았다.나는 손가락을 들어 이번엔 그의 등에 다른 글자를 적었다. 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글자 끝 부분이 지저분하게 늘어지도록 이었다. 내 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등허리까지 가 있었다. 손가락을 떼고나면 초여름 햇살이 더 뜨겁게 느껴져 얼굴이 조금 익은 것 같았다. 역시나 이건 좀 부끄럽군. 이 글자를 쓴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기가 소녀만화에 나올법한 짓을 했다는 게 부끄럽다. 오늘 집에가서 이불에다가 화풀이를 할지도 몰라. 아니, 할 거 같다. 윽. 아, 왜 하면 지 부끄러운 게 당연할걸 알면서도 이런짓을 했을까. 나한테도 아직까진 소녀감성이 남아있었구나. 후회의 화끈함을 곱씹으며 그의 등에 다시 손가락을 얹었다. 스키, 어, 스키, 스키야키. 스키야키나 써야지.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저녁메뉴. "실명."
갑작스럽게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자전거를 멈처 세웠다. "어, 어어?" 깜짝 놀라 세우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느라 그의 등에 다시 얼굴을 묻은 내가 고개를 들어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맞닿는다. 나는 그보다 더 진한색을 품으며 고민했다. 뭐지. 알았나. 글자 눈치챈건가. 이제와서 갑자기 나 오늘 스키야키가 먹고 싶은데. 알아맞췄어? 이렇게 물어보는 건 너무 바보같아보이는데. 남은 아무생각 안하는 데 괜히 나 혼자 설레발 치는 거 같잖아. 근데 얜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야. 뭐 할말 있길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알은건가? 읽은거냐구. 이럴수가, 역시 괜히 이런 멍청한 짓을 해가지고 나란 애는! 갑자기 미안하지만 널 그런식으로 생각한 적 없다는 둥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지. 그냥 무슨 소리야, 스키야키가 먹고싶다고. 나르시스트. 이런식으로 치부해버리면 될려나? 근데 그러면 내일부터 또 얼굴보기가 거북해질거 같은데. 아 이럴수가, 제가 괜한 짓을 해가지고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던지다니, 인생이시여. "안내리니?"
"뭐...뭐, 뭐?"
"편의점 도착했어. 여기서 계속 타고 가면 교칙위반이라고 혼날거야."
"아...아, 그래...어, 응. 그래..."
"조금 더운가? 실명, 얼굴이 좀 붉지 않니?"
"자! 잠을 못자서 그래, 내가 원래 피부가 그렇거든. 피, 피곤하면 이래."
"흐음, 그래. 그럼 가자."
나는 카오루의 자전거에서 내려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와, 다행이다. 와, 진짜 부끄럽다. 정말 오만가지 상상을 다했구나, 정작 본인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런식으로 마구잡이 망상을 펼쳐내는 내 자신이 싫다. 머리를 싸매며 후회와 자기 혐오를 음미했다. 곰팡이처럼 우울하고 축축한 맛이야. 정신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마른세수를 하는 내가 이상한 듯 카오루가 나를 부른다. 그는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어 자전거를 끌기 시작했다. 활기없는 얼굴로 총총 그에게 뛰어가면 카오루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 표정, 얼굴 더 못생겨 지겠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대꾸할 기력도 없거든. 나는 묵묵히 그의 옆을 걸을 뿐이였다. 기운없는 내가 이상한 듯 나기사가 흘끔 나를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오늘 저녁은 스키야키 해 달라고 해야지..."
"...아침도 안먹었는데, 벌써부터 너는 저녁생각을 하는 구나."
"시, 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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