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교류회에 가져갈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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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한 내용을 찾아보았어요. 지금 현재 부족한 봉사시간이…대략 50시간 정도 되네요."

전학온 아모로트 학교는 에스컬레이터 전형이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치루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다만 한가지 간과한 사항이 있었는데, 이 학교는 명문학교이기 때문에 유난히 봉사시간 이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이었다.

일반 학교와 학년당 시간이 50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니…이 쯤 되면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지 않나?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연계된 학교니까요. 초등학생은 연간 5~8시간 정도 봉사시간을 이수하지만 이 곳은 10시간 정도는 되요."

"휴…그래도 50시간 정도면 2년 안에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네요."

"어머? 다른 학생보다 부족한 시간이 50시간이라는 거에요. 거기에 추가로 50시간을 2년동안 이수해야 하는 걸요. 3학년때도 봉사활동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보통 그 즈음엔 다들 졸업시험이나 논문 쓰기로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2년 안에 100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거죠. 베네스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100시간…?! 그게 무슨 뉘 집 똥개 이름이라도 되나! 아무리 명문 학교라지만 봉사에 대한 집요함이 도를 넘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졸업생 시기에도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우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스러웠다. 거의 쫓겨나듯 오게 된 전학. 그마저도 당장 자취할 돈이 없어 친척인 베네스 선생님 집에 주소지를 옮겨 겨우 통학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전 학교에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말고, 자취방도 천천히 알아보라고 해주셨지만…. 16살이나 먹었는데 자신의 집안 사정을 모르는 학생이 어디있겠는가. 철없이 살 수 있는 풍족한 머저리라면 가능하지만 가난과 서민의 사이에 걸쳐있는 나는 모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기억보다 좁아져가는 집안. 제철 야채나 과일은 눈에띄게 밥상 위에 줄어들고 인스턴트가 올라온다. 부모님이 입고있던 옷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누가봐도 집안 기둥이 휘어가고 있단 증거인데. 눈 앞에 징거를 무시할 정도로 사리가 어둡진 않았다.

"하………."

"걱정말아요, 해결방법까지 찾아보고 알려준 거에요."

"저, 정말요?!"

역시나 고민의 해결사, 베네스 이모. 실의에 빠진 조카를 바로 구원해주셨다.

이모는 어릴적부터 집안의 자랑이었다. 예쁘고, 상냥하며 똑똑하고, 뭐든지 해내는 수재. 좀 괴짜같은 면이 있어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었지만, 원래 머리 좋은 애들은 나사가 빠진 곳이 있다며 조부모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물론 나도 항상 내게 친절히 대해주는 이모를 맨날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리곤 했다. 이모는 그야말로 아젬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이자 나의 은인이었다.

"나마에가 유난히 다른 학생들과 시간이 차이가 나는 건, 봉사과목을 듣지 않아서에요. 이 학교는 아이들이 중간에 수강철회를 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을 못 채워서 졸업을 못하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강의를 이수하면 추가로 5시간씩 더 주거든요. 1학년때부터 세어보면 대략 45시간…딱 당신이 부족한 숫자죠."

그런 꼼수를 쓰고 있었구나. 역시나, 아무리 모범생과 우등생이 득실거리는 학교라 해도 그 정신나간 숫자는 학생이 채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봉사과목은 학생회에 소속된 사람은 들을 수 없어요. 매주마다 학생회 임원들은 회의를 하는데 그 시간이 봉사과목 시간과 겹치거든요. 그리고 추가시간을 얻기 위해선 강의를 고등학교 2학년까지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학생회 아이들은 입부하자마자 봉사시간을 50시간 받는답니다.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요."

"그럼……"

"네! 나마에도 학생회에 들면 바로 부족한 봉사시간을 채울 수 있어요!"

"어……그런데, 학생회는 지금도 뽑나요?"

그렇게 이득이 있는 학생 활동이면 지원자가 적을리 없다. 이상한 소문 때문에 내쫓겨난 낯선 전학생을 요 고지식한 학교가 잘도 받아줄까? 전혀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내 걱정을 꿰뚫었다는 듯 베네스 이모는 싱긋 웃었다.

"학생회 멤버는 그 소속인의 추천으로도 될 수 있어요. 마침 지금 시간이면 음악실에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볼래요?"

처음보는…사람한테 다짜고짜 학생회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라는…뜻인가요? 그러나 베네스 이모에게 되묻기도 전에 이모는 봉사상담부에 가봐야 한다며 교무실을 그대로 떠나버렸다. 지도교사는 바쁜걸까. 그런것 치곤 자리를 피하는 것 처럼 보였는데…. 뭐 아무렴 어때. 앉아만 있어봤자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움직이고 봐야 하는 법. 혹시 몰라, 운 좋게도 학생회 결원이 있어 입부자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나는 최대한 근심을 집어던지고 음악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음악실은 동관 3층에 있었다. 3층은 거의 졸업생들 전용이라 1학년인 내가 들어가기엔 많이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그러나 2학기를 막 맞이한 3학년 교실은 한산했다. 이게 베네스 이모께 들은 모습인가. 각 학생들은 원하는 과에 맞춰 졸업시험이나 작품, 논문을 쓰느라 학교에 거의 오지 못한다고…했던 것 같다. 1학년 음악 수업이 왜 2학기에 몰려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3학년 눈치 보지 말고 음악실을 마음껏 사용하라는 뜻이였구나.

당당한 걸음으로 음악실을 열자 벽에 잔뜩 걸린 상패가 반겨주었다. 중앙에 놓인 드럼과 심벌즈를 지나면 창문 옆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있는 백발의 소년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안녕."

샛별처럼 파란 눈이 마주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섬뜩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단정한 얼굴이다. 부드러운 눈썹과 함께 휘어진 눈매가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애가 실제하는 구나. 연예인을 직접 보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며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흰 피부가 무척이나 매끄러워 보인다. 남자애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입술을 한껏 올렸다.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빛이 뚜렷한 보석같았다. 그는 그대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큰 눈을 접으며 웃었다. 웃는 상은 꼭 강아지 같은게 무척 귀엽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 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손을 붙잡히고 말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보고싶었어. 그동안――"

"아………그, 누, 누구세요…?"

잘생긴 놈 처음보냐? 부끄러운 짓 그만 하고 정신 차려라. 나는 머리를 뒤 흔드며 그제서야 남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유해보이는 얼굴은 어림잡아 동갑이나 연하로 보이지만…외모로 사람의 나이를 판단할 수야 없지, 선배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학생회에 들어가게 해달라며 잘 보여야 하는 인물에게 버릇없게 굴 순 없으니, 당연히 여기선 존댓말이다!

"저,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누구냐면―"

"………그렇구나, 날 기억 못하는 건가…"

학생회 인물로 보이는 소년은 상심한건지 고개를 숙였다. 언뜻 스쳐간 얼굴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뭐지? 아까 중얼거리는 말도 그렇고 날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이런 미소년을 내가 잊어버렸을리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응? 어…그 쪽이 베네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생회 소속 인거…죠?"

"아…맞아. 학생회 부회장인 1학년, 엘리디부스라고 해. 편하게 테미스라고 불러."

 

엘리디부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동갑이구나, 어려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묘하게 어른스러운 태도때문에 선배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이름으로 부르라고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이런 미소년을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며 친한척 굴고 싶진 않다. 나는 너스레 괜찮다고 거절하며 곧이 곧대로 그를 성으로 불렀다.

 

"베네스선생님이 도울 일이 있을거래서 왔는데, 무슨 일이야?"

"아………정말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물어본건 분명히 용건인데 어째서인지 미소년은 이름을 고집하며 내 눈치를 슬쩍 보고 있었다. 귀엽게 데굴, 올라간 눈동자가 꼭 토끼처럼 귀여운게…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엘리디부스에게 되물었다.

 

"엘리디부스, 학생회를 도울 일이라는 게, 뭘까?"

"1학년 에리쿠토니오스를 아니? 그의 집을 방문하는 거야. 꽤나 학교에 오지 않고 있거든."

"아……에리쿠토니오스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이사장…라하브레아의 아들이었던가? 언젠가 애들이 떠들어대던 이야깃속에서 나온 단어인 듯 했다. 학교에 오지 않는다라…학생회가 찾아갈 정도면 불량학생이라기보단 등교거부 학생인건가.

 

"그 애 집에 가면 되는거야?"

"응, 수업 필기물과 기타 프린트물 같은 거. 우리와 상담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찾으러 갈 때마다 만나주지 않네."

 

엘리디부스는 정말 아쉬운건지 쓴 웃음을 지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가만보자…이거, 기회 아냐? 만약 에리쿠토니오스를 방 밖에 나오게 하면, 적어도 엘리디부스와 얘기할 수 있도록 도우면 학생회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좋은 인상은 남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엘리디부스는 에리쿠토니오스의 집으로 향했다.

훗날, 우리의 만남이 어떤 날개짓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체.  

오리주까진 아니고 귀찮아서 매일 게임하면서 넣는 이름을 그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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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아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아쳐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쳐는 나를 마스터로 생각해주고 있을까. 서번트로 소환 된 이상 마스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내게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 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그에게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많았군...랜서뿐만 아니라 멜트리리스의 건도 있고 말야."

"응."

"...마스터?"

"응?"

"내 착각인 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이 쪽을 쳐다보지 않는거 같은데."

"이 쪽?"

"마스터."

 

아쳐가 타이르듯 나를 부른다. 아이템과 소지금을 확인하고 있던 내 팔을 붙잡고는 똑똑히 자신을 보도록 내 몸을 돌렸다. 이거야 어쩔 수 없이 아쳐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행운이 높아진 대신 근력이 낮아졌다 하여도 서번트와 마술사의 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까. 저도 모르게 놀라 시선을 돌려 버리면 아쳐의 이마가 이그러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왜 내 눈을 피하지?"

"아니...보통 그렇게 진하게 쳐다보면 놀라잖아..."

 

그 말을 내뱉고는 다시 아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검정색 눈동자 안에 내가 비춰지는 것이 보인다. 웃기지도 않는 내 변명에 무명의 서번트는 "내가 물은 건 최근의 일일텐데." 핵심을 꼭 집으면서 내 팔을 더욱 붙잡았다. 이쯤되면 아파오기 시작하지만, 사내로써 그정도는 참으라고 마초 서번트가 으름장을 내놓을게 뻔하니 가만히 있는다.

 

"그런 적 없는데."

"내게 거짓말이 통할거라고 생각하는 가?"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해도 그거야..."

"그거야?"

"......아쳐가 나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목 아파서 안 본거겠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쳐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진다. 아무래도 화난 거겠지. 히익. 저도 모르게 아쳐에게 잡힌 팔에 통증에 짧은 비명을 질러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서번트가 마스터를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닌가? 원래 이 자식이 좀 이런 놈이긴 했지만. 고통과 아쳐에 대한 음울한 마음이 뒤 섞여 목 부근까지 차오른다. 이런걸 욱한다고 하는건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괴상한 말이였다.

 

 

"그거야......아쳐가 씹스트니까 그렇지!"

"...뭐?"

"엇, 아니 방금껀 미안. 잊어.........라고 말해도 전혀 안듣네, 아쳐."

 

이번엔 맥이 풀린 듯 아쳐가 내 팔을 놓고는 한숨을 쉰다. 바보취급당한 건가. "마스터, 때때로 네가 무슨 소릴 하는 지는 몰랐지만. 이 정도로 바보일 줄은..." 역시 그렇구나. 어리석은 사람 취급받은 것은 괜시리 화가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쳐의 눈을 피하게 된 계기를 떠올린다. 하쿠노, 그러니까 내 친구(남자)가 아닌 소녀와 함께 있던 서번트. 그녀를 보호하고 함께 싸우는 남자는 소녀에게 때때로 핀잔을 주고 타박을 굴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것 보다 훨씬 상냥한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함께하고 있는 순간의 표정도, 더욱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였다. 그야 물론 나도 여자가 좋고, 아니 당연히 좋지만. 어쩜 저렇게 성별에 따라서 행동과 말이 싹 바뀌는 거지. 아쳐의 편애적인 모습에 왠지 모를 질투와 함께 그에 대한 짜증이 몰려왔었다. 나도 아쳐에게 많이 폐를 끼치고 있다곤 생각해도 나름에 애정과 친절을 주고 있는데, 그야 물론 귀엽지 않고 퀴퀴한 사내놈한테 애정을 주고싶지 않겠지. 부드러운 소녀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경을 함께 거처온 마스터인데, 성별에 상관없이, 그래도 애정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인가?

 

린과 마력공급을 했을 때도 그렇다. 솔직히 그 땐 그에게 믿음만 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마스터인 나하고 할 생각을 안하고 린을 고르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보통은 마스터를 먼저 생각하지 않냐고. 그리고 하고 난 뒤 그 말과 표정은 무엇이더냐. 린이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그리 좋더냐. 아쳐의 이상형이 린 처럼 기세고 귀여운 여자아이란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마스터?"

"어? 엇......"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점점 우중충한 기운이 도는데."

"......아쳐..."

"무슨 일이지?"

 

기운 없이 그를 불러보면 앞엔 자신을 걱정하는 듯 표정을 바꾸는 서번트가 보인다. 이런 얼굴을 보면 그에게 저도 모르게 두근 거리지만, 그 표정을 다른 여성에게도 보여줬을 거란 생각을 하자 역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세이버한테 시집이라도 갈 걸 그랬나..."

"마, 마스터?!"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안 맞춘다는 거래. 그게 뭐? 그래도 싸움은 잘 하고 있고, 대화도 잘 하고 있잖아."

"사회에선 눈 스킨쉽또한 신용과 애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눈맞춤의 빈도가 떨어진다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죠."

"저, 정말인가?!"

"그치만, 소우마씨 평소랑 전혀 다른게 없는 걸요? 평소처럼 아쳐씨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걱정도 하고..."

"이게 다 잡종 네 놈이 편식을 해서 그런 것이다."

 

 

길가메쉬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학생회는 정적을 맞이했다. 편식이라. 자신이 좋아하는 싫어하는 음식을 가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바보같은 놈, 맛만 좋으면 될 것을. 뭐, 어차피 네 놈은 꽉막힌 놈이니 자신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길...그게 무슨 뜻이야?"

"그걸 알려주면 재미가 있겠느냐? 하쿠노. 뭐, 요컨대 나 처럼 행동하라는 거다."

"아쳐가 길처럼 변하면 유우키는 울 걸."

"뭐라고?! 잡종, 요즘 간이 아주 커졌구나?"

"죄송합니다..."

"...뭐, 난 대충 무슨 소리인진 알거 같지만."

 

 

험악한 길가메쉬와 하쿠노의 만담속에 린이 말을 꺼내었다. 얕은 한숨을 쉬고는 아쳐를 보며 "걱정할거 없어. 서번트와 마스터간의 신뢰가 깨질일은 없으니까. 아쳐가 인간적으로 윳키를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냥 냅둬도 되는 일이야." 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하쿠노와 라니를 냅두고 사쿠라 또한 "아...그런거였군요." 린에게 긍정을 하였다.

 

 

"잡종...네 놈의 이해력은 덜떨어진 놈 답게 같잖지도 않구나."

"엣, 뭐야, 나 지금 왜 길한테 모욕받는 거야?"

"선배는 그런 쪽으론 감이 떨어지니까요."

"...그런 일이군요. 저도 알아들었습니다."

"하긴 저 초식계 동물 애호 남자애가 이런 걸 알리 없지."

"쯧...하찮구나, 하쿠노여. 친우의 고민 조차 이해 못하는 네 놈을 보니 실로 웃음이 나는 군! 하하하!"

"나 왜 비웃음 당하는 거야?! 것보다 라니도 이해한 거야?!"

 

 

소우마 유우키의 이상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하쿠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알몸으로 자고있는 자신의 왕의 품에 안겨있을 때 였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의 이상의 원인을 왠지 모르게 깨달은 아쳐는 마이룸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우키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동성애 자체는 아쳐 또한 그리 꽉 막힌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고 있었다. 본인이 거기에 흥미가 없었던 것 뿐.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지만.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 동료중에서도 동성애자는 뭇 되었으니.

 

세계 여러나라를 누비고, 많은 사람을 만나던 터라 아쳐 또한 동성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의 감정은 당혹함, 왠지 모른 미안함. 아주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스터의 마음을 떠올리는 감정은. 잘 모르겠다. 저항감이 크게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끌리는 것은 아니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아주 꼴사나운 것이기 때문에 아쳐는 결국 마이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미닫이 문을 열고 "마스터, 안에 있는가?" 들어가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흑발의 소년이 붉은 여성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 여성?

 

 

"호오, 네 놈이 바로 이 소년의 서번트인겐가? 아주 부러운 남자이군."

"아, 아쳐어..."

"?! 네놈, 도대체 누구냐?!"

 

자신의 마스터를 여성에게 보호하려고 싶지만, 그는 이미 그 여성에게 폭 안겨있는 꼴이였다. 아쳐의 쌍검을 들고 여성에게 위협을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고 고양이같은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서번트 세이버, 소년의 부름에 응하여 이곳에 현세하게 되었다."

 

 

"부름...? 마스터, 도대체 무슨짓을."

"아냐 잠깐!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무슨 소릴 하는 가! 소자여! 소자가 어제 '세이버에게 시집이라도 갈 걸...'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젯밤(솔직히 이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없지만.) 자신의 마스터가 내뱉었던 터무니 없는 말을, 여성은 홀로 주장하며 소년을 꼬옥 안았다. 그 때 아쳐는 그 세이버가, 학생회장의 서번트 '가웨인' 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소년이 내뱉었던 그 세이버가 바로 이 여성이란 말인가.

 

"아니, 솔직히 적밥폐하를 부른 건 맞긴 한데...진짜 말이 이뤄질 줄은,"

"주자의 뜨거운 고백에 짐은 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년이면 짐은 두말할 것도 없지! 주자여, 짐의 비가 되겠느냐?"

"아니, 폐하, 저기, 저 남잔 데,"

"그대같은 영혼의 소유자면 성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대는 비가 좋느냐? 왕이 좋느냐? 마음이 따르는 대로 고르도록 하여라!"

"......그거, 혹시, 내가 여자든 남자든...날 좋아해주겠다는 거?"

"물론이고 말고!"

 

 

붉은 여성, 세이버의 터무니 없는 말에 아쳐는 그녀를 말릴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스터가 볼을 붉히며 "엣."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였으니. 마스터의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아쳐는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트릴 뻔 하였다. 소년의 수줍은 모습을 세이버는 그저 귀엽다며 애지중지 하고 있었다.

 

 

"저...정말로?"

"왕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 그대같은 강인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비로 삼고 싶지 않겠느냐."

"아니...저...그런 강렬한 고백은 처음 들어서..."

 

소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곤 부끄럼을 떨고 있다. 저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마스터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다. 언제나 엉뚱한 말을 하곤, 수치라곤 없던 소년이 지금은 저리도 한껏 쑥스러워 하고 있다니.

 

"소자여, 짐의 고백을 받겠느냐?"

"......저기...그...나도 날 그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면..."

"마스터는 못 넘긴다!!!"

 

정신을 놓고 가만히 그 둘의 열렬한 사랑의 대사를 보고 있던 중, 아쳐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곤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세이버에게 안겨있는 소년을 자신의 품에 감추곤 그녀를 향해 눈초리를 주면, 소녀 또한 아쳐를 향해 눈을 부릅 떴다.

 

 

"마스터! 정신 차려라. 저런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함부로 휘둘려져서는 안 돼! 애초에 넌 너무 헛점이 많아, 정말이지 내가 눈을 뗄 수가."

"하하! 정말이지 들어줄 수 가 없는 잔소리구나! 주자는 계속 저걸 듣고 지냈는가? 참으로 딱하도다. 그러고보니 주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 소우마 유우키라고 합니다..."

"마스터어! 정신차려! 그렇게 쉽게 답하지 마! 정말이지! 넌 지금 몹쓸 마술에 걸려있는 건가?! 왜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거야!"

"이미 결정은 났다! 소자여, 저 남자는 이만 끝내고 짐을 맞이 하여라!"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마스터가 세이버를 바라본다. 저건 이미 홀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등장한 세이버 탓에 마스터에게 버림받을 지도 모르는 아쳐는 화가났다. 지금까지 마스터와 겪어온 고난은, 고작 저런 말 쪼가리에 버려지는 것이였는 가. 그 때 느꼈던 믿음도, 우정도, 애정도,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자신의 마스터는 고작 아쳐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그건 안 돼! 마스터가 좋아하는 건 바로 나란 말이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스터가 아쳐를 바라보았다. 그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쳐의 말이 사실인 듯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말을 더듬으며 "뭐!뭔 소리야?!" 자신의 서번트에게 대꾸를 하지만 마스터의 그 얼굴을 본 이상 아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술술 말을 꺼내었다.

 

 

"나하고 눈을 계속 마주치지 않은 것도, 내게 질투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멜트 리리스에게 구애받은 후로, 아니 그 보다 더 훨씬 전인가. 키시나미 하쿠노, 그녀와 있던 또 다른 나를 보았던 이후인거 같군.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모습에 화가난 건가. 마스터."

"린하고 마력공급을 한 후에도, 그 때 마스터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거 같군. 기억난다. 그거 때문에 화가나서 날 보지도 않은 거 아닌가? 유우키."

 

 

아쳐의 눈사태 마냥 쏟아지는 말에 세이버와 소년은 가만히 있었다. 조금은 뿌뜻 했는지 내 말이 맞지? 하며 그가 마스터에게 대답을 물었다. 하지만 싸늘한 표정의 소년은 아쳐의 득의양양한 얼굴에서 눈을 떼었고 세이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쳐를 바라보았다.

 

 

"...네 놈, 그걸 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냐?"

"아니, 그런 일은,"

"됐다. 소자여, 그대도 정말 가련하구나. 저런 되 먹지도 못한 남자에게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농락 당하고...그대가 받은 상처, 짐이 다 헤아려 주고 싶구나."

"그러게, 아쳐,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린하고 상성이 좋다는 둥 별 소릴 했던 거네."

"마스터, 난 그런 게 아니라"

"됐어."

 

 

지금 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스터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 딴에는 마스터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듣기엔 그저 알면서도 일부러 마스터를 간보았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였다. 세이버는 고개를 저으며 "하여간 근육덩어리인 남자들은 어쩔 수 없군." 아쳐에게 폭언을 날려댔다. 마스터와 세이버의 오해에 아쳐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니라고 큰 소리를 지었지만 소년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미안, 세이버."

"마, 마스터?"

"저렇게 짜증나고 말하는 것도 버터 바른 거 마냥 번지르르하고 느끼하고 근력도 낮아서 데미지는 안먹히는 주제에 내구는 약해서 맨날 죽기 바쁘고 스킬을 쓰려고 하면 투영횟수가 필요해서 상대방의 가드마다 투영하고 보구도 데미지 효과 없고 옷 입는 센스도 떨어지는 데다가, 성차별은 엄청나게 심하는 말도 못한 마초지만."

"마스터?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래도 꽤 상냥하고 이런 날 마스터로 인정해주고, 내가 믿을 수 있고, 무엇보다...내가 좋아하는 남자니까 말야."

 

 

소년이 세이버를 향해 얕은 미소를 지으면 그녀는 납득한 듯 "그렇군." 소년을 품에서 떼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버가 아쳐를 향해 말했다.

 

 

"거기, 이 가련하고 강인하고 귀여운 마스터에게 험악한 말만 내뱉는 서번트여."

"뭔가 오해가 있는거 같은데, 난 거기까진..."

"짐은 마음에 들지 않느나, 어쩔 수 없지. 주자가 그대를 원한다면야. 꽃은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아름다운 법. 비록 그 사람이 짐이 아닌게 아쉽지만, 내 특별히 그대에게 양보하겠네."

 

 

아쳐는 약간 떨떠름한듯 말끝을 흐렸지만 똑똑히 알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주자여, 짧은 기간이였지만 만나서 즐거웠네. 짐의 마스터도 그대와 같은 사람이면 좋겠군." 사라지는 듯, 그녀의 주변에서 푸른 색 빛이 맴돌았고, 세이버는 소년의 손등에 작별의 입맞춤을 맞추었다. 아쳐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어라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였으니 더 이상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럼 잘있게나, 유우키. 될 수 있다면 또 보았으면 하는 군."

 

 

귀여운 미소를 짓는 소녀는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이룸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의 마스터와 그 일뿐. 한동안 조용한 정적을 헤메고 있던 것을 깬 건, 바로 아쳐의 목소리였다.

 

"...마스터."

"응."

"아무래도 BB의 짓인 거 같군, 그 티켓처럼 말이야. 구교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그러네."

 

 

무안한듯, 아쳐가 줄줄이 말을 하였지만 마스터는 짧게 그의 말에 대답하고는 가만히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마스터를 봐도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어째서인지 아쳐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이였다. 소년의 감정을 상상했을 때 떠올렸던 감정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묘한 기분이 든다.

 

자, 그래서. 자신의 마스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의 입으로 밝혔고. 소년 또한 거기에 시인하였다. 지금 아쳐가 꺼내야 할 말은 무엇인가. 혹은 마스터는 과연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고요히 자신만을 보는 소년에게서 아쳐는 긴장감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로.

 

 

"아쳐."

"아, 아아."

"오늘은 밖에서 자."

"알겠......뭐? 뭐라고?"

 

 

자신이 상상했던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마스터는 그를 아까와 같이 차가운 말투로 얘기하였다. "남의 마음을 다 알면서 능욕한 게 말이야, 어지간히 짜증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동안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밖에서 자든가 해."

 

 

"마, 마스터?!"

"빨리 나가줄래? 나 피곤하거든."

 

 

마이룸 밖으로 쫓기게 된 아쳐는 방문을 두드리며 "어째서?!" 마스터에게 물었지만 소년은 가볍게 무시한 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요즘들어 유우키가 아쳐를 안 보는 거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말도 안하는 거래. 싸움은 잘하고 있고, 전략도 얘기하고 있지만..."

"그건 아쳐, 당신이 나쁜 겁니다."

"당연하지 않느냐, 페이커. 이 몸 마저 그 잡종이 가엽다고 여길정도니. 그 붉은 여자에게 넘겼으면 네 놈의 마스터도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잠깐, 다들 그걸 듣고 있었던 건가?!"

"일단은, 만일을 위해서 마이룸을 촬영하고 있으니까요..."

 

 

놀란 아쳐에게 사쿠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자신의 추태를 만천하에 알린 것과 동시에 마스터에게 받는 미움을 자업자득이라고 단언받다니. 아쳐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다를 지경이다.

 

 

"어라? 아쳐, 어디가 있었나 했더니 먼저 학생회실로 왔었네."

"마, 마스터..."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이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등장하였다. 평소와 다름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자신의 서번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듯 보였다.

 

"못봐주겠군. 잡종, 네 놈의 딱하다는 건 짐도 인정하는 격이다. 허나 이 페이커 놈이 늘어지는 추태는 꼴도 보기 싫다. 네 놈이 알아서 달래거나 하여라."

"잠깐, 길!"

"뭐? 나 별로 화같은 거 안났는데? 아, 아쳐. 오늘부터 마이룸에서 같이 자도 돼."

"마스터...!"

 

아쳐가 울망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더 이상은 처음에 보았던 여유만만한 그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다. 여성진 멤버들은 그의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미안. 내가 너무 신경쓰이게 해서. 그래도 이젠 괜찮아."

"뭐, 네 기분이 풀렸으면 되는 거고."

"어, 이제 아쳐 안 좋아할 거니까."

 

 

소년의 말 한마디에 학생회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길가메쉬만이 "호오, 재미있군." 하며 입맛을 다실 뿐이였다.

 

"뭐, 뭐?!?!?!"

"아, 물론 서번트로서 믿고 있고 아쳐 본인한테도 정은 있어. 내가 말하는 건 연애감정이니까. 붉은 세이버를 보고 깨달았는데. 의외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것도 성별에 상관없이. 아쳐는 여자애만 좋아하는 스트레이트니까, 괜히 마음 품어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을거고. 난 내 성별에 상관없이 좋아해줄 사람을 찾을래."

"잠깐! 마스터, 내 대답은?!"

"뭐? 아쳐 마음 말야? 그거야 당연히 처음부터 결정된 거 아냐?"

 

비웃는 얼굴을 보면, 소년의 화는 절대로 누그러진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더 돋구아 졌으면 몰라도. 아쳐의 패닉 속에 소년은 "그럼 미궁 탐색을 가볼 까." 하며 자신의 서번트를 두고 학생회실 문을 열어 재꼈다. 소년의 뒤 끝이 심하긴 하지만, 원인은 아쳐에게 있어. 학생회 멤버는 절망에 빠진 아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화가 그나마 누그러진 건, 미궁탐색이 끝난 후 마이룸에서 아쳐가 무릎을 꿇은 뒤 였다.

점심시간 옥상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였다. 4교시는 여자애들은 수영, 남자들은 야외수업이여서 나마에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먼저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나마에는 늘 항상 내게 미안하다며 한시코 내가 그녀의 도시락을 싸오는 걸 거절한다. 하지만 난 직접만든 음식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다는 욕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반찬을 교환하는 거라도 좋으니까, 한입이라도 먹어줬으면 좋겠어. 토우지, 켄스케와 함께 옥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스카가 나마에에게 무언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엑, 나마에 바보신지가 좋아하는 사람 알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 셋은 발걸음을 멈췄고, 동시에 둘이 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응, 그야 뻔히 보이잖아. 이카리 의외로 알기 쉽던데." 새삼스럽다는 듯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스카에게 대답했다. 나, 나마에가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

설마, 평소엔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내 도시락도 거절한 건가. 그렇다면 어떡, 어떡하지. 새파란 얼굴과 달리 새빨갛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아스카는 놀란 듯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고 반장또한 놀란 소리를 내었다. 잠시 소녀들끼리 대화를 하면 나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 아야나미씨 맞지?"

 

 

그 순간 나는 아찔해졌다.

 

 

 

 

 

 

솔직히 알고 있었다. 나마에는 원래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걸. 그러면서 정작 주변사람이 곤란해 하면 발벗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나 또한 아버지나 에바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그녀가 옆에 있어주곤 했지. 감동은 호감으로 바뀌고 소년의 호감은 사랑이 된다. 남의 마음을 멋대로 휘저으면서 왜 정작 자기는 그런 짓을 하는 줄 까마득히 모르는 걸까. 점심시간은 결국 나마에를 뒤로 하고 교실에서 혼자 지내고 말았다. 아야나미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나마에를 어째서인지 제대로 볼 수 가 없어서 였다. 책상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쉬면, 토우지와 켄스케가 걱정하는 지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어?"

"......응, 아무렇지 않아."

"이카리, 표정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나저나, 묘우지 녀석 아야나미로 착각하다니......선생님, 좀 더 발벗고 나서는 게 어때?"

"나, 나서다니...뭘?"

"큰맘먹고 고백을 한다던지...데이트를 한다던지?"

"오, 켄스케. 너 말 잘하는 구만!"

"고, 고백이라니...별로 그런 건..."

 

 

켄스케의 말에 대답을 하면 옆에 나마에가 지나쳐 갔다. 바로 우리 셋은 얼음을 맞은 것 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나마에는 신경도 안쓰는 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야나미에게 다가간 나마에는 즐거운 듯 자리를 잡고 떠들기 시작했다. 천하태평하긴. 사람 속도 모르고. 무심코 나마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다갈색 눈동자와 갑자기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움직인다. 너,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나마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왜?"

"아, 아니...아무것도..."

"이카리 말야...거짓말 할 때 눈을 꼭 피하더라?"

"뭐?!"

"아니 농담인데...진짜야?"

"노, 놀리지 좀 마! 정말..."

 

 

왜 그런 걸로 화내고 그래. 나마에의 볼멘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없이 나를 놀려대는 나마에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켄스케 말대로, 이것저것 나서서 나마에의 마음을 끌어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우선 내가 그럴 자신이 없을 뿐더러, 자존심도 상한다. 쓸모없이 허세를 부려봤자 가장 골치 아픈건 스스로인 건 알지만, 쉽게 마음이 굳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마에는 왠지 내가 무슨말을 해도 다 착각을 할거 같단 말이지. 아예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가정을 상상조차 못하는 거 같아.

정말 고백이라도 하면 달라질까. 하지만 나마에 성격상 고백을 받으면 나한테서 더 멀어질거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나마에하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친구 중에선 가장 친하지만, 오직 친구로만 따지자면 나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에 쓰러져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면 나기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신지군, 뭐해? 고민?"

"나기사.........별로, 아무것도 아냐."

"아, 그래? 당연히 묘우지씨랑 관련된 건 줄 알았지."

"어? 나기사군, 내가 뭐?"

"그게.........아, 이럴땐 함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랬어. 그치 신지군? 아무것도 아냐."

"나기사아아아아......!"

"...아야나미씨, 우리 도서실이나 갈래?"

"...응."

 

 

 

나기사를 죽일듯이 노려보자 녀석은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보아하니 이가 또 나갈까봐 무서워 하는게 틀림없다. 나기사의 눈치없는 말에 화낼 기력도 사라진 나는 가만히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나마에때문에 점점 지치는 거 같아. 다행히도 나마에는 도서실로 사라졌지만, 보통 조금이라도 신경쓰지 않나. 아니면 나한테 그 정도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건가. 눈을 반쯤 감으면 위에서 나기사가 토우지와 켄스케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카리!"

"...나마에? 아직 안 돌아갔어?"

"잠깐 도서실에 들렸다가 늦어져서. 이카리는? 오늘은 소집안하나 보네."

"응, 그렇지 뭐..."

"같이 안 갈래?"

"어, 어어 응."

"마침 잘됐다. 우산이 없어서..."

 

 

이카리가 없으면 큰일 날뻔 했네. 반갑게 나마에가 웃으면 괜시리 미간이 찌풀여졌다.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 표정이 풀려버릴 거 같아. 나마에는 겁이 난 듯 저때문에 화났냐며 내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안 그래도 나마에한테 닿지 않는데, 걷는 거리도 떨어트릴 필요 없잖아. "그런거 아니야. 나마에, 들어와." 조금 심통난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피면 나마에는 아무말 없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이카리,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아까 있잖아, 나기사군이 말하던거 무슨 얘기였어?"

 

 

 

 

톡 하고 나뭇잎에 고여있던 커다란 물방울이 우산에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나마에에게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겨우 대답했지만 그녀는 성에 안차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설마 내 뒷말이라도 했던거야?" 서운한듯 눈을 찡그리는 나마에에게 나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그럴리가 없잖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진 듯 나마에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또 놀리는 거였나. 한 순간도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욱한마음이 들었다.

 

 

 

"먼저 간다."

"잠깐잠깐 농담이야! 설마, 이카리가 그런 소릴 할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 안하는 걸."

"글쎄, 그건 어떨까."

"진짜라니까, 진짜, 진짜로."

 

 

 

터벅이는 발로 걷고있으면 발걸음에 미치지 못하는 나마에가 쫄래쫄래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약간 비에 젖은 그녀가 이번엔 진심인듯 울상을 지으면 마음약한 나는 화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이카리, 미안해."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목소리를 나마에가 내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도 농담이라며.

 

 

 

"무슨 고민있어?"

"뭐, 뭐?!"

"아니, 오늘 계속 책상위에 쓰러져 있었잖아. 어디 아픈거 같진 않고...괜찮으면 고민 들어줄까?"

"돼, 됐어...그런거 아냐..."

 

 

 

너하고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너한테 말할 수가 있겠어. 지금 여기서 나마에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분명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떨어트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곤란해 하는 모습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고민? 아, 역시 그렇구나."

"무, 무슨..."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면 나마에는 잡아냈다는 듯 개구쟁이마냥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분하고 들켰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빨게지는 게 느껴졌다.

 

 

"음...고백하는 게 어때? 혹시 모르잖아, 그 애도 널 좋아하고 있을 지."

"...그럴일 절대 없어."

"이카리가 그 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들었다면?"

"어?"

"나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는 걸 들었다면?"

 

 

 

한 줄기 빗방울 마냥 땀을 흘리는 나마에의 속은 뻔히 보였다. 아야나미씨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나마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나쁜 건 알고 있지만,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참고로, 아야나미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에게 한마디를 더 꺼내면 나마에는 큰소리를 내며 놀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아니라고......응?!"

"토우지하고 켄스케한테 다 들었어......뭘 멋대로 착각하는 거야."

"...아...미안...이카리, 항상 아야나미씨 잘 챙기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나마에를 챙기는 건 생각지도 않는 건가. 한숨을 쉬며 나마에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째서인지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내가 아야나미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도 슬픈건가. 고개를 푹 숙인 나마에는 건들면 흘러내릴 거 같은 빗방울 같았다.

 

 

 

"그럼...달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거야?"

"......글쎄?"

"이카리는 거짓말은 잘 안하지만 대답은 많이 안 하지. 그런 거라고 생각할게."

"잠, 나마에..."

 

 

생기없는 목소리로 나마에가 수긍하였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겨짚다니.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왠지 저 표정, 처음 나마에를 봤을 때랑 비슷하다. 마치 아무 관심도 없는 것 처럼 보여.

 

 

"...그러는 나마에는?"

"어? 나?"

"나마에가 말한대로, 그 나이대인데 좋아하는 사람정돈 있지 않아?"

".........난..."

 

 

평소의 나마에라면 웃으면서 없다거나, 숙녀에게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말할 텐데. 이상하게 장난기가 없는 그녀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진지한 눈동자이다. 좋아하는 여자애 한테서 본 적없는 여성을 발견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뛰게했다. 나마에가 달라보여. 그녀는 운을 떼더니 조곤조곤 빗소리에 맞춰서 말을 꺼내었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 있어."

".........그래?"

"응. 아, 이카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때?"

"난......"

 

 

툭하면 장난을 걸고, 밝게 웃으면서 언제든지 사라질거 같은 실낱같은 사람. 때때로 정말 옆에 있는게 맞는가 싶은 귀신같은 아이. 아무도 모르는 속이 있지만, 감추는 게 싫지 않은 소녀. 언젠간 그 마음을 알고 싶은 나마에. 나마에의 질문 하나에 나는 여러가지 답을 속으로 읊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를 꺼냈다.

 

 

 

"그냥, 바보같은 애 있어."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2월 길바닥은 수북한 눈덩이가 쌓여있었다. 사람 때를 탄 눈덩이는 발자국을 따라 딱딱한 얼음이 되었고 나무 밑에 숨어있는 저들만이 새하얀 빛을 띄웠다. 겨울 바람은 여전히 볼을 매섭게 찌를 뿐이다. 사람들이 분잡하게 모여있는 틈을 파고 들어가 위를 바라보면 예상하던 번호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꽤나.

 

 

"카오루군 봐봐! 합격했어!"

"아, 정말이네요. 잘됐다."

"카오루군, 이 학교 시험친건 너 잖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별로, 시험도 많이 힘들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요."

 

 

카오루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기사 머리가 아주 좋으시니까 그러시겠지. 난 이 학교 올려고 학원에서 썩어갔는데. 그의 잘난척에 기분이 상할법 했지만 귀엽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을 보니 그것도 풀려버렸다. 귀여워. 단추를 목까지 채운 떡볶이코트가 아주 잘 어울린다. 카오루군은 자신의 머리칼보다 훨씬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꼭 백설기 같다. 눈만 빨간 그가 더욱 집중되었다.

 

 

"카오루군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는 건가...응, 아주 좋네!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 블레이저가 멋지기로 꽤 유명하니까. 카오루군이 입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두근두근 거려."

"나마에씨, 이제 성인인데 미성년자를 건들이는 건 범죄가 아닌가요?"

"나 아무짓도 안했잖아...너무해...맞는 말이라서 더 슬퍼..."

 

 

소년이 싸늘한 말을 꺼내고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그래, 지금껏 카오루군에게 맹렬하게 사랑을 전했지만 그것도 소년법이 지켜주던 때였으니까. 지금부턴 조심해야겠지. 근데 내가 범죄를 저지를 만큼 그렇게 민폐를 끼쳤었나. 그동안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왠지 소년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내가 좀, 여러가지로 쫓아다니곤 했지. 빠순이 마냥.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그의 말마따라 성인답게 구는게 좋고, 무엇보다 대학생인데도 애 같이 구는 건 착한 그라도 싫겠지.

 

 

 

"그러고보니 카오루군, 왜 우리 학교 지원했어? 카오루군이라면 더 좋은데 갈 수 있을 텐데."

"신지군이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군...한 방에 납득이 가네."

 

 

신지도 우리학교로 지원했을 때 예상했지만 역시나 딱 들어 맞는 군. 조금은 나를 따라 학교에 와준 건 아닌가 기대했었는데. 설마는 사람을 잡지 않았다. 오늘은 정시지원자, 어제는 수시지원자 모집발표였다. 카오루군은 수시로 지원해도 붙을텐데 굳이 정시로 한 건 신입생 대표로 뽑힐 확률이 높아서 라고 신지가 말했던 거 같다. 정작 카오루군 본인은 관심이 없지만 학자집안이다 보니 그런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했다. 카오루군과 인파 속에서 짧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싶어 돌아보니 후배 몇이 서 있었다.

 

 

 

"어, 둘이 여긴 왠일이야?"

"부활동 하다가 심심해서 와봤어요. 어~옆은 누구?"

"아, 내 사촌동생 친구야. 카오루군, 이 쪽은 아는 후배."

"안녕하세요."

 

 

음, 공손하게 인사하는 카오루군도 너무 상큼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학교는 매년 미스퀸같은 걸 뽑곤 했었지. 난 당연히 뽑힌 적 없지만, 카오루군이라면 일 삼학년 독점하지 않을까. 왕관과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비식 새어나온다. 카오루군은 그런날 약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은.

 

 

"대학교 가도 경기같은 건 보러와줄 거죠?"

"남친 생기면 못 오겠지~아무래도."

"그럼 계속 오시겠네요."

"야, 너 방금 뭐랬어?"

"나마에씨, 슬슬 시간도 되었고 이만 가보는 게 어떨까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거보다, 카오루군. 얘네한테 뭐라 한마디 해줘. 날 웃기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실을 말하는 사람한테 뭐라 할 순..."

"카오루군이 제일 너무 한 거 알아?"

 

 

 

허나 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후배에게 차분히 인사를 했다. 차가운 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앞에서만 저러는 건 기분 좋지가 않지. 하지만 나를 새초롬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역시나 울분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왠지 이 소년의 얼굴이 있으면 세계 3차대전도 평화종전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학교를 벗어나 길가를 그와 같이 걷는다. 나를 데려다 준다는 기특한 일은 아니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 때문이였다.

 

 

 

"카오루군, 초밥이 좋아 패밀리 레스토랑이 좋아? 아까 신지가 나올 때 물어보던데."

"상관없어요."

"어어? 응, 그럼 고기라도 썰까..."

"........."

 

 

평소라면 살이 찐다던가, 이것저것 괜한 핀잔을 주는 소년인데 왠일인지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면 다를거 없이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단박에 그의 기분을 알아채었다. 뭔지 몰라도 카오루군이 화난 것이다. 아니 근데 왜 화가났지. 아까 내가 심한 말이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후배들이 무슨 말이라도.

 

 

"저기...카오루군?"

"무슨일이죠?"

"어어...있잖아, 혹시 화났어?"

"...아뇨."

 

 

야, 화난 거 맞잖아. 딱 봐도 그 대답없는 여운이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걸로 보면 화났다기 보다, 그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삐친듯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지만 잘 생각이 안 난다. 카오루군에게 심한 핀잔을 주거나 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했다면 이 꼬맹이가 했지. 근엄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은 모델같지만 분위기는 을싸년스러웠다. 왠지 내가 바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거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화가났는지도 모르는데, 성의없는 사과를 했다간 오히려 화를 부추길 것 같고.

 

 

"나마에씨는, 고등학교 때 유도부 매니저셨나요?"

"어어...? 으, 응. 아니. 매니저하고 친한 사이였지. 오히려 운동은 젬병이여서...매니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그런가요."

"............그, 그래서. 그 매니저랑, 아까 그 애들하고 자주 놀러가고 그랬어. 친구중에 매니저, 음, 미나코랑 친한애가 있었거든. 그 애가 날 되게 따라줘서 친해졌는데..."

"그렇군요."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그렇냐고 대답하는 그 입이 당혹스러울 뿐이였다. 그치만 아까 유도부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애들을 만났을 때 무슨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솔직히 짐작가는 바는 없다. 카오루군을 제대로 소개 안해줘서? 그건 아니겠지. 그런걸로 화내는 아니다. 그럼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 설마 친한 남자애가 두명이나 있어서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닐테고...

 

 

"카...오루군. 혹...혹시 말야 질"

"질투에요."

"그렇지 질투일리가 없...뭐, 질투?!"

 

 

무심코 목청껏 소리를 질러버렸다. 카오루군은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질책받을만한 짓이긴 하지. 하지만 그 눈빛에 아랑곳없이 가슴은 붕 뜬 기분이였다. 카오루군이 질투를 해주다니. 나를 생각해주다니! 아니, 설마 나를 질투한 건 아니겠지.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현실감 없는 그의 말에 의식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난 몇년동안 그에게 퍼 준 사랑이 조금 결실이 맺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헤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카오루군이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귀담지 않았다.

 

 

"카오루군...결혼할까?"

"나마에씨는 언제나 그런 소릴 하네요."

"미안, 무심코 기뻐서...오늘 집에가서 울어야지. 카오루군 사진 보면서 울거야."

"왜 그런 일을..."

"카오루군은 몰라도 돼."

 

 

사실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나올 거 같지만. 길가에서 갑자기 눈물을 왈칵쏟는 여잘 보면 다들 기함하며 사라지겠지. 카오루군에게 그런 싸늘한 시선은 받고 싶지 않다. 평소처럼 하찮은 농담을 내던졌지만 말이 없는 그는 이질적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동자는 아니다. 왠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지금이 서사마냥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다. 카오루군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마에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

"언제나 제게 그런 소릴 하지만, 정작 그 진심은 알 수 없네요. 정말로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늘 진심인듯 농담인듯 애매모호하게 말을 툭 던지는 당신이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있는 지 알 수 없어요. 나마에씨는 늘 제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정작 진심을 다하지는 않죠."

"......"

"저는 당신의 소모품에 불과한건가요? 당신의 소원은 저를 향하고 있는 건가요. 나마에는 나와 함께 할 마음이 있는걸까. 늘 내 대답을 듣지 않아요."

"카, 카오루군..."

"너는 겁쟁이구나. 내게 너를 보여주지 않아."

 

 

상처받은건가 슬픈건가 분노한건가. 눈썹을 떨어트린 카오루군만 보인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빨간 눈동자는 일렁거렸다.

 

 

 

"카오루군...그럼 내가 만약에 좋아한다고, 카오루군한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하면 뭐라 할꺼야?"

"싫네요, 나마에씨. 전 제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대답하진 않아요."

"카오루군이 만약 거절하면...이도저도 아니게 되잖아. 카오루군을 다시 만날 정도로 그렇게 당당한 사람은 못 돼, 난."

"저는 상관없어요. 나마에씨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연애감정과 별개로 당신에겐 정을 붙이고 있어요."

"그런게 듣고 싶은게 아냐. 그리고...카오루군이 좋다고 해도 내가 싫어. 만나봤자 상처받을 사람을 내가 뭐하러 만나?"

"나마에씨는 저보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거군요."

"그런거 아냐...왜 그런 소릴 하는거야?"

 

 

질질끄는 발걸음을 멈추고 먼저 앞선 그를 보면, 무덤덤한 얼굴로 소년이 "도착했어요. 들어가죠." 태평한 말을 꺼냈다. 목구멍으로 짠 울음이 출렁거렸다.

 

 

"...안 가. 이렇게 카오루군이랑 있어봤자 기분만 상할거야."

"......나마에씨."

"카오루군은 바보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실 건가요? 감기걸려요. 나마에씬 호흡기가 약해서 감기에 자주 걸리시잖아요."

"뭐야 그건...왜 이럴때 뜬금없이 말해..."

"뜬금없지 않아요. 내일 아르바이트도 가야 되잖아요."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걱정하고 있어요."

 

 

 

자극의 반응하는 물체마냥 내가 말만꺼내면 카오루군이 재빠르게 대답을 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면 어느새 키가큰 듯 눈높이가 올라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엇비슷했었는데, 이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건가. 카오루군이 발을 내딛어 거리를 좁혀왔다.

 

 

"나마에씨는 고집불통이네요."

"카오루군도 충분히 그러잖아. 맨날 내가 뭐만 해도 고집부리면서..."

"그런가요. 나마에씨, 고집부리는 사람이 싫다고 했었는데. 제가 고집 부리면서 많이 싫었겠네요."

"...싫은 적 없어."

"........."

"싫을리가 없잖아, 카오루군이 뭘 하든 다 좋은데. 어떤 점이든 다 좋단 말야."

 

 

겨울바람이 코끝을 벤 것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고집불통인 카오루군은 똑같이 목을 움직여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미처 떨어지는 걸 막지 못한 케잌조각 마냥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나마에씨, 울지마세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뒤적이고 있으면 소년이 천으로 눈물 범벅을 닦아주었다. 고개를 돌려 피해보려고 하지만 팔을 붙잡지 않아서 인가, 카오루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찾아 모두 다 닦아내었다. 울음에 잠긴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모든것이 좋니? 나마에."

"........."

"왜? 어째서 그런거니?"

 

 

그거야 카오루군이 좋으니까. 오랜만에 보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고 마는 걸.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더듬더듬 말을 찾아 소년을 좋아한다고 웅얼거리면 그는 흡족한 듯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 표정은 여지껏 어른스러운 카오루군이 짓던 것이 아니였다. 제 소년티가 나는 귀여운 미소였다.

 

 

"네 전부를 내게 줄 만큼 나를?"

".............응..."

 

 

욱욱 흘러나오는 딸꾹질을 참고 열심히 대답하면 그가 나를 양 팔로 꼬옥 안아주었다. 비릿한 겨울냄새가 그의 체취에 감싸 사라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등을 쓰다듬은 듯 딸꾹질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가 내 어깨의 고개를 묻곤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마에씨, 저번에 봤던 영화 기억 하나요?"

"여, 영......영화....?"

"네가 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난 전부 필요 없어."

 

 

그 말이 끝나면 카오루군은 내게서 떨어졌다. 진지하게 나를 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왠지 딸기주 같은 저 눈동자에 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뭐야 그...거..."

"나도 나마에씨를 좋아해요. 아니, 내가 나마에를 좋아해."

"어...어...?"

"겨우 말했네요. 나마에씨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바로 말하면 될 걸, 너무 오래 끈 거 같아."

 

 

눈물과 딸꾹질과 그의 말에 범벅이 되어 얼떨떨한 표정이 된 내 볼을 그가 쓰다듬었다. 나를 끌어안느라 차가워진 손은 어깨를 흠칫 떨게 했지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포게었다. 카오루군의 손이 따뜻해지고 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마에씨, 가게에 들어갈까요?"

"...아니...역시 안 갈래."

 

 

그도 그럴게 카오루군이 너무 날 몰아세웠잖아. 오늘은 가만히 집에 있을 거야. 그에게 애꿎은 타박을 농담으로 던지면, 소년은 "그럼 저도 나마에씨 방에 갈게요." 또다시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말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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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몇년전에 썼던 소설들을 제가 업로드를 안 했던것 같습니다

중복일시 삭제합니다

 

"난 너 아니면 못 사는데 왜 넌 아닌건데!!"
"아니, 사토루 좀 진정..."
"왜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말도 안돼! 너도 날 좋아해야 하는거 아냐?!"
"진짜 돌아버리겠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
"너도 날 좋아해! 지금 당장 사귀자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



2005년 일본 하라주쿠. JR의 최강 집결지 중 하나로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젊은이들의 거리.
...를 고죠 사토루는 길 바닥에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이 더러워지든 말든,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든 말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왜 이럴 때 책에서 자주 봤던 도입부가 떠오르는 걸까. 그건 아마 내가 현실도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증스런 인간은 죽어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멀쩡한 허우대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쓸고 있다.
귓가가 무척 따갑다.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 부족한 거 없어보이는 학생이 왜 저러고 있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사토루는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팔 다리를 휘두르는 와중에 날 놓지 않는걸 보고 누가 그 거짓말을 믿겠는가.



"제발, 사토루, 좀, 일어나!! 야악!!!! 일어나라고!! 너 갑자기 왜 이래!! 난 하라주쿠에 쇼핑하러 온 거지 190cm 다 되가는 남고생 돌보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내 고백에 대답해!! 좋아한다고 대답하라고!!"



그래, 갑자기 사토루가 고백을 해왔다. 별 시덥지도 않은 잡몹(라고 사토루가 말한다)용 임무를 끝내고 쇼핑을 가려하자 사토루가 따라왔다. 나도 데려가, 라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같이 전철에 탔는데...
별 생각 없이 데려가선 안됐다. 살 것도 없는 지 계속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사토루는 방해였다. 차라리 쇼코처럼 따로 행동하던가, 스구루 처럼 조용히 따라오던가 할 것이지. 뒤에서 옷을 고르면 그건 너무 짧다느니, 안 어울린다느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옷을 입냐. 해가 서쪽에서 뜨냐...등, 거슬리는 소리만 일삼았다.


여기서 고죠 사토루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간 고전에 돌아가 괴롭힘을 당할게 뻔했으므로...나는 별 수 없이 쇼핑을 포기하고 스타벅스에 들렸다. 입에 초코 프라프치노를 물려주자 조용해진 고죠 사토루. 이걸로 겨우 조용해졌나 싶었으나...문제는 여기서 시작 되었다.



"저...멀리서 지켜봤는데......혹시 옆에 여자친구 인가요?"
"맞아."
"아니에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YES를 대답한 사토루와 NO를 대답한 나. 무슨 농담이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페 안 분위기가 얼음장으로 덮였다. 눈빛으로 말려 죽는 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특급 주령을 노려보는 것 마냥 날 쳐다보는 사토루를 피해 재빠르게 밖으로 도망쳤으나 속수무책이였다. 세걸음도 못 걷고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너, 내가 여자친구라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뭘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난 그런 거짓말 싫어해.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럼 내가 싫다고?"
"어어...?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건......아니지?"



그리고 눕게된 것이다. 각종 구두와 운동화의 때가 묻은 이 하라주쿠 길바닥에. 3만엔 샤넬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사고 버리는 고죠가문 도련님이 누운 것이다.
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이 고죠 사토루를? 이 나이스 가이를?
평소같으면 단어선택이 촌스럽다고 말했겠지만 굉장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맞은 지네처럼 입도 못 열고 고개만 끄덕였다.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치던 사토루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1학년의 그......그 자식이 좋은거냐?" 첫마디가 괴상망측한 소리였다. 1학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난 사토루랑 달리 유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구루처럼 사람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동창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다. 눈살만 찌푸리며 골치를 앓자 참다못한 사토루가 대신 말했다.



"...나나미 켄토! 너도 알 거 아냐."
"아.........아, 그 애? 저번에 하이바라군이랑 같이 있는 거 봤지. 근데 왜?"
"......네 이상형이잖아?"
"뭐? 걔가?"
"키 174이상의, 숫기없고 무서워 보이지만 다정한 성격에! 머리색은 옅은 편이고, 목소리는 츠다 켄! 작년에 스구루한테 네가 대답했잖아!"
"뭐야 그런거 기억할 리 없잖아!!"



그치만 고죠 사토루는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작년 봄 즈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죠 도련님은 제쳐두고 나머지 다른 동급생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은 내가 스구루에게 물어본 것 같은데...솔직히 그걸 이제와서 기억하는 사람이 신기한 거다. 보통은 잊어먹기 마련이라고! 게다가 그 때 사토루는 없었는데 얜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몰라 기억 안 나! 그리고 나나미 켄토라는 애는 만난 적도 없고...만나도 솔직히 금방 반할리도 없잖아. 이상형이랑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거라고."
"뭐야 그럼 나랑 사귀면 되겠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사람이라도 죽일 것 처럼 살벌하던 사토루는 온순해졌으나 내 말에 다시 날카롭게 눈썹을 올렸다. 왜 안되는데?! 아니, 되겠냐고...보통 그런 식으로 사람하고 사귀진 않는다고...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날 좋아하게 될 거 아냐."
"와~! 고죠 사토루 유아독존 나왔다! 아니거든! 내가 너랑 사귀지 않는 이유 3번째가 그거야! 이 자기중심적 인간아!"
"뭐...? 이유가 세 개나 있다고..?!"
"당연하지!!"



첫째. 날 너무 괴롭힌다. 그건 그냥 네가 너무 약해서 별 거 아닌 일에도 신경질 부리는 거잖아. 응 아냐, 입 다물어 사토루.
둘째. 사람들을 너무 깔본다. 적어도 지나가는 선생님한테 인사조차 하지 않는 예의 없는 사람하고 사귀진 않아요. 조용히해 사토루.
셋째. 천상천하 유아독존. 뭐 이건 스구루한테 물어보던가. 야! 그 녀석도 만만치 않거든?! 그래도 스구루가 너보다야 낫지.
넷째. 얼굴이 너무 잘생겼어. 난......굳이 따지자면 올리브 보단 간장파 얼굴이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사실 열거하자면 많지만 대충 이 정도로 끝내고."
"여기서 더 있다고?!"
"사토루...너는 장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네 특징이 내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뭐 이건 변명이고 그냥 너랑 사귀면 고죠 가문이고 뭐고 귀찮을 거 같아서 싫지만! 난 딩크족이거든!"




그리하여 하라주쿠를 넘어 오다이바까지 퍼져나가는 최악의 생떼소리가 태어난 것이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사토루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왜 나랑 안 사귀어 주냐고!! 억지를 부렸다.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가 날 놔줄리 없지. 이 자존감 사나이는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럽기는 커녕 이렇게 해서라도 OK를 받아내면 원만히 해결했다고 좋아할 걸?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고죠 사토루가 내게 수치를 끼얹고도 모자라서 날 이긴다고? 어림도 없지.



"싫어! 떼쓰는 남자는 싫고 그냥 싫어! 내가 질 거 같아!! 평소에 날 비웃은 건 언제고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그건 네가 날 두고 스구루랑 사이좋게 얘기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알까보냐! 그리고 너처럼 뭐든지 가진 남자한테 쉽게 넘어갈 거 같아?! 배알 꼴려서 그건 못 봐주지!!"
"네가 좋아하는 츠다 켄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너 나캄이잖아! 선배 목소리 따라하지마!"




30분을 넘어가는 이 말싸움은 결국 사토루가 오지 않자 마중인으로 불려나간 스구루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이를 악물다 못해 갈고 있는 고죠 사토루를 보면, 아무래도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 했다...

 

 

 

 

 

 

"누나, 요즘 흡혈귀 사이에서 소문 도는 거 알아요?"

"무슨 소문?"

 

서린과 오붓하게 차를 마시던 실명이 그에게 물었다. 인간과 테트라 아낙스의 다과회를 누군가 보게 된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진마 사냥꾼 한세건도 건드리지 못하는 둘의 관계를 함부로 건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형이랑 누나랑 사귄다는 소문이요."

"...뭐?"

"참고로 세건이 형이에요."

 

서린은 실명이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끼 넘치는 말이였지만, 그의 말에 웃을 순 없었다. 설령 그게 농담이라 할지라도.

 

"누나, 미간 찌풀이면 주름진데요."

"그게 문제냐!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그것도 왜 갑자기? 지금?"

"글쎄요? 세건이 형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무슨일은...아무일도 없었는 걸."

 

가끔씩 마법도구를 구매하러 한세건이 집을 찾아오거나, 아르쥬나에서 만난다거나, 한세건에게 볼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간다는 건 이미 평범한 일이다. 특별한 일이라고 하기엔 비즈니스적으로 만나는 것 뿐이라 오해를 받을 일은 더욱이 없다. 게다가 만약 실명과 한세건이 만나는 걸 이유로, 그런 소문이 돌았다면 그 소문은 진작에 흡혈귀 헌터들 사이에서 돌아야함이 마땅하다.

 

"음...그래요? 난 또 진짠 줄 알고 놀랐는데. 에이, 아니네."

"너 방금 에이 라고 했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나저나 날 오늘 부른 것도 그 소문 때문에 부른거야?"

"설마요. 솔직히 진짜 일거라곤 생각안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말 꺼낸거에요."

"근데 너 그 소문 어디서 들은거야?"

"글쎄요...? 그냥 다들 지나가는 얘기로 하는 걸 들었던거 같아요."

 

 

 

 

 

사태는 심각했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지만...한세건과 연인이라는 소문은 솔직히 말해 달갑지않았다. 

한세건이 싫어서, 관심없는 상대와 풍문이 난 게 싫은 건 아니였다. 다만 그는 월야의 세계에서 아이돌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다. 비스트라는 별명이 정말 아이돌 비스트 처럼 모르는 사람이 드물어 잘 어울릴 정도로. 때문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과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도는 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원래 이런건 본인들이 해명을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어 부풀어지는 법이니까. 하물며 상대는 흡혈귀로 실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족들이였다. 타인일수록 더 무심하고 거칠게 말할 수 있는 법.

서린은 그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지만 소문의 당사자로썬 무시할 수 없는 것이였다.

 

 

"무슨 바람이 분거야?"

"뭐가?"

"갑자기 흡혈귀 사냥에 자길 데려가 달라 하지 않나...연금술사는 그만 두고 헌터로 이직하게?"

 

실명이 내린 결론은 흡혈귀 하나를 잡아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자는 것이였다. 한세건과 같이 다녀봐야 소문이 더 불거지면 불거졌지 잦아들린 없다. 더욱이 흡혈귀와 대화할 시간도 없이 보이는 대로 다 죽일게 뻔하니. 한세건과 달리 서현은 여유가 있어 몰래 하나정도 빼오는 건 괜찮을 거고, 서현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줄 것이다.

 

"궁금해?"

"음, 그렇지 뭐?"

".........그러고보니...너 린이하고 동갑인데 왜 나한테 반말이야?"

 

서현은 실명을 보던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소문에 대해 설명하는 건 크게 곤란한 일은 아니였으나, 소문이 한세건에게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한세건과 투닥이면서 저도 모르게 내뱉을 수도 있으니까.

 

 

실명과 눈을 못 맞추던 서현이 갑자기 고갤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실명은 바로 흡혈귀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인 그녀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라이칸슬로프는 분명 다르다. 새삼 그가 풋내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너도 싸울거야?"

"일단은...근데 난 한 놈이면 되거든. 그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돼."

 

0세대 라이칸슬로프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너 밖에 없을거다. 서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림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뭐가 긴장되는 지 한껏 얼굴을 찌풀이고 있었다.

밝히기 싫은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보는 걸 그만뒀지만 정말로 뭔가 사정이 있어보이는 표정이였다.

 

 

기척이 가까워진다.

서현은 실명에게 등을 돌리고 앞을 바라봤다.

 

 

 

//////////////

이래놓고 쓰던 사람이 뒷내용을 잊어버렷네요

죄송합니다;

는 내용은 생일과 1도 관련 없지만...

이건 4년 전 소설이네

아카기랑 같이 학생회...였던가 함튼 그런 드림주 설정입니다

-----


춥다. 나즈막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주머니 속 깊게 손을 넣었다. 옆에서 그녀가 혼잣말을 들은 듯 그렇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칼처럼 매섭게 부는 겨울바람따윈 모르는 듯 버스는 머리끝도 보이지 않았다. 곧 비가 올것같은 하늘이 울적하기만 했다. 이미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옆에 조금 떨어져 나도 서있던 다리를 풀어놨다. 윗단추까지 꽁꽁잠근 교복 마이속으로 찬 바람손길이 느껴진다. 

 

 

"그나저나...학생회도 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네."

"맞아. 모처럼 오전수업만 하는 날인데"

"뭐, 수험생이나 되놓고 학생회에 얼굴 내민게 잘못이긴 하지만."

 

 

아카기군이 날 끌고 간 거 잖아. 하교하던 중 우연히 나와 마주쳐 반강제로 학생회실에 끌려간 일을 떠올리는 듯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짧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면 못 이기겠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번 회장 말이야, 그 1학년이 되었다며? 이름이 뭐였더라..."

"콘노?"

"어, 아 응. 좀 의외더라."

"왜?"

"분위기는 딱 학생회장인데, 원래 그런 애들이 굳이 하는 거 싫어하잖아."

 

 

난 당연히 출마 안할거라 생각했는데. 등떠밀렸나. 그녀가 중얼거리면서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짧게 그 소리가 멈췄지만 왠지 그 모습이 내겐 앙증맞아 보였다. 흠, 딱히 떠밀린거 같진 않던데. 맞장구를 쳐주며 시선을 얼굴로 옮기면 그녀가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다지 놀라보이진 않았다.

 

"음, 그래?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로 맘먹은 계기가 있었나 보지."

"뭐, 갑자기 라이벌 출현해서 의지를 불태웠다던가."

"아하하, 그건 너무 드라마틱하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그녀가 꺄르륵 웃어주자 분위기에 맞지 않는 차가운 비가 아스팔트를 천천히 적시기 시작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무시할 수 없는 소리로 번지면, 우리는 서로를 한번 바라보고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쓱 바깥으로 내밀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손에 빗방울이 투둑하며 떨어져 고이기 시작했다. 비가 꽤 올거 같은데. 그녀는 한번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손에 고여있던 빗물을 털면서 벤치에 다시 앉았다. 따뜻한 그녀의 손은 비에 젖어 얼음장보다 차가워졌을지도 모른다.

 

 

"이래서야...걸어갈 수도 없겠는데?"

"버스는 아직 멀었나?"

"비가 급작스레 오니까, 사람들이 너도나도 버스에 타서 더 늦어질 지도 몰라."

 

 

하여간. 꼭 이럴때만 비가온다니까. 옆에서 그녀가 짜증을 부리며 한숨을 쉬었다. 신경질난 그녀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내 귀를 때렸다. 악의가 없는 말인 건 안다. 하지만 그녀의 짜증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짜증내지마. 그렇다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잖아."

"뭐? 딱히 그렇게 짜증내진 않았어. 아카기군이 화낼 이유는 없잖아."

"화 안났어. 니가 너무 신경질적이게 말하니까, 듣는 사람도 기분이 나쁘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애초에, 아카기군이 학생회에 얼굴 내밀어서 그런거 잖아."

"일이 있어서 그런거잖아. 그렇게 짜증이 났으면 따라오지 않았으면 됐잖아."

"왜 말을 그런식으로만 해?

"너한테 그런 소린 듣고 싶지 않아."

"됐어!!"

 

 

큰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정류장을 나와 인도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며 심하게 당황했지만 목소리에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 비 오는데. 하지만 돌아오는 건 건조하게 그냥 갈거야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아, 또 싸우고 말았어. 자포자기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싸며 고개를 숙였다. 빗소리만 들려오는 정적과 차갑게 옆구리를 매만지는 한기가 후회를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발랄하게 웃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는 옆에 없었다. 지금쯤 그녀는 그 차가워 보였던 손보다 더 추운 어깨를 움츠리며 뛰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쫓아갈까. 하지만 오히려 내 얼굴을 봐서 그녀가 더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쯤 그녀가 가장 보고싶지 않은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그녀를 저 빗속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감기에 걸릴텐데, 12월 초의 겨울날씨는 무정하게도 차가운 비만 내리고 있다.

 

 

비에 젖은 것 처럼, 주머니에 넣은 양 손은 어느샌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보다 더한 차가움을 온몸으로 젖으면서 집에가고 있을텐데. 그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점점 차가워진다.

 

쫓아가자. 옆 자리에 놓은 가방을 들어 자리에 일어나려 하면,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자 여기. 하고

따뜻한 무언가를 내게 던져주었다. 보기 좋게 물건을 받고 그 정체가 캔커피라는 걸 이해하면 방금전 화를 내며 사라졌던 그녀가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어...? 이거..."

"응, 캔커피. 마침 요 앞에서 핫 음료 팔더라구."

"...간 거 아니였어?"

"그냥 왔어."

 

 

또 다시 빗소리만 들리는 정적이 나를 감쌌지만 아까처럼 후회감이 몰려오지는 않았다. 겨울바람도 차갑지 않았다. 캔커피를 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받은 캔커피의 온기에 의지하며 차가워진 손을 녹이고 있었다. 옆 눈으로 힐끔 쳐다본 그녀의 손도 마찬가지 였다. 우린 서로가 말이 없었다. 빗방울만 바닥을 때리고 있던 조용한 순간, 그녀가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아까보다 세게 캔커피를 잡는 그녀의 손은 차가워보였다.

 

"아까 짜증내서 미안해."

"아니...나야말로...먼저 언성 높인건 나니까."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아카기군이 기분나빴을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캔커피처럼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살짝 따라웃어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푸념하듯 사과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안, 늘 항상 이런 식이야. 남들한테 말실수를 자주하고...생각없이 심한말을 해버리는데도 자각없거나 곧바로 깨닫지만...생각만큼 고쳐지지가 않아..."

"응, 알고 있어. 그리고 곧바로 후회하는 것도."

"그거야..."

"그러면 됐어. 다음날 사과하면 돼."

"......"

"말은 가끔 이렇게 나쁘게 말하지만 아카기군은 사실 상냥한 사람이니까."  

 

 

또 그녀가 나를 보며 따뜻하게 웃는다. 빗속을 달리고 있던 그녀를 상상하며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카기군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도 잘못이 있어. 그녀가 이번엔 짖궃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을 꺼냈다. 정말 하여간. 조금 빈정상하는 말이여도 왠지 도는 안도감에 가벼운 콧바람이 나왔다. 그녀는 아하하 거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고마워."

"응?"

"아니, 이거."

"...어? 캔커피 안 마셔?"

 

 

아니, 니 손이 차가워...보여서. 손에 쥐고 있던 아직 식지않은 캔커피를 그녀에 한손에 쥐어주며 미소지었다. 비에 젖어 차가울 그 손이 캔커피에 녹아내렸으면 했다. 그녀를 본 나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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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의 사랑의 꿈이라는 곡이 있는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리스트가...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 데 재력차이인가 신분차이인가 뭐시기 때문에 결국 이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썼습니다 근데 지금은 그게 뭐였는 지 기억이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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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심코 쳐다본 책꽂이에는 리스트의 악보가 가득했다.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며 낭만파 음악을 싫어하는 아버지를 위해 칠 곡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끔씩 억지로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할 때에 대비해, 혹은 예전에 연습했을 때 썼었던 악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사 모은 악보들 사이를 뒤지고 펼쳐보아야, 어느세 색이 바래진 옛 악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나. 본 색깔을 잃은 종이와 옅은 잉크가 얼마나 내버려두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그러고보니 그녀를 만나고 나선 이 곡들을 연주한 적이 없지. 그녀를 위해 곡을 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도, 악보만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사모아 놓았다. 이건 마치 애정표현을 못하는 어리숙한 소년과도 같지 않은가. 꽃을 좋아하는 소녀를 위해 꽃을 열 아름 사다놓았지만 결국은 건네주지 못하는 것 처럼. 멍청이 같긴. 눈에 띄는 악보를 하나 꺼네 펼쳐보면, liebestraum라고 시커먼 글자가 써있다. 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 그런데도 나한테 연주하지 말라고 한 곡. 음악실에서, 그녀는 내게 가장 좋아하지만 나한테만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곡이라고 말했지.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또한 스스로의 말이 창피한 듯 횡설수설하게 이 곡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했지.

 

 

 

 

그녀는 내게 말했다. 만약 그런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거냐고. 평소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자주 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질문에 별 다른 반응 없이 몰라. 라고 대답했다. 좀 진지하게 대답해봐. 보통 이맘 때쯤이면 이정도 반응에 포기할 텐데. 끈질기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동자가 기특하기도 해서.

 

"그 전에, 주변에서 나랑 딱 맞는 여성과 만날거야."

 

무심하게 그 한마디를 대답해주었다. 그 때 그녀의 표정은 어땠더라. 리스트의 실연의 아픔만큼 씁쓸한 미소를 띄웠던거 같기도 하고, 변함없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던거 같기도 하다. 왜 그렇게 웃고 있었는 지, 당시에는 묻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 심기가 불편해지는 얼굴이나 말에만 신경쓰고 있었지, 지금은 다르지만.

 

 

만약, 그녀가 다시한 번 물어봐 준다면. 이번에는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도 그저 아무런 말 도 못할 것이다. 운을 띄우다간, 심심찮게 수도사로는 평생 살지 않겠다고 말하겠지.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버릴 용기는 있지만, 그녀에게 그 진심을 전할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다. 상상속에선 그녀와 함께 열차를 타고 어느 먼 이국으로 떠나고 말겠지.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나와 그녀는 열정적인 연인도 아닌 그저 우호적인 친구관계일 뿐. 우정의 껍데기를 쓴 애정을 갖고있는 건 나뿐일 것이다. 분명히.

 

 

피아노 커버를 열어, 악보를 펼치고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말했다. 이 곡은 나를 젊게 만들어 준다고. 젊었을 적 그 애틋한 사랑을 다시 끓게만드는 만든다고.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피아노 소리가 점점 아름다워질 수록 가슴은 그녀에 대한 애틋함으로 고통스러워 지는 듯하다. 내가 그 노인의 나이가 될 무렵엔, 과연 나는 이 곡을 듣고 무엇을 떠올릴까.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일까. 내 아내가 되어있는 그녀일까. 허황한 망상이 끝을 치닫으면, 황당함이 목구멍을 치솟고 나올것만 같아 건반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바보짓도 정도껏 해야지. 스스로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상처입은 자존심에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여보세요?"

"나다. 너, 지금 시간 괜찮아?"

"괜찮은데, 왜?"

"다음 주 일요일 비었으면, 우리집에 오지 않겠어?"

 

 

짜증이 가득한 가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차분해진다. 아니, 기분이 나빠졌던 때와 반대로 높게 뛰지만. 사랑이란 어떻게도 이렇게 단순한 것에 반응하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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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루, 너 방과후에 약속 없지?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같이 가자."


카오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복도를 떠났다. 옆에 있던 신지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지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교실로 몸을 옮겼다.


어제는 카지씨에게 많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울음을 다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카지씨에게 사과를 하면 그는 멋쩍스런 웃음으로 답하였다. 진정은 좀 됐니?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 목소리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었지.


"와 방금 대단했어, 실명아."

"어? 뭐가?"

"나기사군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

"고작 같이 하교하는 거 뿐이잖아...데이트는 무슨..."

"그치만 너 옛날엔 같이 하교하는 거도 눈치 봤었잖아."



친구의 말에 나는 예전 일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보니 옛날엔 그랬었지, 1학년 땐 카오루는 거의 학교에 스타라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떠돌았으니까.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앨 피하고 다녔었지.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2학년 말 까진 학교에선 말도 잘 안했으니까. 카오루가 졸업생이 될 때 즈음부터 학교에서 대화를 했었던 거 같다.



"이제 애들 눈은 신경 안쓰여?"

"아니 쓰여."

"뭐야...근데 왜 같이 가자고 했어?"

"신경이 쓰여도 오늘 꼭 해야 할 얘기가 있거든."



머리를 긁적이며 친구에게 말하면 그녀는 웃었다. 뭔진 몰라도 일이 좋게 해결 되는 거 같네. 그럼 다행이야. 진심을 담은 그 눈빛이 쑥스러웠지만 고마웠다.


"잘 안 해결 될 수도 있고. 일단 봐야 알 거 같아."

"만약 안 되면 어쩌게?"


음, 글쎄. 사실 우선 이야기만 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뒤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만약에 카오루랑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어봐도 안 된다면...뭐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를 무작정 내 곁으로 끌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것. 그거 뿐이다. 그저 겸허히 카오루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여기서 기다릴 줄은 몰랐네."

"반에 가도 네가 없었거든. 그럼 돌아갈까?"

"응."


교문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카오루와 함께 하교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의 반으로 가면 카오루는 이미 하교하고 난 뒤였다. 설마하니 날 두고 도망쳤을린 없으니,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띄는 은발이 교문 앞에 있었다. 분명 우리 반 보다 늦게 끝났을 텐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간거지?



"네가 혹시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뭐?"


그 말은 즉슨 내가 카오루를 내버려 둔 체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나보다 빠르게 학교를 나선거고. 뭐야 그게. 아무 말 없이 표정을 찌푸리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그런 표정 짓지말라고 말하였다.



"내가 너한테 먼저 말해놓고 도망가겠어? 아님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거야?"

"설마, 그런 일은 없어."


어쨋든 내가 도망갈거라고 생각한 거 잖아. 확신은 아니고 그저 일말의 가능성으로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결투장을 건넨 사람이 바보같이 그 결투를 피하겠냐고.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는 눈치챈 듯 나를 슥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과는 커녕 위로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거다. 그래 비꼬지 않는 게 어디야.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천천히 걷던 도중 우연히 어린아이들이 놀 법한 작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자주 드나들던 곳 이였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낡은 놀이기구 들이 녹슨 몸을 보이며 말해주었다. 하기사 요즘은 다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서 노니까. 이렇게 모래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놀이기구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



"여기서 자주 놀았었니?"

"옛날엔 그랬었지. 그러고보니 너랑 놀이터에 온 적이 없네."



항상 그와 놀 땐 집 안에서 였다. 카오루의 방엔 항상 놀 것이 많아 정신이 팔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비노라 그런가, 햇빛에 약해서 밖에서 모래장난을 한 적은 없었지. 머릿속을 헤쳐내며 몇 기억들을 떠올려봤지만 기껏해야 부모님들 끼리 밖에 나갈 때 빼곤 전무했다. 그래서 카오루가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비밀친구 같은 느낌이여서.



"우리 여기 앉자."

"여기가 좋은 거니?"

"옛날 생각 나서 좋아."



그를 두고 먼저 공원으로 들어가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옛날엔 여기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쳤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곤 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론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카오루랑 오다니. 이렇게 될 줄은 그 땐 꿈에도 몰랐을 거야. 


"실명아."

"응?"

"할 얘기가 뭐니?"


카오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상대를 놀릴 때 간혹 올라가던 입꼬리는 수평이였다. 나는 그를 마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하늘은 윗자락부터 어둠이 기웃거렸다.


"너한테 사과하려고."

"사과?"


저번에 내 방에서 같이 얘기 했을 때 있잖아. 카오루에게 넌지시 말하면 그는 기억하는 듯 작게 수긍의 소리를 내 뱉었다. 



"저번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 있잖아. 너한테 괜히 화내고 놀라게 한 거. 미안해."

"그건..."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 같아."

"...뭘 말이니?"

"너랑 제일 오래 지내왔던 게 나 잖아. 그래서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지. 몇 없는 너의 주변 사람이란 것에 같잖은 책임감을 느끼고 카오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믿었었다. 카오루가 나한테 특별한 만큼 나도 네게 특별한 믿음을 주고 싶었어. 



"바보같이 그렇게 믿은 결과는 완전 꽝이였지만. 나한텐 말야,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게 말이야, 잘 이해가 안갔어."



어느 동화책에 나올법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자길 껴맞추지 않는 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소모품인 것 마냥 말하는 게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되나. 너랑 내가 지내온 시간이 몇인데 그것마저 가볍게 여기는 거 같아서 싫기도 했고.


"뭐, 넌 아니라고 그랬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아는데...납득이 안갔어. 자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애한테 그게 제대로 들렸을리도 없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을 빛에 산수유 같은 눈동자가 빛을 담았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져 작게 헛 기침을 내뱉어 버렸다. 남부끄러운 자기 반성을 고해하는 이 순간조차 설렘을 느끼다니. 나는 이 애를 참 좋아하는 구나. 징하기도 하다.



"나도 내 마음을 가끔 모를때가 있는데, 남에 대해서 다 알고 이해한다고 잘못 믿고 있었어.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닌걸.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카지씨가 말했어. 저번에 시내에서 만났거든. 어색한 웃음을 그에게 내보이면 카오루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지씨 덕분에 깨달은 거 같아. 실은, 나 널 이해 못하는 게 너한테 상처주는 게 아닐까 겁먹고 있었어. 네 곁에 있어도 되나 무서웠어.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죄책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카지씨가 아니래. 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대. 우리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 안다면, 이해 못해도 괜찮은 거야."


목석같이 앉아만 있는 카오루는 반응 조차 없다. 그에게 듣고있냐는 물음을 던지면 카오루는 무겁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지금부터 카오루에게 해야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이 부끄러운 말을 도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 까.


"실명아?"

"왜."

"이제 끝이니?"

"...아니."


카오루가 보채듯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무말도 안하는 내가 참을 수가 없던 게 아닐까. 하얀 속눈썹이 천천히 두어번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입을 움직였다. 왜 쓸 데 없는 곳에서 성질이 급한 걸까. 결정적인 말이야, 언제든지 소리낼 수 있는데. 그 잠깐 망설이는 걸 기다리지도 못하다니.


"그러니까...내가 하고싶은 말은...너한테 사과도 하는 김에 화해하자는 뜻이였어. 나는 카오루 곁에 계속 있고 싶어. 솔직히 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네 곁에 내가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바싹 마른 입술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 남은 건 카오루의 대답 뿐이다. 바람 한줄기조차 가려울 만큼 내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저 입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나올까? 목울대를 두드리는 심장소리는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곁에있을지 말지는, 나는 실명이가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단다."

"그런가...그렇구나."


약간 싱거운 대답을 끝으로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그런건가. 내가 곁에 있고 싶어서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거구나. 지금껏 깊은 굴을 파면서 썩혀왔던 생각들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등줄기를 누르던 무게에 해방된 느낌이였다. 정말 단순한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있는 건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닌거야. 하고싶은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다.



"실명아."

"왜."

"얼굴이 빨갛네."

"그야...너 같으면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하는 게 안 쪽팔리겠어?"

"실명이가 많이 말썽을 피우긴 했지."

"동네 골목대장처럼 얘기하지마."

"그래도 조금은 리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거 같아."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노을마저 저 밑자락으로 내쫓은, 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춰졌다. 옅은 어둠속에 그의 얼굴은 오히려 또렷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미소에 가슴이 간지러운 게 미칠 것만 같았다.



"리린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이 갈 수록 상처 받는 게 나는 너무 안쓰러웠단다. 사람과 닿는게 두려우면서도 외로움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기에 사랑스러웠지만, 사랑했기에 그 슬픔을 멎게해주고 싶었어.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라면, 아마 카오루의 순정의 대상을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내가 카오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이 남자가 목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카오루를 고민에 빠트리고 이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쥐어잡는 그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다.



"그 애는 항상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며 상처를 받았단다. 그래서 사람들과 멀어졌지만  고독과 쓸쓸함을 잊지못해서 결국은 누군가를 원하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어. 하지만 오늘 네 얘기를 듣고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거 같아."



빙긋 올라간 입술은 심술을 부리지 않고 감사함을 표했다. 나도 카오루에 맞춰 웃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 수 없는 그지만, 이 애가 기뻐한다면 나도 기쁘다.



"너 꼭 말하는 게 신같아."

"...후후, 사실 난 천사란다."

"웃기지마. 이렇게 내숭떠는 천사가 세상에 어딨어..."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웃을 뿐이였다. 대답없는 그 모습에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뻔 했지만 실 없는 농담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순수하고 깜찍하지 못했다. 그저 그 미소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맞받아 칠 뿐이였다.



"그래, 뭐 니가 외계인이든 천사든 신이든.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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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도 마실래?"
"아니, 괜찮아."


친구를 내 쫓고 방으로 들인 카오루는 가만히 바닥에 앉아있었다.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워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짧은 거절 뿐이였다.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무거운 공기는 변함없이 나를 짓눌렀다. 카오루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꺼낼 지 긴장하면,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즘 실명이가 이상해서."
"난 맨날 이상하다며."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야! 이럴 땐 아니라고 해야지!"
"...요즘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니?"


핵심을 찌르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민이 있냐고 묻는 게 아니라, 아예 고민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구나. 대답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실명이랑 대화하고 난 뒤였지. 태도가 이상해진게."
"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게 눈에 보이던 걸. 날 볼때마다 괴로워 보이던데."

카오루는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괴로웠다고? 확실히 카오루와 얘기할 때마다,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결코 괴롭지는 않았다. 카오루는 내 표정을 괴로워 보인다고 생각한 걸까? 


"괴롭다니...그런 건 아닌데."
"무언가 참고 있었다는 건 맞구나."


카오루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아버렸다. 그것도 카오루가 지적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테지. 하여간 쓸 데 없이 눈치만 좋아가지고. 무겁게 입을 다물었지만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입술이 말라갔다. 물론 나도 그에게 제대로 내 감정들을 얘기하곤 싶었다. 이렇게 우물쭈물 해 하는 것도, 카오루를 보면서 자꾸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카오루와 대화할 수록 그가 나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카오루가 껄끄러웠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를 알아갈 수록 애정이 식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불안했다. 카오루의 마음을 들을 수록 이 애정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싶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그의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끝에 다다르고, 내가 그를 계 좋아할 지 결정하고 싶었다.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은 하지 못했고 답도 얻지 못했다. 서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른 체 이 사랑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실명, 예전에 네가 했던 말 기억하니?"
"무슨..."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대전시합 전에 일을 말하는 건가. 카오루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카오루가 멀게 느껴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 나기사 카오루는 알아갈 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물론 카오루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전해야 된다고. 감정이란 건 안 보이는 거니까 더욱 보여줘야 되는 거라고 나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고 싶은 마음의 경우다. 나는 카오루에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친구가, 자신을 꺼려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게 실망을 할까? 그건 무섭다.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 또 만약, 카오루가 내 마음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내가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면 어떡하지? 무기력하게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실명이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친구로써...그러니까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려줬으면 좋겠단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표정이였다. 그건 맞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보낸 카오루를 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 안에 깊숙히 숨어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모를거야.
그리고 우정도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카오루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카오루가 듣고 싶은 말은 바로 그 가능성에 대한 것이였다.

나를 직시하는 그 눈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망설임과 함께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테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곤 그에게 말했다.


"꼭 듣고싶어?"
"내 말에 거짓은 없어."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근데...그게 너한테 말하기 너무 무서워."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오루는 어루듯 내게 물었다. 무얼 말이니? 그 말에 나는 빠르게 대답한다.

"내가 말하면 우리 관계가 다 부숴질 거 같아."

그래서 망설여지고 더욱이 숨기고 싶다. 카오루와 계속 지내기 위해선 이 말을 꼭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일까. 그저 모르는 것 마냥 영원히 저 밑바닥 속으로 숨겨버리고 싶은데, 마치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실명아, 그럴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나인데. 충분히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 보다 더욱 허탈했다. 남의 마음이란 건 직접 마주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네가 무서웠어.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위해서 죽어도 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갔거든.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게 무섭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정말 죽어도 되는 거야? 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너무 미웠어. 넌 죽으면 끝이지만 나는 아니잖아. 네 주변 사람들이 남겨졌을 때 생각해 봤어? 내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 안했어?"


너한테는 내가 네 사랑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말 같은 존재였냐고. 그렇게 끝을 내면 카오루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 말은 진심일 것이다.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마음 안 으로 들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게 사람을 쉽게 버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럴거잖아. 만약 네 목숨을 버려야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난 말야, 네 그런 점이 무서웠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그 점이 사람같지가 않았어. 아무 욕망도 없는 거 같아서 겁이 났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처음 보는 사람 같았어."

이런 날 넌 이해할 수 있어?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실명아."
"어, 카지씨!"


오랜만에 번잡한 번화가로 나오면 낯 익은 얼굴과 조우했다. 요즘들어 번화가에 나오는 카지씨랑 마주치게 되는 거 같다. 솔직히 번화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건 이번을 포함해서 고작 두번밖에 안되지만. 카지씨는 외국에 자주 나갔다 오는 사람이라 워낙 만나기 힘들어서, 만날 때마다 인상이 깊었다.


"혼자 여기서 뭐하니? 쇼핑이라도 하려고?"
"책 좀 사려구요. 카지씨는요? 언제 귀국한거에요? 오늘은 아스카하고 같이 안 왔네요?"
"실명아...한개씩 물어보렴."


그나저나 아스카하고는 언제 친해진 거니? 카지씨가 놀란 듯 물어보면 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여자애들은 원래 금방 친해지는 거라고 대답했다. 카지씨는 그저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실명이 만났는 데 어디가서 차라도 마실래? 뭐, 한창 좋을 여자애가 아저씨한테 데이트 신청 받으면 별로일려나?"
"중학생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아저씨는 좀 위험하지만 카지씨는 특별히 봐줄게요."
"아스카를 만나서 실명이가 좀 차가워졌나...?"
"카지씨! 우리 저기 가요!"


카지씨를 기운좋게 끌고 근처의 분위기 좋아보이는 까페로 향했다. 언젠가 친구와 인테리어도 멋지고 커피도 맛있을 거 같지만 비싸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함께 낙심한 곳이였다. 설마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이야. 역시 남의 돈으로는 뭐든 지 할 수 있구나.


"실명이랑 이렇게 둘이서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니?"
"저야 뭐 쌩쌩하죠. 카지씨는요? 원래 방학마다 일본에 오시잖아요. 왜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아, 실은 외국에 나가지 않았단다. 잠깐 회사 일 때문에 말이야. 뭐 카오루 일도 있고."
"그랬구나."
"실명아."


카지씨는 평소에 거들먹 거리는 목소리는 생각조차 안 들정도로 찬찬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언가 얘기하려는 그 눈은 장난스러운 느낌은 전혀 감돌고 있지 않았다. 일하는 카지씨의 모습은 이런 모습일려나. 저것은 명백히 진지한 어른의 눈동자였다.


"카오루랑 싸웠니?"
"카지씨, 저랑 걔랑 싸울 거 같아요? 제가 삐지고 걔는 무시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무슨일은 있었구나. 아, 요즘들어 카오루가 이상한 거 같아서."


곤란해 하며 빨대를 씹는 내게 카지씨는 손을 뻗더니 빨대를 가져가 버렸다. 안 좋은 버릇이라며 살짝 웃는 그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이상하다고 해야 될까...그 애가 그렇게 말하더구나. 역시 사람 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그, 그래요?"
"실명이는 카오루가 남들하고 조금 다른 건 알고 있었지?"


마치 특이한 반 친구를 이해시키려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카지씨는 말했다. 남들과 다른 건 확실하지. 그 차이가 큰지 작은 지는 잘 모르고 애초에 그 차이를 구별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앤 사람 마음을 잘 몰라. 예전부터 그랬거든.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 느낌이랄까? 어릴적에, 그 애 부모님이 카오루를 걱정해서 병원에 데려가셨단다. 남들 보다 공감능력이 좀 떨어진다더구나."


만화같은 표현을 하시네.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다니. 그나저나 카오루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이건 정말 처음듣는 소리였다. 다만 크게 놀라지 않는 이유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그 앨 병원에 데려가신 이유가 납득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잘 지내지만 예전엔 큰일이였어. 사람의 목숨과 벌레의 목숨도 동일시하고, 식욕을 느끼거나 수면욕을 느끼는 걸 기분나빠하고 말이야. 마치 사람으로 지내는 게 어색한 거 처럼. 그래서 친구도 없었어."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었지. 어릴 적 카오루 곁엔 아무도 없었고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의 행동을 헤아리는 사람도 없이, 그 앤 철저한 고독 속에서 지내왔어.


"카지씨, 마치 카오루가 된 것 마냥 잘 아시네요."
"거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무엇보다 그 애가 더 이상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마치 포기한 것 처럼 주변에 맞춰가더군."


어느새 음료가 나온 듯 점원이 우리들에게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카지씨는 찻잔을 들어 이내 한모금 마셨다. 헤이즐넛 향이 은은하게 났다.


"카지씨."
"응?"
"근데 왜 카오루의 과거를 얘기하는 거에요?"


카지씨는 카오루와 있었던 일에 대해, 피하는 내게 나기사 카오루에 대해서 얘기하였다. 흡사 고기를 잡기 위해 조금씩 먹이를 깔아놓는 사냥꾼 같았다.  


"실명이가 카오루랑 있었던 일이 대충 뭐였는 지 알 거 같으니까."
"...정말요?"
"실명아, 난 어릴적에 카오루를 보면서 진심으로 사람이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렇지 않니?"


정확하게 내 속을 꿰뚫어 본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하지 않아도 카지씨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순간 만큼 카지씨와 나는 같은 생각을 공유한 일심동체였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느끼곤 하지만. 적어도 이질감은 많이 없어졌어. 나는 그게 실명이의 영향이라고 생각해?"
"저요?"
"카오루는 실명이랑 지내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카지씨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 좀 기분 나빴을려나? 실험쥐처럼 말해서. 나는 카지씨를 향해 고개를 가로로 가로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카오루와 처음으로 속 내를 얘기했던 그 날에 바로 그와 헤어졌겠지. 카오루가 나를 실험체로 삼았다 해도 싫지 않았다. 지금 카오루가 내게 느끼는 건 틀림없이 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쁠테니까. 이유는 무엇이든 그것이 나와 카오루가 만나게 된 계기이다.


"앞으로 실명이는 카오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겠지. 사람과 신이 다른 점이 뭔 줄 아니? 바로 영향이야.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받는단다. 카오루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이 되가는 거라고 생각해. 물론 실명이도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실명이가 카오루랑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카오루가 내게 영향을 받고, 그 애도 내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사람이 되간다. 흡사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이처럼. 카오루를 사람이 아니라는 그 결론이 조금 꺼려졌지만 카지씨의 말은 내 가슴을 울렸다. 카오루와 그런 사이가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뭐든지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애를 미어내고 말았다. 카오루에게 진심을 터 놓은 날, 나는 카오루에게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했고 그 애는 말 없이 방을 나섰지. 아직까지도 카오루가 떠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 지 신경이 쓰인다. 그 애를 한 번 거절한 내가 카오루에게 다시 다가가도 될까?


"그치만...내가 카오루 옆에 있어도 될까요? 무얼 하든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할 거 같아요. 그러면 카오루가 상처받잖아요. 그건 싫어요."


카지씨의 깊은 말에 저도 모르게 그 속내를 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뜨겁게 눈이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지씨는 내 눈가에 손을 갖다대더니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카지씨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실명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니야.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카오루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은 나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 애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애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곁에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왜 이렇게 간단한 답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얽매였던 것일까? 그의 곁에 오래 있었다는 자부심으로 괜한 책망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였을까. 자만이 화를 부른다는 말은 아마 이런 말일지도 모른다.

히잉, 거리면서 훌쩍이는 나를 보며 카지씨는 그제서야 당황해 했다. 주변 사람들이 카지씨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카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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