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 아니면 못 사는데 왜 넌 아닌건데!!"
"아니, 사토루 좀 진정..."
"왜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말도 안돼! 너도 날 좋아해야 하는거 아냐?!"
"진짜 돌아버리겠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
"너도 날 좋아해! 지금 당장 사귀자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



2005년 일본 하라주쿠. JR의 최강 집결지 중 하나로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젊은이들의 거리.
...를 고죠 사토루는 길 바닥에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이 더러워지든 말든,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든 말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왜 이럴 때 책에서 자주 봤던 도입부가 떠오르는 걸까. 그건 아마 내가 현실도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증스런 인간은 죽어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멀쩡한 허우대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쓸고 있다.
귓가가 무척 따갑다.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 부족한 거 없어보이는 학생이 왜 저러고 있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사토루는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팔 다리를 휘두르는 와중에 날 놓지 않는걸 보고 누가 그 거짓말을 믿겠는가.



"제발, 사토루, 좀, 일어나!! 야악!!!! 일어나라고!! 너 갑자기 왜 이래!! 난 하라주쿠에 쇼핑하러 온 거지 190cm 다 되가는 남고생 돌보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내 고백에 대답해!! 좋아한다고 대답하라고!!"



그래, 갑자기 사토루가 고백을 해왔다. 별 시덥지도 않은 잡몹(라고 사토루가 말한다)용 임무를 끝내고 쇼핑을 가려하자 사토루가 따라왔다. 나도 데려가, 라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같이 전철에 탔는데...
별 생각 없이 데려가선 안됐다. 살 것도 없는 지 계속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사토루는 방해였다. 차라리 쇼코처럼 따로 행동하던가, 스구루 처럼 조용히 따라오던가 할 것이지. 뒤에서 옷을 고르면 그건 너무 짧다느니, 안 어울린다느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옷을 입냐. 해가 서쪽에서 뜨냐...등, 거슬리는 소리만 일삼았다.


여기서 고죠 사토루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간 고전에 돌아가 괴롭힘을 당할게 뻔했으므로...나는 별 수 없이 쇼핑을 포기하고 스타벅스에 들렸다. 입에 초코 프라프치노를 물려주자 조용해진 고죠 사토루. 이걸로 겨우 조용해졌나 싶었으나...문제는 여기서 시작 되었다.



"저...멀리서 지켜봤는데......혹시 옆에 여자친구 인가요?"
"맞아."
"아니에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YES를 대답한 사토루와 NO를 대답한 나. 무슨 농담이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페 안 분위기가 얼음장으로 덮였다. 눈빛으로 말려 죽는 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특급 주령을 노려보는 것 마냥 날 쳐다보는 사토루를 피해 재빠르게 밖으로 도망쳤으나 속수무책이였다. 세걸음도 못 걷고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너, 내가 여자친구라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뭘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난 그런 거짓말 싫어해.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럼 내가 싫다고?"
"어어...?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건......아니지?"



그리고 눕게된 것이다. 각종 구두와 운동화의 때가 묻은 이 하라주쿠 길바닥에. 3만엔 샤넬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사고 버리는 고죠가문 도련님이 누운 것이다.
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이 고죠 사토루를? 이 나이스 가이를?
평소같으면 단어선택이 촌스럽다고 말했겠지만 굉장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맞은 지네처럼 입도 못 열고 고개만 끄덕였다.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치던 사토루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1학년의 그......그 자식이 좋은거냐?" 첫마디가 괴상망측한 소리였다. 1학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난 사토루랑 달리 유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구루처럼 사람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동창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다. 눈살만 찌푸리며 골치를 앓자 참다못한 사토루가 대신 말했다.



"...나나미 켄토! 너도 알 거 아냐."
"아.........아, 그 애? 저번에 하이바라군이랑 같이 있는 거 봤지. 근데 왜?"
"......네 이상형이잖아?"
"뭐? 걔가?"
"키 174이상의, 숫기없고 무서워 보이지만 다정한 성격에! 머리색은 옅은 편이고, 목소리는 츠다 켄! 작년에 스구루한테 네가 대답했잖아!"
"뭐야 그런거 기억할 리 없잖아!!"



그치만 고죠 사토루는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작년 봄 즈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죠 도련님은 제쳐두고 나머지 다른 동급생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은 내가 스구루에게 물어본 것 같은데...솔직히 그걸 이제와서 기억하는 사람이 신기한 거다. 보통은 잊어먹기 마련이라고! 게다가 그 때 사토루는 없었는데 얜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몰라 기억 안 나! 그리고 나나미 켄토라는 애는 만난 적도 없고...만나도 솔직히 금방 반할리도 없잖아. 이상형이랑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거라고."
"뭐야 그럼 나랑 사귀면 되겠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사람이라도 죽일 것 처럼 살벌하던 사토루는 온순해졌으나 내 말에 다시 날카롭게 눈썹을 올렸다. 왜 안되는데?! 아니, 되겠냐고...보통 그런 식으로 사람하고 사귀진 않는다고...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날 좋아하게 될 거 아냐."
"와~! 고죠 사토루 유아독존 나왔다! 아니거든! 내가 너랑 사귀지 않는 이유 3번째가 그거야! 이 자기중심적 인간아!"
"뭐...? 이유가 세 개나 있다고..?!"
"당연하지!!"



첫째. 날 너무 괴롭힌다. 그건 그냥 네가 너무 약해서 별 거 아닌 일에도 신경질 부리는 거잖아. 응 아냐, 입 다물어 사토루.
둘째. 사람들을 너무 깔본다. 적어도 지나가는 선생님한테 인사조차 하지 않는 예의 없는 사람하고 사귀진 않아요. 조용히해 사토루.
셋째. 천상천하 유아독존. 뭐 이건 스구루한테 물어보던가. 야! 그 녀석도 만만치 않거든?! 그래도 스구루가 너보다야 낫지.
넷째. 얼굴이 너무 잘생겼어. 난......굳이 따지자면 올리브 보단 간장파 얼굴이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사실 열거하자면 많지만 대충 이 정도로 끝내고."
"여기서 더 있다고?!"
"사토루...너는 장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네 특징이 내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뭐 이건 변명이고 그냥 너랑 사귀면 고죠 가문이고 뭐고 귀찮을 거 같아서 싫지만! 난 딩크족이거든!"




그리하여 하라주쿠를 넘어 오다이바까지 퍼져나가는 최악의 생떼소리가 태어난 것이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사토루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왜 나랑 안 사귀어 주냐고!! 억지를 부렸다.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가 날 놔줄리 없지. 이 자존감 사나이는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럽기는 커녕 이렇게 해서라도 OK를 받아내면 원만히 해결했다고 좋아할 걸?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고죠 사토루가 내게 수치를 끼얹고도 모자라서 날 이긴다고? 어림도 없지.



"싫어! 떼쓰는 남자는 싫고 그냥 싫어! 내가 질 거 같아!! 평소에 날 비웃은 건 언제고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그건 네가 날 두고 스구루랑 사이좋게 얘기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알까보냐! 그리고 너처럼 뭐든지 가진 남자한테 쉽게 넘어갈 거 같아?! 배알 꼴려서 그건 못 봐주지!!"
"네가 좋아하는 츠다 켄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너 나캄이잖아! 선배 목소리 따라하지마!"




30분을 넘어가는 이 말싸움은 결국 사토루가 오지 않자 마중인으로 불려나간 스구루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이를 악물다 못해 갈고 있는 고죠 사토루를 보면, 아무래도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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