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함께 있고 싶어!
그 날, 나는 카오루에게 장르가 단숨에 순정만화로 바뀔만큼 노골적은 말을 꺼냈었지만 그 후 우리 둘에겐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마치 서로간의 대화가 없었던 것 마냥 행동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어색해하며 피하는 것은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유순히 넘어갈 뿐이였다...아니, 유순히 넘어가는 건 적어도 일이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아니다. 내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새카맣게 까먹은 것 처럼, 인지를 못하고 있다. 마치 어제 친구와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 마냥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에 친구하고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할 테니까.
아마 카오루에게 있어서 내가 죽을만큼 짜 낸 용기는 그 정도의 뜻을 갖는다는 거겠지.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무시를 당하면, 적어도 내게 아무런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똑똑히 느끼게 되면 울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할 것이다.
그야 애써 사람이 부끄러움도 무서움도 꾹 참고 말한 걸 점심메뉴판을 보는 것 마냥 흘려보낸 것이니까. 나는 성심성의껏 준비했는데 그게 막상 상대방에게 가게에서 파는 물건 취급도 못받는 다면 억울할 것이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에 굴하지 않았다. 느끼지 않았다.나기사 카오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잘생긴 미모에 온 여자애들이 홀려, 가벼운 호감 확인부터 적극적인 어필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는 아이니까.
척 봐도 연예인보다 더 예쁜 여자애들을 정중히 거절한 아이니까.
고작 소꿉친구라고, 평범한 여자애가 흘린 말을 진지하게 들었을리가 없다. 게다가 고백도 더욱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나는 되려 시점을 바꾸어 생각하였다.
그 때 나는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어줍잖은 대쉬를 날렸다. 귀엽게 말하자면 순수한 호감 발산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푼수를 떤 발언이다.
어쨌든 간에, 적어도 그 애에게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표현해야 하는 첫 과제를 끝마친 셈이다.
나기사 카오루의 마음을 얻는 다는 끝을 향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빌어, 나는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반 정도나 했다는 뜻이다.
어때 이 정도면 나름 대단하지? 그 궁상맞고 미련 넘치게 옆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순정만화 여자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다.
적어도 자기 마음은 제대로 밝히는 당찬 여자 주인공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우선 만족하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진짜 짜증나..."
는 개뿔이.
보는 사람 화를 돋굴정도로 화창한 이 날씨에 나는 등교길에 오르면서 소꿉친구를 욕했다.
오늘은 둘째주 일요일, 즉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모교에 향하는 이유는, 오늘이 바로 우리 동아리가 대전시합을 벌이기 때문이였다.
원래 3학년은 동아리 활동에 자율참가지만, 워낙 동아리에 재능있는 사람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나기사 카오루가 참가하게 되었다는 구닥다리한 얘기이다.
그리고 그 소꿉친구에게 홀딱 빠진 멍청한 여자애가 그 뒤를 졸졸 쫓아간단 후일담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진짜 바보인거 같아.
왜 카오루한테 그런 무시를 당하면서 그렇게 따라다니는 거지.
그래서, 아까까지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힘찬 정신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교길에서 새치 소년의 뒷담을 까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그 때 이후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너무 못마땅했기 때문이였다.
상큼하게 내가 이루어낸 과정을 중시하려고 해도, 눈 앞에 카오루의 행동,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니 수틀릴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함께 있고 싶다고 대 놓고 말했는 데 이렇다 할 대답이 없으니 그 누가 화가 안나겠어?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하기라도 했냐고. 선배 여친 있어요? 이런식으로 물으면서, 여친이 없다면 그 여친 제가 하고 싶은데요,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어려운 말을 하기라도 했냐고. 단순하게 그대 곁에 늘 머물고 싶어요 라고 말한 거잖아. 내가 물론 그렇게 고풍 스럽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나는 몇발자국 걷다가 잠시 멈춰서 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시각은 8시 25분이다. 시합은 9시에 시작이고, 늦어도 딱히 상관없으니 이렇게 늦장부려도 괜찮겠지. 원래는 일찍 가서 카오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한 거니까.
생각한다. 그 눈치 빠른 나기사 카오루가 어물쩍한 말도 아니고,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강한 호감의 표시를 못 알아챘을리가 없는데.
아니면...간접적으로 차인 걸까?
그래서 그 자식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 마냥 행동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소꿉친구의 남자친구가 될 마음은 없지만, 그 우정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능구렁이 처럼 넘어가는 나기사 카오루...음, 이건 아니다.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가 넘쳐 흐르는 나기사 카오루가, 두루뭉술한 태도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을 대하면 얼마나 피를 보는 지 잘 알고 있을테니까. 상대방이 고백을 받아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면, 나도 모르는 척 옆에서 부벼도 되는 거잖아? 넘어갈 때 까지.
그리고 카오루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하도 그건 절대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딱 잘라 말하며, 타인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제대로 긋는 그 애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리 없다.
그럼 도대체 뭐지? 도대체 뭐니, 카오루.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이해가 간다는 사정이라는 건 있다지만, 이건 정말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는 답이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데, 풀릴 생각이 없는 문제에 머리가 더 아파온다.
머리는 그만 쓰자. 에너지도 없는 뇌를 돌려봤자 남는 건 고통이다.
그저 입을 쓰면서 속 안에 가득찬 홧덩어리를 내뱉을 수 밖에.
"진짜, 내가 왜 그 나르시스트 피프스까지 보러가야 되는 거야?"
바로 이런 식으로. 아마 피프스라는 단어를 카오루로 대체한다면 내가 내뱉을 뻔한 말이 되었을 것이다.
"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속 시원한 말로 내 가슴을 때렸다. 그 목소리에 주인은 누군가 하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였다.
지난 주말 즈음, 시내에서 카지씨와 함께 있었던 그 소녀였다. 잠깐의 인사를 나눈 것 뿐인데 내가 똑똑히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소리의 주인은 엄청나게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였다.
"앗..."
뒤를 돌아보면 역시나 붉은기가 도는 금방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양갈래가 맞나 저 머리? 어쨌든 그 때 보았던 어엄청나게 예쁜 소녀였다.
잠깐 눈이 맞았을 뿐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소류씨는 나를 보더니 바로 눈썹을 찌풀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만 교환한 것 뿐인데 그렇게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짓다니. 그런데도 그 표정마저 예쁜 아이이다.
"...누구?"
"피프스의 소꿉친구. 설마 또 만날 줄은 몰랐네."
소류씨는 누군가의 물음에 새초롬 대답하며 여전히 날 노려봤다. 나는 그제서야 소류씨 옆에 또 다른 소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면, 하늘색 머리칼이 부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소녀였다.
"...안녕."
"아, 안녕..."
그저 투명하고 하얗고, 예쁘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 아이는 내게 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인사에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맞인사를 하였다.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사람이 아닌 것 처럼 신비로운 소녀다. 옆에 소류씨가 활기찬 소녀라고 말하자면, 이 아이는 햇볕에도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운 결정같은 아이였다. 마치 자연 속에 사는 아름다운 요정같은 느낌이다.
이 소녀들을 보니 아까부터 찾고있던 답이 단박에 풀리는 것 같았다. 카오루가 내 고백아닌 고백을 무시했던 이유는 사실 이 소녀들 때문이 아니였을까?
그래,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주변에 있는 데 나처럼 평범한 애가 눈에 들어오겠어? 방금 전까지 카오루에게 온갖 욕을 지껄였던 걸 취소하고 싶다. 카오루도 사람이고 남자애다. 나 같아도 얘네들을 보느라 시선이며 정신이며 팔려있을 거다.
카오루, 미안해.
"마, 말해두겠는데. 피프스에 대해서 험담한 건 사과 안할 거니까!"
"피프스...?"
"나기사 카오루 말이야."
"별로 상관없는데."
소류씨는 내 말에 놀란 듯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옆에 있는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였다.
두 사람에게 넋이 나가있어서 지금 만원만 빌려달라고 말했어도 나는 건네줬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였지만, 나는 진심이였다. 애당초 나기사 카오루의 행동은 충분히 욕 먹을 만 하다. 내게 시비를 걸거나 비꼬곤 하니까. 소꿉친구인 나한테도 태도가 나쁜데,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그를 욕한다면, 그건 분명히 카오루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가 남자애 험담을 하는 경우도 드무니까. 카오루가 자초한 일일거야.
"걔가 좀 괜히 사람 건드리고 놀리고 아주 못된 버릇이 있으니까."
"마, 맞아. 너 잘 아네."
"틈만 나면 지 잘난거 내세워서 너는 왜 그런식으로 행동하니? 이렇게 낮잡아 보고 말야. 상냥하게 말해줘도 될 걸 굳이 사람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고."
"뭐야, 너 말이 통하는 구나?"
소류씨에게 지지 않게 카오루에 대해 헐뜯으면, 그녀는 마치 동지를 만난 것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양 손을 붙잡았다. 밝게 웃으며 소류씨가 말했다.
"피프스의 소꿉친구라고 해서 똑같은 녀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소류씨가 날 나기사와 비슷한 부류라고 착각하는 건 당연하다. 내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카오루하고 친구하는 건 심사숙고 해야 하나? 보통 친구 사이라면, 제 친구의 뒷담에 화를 낼법도 하지만 나는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고. 나르시스트 맞잖아, 소류씨도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걸 보면 뭔가 당한 게 분명해.
"쇼류씨랑...둘은 어디 가는 거야?"
"너네 학교. 오늘 대전 시합 있다면서? 아, 얜 아야나미 레이야. 퍼스트, 너 사람한테 자기소개 정돈 먼저 하는 게 어때?"
"...잘 부탁해."
소류씨는 아야나미라 불리는 소녀에게 타박을 주며 말했다. 음, 애시당초 아야나미씨가 말하기 전에 소류씨가 먼저 말해버려서 자기소개를 안 한거 같은데. 아야나미씨는 소류씨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오늘 대전 시합 있는 건 맞는데...누구 응원 가려구? 상대편 학교가 소류씨네 학교야?"
"...이카리군이 피프스의 응원을 갔으니까, 따라가는 거 뿐이야."
이카리? 아, 신지군을 말하는 건가? 아야나미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류씨의 얼굴이 여름햇살에 익은 것 마냥 붉게 오르게 시작했다. 그렇구나, 소류씨는 신지군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카오루가 아니였어. 아까까지 소류씨가 카오루의 험담을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니 뭔가 실망스러운 기분이였다. 거대한 히어로가 무너진 걸 본 느낌이랄까. 그 잘생긴 얼굴에 모든 여자애들이 넘어가는 건 아니였어.
"잠, 퍼, 퍼스트!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길을 잃고 있어. 도와줄래?"
"어, 응..."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아야나미씨에게 나는 놀랐다. 거의 말이 없었으니까, 의사표현을 잘 안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러나 이 시간까지 길을 헤매고 있다는 건 꽤 일찍부터 학교에 가기 위해 나왔다는 거고, 그건 그만큼 빨리 도착하고 싶기 때문 일 것이다. 주말, 집에서 늦잠잘 수 있는 유혹도 뿌리치고 빨리나온 이유라...아야나미씨도 혹시 신지군을 좋아하나? 그래서 빠르게 집을 나왔다면,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였다.
이 아름다운 소녀들이 모두 신지군에게 빠져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애길래 그런 걸까? 어떻게 이 애들을 매료 시킨 거지. 게다가 이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그 나기사 조차 신지군을 위해서라면 별까지 따올 정도다. 나기사 카오루까지 함락시키고. 사실 이 소설은 이카리 신지군의 하렘이 본 스토리고 나는 엑스트라 같은 게 아닐까? 문득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세컨드랑 퍼스트가 실명이랑 함께 있다니 별일이네, 무슨 얘기했니?"
"세컨드? 소류씨 말하는 거야?"
얘넨 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갖다 붙인 걸까? 가족놀이마냥 엄마, 할머니, 이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퍼스트 세컨드 라니, 꼭 첫번째 여자친구, 두번째 여자친구 이런거 같잖아. 예를들면 나기사는 신지군의 다섯번째 애인이니까 피프스.
"...그냥, 이 딴 행동하는 남자는 진짜 나쁜 놈이야~이런 얘기했어."
"예를들면?"
"사람 낮잡아보고 굳이 띠거운 말투 써가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사람?"
"흐음, 이런 이성은 만나기 싫어, 이런식으로 말하는 거 보단 이런 이성만큼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반성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실명이도 그러지 않니?"
능구렁이 같은 카오루의 말에 나는 속으로 화를 눌러 담을 뿐이였다. 역시 내가 소류씨하고 자기 뒷담까고 있던 건 눈치 챘구만. 소류씨와 아야나미씨,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기사 근처에 여자아이들이 가득가득 해 있었다. 소녀들은 용감하게 그 속을 파헤쳐 원하던 신지군의 옆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활을 쏘는 카오루가 적당히 보일만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중간에 선생님이, "실명아, 부원인데 왜 이런 곳에 있어~" 라며 나를 안 쪽으로 끌고가려 했지만 화장실을 가는 척 도망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카오루에게 매료된 여자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가 걱정되니까. 만약 그 안에서 내가 카오루의 소꿉친구라는 걸 아는 애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마 손들의 눈초리는 모조리 나에게 향할 것이다.
시합을 멋지게 끝낸 카오루는 2학년 부원들과 선생님에게 둘려싸여 칭찬과 갈채를 받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비명은 덤으로. 그러나 카오루가 역시 신지군의 칭찬이 제일 기쁜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꼴이 아주 눈꼴 시려웠다. 누가보면 아주 신혼인 줄 알겠네. 소류씨 또한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 지, 카오루와 신지군을 떼 놓았다. 소류씨가 카오루를 싫어하는 이유, 신지군한테 달라 붙어서 그런 거구나. 그리고 카오루도 의외로 성질 있으니까 소류씨한테 핀잔 주고. 저 둘은 멀리서 지켜보아도 상성이 좋지 않은 듯 했다.
우리 학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동아리의 영웅인 카오루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것 마냥, 뒤풀이에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실망의 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기사 그 애 성격이라면 그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바로 수긍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부원들을 뒤로 한체 떠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내게 다가왔냐는 것이였다. 동아리 실 근처는 커녕, 떨어진 곳에 있었던 날 발견하고는 성큼 다가온 이유가 알 수 없었다. 시선이 모이는 걸 천연덕 스럽게 무시하고는, 내게 같이 돌아가자며 권유하는 것이 일부러 날 놀리려는 속셈인가 싶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지. 분명 날 이용해서 뒤풀이에 가는 걸 거절하려는 게 분명하다.
"반은 맞았어."
"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능글맞게 웃으며 카오루는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뱉을 지 언정 욕은 날려주고 싶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이렇게 사람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다, 절대 그 얼굴에 속으면 안된다.
"내가 무슨 니 방어막이야? 사람 취급이 뭐 그래?"
"별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걸?"
"바로 입 싹 씻는 거 봐. 네가 아까 맞다고 그랬잖아."
"반은 맞다고 했지, 다른 반은 무슨 뜻인 지 물어봤니?"
그러고보니 카오루가 반쯤은 맞다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괜히 자기 성격 나쁜 걸 대놓고 티내고 싶지 않아서 내뱉은 말이 아닌가? 난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거야? 카오루의 옆 모습을 노려보며 그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실명이가 그랬잖니."
"뭐가?"
"나랑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뭐?"
"그래서 같이 돌아가려고 한 거 뿐이야."
앞으로 걸어가는 카오루를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얘가 방금 뭐라 그랬지? 분명히 내가 저번에 말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 데 그게 아니였나? 멀거니 서 있는 모양새에 카오루가 날 부르며 손짓하면, 나는 그제서야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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