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2월 길바닥은 수북한 눈덩이가 쌓여있었다. 사람 때를 탄 눈덩이는 발자국을 따라 딱딱한 얼음이 되었고 나무 밑에 숨어있는 저들만이 새하얀 빛을 띄웠다. 겨울 바람은 여전히 볼을 매섭게 찌를 뿐이다. 사람들이 분잡하게 모여있는 틈을 파고 들어가 위를 바라보면 예상하던 번호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꽤나.
"카오루군 봐봐! 합격했어!"
"아, 정말이네요. 잘됐다."
"카오루군, 이 학교 시험친건 너 잖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별로, 시험도 많이 힘들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요."
카오루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기사 머리가 아주 좋으시니까 그러시겠지. 난 이 학교 올려고 학원에서 썩어갔는데. 그의 잘난척에 기분이 상할법 했지만 귀엽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을 보니 그것도 풀려버렸다. 귀여워. 단추를 목까지 채운 떡볶이코트가 아주 잘 어울린다. 카오루군은 자신의 머리칼보다 훨씬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꼭 백설기 같다. 눈만 빨간 그가 더욱 집중되었다.
"카오루군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는 건가...응, 아주 좋네!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 블레이저가 멋지기로 꽤 유명하니까. 카오루군이 입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두근두근 거려."
"나마에씨, 이제 성인인데 미성년자를 건들이는 건 범죄가 아닌가요?"
"나 아무짓도 안했잖아...너무해...맞는 말이라서 더 슬퍼..."
소년이 싸늘한 말을 꺼내고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그래, 지금껏 카오루군에게 맹렬하게 사랑을 전했지만 그것도 소년법이 지켜주던 때였으니까. 지금부턴 조심해야겠지. 근데 내가 범죄를 저지를 만큼 그렇게 민폐를 끼쳤었나. 그동안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왠지 소년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내가 좀, 여러가지로 쫓아다니곤 했지. 빠순이 마냥.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그의 말마따라 성인답게 구는게 좋고, 무엇보다 대학생인데도 애 같이 구는 건 착한 그라도 싫겠지.
"그러고보니 카오루군, 왜 우리 학교 지원했어? 카오루군이라면 더 좋은데 갈 수 있을 텐데."
"신지군이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군...한 방에 납득이 가네."
신지도 우리학교로 지원했을 때 예상했지만 역시나 딱 들어 맞는 군. 조금은 나를 따라 학교에 와준 건 아닌가 기대했었는데. 설마는 사람을 잡지 않았다. 오늘은 정시지원자, 어제는 수시지원자 모집발표였다. 카오루군은 수시로 지원해도 붙을텐데 굳이 정시로 한 건 신입생 대표로 뽑힐 확률이 높아서 라고 신지가 말했던 거 같다. 정작 카오루군 본인은 관심이 없지만 학자집안이다 보니 그런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했다. 카오루군과 인파 속에서 짧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싶어 돌아보니 후배 몇이 서 있었다.
"어, 둘이 여긴 왠일이야?"
"부활동 하다가 심심해서 와봤어요. 어~옆은 누구?"
"아, 내 사촌동생 친구야. 카오루군, 이 쪽은 아는 후배."
"안녕하세요."
음, 공손하게 인사하는 카오루군도 너무 상큼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학교는 매년 미스퀸같은 걸 뽑곤 했었지. 난 당연히 뽑힌 적 없지만, 카오루군이라면 일 삼학년 독점하지 않을까. 왕관과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비식 새어나온다. 카오루군은 그런날 약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은.
"대학교 가도 경기같은 건 보러와줄 거죠?"
"남친 생기면 못 오겠지~아무래도."
"그럼 계속 오시겠네요."
"야, 너 방금 뭐랬어?"
"나마에씨, 슬슬 시간도 되었고 이만 가보는 게 어떨까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거보다, 카오루군. 얘네한테 뭐라 한마디 해줘. 날 웃기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실을 말하는 사람한테 뭐라 할 순..."
"카오루군이 제일 너무 한 거 알아?"
허나 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후배에게 차분히 인사를 했다. 차가운 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앞에서만 저러는 건 기분 좋지가 않지. 하지만 나를 새초롬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역시나 울분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왠지 이 소년의 얼굴이 있으면 세계 3차대전도 평화종전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학교를 벗어나 길가를 그와 같이 걷는다. 나를 데려다 준다는 기특한 일은 아니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 때문이였다.
"카오루군, 초밥이 좋아 패밀리 레스토랑이 좋아? 아까 신지가 나올 때 물어보던데."
"상관없어요."
"어어? 응, 그럼 고기라도 썰까..."
"........."
평소라면 살이 찐다던가, 이것저것 괜한 핀잔을 주는 소년인데 왠일인지 말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면 다를거 없이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단박에 그의 기분을 알아채었다. 뭔지 몰라도 카오루군이 화난 것이다. 아니 근데 왜 화가났지. 아까 내가 심한 말이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후배들이 무슨 말이라도.
"저기...카오루군?"
"무슨일이죠?"
"어어...있잖아, 혹시 화났어?"
"...아뇨."
야, 화난 거 맞잖아. 딱 봐도 그 대답없는 여운이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걸로 보면 화났다기 보다, 그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삐친듯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지만 잘 생각이 안 난다. 카오루군에게 심한 핀잔을 주거나 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했다면 이 꼬맹이가 했지. 근엄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은 모델같지만 분위기는 을싸년스러웠다. 왠지 내가 바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거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화가났는지도 모르는데, 성의없는 사과를 했다간 오히려 화를 부추길 것 같고.
"나마에씨는, 고등학교 때 유도부 매니저셨나요?"
"어어...? 으, 응. 아니. 매니저하고 친한 사이였지. 오히려 운동은 젬병이여서...매니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그런가요."
"............그, 그래서. 그 매니저랑, 아까 그 애들하고 자주 놀러가고 그랬어. 친구중에 매니저, 음, 미나코랑 친한애가 있었거든. 그 애가 날 되게 따라줘서 친해졌는데..."
"그렇군요."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그렇냐고 대답하는 그 입이 당혹스러울 뿐이였다. 그치만 아까 유도부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애들을 만났을 때 무슨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솔직히 짐작가는 바는 없다. 카오루군을 제대로 소개 안해줘서? 그건 아니겠지. 그런걸로 화내는 아니다. 그럼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 설마 친한 남자애가 두명이나 있어서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닐테고...
"카...오루군. 혹...혹시 말야 질"
"질투에요."
"그렇지 질투일리가 없...뭐, 질투?!"
무심코 목청껏 소리를 질러버렸다. 카오루군은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질책받을만한 짓이긴 하지. 하지만 그 눈빛에 아랑곳없이 가슴은 붕 뜬 기분이였다. 카오루군이 질투를 해주다니. 나를 생각해주다니! 아니, 설마 나를 질투한 건 아니겠지.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현실감 없는 그의 말에 의식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난 몇년동안 그에게 퍼 준 사랑이 조금 결실이 맺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헤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카오루군이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귀담지 않았다.
"카오루군...결혼할까?"
"나마에씨는 언제나 그런 소릴 하네요."
"미안, 무심코 기뻐서...오늘 집에가서 울어야지. 카오루군 사진 보면서 울거야."
"왜 그런 일을..."
"카오루군은 몰라도 돼."
사실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나올 거 같지만. 길가에서 갑자기 눈물을 왈칵쏟는 여잘 보면 다들 기함하며 사라지겠지. 카오루군에게 그런 싸늘한 시선은 받고 싶지 않다. 평소처럼 하찮은 농담을 내던졌지만 말이 없는 그는 이질적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동자는 아니다. 왠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지금이 서사마냥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다. 카오루군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마에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
"언제나 제게 그런 소릴 하지만, 정작 그 진심은 알 수 없네요. 정말로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늘 진심인듯 농담인듯 애매모호하게 말을 툭 던지는 당신이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있는 지 알 수 없어요. 나마에씨는 늘 제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정작 진심을 다하지는 않죠."
"......"
"저는 당신의 소모품에 불과한건가요? 당신의 소원은 저를 향하고 있는 건가요. 나마에는 나와 함께 할 마음이 있는걸까. 늘 내 대답을 듣지 않아요."
"카, 카오루군..."
"너는 겁쟁이구나. 내게 너를 보여주지 않아."
상처받은건가 슬픈건가 분노한건가. 눈썹을 떨어트린 카오루군만 보인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빨간 눈동자는 일렁거렸다.
"카오루군...그럼 내가 만약에 좋아한다고, 카오루군한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하면 뭐라 할꺼야?"
"싫네요, 나마에씨. 전 제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대답하진 않아요."
"카오루군이 만약 거절하면...이도저도 아니게 되잖아. 카오루군을 다시 만날 정도로 그렇게 당당한 사람은 못 돼, 난."
"저는 상관없어요. 나마에씨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연애감정과 별개로 당신에겐 정을 붙이고 있어요."
"그런게 듣고 싶은게 아냐. 그리고...카오루군이 좋다고 해도 내가 싫어. 만나봤자 상처받을 사람을 내가 뭐하러 만나?"
"나마에씨는 저보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거군요."
"그런거 아냐...왜 그런 소릴 하는거야?"
질질끄는 발걸음을 멈추고 먼저 앞선 그를 보면, 무덤덤한 얼굴로 소년이 "도착했어요. 들어가죠." 태평한 말을 꺼냈다. 목구멍으로 짠 울음이 출렁거렸다.
"...안 가. 이렇게 카오루군이랑 있어봤자 기분만 상할거야."
"......나마에씨."
"카오루군은 바보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실 건가요? 감기걸려요. 나마에씬 호흡기가 약해서 감기에 자주 걸리시잖아요."
"뭐야 그건...왜 이럴때 뜬금없이 말해..."
"뜬금없지 않아요. 내일 아르바이트도 가야 되잖아요."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걱정하고 있어요."
자극의 반응하는 물체마냥 내가 말만꺼내면 카오루군이 재빠르게 대답을 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면 어느새 키가큰 듯 눈높이가 올라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엇비슷했었는데, 이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건가. 카오루군이 발을 내딛어 거리를 좁혀왔다.
"나마에씨는 고집불통이네요."
"카오루군도 충분히 그러잖아. 맨날 내가 뭐만 해도 고집부리면서..."
"그런가요. 나마에씨, 고집부리는 사람이 싫다고 했었는데. 제가 고집 부리면서 많이 싫었겠네요."
"...싫은 적 없어."
"........."
"싫을리가 없잖아, 카오루군이 뭘 하든 다 좋은데. 어떤 점이든 다 좋단 말야."
겨울바람이 코끝을 벤 것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고집불통인 카오루군은 똑같이 목을 움직여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미처 떨어지는 걸 막지 못한 케잌조각 마냥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나마에씨, 울지마세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뒤적이고 있으면 소년이 천으로 눈물 범벅을 닦아주었다. 고개를 돌려 피해보려고 하지만 팔을 붙잡지 않아서 인가, 카오루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찾아 모두 다 닦아내었다. 울음에 잠긴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모든것이 좋니? 나마에."
"........."
"왜? 어째서 그런거니?"
그거야 카오루군이 좋으니까. 오랜만에 보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고 마는 걸.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더듬더듬 말을 찾아 소년을 좋아한다고 웅얼거리면 그는 흡족한 듯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 표정은 여지껏 어른스러운 카오루군이 짓던 것이 아니였다. 제 소년티가 나는 귀여운 미소였다.
"네 전부를 내게 줄 만큼 나를?"
".............응..."
욱욱 흘러나오는 딸꾹질을 참고 열심히 대답하면 그가 나를 양 팔로 꼬옥 안아주었다. 비릿한 겨울냄새가 그의 체취에 감싸 사라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등을 쓰다듬은 듯 딸꾹질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가 내 어깨의 고개를 묻곤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마에씨, 저번에 봤던 영화 기억 하나요?"
"여, 영......영화....?"
"네가 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난 전부 필요 없어."
그 말이 끝나면 카오루군은 내게서 떨어졌다. 진지하게 나를 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왠지 딸기주 같은 저 눈동자에 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뭐야 그...거..."
"나도 나마에씨를 좋아해요. 아니, 내가 나마에를 좋아해."
"어...어...?"
"겨우 말했네요. 나마에씨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바로 말하면 될 걸, 너무 오래 끈 거 같아."
눈물과 딸꾹질과 그의 말에 범벅이 되어 얼떨떨한 표정이 된 내 볼을 그가 쓰다듬었다. 나를 끌어안느라 차가워진 손은 어깨를 흠칫 떨게 했지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포게었다. 카오루군의 손이 따뜻해지고 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마에씨, 가게에 들어갈까요?"
"...아니...역시 안 갈래."
그도 그럴게 카오루군이 너무 날 몰아세웠잖아. 오늘은 가만히 집에 있을 거야. 그에게 애꿎은 타박을 농담으로 던지면, 소년은 "그럼 저도 나마에씨 방에 갈게요." 또다시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말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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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몇년전에 썼던 소설들을 제가 업로드를 안 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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