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계기는 간단했다. 누가 좀 도와달라며 힘 없는 시민이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마음씨 착한 히어로가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전래동화에 나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적으로 부터 위협받고 있다면, 나는 연휴동안 쌓인 과제에 맥을 못추리고 있는 거지만.


".........클락?"


나는 분명히 도움을 부르긴 했다. 믿지 않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까지 끌어 모아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 과제를 누군가 끝내주길 빌었지.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며 간절하게. 그리고 설마 그 결과가 눈 앞에 슈퍼맨을 불러오게 될 걸 누가 알았겠는가.


눈 앞에 남자는 슈퍼맨으로써 입는 수트가 아닌 평상복이였다. 검정색 목티 위에 모닝코트를 입은 아주 말끔하였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후드티 차림에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었다. 단정한 차림새와 늘어진 꼬라지가 아주 잘 비교 되었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길래..."


클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걸 내게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재빠르게 달려...날아왔는 데 눈 앞에는 책상에 좀비처럼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가 있었으니까. 적잖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나도 당황했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던 건 물론이고, 항상 그에게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완벽하게 화장도 마친 상태로 만났었는데 이 꼴이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평소와 똑같이 상냥하겠지만 이건 그저 내 만족감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그 어느 여자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냥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좋을텐데. 슈퍼맨이 들으면 놀랄 생각을 접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이미 그에겐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그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어야지 어쩌겠어. 이제와서 화장을 한다던가 옷을 갈아입는 건 난리 피우는 꼴이 된다. 나는 민망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와줘서 고마워요...그치만... 어쩌죠, 그냥 난 과제가 너무 많아서...으, 미안해요.. 사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어요."

"실명씨, 마음 쓰지 말아요. 오히려 무턱대고 온 제 잘못이에요."


클락은 내게 사과를 건네었다. 흐려지는 그 말 끝이 그가 미안쩍음을 나타내었다. 물론 정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 마냥 도움을 부른 것은 아니고, 그저 개미만한 목소리로 투정부리 듯 말을 꺼낸 것은 사실이지만...엄연히 그가 날 걱정해서 온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괜찮아요...생각보다 클락이 걱정이 많은 편이란 건 좀 놀랐지만."


솔직한 심정이였다. 일반인의 청력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그는 중얼 거리는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기색이 다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감이 임박한 내 과제를 서둘러야 하는 건 맞지만, 적어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사람의 애원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았을텐데. 곧장 달려오는 모습이 뜻밖이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그의 일면이였던 걸까?


"당신의 요청을 듣자마자 경황이 없어져서...미안해요.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 쳐해진 게 아닐까 하고..."



그렇구나.

그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에 그 조그만한 목소리에도 날아온 것이였다. 만약 위협을 가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다급한 목소리조차 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을 둔 것이겠지. 날 생각 해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곤혹해하는 청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클락, 으음......당신이 어떤 걸 걱정하는 지는 알지만...전 별로 당신에게 지켜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히어로의 주변인은 언제든 위협받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였다. 그가 걱정하고 보살피는 존재 보단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애석하게도 나는 과제 하나에 끙끙 앓는 보잘것 없는 대학생이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새끼 병아리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삐약거리는 걸로 보일 것이다. 그 증거로 클락의 표정이 바뀌었으니까. 그치만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클락이 날 생각 해주는 것도 기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싶지도 않구요."


앗, 물론 클락이 지키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짐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허둥지둥 거리며 나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선한 마음이 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이 날 위해서 한 걸음에 와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나보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우선 해도 괜찮아요."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특별함을 얻고 싶진 않았다. 나에 대한 마음과 책임을 전부 다 벗어던지라는 소리는 아니였다. 그저 그의 선함과 힘이 나 때문에 다른 이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음...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절 위해서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무거운 이야기 였다면 사과할게요."


그에게 꺼낸 말이 쌀쌀맞은 느낌이 들어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날 구해주는 건 정말 기쁘지만...클락이 나의 히어로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에게 구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클라크 켄트라는 남자를 원한다. 우리 둘 사이에 슈퍼맨이 존재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물론 클라크 켄트가 바로 슈퍼맨이긴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중점이 되는 건 싫다.


"만약 당신이..."


말이 없는 청년 덕에 어색해진 분위기는 미성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는데도 내가 구하지 못한다면, 난..."


점점 슬픔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뒤를 말하는 것 조차 버거운 듯 입을 다물었다. 상상만으로도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를 안았다.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클락, 괜찮아요. 만약에 그런 상황이 와도...다른 히어로가 있잖아요?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나도 날 지킬 수 있어요."


그러나 번지르르한 말이다. 만약 슈퍼맨에게 적의가 있는 외계인 같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상대가 온다면 나는 위험하겠지. 그치만 그 적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슈퍼맨이 나를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였다. 누구든지 구해주는 슈퍼맨을 사랑했기에 누구든지 구해주길 바랬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상관없다. 죽는 건 역시 무섭지만, 견뎌내야 하며 견딜 것이다.


클락은 대답없이 나를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숨겼다. 감싸안는 그 손은 마치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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