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2월 길바닥은 수북한 눈덩이가 쌓여있었다. 사람 때를 탄 눈덩이는 발자국을 따라 딱딱한 얼음이 되었고 나무 밑에 숨어있는 저들만이 새하얀 빛을 띄웠다. 겨울 바람은 여전히 볼을 매섭게 찌를 뿐이다. 사람들이 분잡하게 모여있는 틈을 파고 들어가 위를 바라보면 예상하던 번호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꽤나.

 

 

"카오루군 봐봐! 합격했어!"

"아, 정말이네요. 잘됐다."

"카오루군, 이 학교 시험친건 너 잖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별로, 시험도 많이 힘들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요."

 

 

카오루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기사 머리가 아주 좋으시니까 그러시겠지. 난 이 학교 올려고 학원에서 썩어갔는데. 그의 잘난척에 기분이 상할법 했지만 귀엽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을 보니 그것도 풀려버렸다. 귀여워. 단추를 목까지 채운 떡볶이코트가 아주 잘 어울린다. 카오루군은 자신의 머리칼보다 훨씬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꼭 백설기 같다. 눈만 빨간 그가 더욱 집중되었다.

 

 

"카오루군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는 건가...응, 아주 좋네!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 블레이저가 멋지기로 꽤 유명하니까. 카오루군이 입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두근두근 거려."

"나마에씨, 이제 성인인데 미성년자를 건들이는 건 범죄가 아닌가요?"

"나 아무짓도 안했잖아...너무해...맞는 말이라서 더 슬퍼..."

 

 

소년이 싸늘한 말을 꺼내고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그래, 지금껏 카오루군에게 맹렬하게 사랑을 전했지만 그것도 소년법이 지켜주던 때였으니까. 지금부턴 조심해야겠지. 근데 내가 범죄를 저지를 만큼 그렇게 민폐를 끼쳤었나. 그동안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왠지 소년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내가 좀, 여러가지로 쫓아다니곤 했지. 빠순이 마냥.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그의 말마따라 성인답게 구는게 좋고, 무엇보다 대학생인데도 애 같이 구는 건 착한 그라도 싫겠지.

 

 

 

"그러고보니 카오루군, 왜 우리 학교 지원했어? 카오루군이라면 더 좋은데 갈 수 있을 텐데."

"신지군이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군...한 방에 납득이 가네."

 

 

신지도 우리학교로 지원했을 때 예상했지만 역시나 딱 들어 맞는 군. 조금은 나를 따라 학교에 와준 건 아닌가 기대했었는데. 설마는 사람을 잡지 않았다. 오늘은 정시지원자, 어제는 수시지원자 모집발표였다. 카오루군은 수시로 지원해도 붙을텐데 굳이 정시로 한 건 신입생 대표로 뽑힐 확률이 높아서 라고 신지가 말했던 거 같다. 정작 카오루군 본인은 관심이 없지만 학자집안이다 보니 그런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했다. 카오루군과 인파 속에서 짧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싶어 돌아보니 후배 몇이 서 있었다.

 

 

 

"어, 둘이 여긴 왠일이야?"

"부활동 하다가 심심해서 와봤어요. 어~옆은 누구?"

"아, 내 사촌동생 친구야. 카오루군, 이 쪽은 아는 후배."

"안녕하세요."

 

 

음, 공손하게 인사하는 카오루군도 너무 상큼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학교는 매년 미스퀸같은 걸 뽑곤 했었지. 난 당연히 뽑힌 적 없지만, 카오루군이라면 일 삼학년 독점하지 않을까. 왕관과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비식 새어나온다. 카오루군은 그런날 약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은.

 

 

"대학교 가도 경기같은 건 보러와줄 거죠?"

"남친 생기면 못 오겠지~아무래도."

"그럼 계속 오시겠네요."

"야, 너 방금 뭐랬어?"

"나마에씨, 슬슬 시간도 되었고 이만 가보는 게 어떨까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거보다, 카오루군. 얘네한테 뭐라 한마디 해줘. 날 웃기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실을 말하는 사람한테 뭐라 할 순..."

"카오루군이 제일 너무 한 거 알아?"

 

 

 

허나 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후배에게 차분히 인사를 했다. 차가운 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앞에서만 저러는 건 기분 좋지가 않지. 하지만 나를 새초롬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역시나 울분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왠지 이 소년의 얼굴이 있으면 세계 3차대전도 평화종전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학교를 벗어나 길가를 그와 같이 걷는다. 나를 데려다 준다는 기특한 일은 아니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 때문이였다.

 

 

 

"카오루군, 초밥이 좋아 패밀리 레스토랑이 좋아? 아까 신지가 나올 때 물어보던데."

"상관없어요."

"어어? 응, 그럼 고기라도 썰까..."

"........."

 

 

평소라면 살이 찐다던가, 이것저것 괜한 핀잔을 주는 소년인데 왠일인지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면 다를거 없이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단박에 그의 기분을 알아채었다. 뭔지 몰라도 카오루군이 화난 것이다. 아니 근데 왜 화가났지. 아까 내가 심한 말이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후배들이 무슨 말이라도.

 

 

"저기...카오루군?"

"무슨일이죠?"

"어어...있잖아, 혹시 화났어?"

"...아뇨."

 

 

야, 화난 거 맞잖아. 딱 봐도 그 대답없는 여운이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걸로 보면 화났다기 보다, 그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삐친듯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지만 잘 생각이 안 난다. 카오루군에게 심한 핀잔을 주거나 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했다면 이 꼬맹이가 했지. 근엄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은 모델같지만 분위기는 을싸년스러웠다. 왠지 내가 바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거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화가났는지도 모르는데, 성의없는 사과를 했다간 오히려 화를 부추길 것 같고.

 

 

"나마에씨는, 고등학교 때 유도부 매니저셨나요?"

"어어...? 으, 응. 아니. 매니저하고 친한 사이였지. 오히려 운동은 젬병이여서...매니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그런가요."

"............그, 그래서. 그 매니저랑, 아까 그 애들하고 자주 놀러가고 그랬어. 친구중에 매니저, 음, 미나코랑 친한애가 있었거든. 그 애가 날 되게 따라줘서 친해졌는데..."

"그렇군요."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그렇냐고 대답하는 그 입이 당혹스러울 뿐이였다. 그치만 아까 유도부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애들을 만났을 때 무슨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솔직히 짐작가는 바는 없다. 카오루군을 제대로 소개 안해줘서? 그건 아니겠지. 그런걸로 화내는 아니다. 그럼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 설마 친한 남자애가 두명이나 있어서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닐테고...

 

 

"카...오루군. 혹...혹시 말야 질"

"질투에요."

"그렇지 질투일리가 없...뭐, 질투?!"

 

 

무심코 목청껏 소리를 질러버렸다. 카오루군은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질책받을만한 짓이긴 하지. 하지만 그 눈빛에 아랑곳없이 가슴은 붕 뜬 기분이였다. 카오루군이 질투를 해주다니. 나를 생각해주다니! 아니, 설마 나를 질투한 건 아니겠지.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현실감 없는 그의 말에 의식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난 몇년동안 그에게 퍼 준 사랑이 조금 결실이 맺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헤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카오루군이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귀담지 않았다.

 

 

"카오루군...결혼할까?"

"나마에씨는 언제나 그런 소릴 하네요."

"미안, 무심코 기뻐서...오늘 집에가서 울어야지. 카오루군 사진 보면서 울거야."

"왜 그런 일을..."

"카오루군은 몰라도 돼."

 

 

사실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나올 거 같지만. 길가에서 갑자기 눈물을 왈칵쏟는 여잘 보면 다들 기함하며 사라지겠지. 카오루군에게 그런 싸늘한 시선은 받고 싶지 않다. 평소처럼 하찮은 농담을 내던졌지만 말이 없는 그는 이질적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동자는 아니다. 왠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지금이 서사마냥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다. 카오루군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마에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

"언제나 제게 그런 소릴 하지만, 정작 그 진심은 알 수 없네요. 정말로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늘 진심인듯 농담인듯 애매모호하게 말을 툭 던지는 당신이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있는 지 알 수 없어요. 나마에씨는 늘 제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정작 진심을 다하지는 않죠."

"......"

"저는 당신의 소모품에 불과한건가요? 당신의 소원은 저를 향하고 있는 건가요. 나마에는 나와 함께 할 마음이 있는걸까. 늘 내 대답을 듣지 않아요."

"카, 카오루군..."

"너는 겁쟁이구나. 내게 너를 보여주지 않아."

 

 

상처받은건가 슬픈건가 분노한건가. 눈썹을 떨어트린 카오루군만 보인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빨간 눈동자는 일렁거렸다.

 

 

 

"카오루군...그럼 내가 만약에 좋아한다고, 카오루군한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하면 뭐라 할꺼야?"

"싫네요, 나마에씨. 전 제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대답하진 않아요."

"카오루군이 만약 거절하면...이도저도 아니게 되잖아. 카오루군을 다시 만날 정도로 그렇게 당당한 사람은 못 돼, 난."

"저는 상관없어요. 나마에씨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연애감정과 별개로 당신에겐 정을 붙이고 있어요."

"그런게 듣고 싶은게 아냐. 그리고...카오루군이 좋다고 해도 내가 싫어. 만나봤자 상처받을 사람을 내가 뭐하러 만나?"

"나마에씨는 저보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거군요."

"그런거 아냐...왜 그런 소릴 하는거야?"

 

 

질질끄는 발걸음을 멈추고 먼저 앞선 그를 보면, 무덤덤한 얼굴로 소년이 "도착했어요. 들어가죠." 태평한 말을 꺼냈다. 목구멍으로 짠 울음이 출렁거렸다.

 

 

"...안 가. 이렇게 카오루군이랑 있어봤자 기분만 상할거야."

"......나마에씨."

"카오루군은 바보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실 건가요? 감기걸려요. 나마에씬 호흡기가 약해서 감기에 자주 걸리시잖아요."

"뭐야 그건...왜 이럴때 뜬금없이 말해..."

"뜬금없지 않아요. 내일 아르바이트도 가야 되잖아요."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걱정하고 있어요."

 

 

 

자극의 반응하는 물체마냥 내가 말만꺼내면 카오루군이 재빠르게 대답을 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면 어느새 키가큰 듯 눈높이가 올라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엇비슷했었는데, 이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건가. 카오루군이 발을 내딛어 거리를 좁혀왔다.

 

 

"나마에씨는 고집불통이네요."

"카오루군도 충분히 그러잖아. 맨날 내가 뭐만 해도 고집부리면서..."

"그런가요. 나마에씨, 고집부리는 사람이 싫다고 했었는데. 제가 고집 부리면서 많이 싫었겠네요."

"...싫은 적 없어."

"........."

"싫을리가 없잖아, 카오루군이 뭘 하든 다 좋은데. 어떤 점이든 다 좋단 말야."

 

 

겨울바람이 코끝을 벤 것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고집불통인 카오루군은 똑같이 목을 움직여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미처 떨어지는 걸 막지 못한 케잌조각 마냥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나마에씨, 울지마세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뒤적이고 있으면 소년이 천으로 눈물 범벅을 닦아주었다. 고개를 돌려 피해보려고 하지만 팔을 붙잡지 않아서 인가, 카오루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찾아 모두 다 닦아내었다. 울음에 잠긴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모든것이 좋니? 나마에."

"........."

"왜? 어째서 그런거니?"

 

 

그거야 카오루군이 좋으니까. 오랜만에 보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고 마는 걸.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더듬더듬 말을 찾아 소년을 좋아한다고 웅얼거리면 그는 흡족한 듯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 표정은 여지껏 어른스러운 카오루군이 짓던 것이 아니였다. 제 소년티가 나는 귀여운 미소였다.

 

 

"네 전부를 내게 줄 만큼 나를?"

".............응..."

 

 

욱욱 흘러나오는 딸꾹질을 참고 열심히 대답하면 그가 나를 양 팔로 꼬옥 안아주었다. 비릿한 겨울냄새가 그의 체취에 감싸 사라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등을 쓰다듬은 듯 딸꾹질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가 내 어깨의 고개를 묻곤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마에씨, 저번에 봤던 영화 기억 하나요?"

"여, 영......영화....?"

"네가 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난 전부 필요 없어."

 

 

그 말이 끝나면 카오루군은 내게서 떨어졌다. 진지하게 나를 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왠지 딸기주 같은 저 눈동자에 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뭐야 그...거..."

"나도 나마에씨를 좋아해요. 아니, 내가 나마에를 좋아해."

"어...어...?"

"겨우 말했네요. 나마에씨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바로 말하면 될 걸, 너무 오래 끈 거 같아."

 

 

눈물과 딸꾹질과 그의 말에 범벅이 되어 얼떨떨한 표정이 된 내 볼을 그가 쓰다듬었다. 나를 끌어안느라 차가워진 손은 어깨를 흠칫 떨게 했지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포게었다. 카오루군의 손이 따뜻해지고 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마에씨, 가게에 들어갈까요?"

"...아니...역시 안 갈래."

 

 

그도 그럴게 카오루군이 너무 날 몰아세웠잖아. 오늘은 가만히 집에 있을 거야. 그에게 애꿎은 타박을 농담으로 던지면, 소년은 "그럼 저도 나마에씨 방에 갈게요." 또다시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말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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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몇년전에 썼던 소설들을 제가 업로드를 안 했던것 같습니다

중복일시 삭제합니다

 

"난 너 아니면 못 사는데 왜 넌 아닌건데!!"
"아니, 사토루 좀 진정..."
"왜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말도 안돼! 너도 날 좋아해야 하는거 아냐?!"
"진짜 돌아버리겠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
"너도 날 좋아해! 지금 당장 사귀자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



2005년 일본 하라주쿠. JR의 최강 집결지 중 하나로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젊은이들의 거리.
...를 고죠 사토루는 길 바닥에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이 더러워지든 말든,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든 말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왜 이럴 때 책에서 자주 봤던 도입부가 떠오르는 걸까. 그건 아마 내가 현실도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증스런 인간은 죽어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멀쩡한 허우대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쓸고 있다.
귓가가 무척 따갑다.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게, 부족한 거 없어보이는 학생이 왜 저러고 있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사토루는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팔 다리를 휘두르는 와중에 날 놓지 않는걸 보고 누가 그 거짓말을 믿겠는가.



"제발, 사토루, 좀, 일어나!! 야악!!!! 일어나라고!! 너 갑자기 왜 이래!! 난 하라주쿠에 쇼핑하러 온 거지 190cm 다 되가는 남고생 돌보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내 고백에 대답해!! 좋아한다고 대답하라고!!"



그래, 갑자기 사토루가 고백을 해왔다. 별 시덥지도 않은 잡몹(라고 사토루가 말한다)용 임무를 끝내고 쇼핑을 가려하자 사토루가 따라왔다. 나도 데려가, 라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같이 전철에 탔는데...
별 생각 없이 데려가선 안됐다. 살 것도 없는 지 계속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사토루는 방해였다. 차라리 쇼코처럼 따로 행동하던가, 스구루 처럼 조용히 따라오던가 할 것이지. 뒤에서 옷을 고르면 그건 너무 짧다느니, 안 어울린다느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옷을 입냐. 해가 서쪽에서 뜨냐...등, 거슬리는 소리만 일삼았다.


여기서 고죠 사토루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간 고전에 돌아가 괴롭힘을 당할게 뻔했으므로...나는 별 수 없이 쇼핑을 포기하고 스타벅스에 들렸다. 입에 초코 프라프치노를 물려주자 조용해진 고죠 사토루. 이걸로 겨우 조용해졌나 싶었으나...문제는 여기서 시작 되었다.



"저...멀리서 지켜봤는데......혹시 옆에 여자친구 인가요?"
"맞아."
"아니에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YES를 대답한 사토루와 NO를 대답한 나. 무슨 농담이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페 안 분위기가 얼음장으로 덮였다. 눈빛으로 말려 죽는 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특급 주령을 노려보는 것 마냥 날 쳐다보는 사토루를 피해 재빠르게 밖으로 도망쳤으나 속수무책이였다. 세걸음도 못 걷고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너, 내가 여자친구라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뭘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난 그런 거짓말 싫어해.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럼 내가 싫다고?"
"어어...?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건......아니지?"



그리고 눕게된 것이다. 각종 구두와 운동화의 때가 묻은 이 하라주쿠 길바닥에. 3만엔 샤넬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사고 버리는 고죠가문 도련님이 누운 것이다.
날?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이 고죠 사토루를? 이 나이스 가이를?
평소같으면 단어선택이 촌스럽다고 말했겠지만 굉장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맞은 지네처럼 입도 못 열고 고개만 끄덕였다.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치던 사토루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1학년의 그......그 자식이 좋은거냐?" 첫마디가 괴상망측한 소리였다. 1학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난 사토루랑 달리 유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구루처럼 사람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동창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다. 눈살만 찌푸리며 골치를 앓자 참다못한 사토루가 대신 말했다.



"...나나미 켄토! 너도 알 거 아냐."
"아.........아, 그 애? 저번에 하이바라군이랑 같이 있는 거 봤지. 근데 왜?"
"......네 이상형이잖아?"
"뭐? 걔가?"
"키 174이상의, 숫기없고 무서워 보이지만 다정한 성격에! 머리색은 옅은 편이고, 목소리는 츠다 켄! 작년에 스구루한테 네가 대답했잖아!"
"뭐야 그런거 기억할 리 없잖아!!"



그치만 고죠 사토루는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작년 봄 즈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죠 도련님은 제쳐두고 나머지 다른 동급생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은 내가 스구루에게 물어본 것 같은데...솔직히 그걸 이제와서 기억하는 사람이 신기한 거다. 보통은 잊어먹기 마련이라고! 게다가 그 때 사토루는 없었는데 얜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몰라 기억 안 나! 그리고 나나미 켄토라는 애는 만난 적도 없고...만나도 솔직히 금방 반할리도 없잖아. 이상형이랑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거라고."
"뭐야 그럼 나랑 사귀면 되겠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사람이라도 죽일 것 처럼 살벌하던 사토루는 온순해졌으나 내 말에 다시 날카롭게 눈썹을 올렸다. 왜 안되는데?! 아니, 되겠냐고...보통 그런 식으로 사람하고 사귀진 않는다고...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날 좋아하게 될 거 아냐."
"와~! 고죠 사토루 유아독존 나왔다! 아니거든! 내가 너랑 사귀지 않는 이유 3번째가 그거야! 이 자기중심적 인간아!"
"뭐...? 이유가 세 개나 있다고..?!"
"당연하지!!"



첫째. 날 너무 괴롭힌다. 그건 그냥 네가 너무 약해서 별 거 아닌 일에도 신경질 부리는 거잖아. 응 아냐, 입 다물어 사토루.
둘째. 사람들을 너무 깔본다. 적어도 지나가는 선생님한테 인사조차 하지 않는 예의 없는 사람하고 사귀진 않아요. 조용히해 사토루.
셋째. 천상천하 유아독존. 뭐 이건 스구루한테 물어보던가. 야! 그 녀석도 만만치 않거든?! 그래도 스구루가 너보다야 낫지.
넷째. 얼굴이 너무 잘생겼어. 난......굳이 따지자면 올리브 보단 간장파 얼굴이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사실 열거하자면 많지만 대충 이 정도로 끝내고."
"여기서 더 있다고?!"
"사토루...너는 장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네 특징이 내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뭐 이건 변명이고 그냥 너랑 사귀면 고죠 가문이고 뭐고 귀찮을 거 같아서 싫지만! 난 딩크족이거든!"




그리하여 하라주쿠를 넘어 오다이바까지 퍼져나가는 최악의 생떼소리가 태어난 것이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사토루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왜 나랑 안 사귀어 주냐고!! 억지를 부렸다.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가 날 놔줄리 없지. 이 자존감 사나이는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럽기는 커녕 이렇게 해서라도 OK를 받아내면 원만히 해결했다고 좋아할 걸?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고죠 사토루가 내게 수치를 끼얹고도 모자라서 날 이긴다고? 어림도 없지.



"싫어! 떼쓰는 남자는 싫고 그냥 싫어! 내가 질 거 같아!! 평소에 날 비웃은 건 언제고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그건 네가 날 두고 스구루랑 사이좋게 얘기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알까보냐! 그리고 너처럼 뭐든지 가진 남자한테 쉽게 넘어갈 거 같아?! 배알 꼴려서 그건 못 봐주지!!"
"네가 좋아하는 츠다 켄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너 나캄이잖아! 선배 목소리 따라하지마!"




30분을 넘어가는 이 말싸움은 결국 사토루가 오지 않자 마중인으로 불려나간 스구루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이를 악물다 못해 갈고 있는 고죠 사토루를 보면, 아무래도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 했다...

 

 

 

 

 

 

유카가 '모리스케' 라는 이름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오늘 낮부터 였다.

야쿠 모리스케. 시모카와 유카의 자랑스러운 남자친구의 이름이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사랑스러운 사람, 늘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퍼붓는 다정한 소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외우고, 누군가가 속삭이면 어디서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언제든지 입에 올리는 건 연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즉 의식하는 건 세상의 이치, 사랑의 도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카가 모리스케란 단어를 의식하는 건 조금 다른 이유였다.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성이 아닌 온전히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연인이 되고 나서도 조차!



유카와 야쿠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절대 아니였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연인은, 이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것 마냥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대낮에 학교에서 서로를 얼싸안을 용기는 커녕 아직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 조차 부끄럽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느 연인보다 짙은 빨강색이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큰 사건은 아니였다. 점심시간을 맞이해 야쿠의 반으로 갔던 유카가 그토록 신경쓰는 소년의 이름을 들은 것 뿐이였다.

조금, 아주 조오금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애였다는 건 걸리지만. 사실 많이 걸리지만, 중요한 건 연인인 자신이 야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부름을 통해 그녀는 그제서야 깨닫고 만 것이다.



그리고 야쿠 또한 자신의 이름을 담은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모카와, 라고 말했지만 한번도 유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수줍게 야쿠와 손을 잡고 볼에 입맞춤을 하는 단계 까지 겨우겨우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연인의 이름을 불러도 되지 않을까?



물론 유카 본인은 언제든지 모리스케 선배, 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무런 부끄럼을 보이지 않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또 세상 누구보다도 달콤하게 연인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모리스케, 모리스케, 모리스케 선배...

말의 무게따위 있을리가 없는데, 단어를 입에 머금을 때마다 마치 입술에 내려앉는 기분이였다. 단어는 이윽코 불꽃이 되어 유카의 얼굴위로 펑, 하고 터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정말로 그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다면 물어보면 될 것이다. 선배, 왜 이름으로 안 부르세요? 아니면 조금 투정을 부리며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하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유카 자신이 먼저 모리스케를 부르고 싶었다.



손을 먼저 잡은 것도, 조심스레 뺨에 입을 맞춘 것도 야쿠가 먼저 해주었다. 아이들 속에 파묻혀 보일리 없던 자신과 눈을 맞춰 주었던 것도 야쿠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주었다.

모든 처음은 그가 늘 선사해주었다, 그렇담 적어도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건 자신이 하고 싶었다.



"시모카와?"

"아, 네, 네! 듣고 있어요!"


그리고 때는 흘러 하교시간. 오늘도 야쿠는 자신의 연인을 데려다주고 유카는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짐했던 의지는 시도조차 해내지 못했다. 하교길을 걸으며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입술을 열어보려 했지만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고 조용해진 순간을 눈치 챈 야쿠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였다.


한 낮의 태양만큼 뜨거웠던 결심은 해가 져물어가는 노을 빛마냥 바래졌다. 겨울을 타는 하늘은 어느새 샛별을 내보인다.

망설임을 비웃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은 집 앞에 우뚝 서 유카를 마중나왔다. 이제 그와 헤어질 시간이다. 작별을 건네려는 야쿠는 아쉬운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서, 선배! 저, 저기!"

"으, 으응?"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는 유카에게 놀란 듯 소년이 말을 더듬었다. 그 상황이 조금 부끄러워 소녀가 귀까지 빨게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야쿠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자, 자, 잘 가시라고...인사 하려고..."

"응, 그래. 잘 들어가고..."

"아뇨, 잠시만요..."


작게 웃음 소리를 내는 야쿠의 손이 유카에게 꼭 잡혀버렸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면서 궁금하기도 한 야쿠는 유카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유카는 조용히 속으로 주문을 외듯 사랑스런 이름을 불렀다.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모리스케 선배.


"조!"

"....조?"

"조심히...가세요...!"

"........."

"조심히 가세요, 모리스케 선배!"


설렘과 다짐, 사랑을 담아서 유카는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야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유카. 내일보자." 대답해주었다.


이 사랑스런 연인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쁨과 함께 그 설렘을 연인의 이름을 외면서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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