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상냥하며 항상 태양같은 그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마치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 마냥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동경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이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세찬이의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당하게 올라간 눈썹은 부끄러운 듯 살짝 내려가 있었고, 그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세찬이는 누구에게나 상냥하였다. 그 점에 반했는데, 왜 지금은 그 이유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는 그를 좋아했고, 남들처럼 서로 좋아 죽는 연애를 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건조한 연애관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제대로 된 연인관계를 확립했을 때 경우이다. 어떤 연애관을 추구하고 행할지는, "과연 서로 상대방을 연인으로써 확실히 보고 있는가" 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세찬이가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도 없이 고백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얼랭이는 이따금씩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불안하였다. 이 연애관계는 아무리봐도 저 혼자만 화살을 쏘는 기분이 들었다. 세찬이에게 제대로 묻고 싶었다. 오빤 날 정말로 좋아하나요?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 만약에, 만약에 그 때 보여줬던 미소와 정 반대의 것이라면, 이 설움이 폭발해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갈까 무서웠다. 세찬이의 여자친구로 있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신을 잡아 먹었다.


그리고 얼랭이는 속상한 마음을 삼켰다. 자꾸만 물 밖으로 떠오르는 그 설움을 애써 참아왔다. 세찬이를 좋아하고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자신만 참으면 세찬이의 미소는 계속 얼랭이를 향한다. 그 사실이 얼랭이를 견뎌내게 했다. 그러나 세찬이는 얼랭이에게만 웃어주는 게 아니였다. 모두에게 같았다. 모두에게 친절하면서 얼랭이에게도 다정했다. 얼랭이는 그 '모두'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그의 주변인이기만 한 것 같았다.


세찬이는 자신에게 있어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인데, 그의 눈에 자신은 어떤 색일까? 색을 띄우고 있을까? 그저 평범한 회색빛이진 않을까.


세찬이의 미소가 보고 싶어 설움을 참아왔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늪으로 끌고 갔다.


눈 앞에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미안한 듯 머리를 긁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였다. 얼랭이는 세찬이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찬이에게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세찬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 세찬이는 얼랭이에게 양해를 구하며 친구에게 가봐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가 곤경에 빠지면 언제든지 달려나갈 세찬이의 성격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몇 번이나 세찬이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왜 오랜만에 그와 오붓하게 있는 지금 이때에 그런 일이 생긴 걸까?


얼랭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는 지, 아니면 그저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 진 알 수 없었다. 얼랭이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진 알 수 없었다.

그를 좋아했고, 곁에 있고 싶어 얼랭이는 혼자 앓으며 참아왔다.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게, 연애에선 더욱이 옳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찬이의 말을 듣자마자 얼랭이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감정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얼랭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세찬이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세찬 오빠."

"어, 어어."

"좋아해."


담담한 고백과는 반대로 얼랭이는 세찬이와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세찬이는 갑작스레 얼랭이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서 놀랐는 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세찬이의 온도는 얼랭이를 더욱 부추겼다. 


자, 이제 늪에 빠져있던 얼랭이가 수면위로 나와 모든 것을 전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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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안은 조용한 공기만이 흘렀다. 누군가 없는 것은 아니였다. 얼랭이와 오이카와, 이 둘이 남겨져 있었지만 둘 사이에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정말 정말,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법한 일이 일어났다. 둘은 지금도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싶었다. 매니저 얼랭이가 체육창고를 혼자 청소하고 있길래 조금 도와줄까 싶어 오이카와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친한 사이는 아니고, 오히려 어색한 사이이지만 그 고생을 지켜보기엔 오이카와는 냉정한 성격은 아니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쓰는 창고이니까, 손이 남길래 빌려주려고 한 것 뿐이였다.


창고 안에 오이카와가 들어온 걸 눈치 챈 얼랭이는 놀란 듯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뭐 청소하고 있어? 도와줄까? 그런 말을 내뱉기엔 약간 껄끄러워서, 오이카와는 조용히 얼랭이가 있는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 때였다. 갑자기 창고 문이 닫힌 것은.


문 고장났으니까,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오이카와와 얼랭이는 부원들으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이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 둘은 꼼짝없이 이 공간에 같히고 만 것이였다!


그렇다고 그닥 급한 상황은 아니였다. 핸드폰이 있었으니까. 부원들에게 연락을 돌려 학교 근처에 남아있는 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안 있으면 곧 사람이 올 것이다.


그러나 마냥 속편한 상황은 아니였다. 특히 같이 있는 상대는, 불편한 사람이였으니까.


싫다거나, 짜증난다거나, 기분나쁜 건 아니였다.

그러나 얼랭이는 오이카와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늘 다른 사람들에게 미소를 머금는 그는 자신에겐 쌀쌀맞았으니까. 친근감있게 남을 대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왜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건 진 알 수 없지만, 그 누가 자길 싫어하는 사람에게 웃으며 다가갈 수 있겠는가? 때문에 얼랭이는 오이카와가 어려웠다.


하지만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랭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눈에띄는 타입은 아니였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 덕에 그녀는 부원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얼랭이는 오이카와에게 거리를 두며 다가가지 않았다. 꺼리고 있다는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왜 자신을 불편해 하는 진 모르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건 확실하였다. 아무리 여자들에게 친절한 오이카와였지만, 딱 봐도 저를 탐탁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진 못했다.


부원은 언제 쯤 올까? 분명 학교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테지만, 가시방석 같은 이 분위기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얼랭이는 오이카와의, 오이카아는 얼랭이의 눈치를 보며 침묵을 유지하였다. 고장난 창고 문 처럼 굳게 닫힌 그들의 입술은, “내가 혹시 무슨 잘못했어?” 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허나 아무말 없이 이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얼랭이와 오이카와, 둘 다 곤란하였다. 창고 문이 열리고 드디어 탈출한 서로가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면, 얼마든지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다. 둘은 이 창고를 나간다 해도 내일이면 다시 얼굴을 마주봐야 할 사이이다. 오이카와는 배구부의 주장으로써, 얼랭이는 배구부의 매니저로써. 서로가 졸업을 하기 전까진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이다.

피할 수 없는 관계이며 피해서도 안되는 관계이다.


얼랭이는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나갈 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다른 부원들에겐 능청맞게 구는 오이카와는 역시나 무뚝뚝하다. 아마 자신과 함께 있어서겠지. 그 태도에 자꾸만 주눅이 들고 그를 피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어색함을 유지할 순 없다. 부원들도 오이카와와 얼랭이의 사이를 슬슬 눈치채고 있으니까. 부원들을 챙겨야 하는 매니저가 오히려 그들의 걱정을 시키는 건 우스운 일이다. 얼랭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오이카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너 나 불편해?”


너무 적나라한 질문이였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였다. 돌려 말하는 것 보단 피할 길을 없애는 게 훨씬 낫다. 얼랭이는 놀란 듯 점점 눈동자를 크게 뜨는 오이카와의 답을 기다렸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긴장되고 길었다.


“넌 왜 나 싫어하는데?”


그러나 오이카와는 질문으로 얼랭이에 말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 내용은 놀랄만한 것이였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싫어한다니! 말도 안된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면 몰라도! 얼랭이는 저도 모르게 무슨 소리냐며 큰 소리를 내었다. 평소에 얌전한 그녀가 낼거라곤 상상조차 못할 크기였다. 얼랭이는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오이카와는 그 동안 얼랭이가 자신을 피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얼랭이는 놀랬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오이카와를 기피했던 건 사실이였으나,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였다. 얼랭이는 오이카와에게 자신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 지 얘기하였다. 오이카와는 또 놀란표정을 지었다. 얼랭이가 자신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배구부 부원이 도착해 창고 문을 열면, 얼마전까지 서로 서먹하게 굴던 얼랭이와 오이카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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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랭이란 여자애가 있었다. 늘 항상 자길 쫓아다니며 서슴없이 애정을 퍼붓던 아이였다. 바쿠고의 퉁명스런 반응에 굴하지 않고 늘 고백을 해왔었다. 그냥 무시하면 저 뜨거운 마음도 금방 식고 말겠지.  그런 생각으로 바쿠고는 얼랭이를 항상 상대하지 않았다.


얼랭이의 대쉬가 어느새 일상의 한 조각이 되었을 무렵, 그는 점차 얼랭이가 자신에게 발길이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라던 일이였고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바쿠고 카즈키에게 쫓아다니는 여자애 한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였으나 귀찮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쉽다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마음은 아니였다. 다만 허전함이 있었다.


얼랭아 널 좋아해. 개운치 않은 감이 마음 속을 어지럽히던 나날이였다. 바쿠고는 처음보는 남자애가 얼랭이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늘 자신을 향하던 눈은 부끄럼이 서려있었다. 그 탓일까, 얼랭이의 볼도 빨갛게 물들여 있었다. 바쿠고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그녀가 그런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사실에 놀랐다는 것.


사실 당연했다. 얼랭이는 끄떡도 않는 자신에게 마음을 더 보여줘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바쿠고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넘치는 사랑은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겠지. 실연은 새로운 사랑으로 덮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바쿠고는 자만했다. 아니, 자만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얼랭이의 사랑이 계속 자신을 향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바쿠고는 남학생과 함께 있는 얼랭이를 지나치지 못했다.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더듬는 얼랭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어서 얼랭이는 그 말을 해야했다. 눈 앞에 남학생의 표정은, 얼랭이의 망설임에 점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서 빨리 그 불쌍한 마음을 꺼트려 줘야한다. 평소엔 그렇게도 잘만 떠벌리던 한 마디를 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못 내뱉는 거지?


자신은 바쿠고 카츠키를 좋아한다는 그 간단한 말을 왜 저 남자에게 하지 못하는 건가!


마음 속으로 얼랭이의 대답을 예상하던, 아니 바라던 소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랭이의 마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

그건 단순히 자신이 고집을 부린 것 뿐이였다. 사실은 그 마음이 계속 되길 바랬다.


어디에 있든 제일 먼저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랬고 작은 보폭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그 발소리가 계속 들리길 바랬고 자신만 보면 올라가는 그 입꼬리를 계속 볼 수 있길 바랬다.

바쿠고 카츠키를 좋아하는 얼랭이를 늘 바랬다.


얼랭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남학생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자신을 부를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했다.

바쿠고는 성큼성큼 얼랭이와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얼랭이를, 똑바로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남학생이 무어라 뒤에서 소리를 쳤지만 바쿠고의 몇마디에 그는 줄행랑을 쳤다.

바쿠고가 자신을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얼랭이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놀랄 땐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바쿠고는 그 상황에서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였다. 항상 그가 보았던 표정은 시무룩해 하거나, 들떠있는 표정 뿐이였으니까.


발걸음을 얼랭이에게 옮기면,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 어느새 그녀의 등에 벽이 닿았다. 딱히 얼랭이를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으나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으니 딱 좋다.

당황함과 불안함이 가득한 그 얼굴을 향해, 바쿠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야, 쟤 말고 내 고백에 먼저 대답해. 너, 나랑 연애할 생각 있냐?"



얼랭이의 대답을 들은 사람은 바쿠고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들 그 고백에 대답이 어떻게 되었는 진 알 수 있었다.

얼랭이에게 바쿠고가 고백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얼굴만 붉힐 뿐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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