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한번 크게 몰아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시끄럽게 소리치지만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듯 했다. 그래, 이미 어쩔 수 없다. 그녀에게 옥상으로 오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 서로는 원하는 것이 일치하니까. 그리고 그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존재다. 반드시 누구 하나는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흑백싸움이다.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을 옷으로 닦고선 문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면 새하얀 시멘트와 퍼런 하늘, 그리고 눈에 지울 수 없는 보랏빛 소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그래."



대화는 곧 단절 되었다. 말을 꺼낼 필요 조차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녀가 나를 불러낸 이유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긴 말 안하고 짧게만 말할게요. 선배한테서 떨어지세요."

"내가 왜?"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아내면 소녀의 이맛살이 치몰린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너하고 하쿠노,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니?"

"어머, 보기보단 다르게 꽤 성격 있으시네요."




그야 당연하다. 본래 내 성격은 사람과 말 다툼 조차 어려워 했지만, BB의 견제 덕에 적어도 그녀에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하쿠노와 어디 놀러가거나, 재밌는 얘기를 나누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 받을 때 항상 뒤에서 노려보았다. 불러내서 협박도 했었다. 보통 여고생이 기껏해야 으름장을 내놓는 것이 무슨 협박이라고 하겠지만, 그걸 들은 본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꼈으니 협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이 선배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미모, 운동, 공부 재색겸비 그 자체인 저한테 아무리 노력해봤자 수준 떨어지지 않나요?"

"너 말야, 하쿠노가 수준을 나눠서 사람을 본다고 생각하는 거니?"

"윽..."

"거기다, 하쿠노는 네가 사람 불러놔서 으름장 놓는 거 알면 바로 화낼텐데. 하쿠노는 네가 착한 애가 아니란 건 알지만 나쁜짓을 하는 걸 눈 감아주는 무른 사람은 아니거든."



물론 하쿠노는 BB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끼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 횡포를 모른척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혼내면 혼냈지. 그리고 눈 앞의 소녀는 하쿠노가 자신을 꾸짖는 걸 무서워한다. 혹시 그에게 미움 받지 않을 까 하고. 이것이 바로 그녀의 약점이다.

하지만 하쿠노에게 여지껏 내게 으름장을 놨다는 사실이 알려질지라도, 하쿠노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각오겠지. 그 위험성을 안고갈 정도로 하쿠노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내 각오가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BB는 분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 뻔뻔한 말투...선배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도군요!"

"누가 뻔뻔하다는 거야. 애초에 맨날 하쿠노한테 내숭 부리는 건 누군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쁜 짓 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안 돼!"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아주 웃기고 있어. 자기는 맨날 하쿠노한테 말 끝마다 하트를 붙이고, 보는 사람 녹을 정도로 애교 피우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음마냥 차갑고. 그게 내숭이 아니면 뭐가 내숭이야?




"...다음 주에 해수욕장 근처에서 불꽃놀이 축제 열리는 거 알죠?"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그 축제를 말하는 건가? 나는 짧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BB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곤 의지깊은 눈동자로 말하였다.




"저하고 내기해요."

"내기? 무슨 내기?"

"그 불꽃놀이 축제에, 선배랑 누가 같이 갈지 내기해요. 만약에 제가 이기면, 당신은 이제 선배한테 떨어져 주세요."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해야 되는 건데?"

"대신, 제가 지면 선배한테서 떨어질게요."




BB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을 내걸며 내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가 하쿠노한테 떨어지면 나한테야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질 경우의 패널티가 너무 크다. 완전 모 아니면 도잖아? 항상 BB가 방해하는 바람에 하쿠노랑도 겨우 약속 잡아서 놀러가고 하는데. 만약 내기에서 진다면 하쿠노한테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다는 거잖아? 그건 싫다. 내가 내기 결과를 무시하고 다가가려고 해도, 이 소녀는 죽을 힘을 다해 날 방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질지도 모르는 경기는 거절하는 게 나을거다. 애초에 난 도박 같은 건 싫어하니까.

 



"...아니, 그건 불이익이 너무 커. 난 안해."

'흥, 저한테 선배를 빼앗길까봐 무서운가 보네요? 그렇게 자신이 없나요? 뭐 제가 당신부터 백배 천배 선배한테 어울리긴 하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야 당연하지. 누구하고 사귈지 결정하는건 하쿠노니까. 하쿠노의 선택을 내가 어떻게 막아? 네가 아무리 사람 골탕먹이고 협박하는 무서운 여자지만, 하쿠노는 그런 너라도 선택할지 모르잖아."

"...말이 꽤 험해지셨네요. 예전엔 으름장만 줘도 울먹거렸으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인데?"


BB를 향해 원망을 가득담은 눈초리를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해버렸다. 역시 이 소녀 아주 무서운 여자다.



"좋아요, 그럼 내기 결과내용을 바꾸죠. 진 사람이 선배하고 일주일동안 접촉하지 않는 거에요. 당신하고 선배는 같은 반이니까 인사까지. 제가 선배 옆에 꼭 달라 붙어도 지켜만 보는 거죠."

"아까부터 네가 이길것 처럼 얘기하네?"

"흥, 그야 이렇게 귀여운 후배를 버리고 당신같이 개성없는 동급생을 고를리 없잖아요?"

"허세부리긴. 너 그러면서 하쿠노한테 차이는 거 무섭지?"



그리고, 하쿠노가 진작에 그런 끼부림에 넘어가는 애라면 진작에 너한테 넘어갔을걸? BB를 향해 조롱을 던지면 그녀는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속이 약간 뚫리는 기분이였다.




"좋아, 그 조건으로 내기 받아들일게. 8월 1일은 일요일이니까, 토요일 방과후까지 하쿠노에게 선택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어때?"

"좋아요. 대신, 선배가 그 전에 누군가를 선택해도 승패는 뒤집을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흥! 반드시 이겨서 선배옆에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있는 당신 얼굴을 떼어버릴 거에요!"

"혀 내두룰 정도로 붙어있는 게 누군데? 연하인 거 어필하면서 알랑거리면서!"

"어머, 제가 선배보다 어린게 부러우신 가 봐요? 그러고보면 선배는 연하가 취향인 거 같던데."

"웃기네! 내가 물어봤는데 상관없다 그랬거든? 그리고 난 하쿠노랑 동급생인 게 아아주 좋아.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반이니까 매일 얼굴도 볼 수 있고."




만화 속에서 나올 것 마냥 그녀와 나는 이글거리는 불꽃을 등 뒤에 맨 체 서로를 못마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구겨진 이맛살이 그대로 주름으로 남을 것만 같다.



"토요일 날 당신에게 승리의 선언을 날릴테니까 각오하세요!"

"너야말로 졌다고 집에가서 일기쓰면서 울지나 마!"



그렇게 BB와 나의 목숨을 건 대결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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