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사, 나기사. 있잖아
"..."
"쫌. 무시하지 말고! 나 저번에 신지군 봤는데, 걔 되게 귀엽더라."
"...?"
나기사 카오루가 관심을 가질 이름을 입에 올리면 그는 눈썹을 약간 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니가 신지군을? 의외네."하지만 그도 잠시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활의 대림끝을 닦았다.
이카리 신지의 이야기를 꺼내면 관심을 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 반응이 없네.
"반응이 뭐 저래...생각보다 안 낚이네..."
"... 내가 무슨 물고기니?"
"소중한 이카리 신지의 이름을 꺼내면 화내거나 기뻐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거든."
"신지군이 누굴 만나든 난 그의 뜻을 존중할 뿐이야."
무표정으로 먼오금을 닦는 그를 보며 저도모르게 손뼉을 쳤다. 역시 나기사 카오루의 아카페 사랑은 대단하시다.
그의 성스러운 성애 덕분에 일부러 떠본 내가 죄책감이 들 정도니 원. 얜 분명 사람이 아니라 인외존재일 거야.
"잡담할 시간 있으면 너도 도와줄래?"
말투는 고운데 그 뜻은 상냥하지 않은 그의 말이 화살촉처럼 나를 찔렀다. 확실히 윤리적으로 눈 앞에 친구가 혼자서 동아리 일을 하고 있으면,
아니 같은 동아리 부원으로써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카오루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티끝만큼도 없었다. 왜냐면 내가 도와줄 걸 당연시 하며 자처한 일이니까!
"카오루, 있잖아."
"뭐니?"
"난 너 도와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활 닦는 걸 나하고 둘이서 하겠다고 쌤한테 말한거야?"
"...실명. 같은 부원이 혼자서 이 많은 활을 닦고 있는 데 도와줄 생각도 없던거니?"
"아니 내말은, 이 일은 원래 2학년 애들이 모여서 하는 건데 왜 날 시키는 거냐고!"
도대체가 말야. 왜 하필 나냐고. 나기사 카오루님께서 일손이 부족한 데 누구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 부원애들, 아니 전교의 여학생들이 이리저리 모일텐데.
그리고 솔직히 활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동아리 인원도 간당간당해서 열 몇개조차 안되는 데. 허나 맘 같아선 활이고 나발이고 다 부셔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왜냐면 카오루한테 온갖 볼맨소리를 내뱉어도 정작 이 놈의 부탁은 거절 못하니까. 참 나도 멍청한 사람이다. 이러니까 계속 종 취급받는 거지. 딱잘라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기다 날 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찬 인간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이건 완전 답이 없다.
인간은 흔히 발전하는 동물이라곤 하는데, 내가 있으니 그 말은 분명 틀릴거야. 아니 나만 성장 못하는 사람인가. 몇년 째 이 냉혈한. 더욱이 따뜻한 말 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소년을 좋아하다니 말야.
"실명? 무슨 생각하니? 손이 멈췄는데."
"...굳이 부장이신 카오루군이 후배들 꺼 까지 닦을 필요는 없는데. 왜 하나 궁금해서요."
"비꼬는 거 너무 티난다."
"남이사."
"활은 조심히 다뤄야 하는 거니까. 우리학교 활은 좀 비싸잖니."
"...그런가."
조심히 다뤄야 하는 거랑 네가 직접 활을 닦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거냐고. 확실히 카오루가 우리 동아리에서 에이스긴 한데 말야. 화살의 명중률과 활을 잘 닦는 거랑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건가.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 영향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이미 활을 닦고 있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떠올리면, 카오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번에 2학년 애가 활을 닦다가 떨어트려서. 고문 선생님이 내게 부탁하셨어."
"어? 뭐? 그런 일이 있었나?"
"...아, 실명인 요즘 동아리 참석도 안하고 곧장 집으로 가서 몰랐겠구나."
"나기사, 너 좀 말에 가시가 있다?"
"그랬니?"
왠지 말에 가시가 박힌 듯한 말투에 눈이 찌푸려진다. 이거 이거. 대놓고 나한테 면박을 주는구만. 집에가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데 동아리에 나오지도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아까처럼 말하는 경우엔 그냥 하는 말이라고 넘어가겠지만. 카오루가 말하는 건 명백히 핀잔을 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저번에 면전에다가 "할 일도 없어보이는 데 동아리에 나오는 게 어떻니?" 라고 들었으니까.
애초에 운동은 죽어라도 못하는 내가 누구씨의 강요에 가입한 동아리인데. 출석까지 일일히 감시받아야 한다니.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지 감옥을 다니고 있는건지.
거기다, 나는 이제 3학년이다. 즉 고등학교 수험으로 바쁠 뿐더러, 눈치봐야 할 선배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동갑인 카오루의 눈치를 봐야한다니. 이 얼마나 꼴불견인가.
카오루에게 수험 공부 해야한다고, 동아리에 안나간다면 분명히 화뜰짝 놀라겠지. 네가 성적을 신경쓰고 있었냐고. 평소 성적이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아서 몰랐다고. 이런식으로 사람 성을 돋구울 게 뻔하다.
"나 요즘 수험공부 하느라 동아리 안 나가잖아."
"음? 그랬니? 네 성적은 전혀 그런 거 같지 않던데..."
"아 진짜, 그 말 할 줄 알았다..."
예상이 너무 적중하니 오히려 맥이 빠진다. 화낼 힘도 없군. 그의 놀림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묵묵히 활을 닦아냈다. 그러면 카오루가 갑자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머지도 다 하면 저녁 지날 거 같은데."
"어? 그럼 나머진 언제 할려고?"
"내일 내가 아침에 일찍 나와서 할게. 실명인 안 나와도 괜찮아. 여기까지 도와줬으니까."
"...됐어. 어차피 선생님한테 나도 같이 한다고 말했다며. 나도 내일 일찍 나오지 뭐."
"응 그래. 그럼 나오렴."
"...잠깐, 너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거 기다렸던거 같은데?"
"뭐, 그렇지."
그게 뭐야. 눈살을 구기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새초롬 하게 "너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날 도와주잖니." 말하였다.
보통 저 상황에서는 괜찮다고 사양하지 않나. 어쩜 뻔뻔하게 이럴수가 있지.
아, 이래서 평소에 사람이 행실을 똑바로 해야되는 구나. 내가 카오루의 말에 너무 잘 따르니까 당연히 내가 자길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어차피 할거면 바로 도와주면 될텐데. 실명은 불만투쟁이라니깐."
"얘 진짜 성격 나쁘다니까.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나기사가 이런 애란 걸 알아야 할텐데."
"글쎄, 실명보단 내 성격이 더 좋은 거 같은데."
금방이라도 이를 갈 것처럼 꽉 치아를 깨물며 그를 노려봤지만 소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냐 난 안 그래. 누굴 능구렁이 처럼 부려먹지도 않고, 도움 받으면 정중하게 감사인사도 하고.
또 나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둥 깔보진 않는다고.
"실명.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활 좀 원래 자리에 갖다 놔 줄래? 슬슬 돌아가자."
"...내가 이거 갖다 놓는 동안 너 먼저 가고 그러는 거 아냐?"
"실명...유치한 생각은 그만 해."
카오루가 이제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눈을 한 카오루의 말은 아무 불평 없이 고분고분 하게 따르고 만다. 이 이상 더 틱틱거렸다간 화내고 말테니까.
근데 내가 얘한테 혼나야 할만큼 불만을 쏟아 부었나. 카오루가 내게 빈정거리는 말에 대답한 거 말곤 없잖아. 난 맞받아 쳤을 뿐인데 왜 불평쟁이란 소릴 들어야 하는 거지.
모든 활을 다 비품실에 두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면 내 가방까지 들고 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제대로 두고 왔니?" 마치 엄마가 손톱깎이를 쓰고 난 내게 말하는 말투이다.
군소리 없이 응 이라고 대답하며 카오루의 근처로 다가간다.
"아 맞다. 우리 부실 청소는 안해도 돼?"
"그건 아까 실명이 오기 전에 일 이학년 애들이 했어."
"음, 그렇구나."
카오루에게 가방을 받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화면을 풀면, 소년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용무가 있으면 바로 말 걸텐데. 왜 쳐다보는 거지?
"어? 카오루 왜?"
"아니...그냥. 오늘은 같이 돌아가겠다 싶어서."
그거야 네가 날 지명해서 남긴 탓이잖아. 저도 모르게 또 투정을 부릴 뻔 했지만 부드럽게 웃는 카오루의 미소에 그 말은 목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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