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 한지 얼마 안되서 캐붕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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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벤 그 칼이라면 몰라도, 복제품에게 영력을 기대해서 어쩌자는거지?"

아 진짜. 또 저 말이다. 이 사람도 슬슬 저런 말은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나.
관광비자로 놀러온 일본에서, 우연히 사니와라는 직업을 얻게 된 내가 고른 초기도는 야만바 쿠니히로 였다. 보통은 성능을 보고 유심히 고른다곤 하지만, 나는 날카롭지만 예쁜 저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를 고르고 말아버렸다. 이렇게 이쁜 얼굴을 매일 보며 살 수 있다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은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툭하면 꺼내는 말이, 자기보고 예쁘다고 말하지 말라는 둥 자기한테 뭘 기대하냐는 둥 온통 부정적인 말 밖에 없기 때문이였다.
처음엔 이 사람 좀 소심한 사람인가 싶어서. 매일 만바에게 이것저것 칭찬을 하였다. 예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리 혼마루에서 만바쨩이 제일 세, 멋있어. 이런 식으로.
허나 그 칭찬은 그 특유의 어두운 어투로 돌아올 뿐이였다. 자기한테 신경쓰지 말고 다른 대원이나 신경쓰라고.
만바의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늘 항상 그를 애지중지 해왔지만 말하는 것이 항상 저러면 짜증이 솟구친다.

아니 내가 내 검보고 이쁘다고 한게 죄야? 그리고 만바가 혼마루에서 제일 센 건 사실이잖아. 레벨이 제일 높잖아. 그리고 내가 맨날 멋지다고 해도 어차피 날 복제품으로 뭐 이렇게 말하고,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뭐야? 아님 뭐, 내 칭찬을 들을 필요 조차 없다는 거야? 물론 만바가 이런 음습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린 없지만. 저 말을 계속 들으면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만다.
그렇다고 만바를 근시에 두지 않거나 출전에 안 보낼 순 없다. 왜냐면 난 만바가 무지 좋으니까.


만바어록(만바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난 뒤 몇 시간이 흘렀나. 출전하고 돌아온 그는 KBO를 만났는 지 심한 상처를 입어 왔다. 이 정도는 거의 파괴 되기 직전이다.
걷는 것 조차 어려워 하세베에게 부축을 받은 그를 울망이며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상처가 없거나, 몇은 경상이다. 아마 운 나쁘게 그가 집중 공격을 받은 거 같다.

"만, 만바쨩! 괜찮아?"

내 꽃같은 애를 이 꼴로 만들어 버리다니. 내가 좀만 셌더라도 그 놈들을 내 손으로 다 부숴버릴텐데. 눈 조차 뜨기 어려운 듯 만바는 실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어서 빨리 치료해야 겠어.
하세베에게 만바를 내 방까지 부축해 달라고 부탁하면 만바가 한 마디를 꺼냈다.

"이걸로, 됐...어...너,덜너덜해지...면, 나를 비교하는.... 녀석 따위, 없어.지니까..."

평소와 똑같은 말투다. 자기 자신을 안 좋게 말하는 모양새.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허나 만바의 말을 평소와는 다르게 무시할 수 없었다.


"너 말야 내가 널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 줄 알아? 맨날 근시도 너로 하고 장비도 뭐 좋은 거 만들면 바로 너한테 주고 강화도 맨날 시켜주는데! 뭐? 다쳤는데 뭐? 이걸로 됐어 뭐? 너덜너덜 해지면 비교하는 녀석 없어진다고? 아니 다쳤는데 그게 뭔 소리야? 너 다쳐서 내 맘이 얼마나 아픈데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누가 너 비교해? 데리고 와! 내가 영력이든 맞짱이든 뭐든 붙어서 때려 눕혀줄게! 아니, 나 말야. 평소에 니가 뭐 예쁘지 않다던가 그런 소리 하는 건 괜찮아. 난 네가 제일 멋있고 예쁘다곤 생각하는데 부담스러워서 듣기 싫은 걸 수도 있겠지. 내가 너 매일 칭찬하는 거도 안 듣고 넘어가는 거도 좋아. 그래 다 좋다고! 근데 너 다쳤는데 그런 식으로 말해야 겠어? 그럼 내가 얼마나 슬픈 줄 알아? 너 다쳐서 지금 너무 맘 아픈데 니가 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 끝 말을 맺지 못한다. 이미 눈물은 차 올라 흐르고 있는 데 울먹임까지 참으려니 목이 끊어질거 같아서. 주변의 도검들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남 앞에선 체면 깎여서 우는 적은 없지만
만바의 일이라 그런지 자존심이고 뭐고 저도 모르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젠장. 내가 이렇게 맘바를 아끼는 데 이 자식은 그딴 말이나 내뱉고!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이 나쁜 자식아아아아아아."
"아니, 난 그,"
"내가, 흑, 널 어떻게 키웠는데, 흐엉, 그딴 소리나 하고오."


보통 수리는 내 방에서 하지만. 지금은 만바를 후딱 수리하고 방으로 들어가 이 기분을 풀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만바를 마당에서 수리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가 만바를 많이 애정하긴 하지만 방금 전 소리를 들으니 지금은 얼굴도 보고싶지 않다. 자식한테 이렇게 키울거면 날 왜 낳았냐 라며 큰 소릴 듣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거 참 기분 엿같네.


"잠깐, 당신 오해가, 콜록."
"몰라! 나 찾지마아아아!"

엉엉 울면서 만바의 상처 부위를 닦고, 솜방망이로 분칠을 한다. 몇 시간동안은 커녕 일분 일초라도 만바의 얼굴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 거 같아 도움표(手伝い札)를 던진다. 그러면 만바의 몸은 마치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치료 되었다. 얼굴을 적시는 눈물 줄기를 옷으로 훔치며 그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더 이상 상처가 없는 게 확실하다. 시야로 아연실색한 만바와 다른 도검들의 얼굴이 흐리게 지워진다. 멀뚱히 서 있는 그들을 뒤로한 체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결계를 치곤 자리에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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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바가 잘생기고 장비 안깨부시고 성격도 귀엽고 존쎄라서 제일 좋다.
만바가 예쁘다고 말하지마 라고 말할 때마다 아닌데^^ 난 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하고 놀려주고 싶다
난 가짜가 아니야 라고 할때마다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 
근데 수리할 때마다...경상은 그렇다 치고 중상은...진짜 이대로, 썩어 문드러져도, 상관없었는데. 이거 듣고 울뻔했다 내 예쁜 맘바 왜 그런 말을 해 내 맘 아프게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튼 맘바는 더 이상 저 소릴 안했음 좋겠다...들을 때마다 내 마음이 찢어진다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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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너 카오루한테 차가운 거 아니니?"
"...뭐? 내가 언제...오히려 차가운 건 나기사 카오루 걔죠."
"싸운건 아무래도 좋은데, 화해는 해라."
"안 싸웠...아니 내가 차가운게 아니라 카오루가 차가운 거라니까요.""
"그럼 니가 먼저 살갑게 굴던가. 예전엔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녔던 애가."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빠 머릿속에 나와 나기사 카오루의 관계는 아직도 유치원 시절인 듯 했다. 하기사, 아빠는 지방근무시니까 카오루를 잘 못봤을 테니까. 부엌에서 나를 옹호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애가 사춘기라 그런가부지. 냅둬."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한 듯 내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가 아니라 걔가 원래 성격이 그렇다니까. 어렸을 땐 그냥 내가 뭣 모르고 걜 쫄랑쫄랑 따라다닌 거고. 솔직히 그 때도 나기사 카오루는 은근히 차가웠지만. 입술을 이죽이며 텔레비전 음량을 키우면 아빠가 나가시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였다. 나가시게요? 서류가방을 아빠에게 드리며 내가 물어보면 아빠는 나를 쭉 내려다 보셨다. 아 이런. 저런 눈빛은 꼭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하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아빠 입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왔다.


"너 등교 안하냐? 카오루는 항상 이 시간에 등교하던데."
"나기사 카오루군은 모범생이니까요. 전 좀 있다 나가려구요."
"등교해."
"아, 아빠~!"
"등교해, 어서. 카오루랑 같이 가."


결국 아빠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나는 집을 나왔다. 삐죽이는 표정으로 대문의 자동문에게 화풀이를 했지만 가까이서 보이는 흰 뒷통수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였다. 아 이런. 내가 왜 학생회도 아닌데 이렇게 일찍 나가는 거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좋은 일이라곤 없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나기사 카오루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그가 눈이 마주쳤다. "아, 실명. 안녕." 짧게 그가 아침인사를 했다.


"별일이네, 일찍 일어나고."
"......원래 일찍 일어나. 나가는 게 일찍인게 별일인거지."
"그래? 일찍 일어났으면 학교 일찍 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그래~그렇긴 하지...나 먼저 간다."
"어, 잠깐만. 어차피 같은 길이 잖아. 같이 가자."
"...뭐?"
"자전거 갖고 올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그러니까 나기사 카오루가 자전거를 갖고 오겠다고? 자전거를 저 혼자 타고 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끌고 가겠다는 건가. 설마, 설마 같이 타자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온갖 걱정을 가슴속으로 세고 있으면 어느샌가 나기사가 자전거를 끌며 다가왔다. 하얀색 자전거였다. 하얀소년이 하얀 것을 끌고 온다. 우습게도 그 상황에서 실없는 생각을 하였다. 아 잠깐만, 진짜로 저거 같이 타자는 건 아니지. 내가 죽어가는 얼굴로 자전거를 내려다보면 카오루는 나를 쓱 한번 바라보았다. "안타니?" 야 너 같으면 삼삼오오 모여서 친구들이랑 가는 등교길에 타고 싶겠냐. 타도 상관없어서 갖고온거겠지만. 으악 안돼. 이걸 타면 또 여자애들이 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볼게 틀림없다. 가끔씩 나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여자애들에게 뒷담화의 상대가 되곤했었다. 요새는 나도 조심하고 카오루도 내게 안다가오니까 그런 말은 없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좋은데 나기사 카오루께서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나이까. 솔직히 이젠 내게 다가와서 나기사 카오루하고 무슨 사이냐고 묻는 여자애들에게 한 소리할 배짱은 생겼지만, 그냥 뒷담화 대상이 되는 게 귀찮을 뿐이다. 뭐가 되었든 남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 타? 여기?"
"그러라고 갖고온건데."
"카, 카오루...교칙에 걸리지 않을까?""
"저기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내릴 거니까 괜찮을 거야."
"아, 잠...잠깐만. 나 아침 안 먹어서 도시락 좀 사갈테니까 먼저 가."
"학교 매점에 팔 잖니. 거기서 사. 실명이 너 그 매점 싸고 맛있다고 좋아하잖아."


카오루는 내가 애써 생각한 변명거리들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소거해주었다. 나 이거 타기 싫어. 애들한테 이상한 소문나잖아. 이런식으로 말하면 분명히 차갑게 나를 쳐다보면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것같은데. 별 수가 없나. 근데 타고가는 건 역시나 좀 그런데. 속으로 눈물을 짜내며 자전거 앞에 서 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아, 잠깐만." 그는 매너있게 손수건을 뒷자리에 깔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럴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오루는 나를 멍청한 학우 취급을 하다가도 때때로 이렇게 친절하게 굴고는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모르겠네. 솔직히 단순히 몸에 벤 예의범절인 건 알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취하는 센스있는 태도를 표할 때면 괜시리 부끄러워진단 말이다. 날 여자로 보지도 않는 주제에. "자, 타." 깔끔하게 그 한마디를 카오루가 말했다. 이 손수건을 던지고 싫어 걸어가겠습니다. 이렇게 매정하게 말 할 단호함도 없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그의 뒷자리에 탔다.


"실명."
"어, 어어...?"
"허리 좀 더 붙잡아. 위험하잖아."
"뭐, 뭐?"
"이렇게."


카오루의 목소리가 멈추면 그는 내 팔을 잡아 자신의 배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떨어져있던 카오루와 내가 가까워 진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모양새에 나는 균형을 잃어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이제 됐네, 출발할게." 강렬하게 그의 등에 얼굴도장을 찍는 나를 아랑곳 하지도 않고 카오루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숨을 한번 들이키면 카오루의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익숙한 그 냄새에 놀라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덥다. 하복으로 갈아입어서 그런지 여름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야. 여름햇살때문에 내 얼굴은 점점 빨게지고 말았다.
신지군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하는거지. 평소엔 우연히 팔이라도 닿으면 눈살을 찡그리더니. 진짜 별일이야. 카오루를 슥 한번 바라보지만, 나보다 한두뼌 큰 그의 뒷모습만 보인다. 그는 곧 들어오는 열차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만 휘날릴 뿐이였다

나아르으시스트. 문득 그 단어를 손가락으로 그의 등에 써내렸다. 알아 들을려나 이거. 예전에 친구가 나한테 해줬을 때 난 전혀 못 알아먹었는데. 기대를 가지고 카오루가 무슨말을 할지 기다리면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실명, 화낸다?" 이런 알아들었네. 미안. 짧게 그에게 사과를 하면서 울고있는 이모티콘을 등에다가 그렸다. 카오루는 귀찮은 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기사, 내가 뭐라고 쓰는 지 다 알아 맞출 수 있어?"
"글쎄...대강은 다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
"와, 대단하네. 난 못 맞췄는데."
"실명은 머리가 나쁘니까."
"아 진짜, 그만하지?"


끝말을 높이며 그의 등에 바보라고 적으면, 카오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듣는 기분 생각해봐." 아 예, 전교1등님께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잘난척쟁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꾸욱 등에 글씨를 쓰면 그가 또 심드렁하게 말했다. " 실명 보다 머리가 좋은 건 확실하니까." 얘기할 수록 점점 지쳐간다. 그의 등을 한대 때릴까 생각이 들었지만 나보다 마른 듯한 그 등을 때릴 수는 없어 가볍게 포기하고 말았다. 얘는 왜 남잔데 나보다 마른건데. 나기사는 쉽게 화를 가라앉힌 내가 신기한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 뭐, 뭐, 뭐 됐어 말시키지마. 속에 천불을 삼킨듯한 목소리로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면 더 이상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 지금까지 등에 적었던 글자 중 가장 약하게 그 단어를 썼다. 운전에 집중하는 카오루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자전거라 해도 얻어타는 입장인데 마구 장난치면 안되겠지. 늦어지만 미안. "카오루, 방해 안돼? 그걸 생각 못했네, 미안." 그의 뒷통수를 흘끔 보며 말을 전하면 카오루는 건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뭐, 이제와서 그러니." 말투는 정말 곱게 쓰는 데 마음씨가 그렇지 않다. 한 대 치고 싶다니까 정말. 하지만 문득 보이는 나보다 얇은 손목을 보곤 그 생각을 다시 접었다. 얘 한대치면 진짜 부러질지도 몰라. 사실은 내가 자전거 운전해야 되는 거 아닐까. "그래그래, 미안해." 나는 별말없이 그에게 불만이 담긴 사과를 하였다. 카오루의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실명, 지금 몇시니?"
"여덟시 구분."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쓰인 커다란 숫자를 보고 대답해주었다. "평소보다 더 일찍가려나." 의외인 듯 나기사가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 감정은 딱히 담겨있지 않았다.나는 손가락을 들어 이번엔 그의 등에 다른 글자를 적었다. 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글자 끝 부분이 지저분하게 늘어지도록 이었다. 내 손가락은 어느새 그의 등허리까지 가 있었다. 손가락을 떼고나면 초여름 햇살이 더 뜨겁게 느껴져 얼굴이 조금 익은 것 같았다. 역시나 이건 좀 부끄럽군. 이 글자를 쓴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기가 소녀만화에 나올법한 짓을 했다는 게 부끄럽다. 오늘 집에가서 이불에다가 화풀이를 할지도 몰라. 아니, 할 거 같다. 윽. 아, 왜 하면 지 부끄러운 게 당연할걸 알면서도 이런짓을 했을까. 나한테도 아직까진 소녀감성이 남아있었구나. 후회의 화끈함을 곱씹으며 그의 등에 다시 손가락을 얹었다. 스키, 어, 스키, 스키야키. 스키야키나 써야지.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저녁메뉴. "실명."
갑작스럽게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자전거를 멈처 세웠다. "어, 어어?" 깜짝 놀라 세우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느라 그의 등에 다시 얼굴을 묻은 내가 고개를 들어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맞닿는다. 나는 그보다 더 진한색을 품으며 고민했다. 뭐지. 알았나. 글자 눈치챈건가. 이제와서 갑자기 나 오늘 스키야키가 먹고 싶은데. 알아맞췄어? 이렇게 물어보는 건 너무 바보같아보이는데. 남은 아무생각 안하는 데 괜히 나 혼자 설레발 치는 거 같잖아. 근데 얜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야. 뭐 할말 있길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알은건가? 읽은거냐구. 이럴수가, 역시 괜히 이런 멍청한 짓을 해가지고 나란 애는! 갑자기 미안하지만 널 그런식으로 생각한 적 없다는 둥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지. 그냥 무슨 소리야, 스키야키가 먹고싶다고. 나르시스트. 이런식으로 치부해버리면 될려나? 근데 그러면 내일부터 또 얼굴보기가 거북해질거 같은데. 아 이럴수가, 제가 괜한 짓을 해가지고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던지다니, 인생이시여. "안내리니?"


"뭐...뭐, 뭐?"
"편의점 도착했어. 여기서 계속 타고 가면 교칙위반이라고 혼날거야."
"아...아, 그래...어, 응. 그래..."
"조금 더운가? 실명, 얼굴이 좀 붉지 않니?"
"자! 잠을 못자서 그래, 내가 원래 피부가 그렇거든. 피, 피곤하면 이래."
"흐음, 그래. 그럼 가자."


나는 카오루의 자전거에서 내려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와, 다행이다. 와, 진짜 부끄럽다. 정말 오만가지 상상을 다했구나, 정작 본인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런식으로 마구잡이 망상을 펼쳐내는 내 자신이 싫다. 머리를 싸매며 후회와 자기 혐오를 음미했다. 곰팡이처럼 우울하고 축축한 맛이야. 정신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마른세수를 하는 내가 이상한 듯 카오루가 나를 부른다. 그는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어 자전거를 끌기 시작했다. 활기없는 얼굴로 총총 그에게 뛰어가면 카오루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 표정, 얼굴 더 못생겨 지겠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대꾸할 기력도 없거든. 나는 묵묵히 그의 옆을 걸을 뿐이였다. 기운없는 내가 이상한 듯 나기사가 흘끔 나를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오늘 저녁은 스키야키 해 달라고 해야지..."
"...아침도 안먹었는데, 벌써부터 너는 저녁생각을 하는 구나."
"시, 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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