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함께 있고 싶어!
그 날, 나는 카오루에게 장르가 단숨에 순정만화로 바뀔만큼 노골적은 말을 꺼냈었지만 그 후 우리 둘에겐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마치 서로간의 대화가 없었던 것 마냥 행동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어색해하며 피하는 것은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유순히 넘어갈 뿐이였다...아니, 유순히 넘어가는 건 적어도 일이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아니다. 내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새카맣게 까먹은 것 처럼, 인지를 못하고 있다. 마치 어제 친구와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 마냥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에 친구하고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할 테니까.
아마 카오루에게 있어서 내가 죽을만큼 짜 낸 용기는 그 정도의 뜻을 갖는다는 거겠지.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무시를 당하면, 적어도 내게 아무런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똑똑히 느끼게 되면 울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할 것이다.
그야 애써 사람이 부끄러움도 무서움도 꾹 참고 말한 걸 점심메뉴판을 보는 것 마냥 흘려보낸 것이니까. 나는 성심성의껏 준비했는데 그게 막상 상대방에게 가게에서 파는 물건 취급도 못받는 다면 억울할 것이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에 굴하지 않았다. 느끼지 않았다.나기사 카오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잘생긴 미모에 온 여자애들이 홀려, 가벼운 호감 확인부터 적극적인 어필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는 아이니까.
척 봐도 연예인보다 더 예쁜 여자애들을 정중히 거절한 아이니까.
고작 소꿉친구라고, 평범한 여자애가 흘린 말을 진지하게 들었을리가 없다. 게다가 고백도 더욱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나는 되려 시점을 바꾸어 생각하였다.
그 때 나는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어줍잖은 대쉬를 날렸다. 귀엽게 말하자면 순수한 호감 발산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푼수를 떤 발언이다.
어쨌든 간에, 적어도 그 애에게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표현해야 하는 첫 과제를 끝마친 셈이다.
나기사 카오루의 마음을 얻는 다는 끝을 향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빌어, 나는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반 정도나 했다는 뜻이다.

어때 이 정도면 나름 대단하지? 그 궁상맞고 미련 넘치게 옆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순정만화 여자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다.
적어도 자기 마음은 제대로 밝히는 당찬 여자 주인공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우선 만족하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진짜 짜증나..."

는 개뿔이.
보는 사람 화를 돋굴정도로 화창한 이 날씨에 나는 등교길에 오르면서 소꿉친구를 욕했다.
오늘은 둘째주 일요일, 즉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모교에 향하는 이유는, 오늘이 바로 우리 동아리가 대전시합을 벌이기 때문이였다.
원래 3학년은 동아리 활동에 자율참가지만, 워낙 동아리에 재능있는 사람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나기사 카오루가 참가하게 되었다는 구닥다리한 얘기이다.
그리고 그 소꿉친구에게 홀딱 빠진 멍청한 여자애가 그 뒤를 졸졸 쫓아간단 후일담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진짜 바보인거 같아.
왜 카오루한테 그런 무시를 당하면서 그렇게 따라다니는 거지.

그래서, 아까까지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힘찬 정신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교길에서 새치 소년의 뒷담을 까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그 때 이후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너무 못마땅했기 때문이였다.
상큼하게 내가 이루어낸 과정을 중시하려고 해도, 눈 앞에 카오루의 행동,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니 수틀릴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함께 있고 싶다고 대 놓고 말했는 데 이렇다 할 대답이 없으니 그 누가 화가 안나겠어?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하기라도 했냐고. 선배 여친 있어요? 이런식으로 물으면서, 여친이 없다면 그 여친 제가 하고 싶은데요,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어려운 말을 하기라도 했냐고. 단순하게 그대 곁에 늘 머물고 싶어요 라고 말한 거잖아. 내가 물론 그렇게 고풍 스럽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나는 몇발자국 걷다가 잠시 멈춰서 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시각은 8시 25분이다. 시합은 9시에 시작이고, 늦어도 딱히 상관없으니 이렇게 늦장부려도 괜찮겠지. 원래는 일찍 가서 카오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한 거니까.


생각한다. 그 눈치 빠른 나기사 카오루가 어물쩍한 말도 아니고, 고백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강한 호감의 표시를 못 알아챘을리가 없는데.
아니면...간접적으로 차인 걸까?
그래서 그 자식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 마냥 행동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소꿉친구의 남자친구가 될 마음은 없지만, 그 우정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능구렁이 처럼 넘어가는 나기사 카오루...음, 이건 아니다.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가 넘쳐 흐르는 나기사 카오루가, 두루뭉술한 태도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을 대하면 얼마나 피를 보는 지 잘 알고 있을테니까. 상대방이 고백을 받아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면, 나도 모르는 척 옆에서 부벼도 되는 거잖아? 넘어갈 때 까지.

그리고 카오루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하도 그건 절대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딱 잘라 말하며, 타인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제대로 긋는 그 애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리 없다.

그럼 도대체 뭐지? 도대체 뭐니, 카오루.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이해가 간다는 사정이라는 건 있다지만, 이건 정말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는 답이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데, 풀릴 생각이 없는 문제에 머리가 더 아파온다.
머리는 그만 쓰자. 에너지도 없는 뇌를 돌려봤자 남는 건 고통이다.
그저 입을 쓰면서 속 안에 가득찬 홧덩어리를 내뱉을 수 밖에.

"진짜, 내가 왜 그 나르시스트 피프스까지 보러가야 되는 거야?"

바로 이런 식으로. 아마 피프스라는 단어를 카오루로 대체한다면 내가 내뱉을 뻔한 말이 되었을 것이다.

"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속 시원한 말로 내 가슴을 때렸다. 그 목소리에 주인은 누군가 하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였다.
지난 주말 즈음, 시내에서 카지씨와 함께 있었던 그 소녀였다. 잠깐의 인사를 나눈 것 뿐인데 내가 똑똑히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소리의 주인은 엄청나게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였다.

"앗..."

뒤를 돌아보면 역시나 붉은기가 도는 금방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양갈래가 맞나 저 머리? 어쨌든 그 때 보았던 어엄청나게 예쁜 소녀였다.
잠깐 눈이 맞았을 뿐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소류씨는 나를 보더니 바로 눈썹을 찌풀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만 교환한 것 뿐인데 그렇게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짓다니. 그런데도 그 표정마저 예쁜 아이이다.

"...누구?"
"피프스의 소꿉친구. 설마 또 만날 줄은 몰랐네."

소류씨는 누군가의 물음에 새초롬 대답하며 여전히 날 노려봤다. 나는 그제서야 소류씨 옆에 또 다른 소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면, 하늘색 머리칼이 부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소녀였다.

"...안녕."
"아, 안녕..."

그저 투명하고 하얗고, 예쁘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 아이는 내게 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인사에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맞인사를 하였다.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사람이 아닌 것 처럼 신비로운 소녀다. 옆에 소류씨가 활기찬 소녀라고 말하자면, 이 아이는 햇볕에도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운 결정같은 아이였다. 마치 자연 속에 사는 아름다운 요정같은 느낌이다.
이 소녀들을 보니 아까부터 찾고있던 답이 단박에 풀리는 것 같았다. 카오루가 내 고백아닌 고백을 무시했던 이유는 사실 이 소녀들 때문이 아니였을까?
그래,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주변에 있는 데 나처럼 평범한 애가 눈에 들어오겠어? 방금 전까지 카오루에게 온갖 욕을 지껄였던 걸 취소하고 싶다. 카오루도 사람이고 남자애다. 나 같아도 얘네들을 보느라 시선이며 정신이며 팔려있을 거다.
카오루, 미안해.

"마, 말해두겠는데. 피프스에 대해서 험담한 건 사과 안할 거니까!"
"피프스...?"
"나기사 카오루 말이야."
"별로 상관없는데."

소류씨는 내 말에 놀란 듯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옆에 있는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였다.
두 사람에게 넋이 나가있어서 지금 만원만 빌려달라고 말했어도 나는 건네줬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였지만, 나는 진심이였다. 애당초 나기사 카오루의 행동은 충분히 욕 먹을 만 하다. 내게 시비를 걸거나 비꼬곤 하니까. 소꿉친구인 나한테도 태도가 나쁜데,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그를 욕한다면, 그건 분명히 카오루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가 남자애 험담을 하는 경우도 드무니까. 카오루가 자초한 일일거야.

"걔가 좀 괜히 사람 건드리고 놀리고 아주 못된 버릇이 있으니까."
"마, 맞아. 너 잘 아네."
"틈만 나면 지 잘난거 내세워서 너는 왜 그런식으로 행동하니? 이렇게 낮잡아 보고 말야. 상냥하게 말해줘도 될 걸 굳이 사람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고."
"뭐야, 너 말이 통하는 구나?"

소류씨에게 지지 않게 카오루에 대해 헐뜯으면, 그녀는 마치 동지를 만난 것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양 손을 붙잡았다. 밝게 웃으며 소류씨가 말했다.

"피프스의 소꿉친구라고 해서 똑같은 녀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소류씨가 날 나기사와 비슷한 부류라고 착각하는 건 당연하다. 내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카오루하고 친구하는 건 심사숙고 해야 하나? 보통 친구 사이라면, 제 친구의 뒷담에 화를 낼법도 하지만 나는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고. 나르시스트 맞잖아, 소류씨도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걸 보면 뭔가 당한 게 분명해.

"쇼류씨랑...둘은 어디 가는 거야?"
"너네 학교. 오늘 대전 시합 있다면서? 아, 얜 아야나미 레이야. 퍼스트, 너 사람한테 자기소개 정돈 먼저 하는 게 어때?"
"...잘 부탁해."

소류씨는 아야나미라 불리는 소녀에게 타박을 주며 말했다. 음, 애시당초 아야나미씨가 말하기 전에 소류씨가 먼저 말해버려서 자기소개를 안 한거 같은데. 아야나미씨는 소류씨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오늘 대전 시합 있는 건 맞는데...누구 응원 가려구? 상대편 학교가 소류씨네 학교야?"
"...이카리군이 피프스의 응원을 갔으니까, 따라가는 거 뿐이야."

이카리? 아, 신지군을 말하는 건가? 아야나미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류씨의 얼굴이 여름햇살에 익은 것 마냥 붉게 오르게 시작했다. 그렇구나, 소류씨는 신지군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카오루가 아니였어. 아까까지 소류씨가 카오루의 험담을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니 뭔가 실망스러운 기분이였다. 거대한 히어로가 무너진 걸 본 느낌이랄까. 그 잘생긴 얼굴에 모든 여자애들이 넘어가는 건 아니였어.

"잠, 퍼, 퍼스트!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길을 잃고 있어. 도와줄래?"
"어, 응..."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아야나미씨에게 나는 놀랐다. 거의 말이 없었으니까, 의사표현을 잘 안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러나 이 시간까지 길을 헤매고 있다는 건 꽤 일찍부터 학교에 가기 위해 나왔다는 거고, 그건 그만큼 빨리 도착하고 싶기 때문 일 것이다. 주말, 집에서 늦잠잘 수 있는 유혹도 뿌리치고 빨리나온 이유라...아야나미씨도 혹시 신지군을 좋아하나? 그래서 빠르게 집을 나왔다면,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였다.

이 아름다운 소녀들이 모두 신지군에게 빠져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애길래 그런 걸까? 어떻게 이 애들을 매료 시킨 거지. 게다가 이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그 나기사 조차 신지군을 위해서라면 별까지 따올 정도다. 나기사 카오루까지 함락시키고. 사실 이 소설은 이카리 신지군의 하렘이 본 스토리고 나는 엑스트라 같은 게 아닐까? 문득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세컨드랑 퍼스트가 실명이랑 함께 있다니 별일이네, 무슨 얘기했니?"
"세컨드? 소류씨 말하는 거야?"

얘넨 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갖다 붙인 걸까? 가족놀이마냥 엄마, 할머니, 이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퍼스트 세컨드 라니, 꼭 첫번째 여자친구, 두번째 여자친구 이런거 같잖아. 예를들면 나기사는 신지군의 다섯번째 애인이니까 피프스.

"...그냥, 이 딴 행동하는 남자는 진짜 나쁜 놈이야~이런 얘기했어."
"예를들면?"
"사람 낮잡아보고 굳이 띠거운 말투 써가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사람?"
"흐음, 이런 이성은 만나기 싫어, 이런식으로 말하는 거 보단 이런 이성만큼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반성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너 지금 나 비꼬는 거지?"
"실명이도 그러지 않니?"

능구렁이 같은 카오루의 말에 나는 속으로 화를 눌러 담을 뿐이였다. 역시 내가 소류씨하고 자기 뒷담까고 있던 건 눈치 챘구만. 소류씨와 아야나미씨,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기사 근처에 여자아이들이 가득가득 해 있었다. 소녀들은 용감하게 그 속을 파헤쳐 원하던 신지군의 옆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활을 쏘는 카오루가 적당히 보일만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중간에 선생님이, "실명아, 부원인데 왜 이런 곳에 있어~" 라며 나를 안 쪽으로 끌고가려 했지만 화장실을 가는 척 도망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카오루에게 매료된 여자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가 걱정되니까. 만약 그 안에서 내가 카오루의 소꿉친구라는 걸 아는 애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마 손들의 눈초리는 모조리 나에게 향할 것이다. 

시합을 멋지게 끝낸 카오루는 2학년 부원들과 선생님에게 둘려싸여 칭찬과 갈채를 받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비명은 덤으로. 그러나 카오루가 역시 신지군의 칭찬이 제일 기쁜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꼴이 아주 눈꼴 시려웠다. 누가보면 아주 신혼인 줄 알겠네. 소류씨 또한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 지, 카오루와 신지군을 떼 놓았다. 소류씨가 카오루를 싫어하는 이유, 신지군한테 달라 붙어서 그런 거구나. 그리고 카오루도 의외로 성질 있으니까 소류씨한테 핀잔 주고. 저 둘은 멀리서 지켜보아도 상성이 좋지 않은 듯 했다.

우리 학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동아리의 영웅인 카오루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것 마냥, 뒤풀이에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실망의 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기사 그 애 성격이라면 그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바로 수긍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부원들을 뒤로 한체 떠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내게 다가왔냐는 것이였다. 동아리 실 근처는 커녕, 떨어진 곳에 있었던 날 발견하고는 성큼 다가온 이유가 알 수 없었다. 시선이 모이는 걸 천연덕 스럽게 무시하고는, 내게 같이 돌아가자며 권유하는 것이 일부러 날 놀리려는 속셈인가 싶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지. 분명 날 이용해서 뒤풀이에 가는 걸 거절하려는 게 분명하다.

"반은 맞았어."
"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능글맞게 웃으며 카오루는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뱉을 지 언정 욕은 날려주고 싶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이렇게 사람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다, 절대 그 얼굴에 속으면 안된다.

"내가 무슨 니 방어막이야? 사람 취급이 뭐 그래?"
"별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걸?"
"바로 입 싹 씻는 거 봐. 네가 아까 맞다고 그랬잖아."
"반은 맞다고 했지, 다른 반은 무슨 뜻인 지 물어봤니?"

그러고보니 카오루가 반쯤은 맞다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괜히 자기 성격 나쁜 걸 대놓고 티내고 싶지 않아서 내뱉은 말이 아닌가? 난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거야? 카오루의 옆 모습을 노려보며 그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실명이가 그랬잖니."
"뭐가?"
"나랑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뭐?"
"그래서 같이 돌아가려고 한 거 뿐이야."

앞으로 걸어가는 카오루를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얘가 방금 뭐라 그랬지? 분명히 내가 저번에 말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 데 그게 아니였나? 멀거니 서 있는 모양새에 카오루가 날 부르며 손짓하면, 나는 그제서야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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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카지씨!"
"어 실명아, 잘 지내고있어?"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을 사러 시내로 나가면 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는 카지씨와 마주쳤다. 꽤 오랜만이네. 한 작년 쯤에 만났던거 같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그 눈을 바라보았지만 내 시선은 이내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붉은기를 띈 금발이 풍성한 소녀였다. 누구지, 엄청 예쁘네. 어디서 본거같기도 하고. 허나 카지씨와 있을땐 본 적이 없다. 눈이 마주치자 끼고있던 팔짱을 더욱 옥죄는 소녀는 눈썹을 세우며 나를 째려봤다. 연인이나 뭐 그런건가. 많게 보아도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데. 카지씨 내일 모래면 계란한판이시잖아.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긴하지만. 소녀를 보며 눈썹을 모으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 불쾌한 목소리였다.

"카지씨! 이 앤 누구?"
"어어, 아스카, 카오루 친구야. 실명, 이쪽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나와 같이 독일에 있을때 알고 지내던 애야."
"아...안녕, 저 난 실명이야."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류씨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차갑게 무시할 뿐이였다. 그녀의 옆에 착 달라붙은 카지씨가 겸언쩍은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대놓고 도외시 당하다니 너무 무안한데. "아스카, 사람 인사는 제대로 받아야지." 카지씨가 소류씨에게 훈계하듯 타일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카오루, 너 독일은 언제가?"
"대전시합이 끝난 다음주에 갔다 올 생각이야."


카지씨는 예전부터 카오루네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카지씨의 능력에 눈독을 들인 카오루네 할아버지께서 등록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것이 시초였다. 그 후 아르바이트로 그 회사에 일하시면서 나기사 집안과 친목을 쌓아왔다.
카지씨는 국제변호사로 현재 카오루네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 일본본사를 맡기 위해 귀화하신 카오루의 아버지를 도우시며 독일과 일본을 오가곤 하신다. 워낙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라 집안 문제까지 개입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카오루가 연휴마다 독일에 갈 때는 꼭 카지씨가 보호자 역할로 같이 움직였다. 때문에 카지씨가 일본에 오는 건 카오루가 독일에 간다는 뜻이 되었다.  


"있잖아, 독일가면 또 그 과자 사다와 주면 안될까?"
"실명, 살찔텐데?"
"......"
"농담이야, 그리고 선물 살 정도로 오래 있진 않을거니까. 하루정도 머물고 올거야."
"하루? 너무 빠르지 않아? 표 아깝게."
"글쎄, 별로."


담담하게 그가 대답하면서 책을 넘겼다. 하긴, 카오루 입장에선 오히려 가고 싶지 않겠지. 어째서인지 그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 독일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어른들 앞에선 싹싹하게 굴어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어릴적에 처음으로 그의 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었지만 카오루가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말도 못 걸었었지. 남인 내가 봐도 카오루가 희한한데 얘네 부모님은 오죽하실까.


"아, 그럼 오늘 카지씨 너네 집에서 묵으시겠네?"
"뭐, 그러시지 않을까."
"아까 카지씨 옆에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고 어떤 여자애 있던데, 너도 알아?"
"아, 세컨드 말이니?"
"세, 세컨...?"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카오루는 "소류, 씨 말하는 거지?" 정정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왠지 그 호칭엔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 애, 신지군의 소꿉친구야. 나하고는 카지씨 일로 알게 된 사이이고."
"흐음~그랬구나....혹시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뭐 그런거야?"


이어지는 질문에 응하려는 듯 그가 책을 덮고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글쎄, 세컨드는 카지씨를 열렬히 좋아하는 거 같지만, 잘 모르지."
흠, 그렇구나. 하긴 그 새초롬해 보이던 얼굴이 카지씨만 보면 활짝 펴졌는걸. 맘껏 좋아한다고 티내는 모습이 부럽기도, 멋지기도 하구만. 나도 좀 보고 배워야 하나. 근데 그래봤자 카오루는 이마를 누비기만 할 거같은데. 생각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면 무정한 얼굴만이 눈에 보인다. 


"왜?"
"아니, 음 그냥 그렇게 이쁜 애한테 맹렬히 사랑받는 카지씨가 대단하게 느껴져서. 아! 그 애 이카리군 소꿉친구랬지? 나기사도 연적이 엄청나서 큰일..."
"......"
"음, 농담이 심했지? 미안." 


질린듯 찡그려진 그의 눈살에 어색한 웃음을 내밀었다. 솔직히 카오루가 이카리군 일이라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니까 내가 이따금씩 농담을 던지는 거라고. 평소엔 감정표현도 잘 안하면서. 반응도 없는 애가 가끔 저렇게 눈에 힘을 주니까 나도 모르게 허망한 말들을 내뱉는 거라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은 잦게 짓지만. 그건 내가 수다스러워서 겠지. 


"실명."
"응?"
"더 할 말 없으면 가봐도 될까?"

카오루는 불편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는 아니였지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 들고 말았다.
그야 그럴만도 하지. 카오루도 내 방에 별로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닐테니까. 카오루에 우리 집에 오게 된 경위는, 단순히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선물을 갖다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다 거실로 내려 온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담담하게 내게 인사만 건네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아 방에 데려온 것이였다. 그야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같이 더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무슨 대화를 할 지 몰라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다 결국 그 대화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고. 왠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억지로 집에 데려가 못생긴 집 강아지를 보여주며 귀엽지를 강요하는 초등학생 남자애가 된 기분이였다.

사실 친구의 말을 줄곧 생각해 봤다. 도대체 나기사한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답은 간단했다. 연인사이가 되고 싶고, 더 가까이 있고 싶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고. 설령 카오루가 내게 아무런 연애 감정이 없다해도 말이야.
그렇다면 답을 향한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소꿉친구와 어떻게든 함께 있으며 더 알아가야 한다.
좀 더 마음을 전해야 한다.
벽 처럼 단단한 나기사 카오루를 쓰러트릴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해야한다.
그래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꺼내며 카오루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별로 나와 얘기하는 거에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하지. 아까부터 계속 가벼운 맞장구만 쳤으니까. 오히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참아왔을 지도 모른다.

그치만 더 있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좋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눈을 깜빡이며 카오루를 다시 시선에 담으면, 아까처럼 변함 없는 무표정이였다.
다행히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다음 주 부터 대전 시합 준비를 하느라 방과후에도 동아리에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미리 공부 좀 해 놔야 해."
"어, 응...공부 열심히 하네."
"실명이는 안 하니? 아, 하기사 실명이는 공부에 별로 뜻이 없으니까."
"나도 하거든!"

이 눔이. 아무리 내가 탱자탱자 노는 것 처럼 보여도 나름 공부는 하고 있다고! 너랑 같은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단 말야!
물론 이렇게 소리지르진 못한다. 그저 가만히 카오루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물론 고고하신 나기사님께선 내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봤던 시험 보니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더라."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복도에 걸려있잖니? 이름이랑 성적. 그걸 보고 알았지."
"왜 내 성적을 보는거야!"

카오루는 시큰둥하게 실명이 이름이 눈에 띄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에게 내 성적을 들켰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다. 왜 남의 성적을 멋대로 보고 난리야? 학생한테 성적이 얼마나 민감한 건지 저도 잘 알면서. 

"실명이도 내 성적 알잖니?"
"몰라! 일부러 안 본다고! 남한테 성적 보이는 거 기분 나쁘잖아.
"나는 별로 신경 안쓰는 걸."
"그야 넌 성적이 좋으니까 그런거겠지..."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며 카오루를 흘겨보았지만 카오루는 그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낼 뿐이였다.


"그러고보니..."
"응?"
"실명이 넌, 어느 고등학교로 갈거니?"
"나?"

갑자기 그건 왜? 당황한 말투로 내가 다른 대답을 하면 카오루는 그냥, 그래서? 고집있게 물어보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보통 그런 건 물어보지도 않는 주제에. 여전히 입을 꾹 다물며 카오루를 질시하였다. 다만 그 눈초리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실명?"
"K고등학교."
".........흐음, 그렇구나."
"너 지금 내가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세우는 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 적 없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평소 실명이는 적당히 잘사는 주의잖니. 갑자기 성적을 높이길래, 어디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나 싶어서."
"응...뭐 그렇지. 나기사는?"
"나도 K고등학교야."

어째 나를 조금 무시하는 것 처럼 들렸지만 이번엔 군말없이 카오루에게 수긍했다.
여기서 똑바로 고하자면 카오루는 알지 못하지만, 난 진작에 이 애가 K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걸 알고 있었다. 공부도 그것 때문에 해왔던 거고. 2학년때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께 상담했었지. 교무실에 심부름으로 우연히 그것을 들은 나였다. 카오루는 전교 탑이니까 그 학교를 치는 것도 당연하다. 

친구의 말마따나 카오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별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떻게든 그의 주변에 있고 싶었다. 지금도 사이가 좋은 친구도 아닌데 학교마저 달라지면 관계는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떨어질 수도 있지.
영영 멀어질 수도 있는 거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나한테 소꿉친구가 있었어. 이렇게 기억도 나지 않는 추억속에 파묻힐 수 있다.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지만 욕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에, 없는 집중력을 모아서 수험공부에 임했었다. 그 결과는 카오루가 보기에도 성적이 많이 오른 축이지만, 여전히 못 미친다.

"그래서..."
"응?"
"왜 K고등학교니?"

핵심을 뚫어보는 그 질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카오루에게 진실을 얘기 못하겠다면, 그냥 어설픈 거짓말로 대충 떼워도 되지만 여전히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나기사 카오루에게 갑작스레 마음을 전한다.
이건 무리다. 아직 고백은 커녕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어.
그렇지만 솔직하게 카오루에게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라고 전하면 눈치밥을 말아먹지 않은 이상 그 말이 품은 뜻을 모를리가 없다.
더욱이, 눈치 9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기사 카오루가 그걸 못 알아차릴 리 없다.


"카, 카오루는?"
"나 말이니? 신지군도 거길 목표로 잡고 있고, 무엇보다 신지군의 어머님께서 그곳을 다니셨으니까."
"아하, 신지군하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였구나. 역시 나기사야."
"놀리는 거니?"
"아니, 오히려 그 집념이 감탄스럽다."

질린 얼굴로 카오루에게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면 무참히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반응 조차 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카오루를 밉다는 듯 노려보고 있으면 그가 영문모를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뭐가?"

뭐야, 뭘 물어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이면, 이번엔 카오루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진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관찰 당하는 기분이였다.

그 시선에 어렴풋이 아까 카오루와 K고등학교 얘기를 하고
"어, 그러고보니까 카오루는 공부도 되게 잘하는 데 수험공부도 하는 구나. 당연한 거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대전시합도 있으니까, 연습 끝나고 씻으면 거의 잘 시간이니까."
"그렇구나...너 진짜 고생이 많다."
"실명이가 조금만 운동을 잘했다면 날 도와줬을텐데 말이야."
"애초에 운동도 못하는 날 끌고 간 게 누군데?"


같은반도 아닌 날 방과후까지 기다리던 1학년 나기사군을 떠올렸다. 볼 일없으면 잠깐 시간 좀 내달라는 모습에 아무생각 없이 졸졸 따라갔지. 주번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임시반장으로 뽑혀서 할 일이 많은가. 뭔가 내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얌전히 그의 손길을 따르면 도착한 곳은 교무실이였다. 그리고 손에 쥐어주는 것이 입부신청서. 내가 당황한 얼굴로 카오루를 바라보자 그는 예사로운 말투로 "어차피 실명이, 귀가부지?" 이딴 말을 내뱉었다. 물론 클럽이나 위원회같은건 귀찮아서 별 관심없었지만 권위적인 그 모습이 여간 꼴보기가 싫었다. 왜 카오루가 멋대로 정하냐며 울컥 쏘아붙이면 되려 앉아계신 고문선생님이 당황해 하셨다. 그 뒤 카오루가 뭐라 했는진 기억안나고, 정신차려보니 부활동을 나가고 있었지.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은 당시에도 참 우스웠다. 그 나마 2학년 때까지 타 학교랑 시합이 없는게 다행이였지. 운동은 제대로도 못하는 내가 궁도부에 들다니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나기사 카오루군께서도 내가 지지리도 몸치인걸 지극히 아실텐데 왜 날 끌고 갔는지 알 수도 없고. 


"그러고보니...어릴적에 실명이랑 축구를 했을 때도 항상 공도 제대로 못쳤었지? 생각해보면 내 판단 미스였어."
"카오루도 실수 할 때가 있구나."

남 얘기 하듯이 흘려보내면 카오루는 한숨을 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운동을 못하는 게 잘못이 아니야, 그걸 알면서 나를 끌고온 네 잘못이지. 도대체가, 운동회마다 달리기 꼴찌를 했던 애를 왜 궁도부에 데리고 온거지.

"음...그러고보니까 있잖아."
"응?"
"진짜로 왜 날 데려온 거야?"

카오루의 비아냥 소리에 맞받아칠 속셈으로 꺼낸 말이였지만, 갑자기 정말 궁금해졌다. 베스트 프랜드 까진 아니더라도, 나와 카오루는 어느정도 서로가 뭐를 잘하고 뭐를 못하는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뻔히 내가 운동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 왜 나한테 궁도부에 들자고 한 거지?

"인원 수...? 는 아니였잖아, 그땐 이 삼학년들 많았고. 할 사람이 없어서...? 너 그런거 신경 안 쓰잖아?"

나는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카오루의 뜻과는 전혀 다른 답이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1학년 때 선배들에게 신입부원이라며 둘러쌓였던 것도 기억하고, 카오루가 남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는 애는 죽어도 아니니까.

카오루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아까처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였다. 진득한 그 시선에 왠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져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알고 싶니?"
"응? 뭐 그야...신경 쓰이 잖아."
"그럼 먼저 실명이가 말해줘."
"어?"
"K고등학교에 지원하려는 이유 말이야."

카오루의 말과 동시에 심장이 내려 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보통 그 즈음에서 잊어버리지 않나? 내가 왜 K 고등학교에 가려는 걸 저렇게 신경쓰는 거지. 평소처럼 날 놀리는 것과는 달리, 카오루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대답을 들어야만 겠다는 결심을 한 것 마냥. 나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아연실색하여 입만 다물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해도 된단다."
"아니, 그...저기, 왜 알고 싶은 건데?"
"네가 나한테 답해주기 전까진 뭘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아."

카오루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비록 말투는 똑 부러졌지만 그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왜 나한테 굳이 그 이유를 듣고 싶은 걸까? 당사자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 말이였기 때문에, 나는 카오루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게 동아리를 권유했던 그 때 같았다. 어쩌면 그 이유도 똑같을까. 출구가 없는 미로 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에 생각을 품었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내게 카오루의 속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신경은 그에게 K고등학교에 가려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 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말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카오루에게 내 감정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저 단순히 우정이나, 친구가 없는 건 싫은 외로움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오루에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첫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카오루에게 처음으로 다가가는 한 발짜국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밝혀야 되는 생각은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너는 나기사 카오루랑 뭐가 하고 싶은 거야? 문득 친구가 내게 꺼낸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마음 속으론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카오루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러나 그의 앞에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언제나 속으로 중얼거린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 카오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 감정만은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고백은, 나기사 카오루에게 들리지 않으니까.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나...나는...그..."
"그러니까........."

겨우 입을 떼고 카오루를 쳐다보면, 여전히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 거북하다. 만약에 여기서 카오루가 내 뜻을 다 알고 날 차버리면 어떡하지? 두루뭉실한 관계조차 깨져버리고, 영영 카오루가 날 어색해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결심과 함께 입은 떼어져 버렸고, 카오루는 그걸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 뺄 수는 없다. 앞으로 나서는 것 밖에는.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걷는 사람마냥 그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너랑, 카오루 너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었어."


드디어 그 한마디를 말하면 카오루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칠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마치 고백하는 거 같잖아! 아니 마음은 똑같지만, 적어도 그에게 다른 여지를 생각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부리면서 말해야 되었는데.
나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빌었다. 고백도 한 게 아닌데, 고작 그에게 작은 마음 하나를 밝힌 게 이렇게나 부끄럽다니. 도대체 고백을 하는 애들은 어떤 용기로 그 마음을 전한 걸까? 살포시 눈을 뜨고 그제서야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무슨 뜻으로 대답한 건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카오루의 대답은 어떨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입을 열 때 까지 기다리면,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얘 실명아! 엄마 잠깐 나갈테니까 빨래 좀 널어라!"

갑작스레 활짝 열린 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세우고 말았다. 열린 문 너머로는 밖에 나가려는 듯, 화장을 한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는 카오루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는 줄은 몰랐다는 듯, 그를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오루에게 잘 놀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가 닫고 나간 문 너머로 얼마나 민망한 공기가 흐르는 지도 모른 체.


"........."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진짜 이만 가야겠어."
"어?"

잠깐만, 그냥 가려는 거야? 카오루가 날 왜 데려왔는 지는 대답도 듣지 못하고, 그는 유유히 내 대답만 듣고 사라지려고 했다. 보통 같으면 왜 너만 내빼냐면서 소리를 지를법 했지만, 부끄러움에 내 몸은 이미 녹아 카오루에게 제대로 된 말 조차 하기 어려웠다.

"맞다, 실명아, 대전시합 보러 올거지?"
"으? 으, 응...명색에 고참멤버 이기도 하고...선생님도 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난 이만 갈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낼 학교에서 봐..."

카오루는 그 말과 함께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발소리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코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방 안에서 꿈쩍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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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잘랐어..."
"실명, 안녕."
"머리를 잘랐어..."
"내 말 듣고 있니?"
"으, 응......있잖아."
"신지군하곤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이상한 오해하지마."

카오루에게 착잡한 마음으로 말을 걸면,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아직도 차이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 주말동안 못봤던 카오루는 짧게 머리를 자르고 왔다. 시원하게 드러낸 목덜미는 햇빛에 닿으면 금방 벌게질 것 처럼 새하얗았다.
뒷머리 만져도 돼? 카오루에게 눈을 빛내며 말하면, 그는 단호하게 안 돼. 라고 말했다. 저번엔 내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무슨 풍선이냐. 마음이 왜이렇게 가벼워? 이랬다 저랬다 하게.

"카오루, 그러고보니까 우리 대전시합은 정해졌어?"
"아마 8월 넷째쭈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일거야. 출전선수는 일 이학년 중심이지만 삼학년도 참가 가능해."
"너 나갈거야?"
"아마도, 고문 선생님이 나가라고 하실테니까."


카오루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기사, 동아리 에이스니까. 시합에 나가는 건 당연하겠지. 우리 동아리가 아무리 시합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명색의 시합이고. 고문 선생님이 보여주기 식으로 카오루에게 출전을 권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대외 활동이 있어야 학교에 동아리 활동비도 얻을 수 있으니까.
만약 우리 부에 좋은 인재가 있다면 분명 그 인재가 시합에 나가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동아리에서 실력있는 사람은 나기사 카오루 뿐이였다. 왜냐하면 시골 학교인 탓에 인원이며 활동비가 적어 지원물품을 그닥 못 얻었기 때문이였다. 동아리 인원보다 적은 활로는 열심히 연습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러니 당연히 인재가 없을 수 밖에.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카오루가 대단한 것이다.
맘 같아선 고문 선생님도 3학년인 카오루를 보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주목하고 있는 우등생이니까. 고작 인지도 없는 동아리의 출전멤버로 나가는 것 보단 수험공부를 하길 바라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믿을 게 쟤 밖에 없는데. 카오루도 그걸 알고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인 걸꺼다.


"힘들겠네, 수험준비는 괜찮겠어?"
"실명이랑 다르게 난 며칠 쉬어도 괜찮아." 


저를 위로하는 말에도 카오루는 굳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보였다. 그 심성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풀여진다. 전생에 난 카오루에게 돈이라도 빌린 걸까? 왜 구태여 내 성을 내게 만드는 소리를 내뱉는거야? 이맛살을 내보이며 카오루를 바라보지만 그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여자애들에게 가버렸다. 나기사군, 있잖아. 상냥하게 웃으면서 여자애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 저 대단한 내숭엔 내가 혀를 내둘룰 수 밖에 없다니까. 


"나기사군이랑 무슨 얘기 했어?"
"어? 우리 동아리 대전시합. 다른학교랑 같이 하거든."
"너 3학년인데 출전하는 거야?"
"설마, 나기사만 나가는 거야."

3학년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로 친구는 말을 꺼내더니, 잠시 침묵을 잇고는 이내 수긍을 하였다.

"하긴. 나기사군이 너네 동아리 에이스니까. 너네 동아리 딱히 궁도 잘하는 애도 없고 말야."
"응, 그렇지 뭐. 나기사가 빠지면 대전시합도 곤란할 테고..."
"그나저나 나기사군 3학년인데 고생이 많네. 공부하랴 시합도 나가랴..."

오히려 양쪽 다 해내려는 모습이 대단한 걸. 원래 완벽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나기사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친구는 감탄만 내뱉을 뿐이였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눈썹을 올렸다. 

"그러고보니..."
"응?"
"다른학교랑 대전시합 하는 거잖아?"
"어...그렇지?"
"그럼 다른 학교 여자애들도 나기사군을 보겠네?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그야 뭐..."
"그럼 나기사군 노리는 여자애들 더 늘어나는 거 아냐?"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친구의 한 마디에 불현듯 초등학생 때 일이 떠올랐다. 그 때는 축구였던가. 축구부 감독의 질긴 권유로 인해 나갔던 대전시합 때였다. 분명 자신의 학교를 응원하려고 왔던 여자애들이 어느샌가 카오루가 골을 넣을 때마다 함성을 지르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앞에서 카오루를 보러 온 아이들이 여럿 있었지. 얘는 정말 생각할 수록 살아온 인생이 순정만화 주인공 같다. 물론 그에 따른 고충은 알긴 알지만, 보통 적군을 아군으로 바꿀 정도로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나?

"비슷한 일이 있었어. 4학년 때인가?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상대편 학교 응원하러온 여자애들이 카오루한테 흠뻑 빠져가지고..."
"생각만 해도 귀 아프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 정문에 그 학교 애들이 카오루를 보려고 버티고 있는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결국 그 학교 선생님이 와서 애들 데리고 갔어."
"...나기사군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그리고 친구는 바로 입을 닫았다. 솔직히 그 정도 인기면 감탄하다 못해 황당함에 말을 잃을 것이다. 이런 반응이 보통이지. 

"뭐 걔가 인기 많다는 건 진작 알고있었지만 나도 그 땐 놀랬어. 역시 넘 볼 나무가 아니라니까."

시답잖게 우스갯소리를 던지면, 곧 이마살은 눈썹을 찡그리는 모양새로 변했다.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친구에게 무슨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이마살을 양 손으로 펴주면, 그제서야 그 입술이 움직였다.

"또 그 소리다."
"어?"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에 몸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친구의 시선을 살폈다. 화난 것은 아니였으나 길게 뜬 눈은 마치 질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쉬며 친구는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너 말야."
"...나?"
"나기사군을 좋아한다면서 아무것도 안하네?"
"뭐...뭐가?"
"아니, 예전부터 그랬던 거 같아. 나기사군이랑 잘 지내지만, 너 정작 그 애한테 네 감정을 비친 적은 없잖아."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만큼 가슴을 꿰뚫는 그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차이는 게 무서워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찌풀이고 있으면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너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나기사군이야 확실히 너랑 소꿉친구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거잖아. 너가 같은 고등학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건 알지만, 솔직히 그건 니가 노력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고등학교 못 들어가면? 어쩌려고? 아예 접점이 없잖아. 옆집사는 거라 해도 고등학생이면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걸? 그럼 적어도 같이 있을 수 있는 핑계거리라도 만들어야지.연애라는 게 노력하면 꼭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런 노력도 안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 나기사군의 마음을 얻으려고 아무것도 안하는 거 같아."
"옛날부터 그렇게 폭풍같이 사람 애정을 얻어온 나기사군인데, 덩그러니 있으려고? 그러다가 뺏기면 어쩌려고? 강에 가서 눈물 흩뿌리게?"
"가끔 너 어차피 나기사는~하면서 말하는데, 너 진짜 나기사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 적은 있어? 그냥 걔 마음을 알기 무서우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고 단정짓는 거 아니야?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본 적은 있어? 떠본 적도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멍청하게 있는 거면 너 진짜 심각한거야. 단지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걸로 만족하는 거야? 너 그 애랑 같은 고등학교 공부하려는 거 아니였어? 못하는 과목도 죽어라 공부하고 있잖아."
"그럼 그 노력으로 나기사군한테 왜 안 다가가는데? 너 혼자서 노력하는 건 쉽게 할 수 있지만 남에게 시도하는 노력은 죽어도 못하겠어?"
"그게 얼마나 미련하기 짝이없는 건데. 나기사군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알면서 왜 계속 가만히 있어? 걔가 얼마나 남한테 사랑받는 지 지켜봐왔잖아. 가만히 있다가 빼앗기고 아 역시 나는 안되는 구나 하고 바보같이 납득할래? 그러고 끝낼래?"
"나 네가 진짜 나기사군을 좋아하는 지 잘 모르겠어."
"너 도대체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게 뭐야? 그 말 한마디가 글자 모양 그대로 뇌 속에 박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기사 카오루랑 하고 싶은 것? 그게 뭘까. 어렸을 적엔 그저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도 기억할 만큼 그 애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지. 초등학교 땐 여러가지 일이 있어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곧바로 후회할만큼 좋아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지금도 투덜거리면서 그가 하는 말은 다 따르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변명하지 않고 나는 나기사 카오루를 좋아한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애정을 얻으려고 하는 일은 없었다.
고작 샤프로 교과서의 내용을 적어내려가는 거 뿐이였다.
적어도 마음을 써내린 적은 없었다. 감정을 눌러담은 촌스러운 러브레터조차 건넨 적도 없었다.


"정신차려."
"어, 어어."
"...말이 좀 심했나? 그래도 맞는 말이 잖아."

어느새 친구의 표정은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약간 말 끝을 흐리는 그 어투에 이젠 엄격함은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미안한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너가 너무 답답해서 그래...차이면 뭐 어때? 나기사군이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딴 사람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뭐 말이야 쉽지만...너가 나기사군을 좋아한 만큼 다른 사람도 못 좋아할 거 뭐 있어?"

그리고 너가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도 뭐가 있어?

나기사군이랑 있어서 그런지 너 좀 자신감이 없는 거 같아. 너 충분히 괜찮은 애야. 그런데 왜 청승맞게 9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 처럼 굴고있어?
요조숙녀처럼 굴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언제 순정만화 처럼 굴었다는 거야. 굳이 덧 붙여도 되지 않을 말을 듣다보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뚱해졌다.
그러나 친구의 말은 솔직히 맞는 말이였다. 정론이였다. 누군갈 좋아하면서 그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조차 안하는 인간을, 나기사 카오루가 좋아할리 없다. 아니 그 누구라도 돌아볼리가 없다. 신지군이라며 입에 내가 아닌 사람을 걸고 다니는 놈이지만. 저거 사람 편애하는게 아주 대단하신 벽창호지만.
사람이니까 눈이라도 여러번 마주친 사람을 기억하겠지.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노력하는 인간을 더 좋아하겠지.

부정할 수 없는 말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웠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순간이였다. 소꿉친구를 멋대로 판단하고 애정을 표현 하나 하지 않는다.
아니 그냥, 나는 나태한 사람이 분명하다. 소꿉친구니까 걸핏하면 만나니까. 옆에 계속 있으면 두고두고 볼 수 있어서 기회만 엿보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기회만 있어서 되는게 아닌데. 찬스도 노력한 사람한테만 온다고 하잖아. 변명따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게 좋을텐데. 그래, 그게 옳다.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는 거다. 노력도 하지않는 어설픈 애정의 끝은 미련과 자기혐오 밖에 없을테니까.
친구의 말마따나, 90년대 순정만화를 따라해봤자 의미가 없다. 아무리 카오루가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인물이라 해도 사랑은 그렇지 않을테니까. 다가가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따운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명아, 진짜 미안해! 괜찮아?"
"어, 어 응 괜찮아..."
"진짜 미안, 아 어떡하지? 체육복 있어?"
"응 있어.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방과후, 동아리 실로 가려고 하면 위에서 갑자기 걸레빤 물이 나를 덮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물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면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반 학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찢어질만큼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내게 사과와 상태를 물어보는 울음소리에 그제서야 학우의 단순한 실수인 걸 깨달은 나는 분노를 넘어선 허탈함을 맛보았다. 이미 젖은 걸 어찌할 수도 없고, 얘가 이렇게나 사과하는 데. 급하게 스포츠 타올로 내 몸을 닦아주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솔직히 눈물이 나오는 건 난데, 얘도 어쩔 수가 없지.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면 카오루가 "아, 실며..." 나를 쳐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저렇게 뜨면 무서울 지경인데. 굳은 얼굴로 내게 빠르게 다가와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무슨일이야? 왜 그러니?"

꽉 잡은 팔에 냄새나는 걸레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나 신경도 안쓰는지 그는 내 손목이 아프도록 세게 힘을 주었다. 


"잠깐, 아파, 아, 아야야야야"
"...누구한테 당한거니?"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프니까 좀 놔!"

카오루의 손목을 붙잡으며 화를 내면 그는 그제서야 작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곤 손을 떨어뜨렸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잡은거야? 카오루는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화가 묻어나 있었다. 이건 좀 진정 시켜 줘야 겠다.

"같은 반애가 벌로 창문 닦는 중이였어. 걸레빤 물이 너무 무거워서 잠깐 창문 틀에 기댔는 데 손이 미끄러져서 떨어트린 거야........내 말 믿지?"
".........그래."

꺼림직한 표정을 짓는 그는 억지로 내 대답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다소 황당한 소리지만 정말 사실인 걸 어쩌겠어. 오히려 울면서 자기 교복을 입고 가라고 하는 걸 말리고 왔다.


"...그런데 그 꼴로 여기까지 온 거니?"
"그야 샤워실이 여기 밖에 없는 걸.........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이야."
"체육 수업 없어서 안 가져왔는데......카오루, 니 체육복 좀 빌려줄래?"
"...정말이지..."
"미안, 고마워."

카오루가 계속 한숨을 쉬면서 탈의실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는 데.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건가. 당사자는 이제 괜찮은데, 카오루는 여전히 초등학교 때 일이 신경쓰이는 듯 하였다.

카오루 입장에선 자기도 가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사실 그런 이야기를 그의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한다는 건 알지만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그때나 이제나 여전히 잊지 못하는 구나. 그 모습에 오히려 카오루에게 잊고싶은 기억을 준 것같아 미안했다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카오루의 체육복을 받으면 카오루 역시 안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마, 냄새 별로 안나니까." 그거 때문이 아닌데. 그런게 아니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카오루,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좀 늦을지도 몰라."
"먼저 가라니...........됐어. 기다릴게.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아니, 늦을 거같으니까 먼저 가라니깐."
"실명, 빨리 들어가."

카오루가 화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아, 알겠어. 오랜만에 보는 찡그린 미간을 보고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옛날에 베란다 넘어서 오지 말라고 혼났을 때 이후로 보는 건 오랜만이다. 무슨 이런 상황에서만 저러니까 꼭 아빠같네. 이따가 편의점에서 봉투라도 하나 사야겠다. 집에가서 얼른 교복 빨아야지. 뜨뜻한 샤워 물줄기를 맞으며 썩은내를 씻어냈다. 생각보다 걸레 냄새가 잘 안빠지네. 도대체 얼마나 더러운 걸레였던 거야. 냄새가 가실 때 쯤 샤워기를 끄고 몸을 닦아 받은 체육복을 입고 나오면 시간은 꽤나 흐른 듯 하늘이 어둑어둑 했다. 벽에 기대서 핸드폰을 보던 카오루는 내가 나오면 액정화면을 끄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명, 아주머니께 연락했어. 좀 늦을 거라고." 얘가 그런 거 까지 하고 있었나.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다. 아주 조금 내가 얘한테 붙잡혀 사는가 하는 배은망덕감도 있지만. "아...고마워, 뭐라셔?" 가방과 교복을 들어 그에게 다가가면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칠칠치 못하다고 그러시더라." 참, 아무리 우리 엄마라도 그건 좀 심하진 않나.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걱정끼친 내가 나쁘긴 하지만. 툴툴 거리면서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 카오루도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맞는 말이잖아, 실명인 너무 조심성이 없어. 평소에도 자주 듣던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어 나는 시선만 돌릴 뿐이였다.

"아주머니께서 저녁 먹고 오라고 하셨어. 먹고 싶은거라도 있니?"
"입맛 없는데......"
"실명...그러면서 사면 먹을 거 잖아."
"야...뭐 맞는 말이긴 하지...내가 탐욕스러운 돼지지..."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잖아...그래서? 어디가고 싶어?"
"난 모르겠어, 음, 음음. 카오루는?"
"그럼 무난하게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자."
"오, 좋다."


노을은 별들에게 쫓겨 어느새 산봉우리 밑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해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달님이 고개를 쏙 내밀듯 하다. 시계를 보면 8시를 넘어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근데 곧 여름인데 왜 이렇게 해가 빨리 저물지. 마지막 노을을 맞으며 황금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카오루를 바라보면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악재에 악재가 겹친 듯 했다. 친구와 있었던 일은 악재가 아니였지만, 정면으로 자신과 바라보는 건 꺼름직한 일이였다. 그런 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받아들여야 할 때 하는 짓이니까.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지만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깨닫는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순정을 바친 상대가 가만히 와주길 바랬던, 그가 변해주길 바라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통감했다.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렇지만 제일 짜증나는 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희미하게 속삭이는 자기합리였다. 어쩔 수 없잖아, 만약에 친구라는 관계조차 깨지면 끝이야. 최악을 떠올리며 스스로 끝을 만들어내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니?"
"어? 왜?"
"표정이 안 좋길래."
"아니...그런 일 없었는데."


이번에는 억지로 수긍조차 안하는 카오루의 표정은 기가 막혀 보였다. 적어도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는 얼굴이다. 맘 같아서야 무슨 일인지 조잘조잘 이야기 하고 싶지만, 본인에 관한 일이니 쉽사리 입을 열기 어려웠다. 별로 얘기해봤자 좋을 거도 없고. 시선을 피하며 입을 우물거리지마나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게 얼굴을 찔러온다.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쳐다볼 지경이였다.


"음...그게...오늘 친구한테 게으르다는 얘길 들었어."
"그건 평소에도 듣는 소리 아니니?"
"너 방금 뭐랬어?"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게으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울컥 화가 치솟았다. 왜 저렇게 얄궂은 말만 꺼내는 거지? 성이 난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나기사 카오루는 내가 욱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인간 관계 같은 거 있잖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나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왜 먼저 다가가지 않냐고. 가만히 있냐고. 멍청하게 있다가 끝나면 납득하고 냅둘거냐고..."

카오루는 흠, 하고 말 끝을 흐렸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 모습에 괜시리 부끄러워졌다. 난 왜 이런 얘길 얘한테 하고 있는 거지? 당사자인데. 카오루는 이게 자기 얘기란 걸 알면 어떻게 반응 할까.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재빠르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래서 그냥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거 같아서 좀 우울해하고 있었어. 그게 다야. 끝."

머리를 긁적이는 걸로 쑥스러움을 씻어내려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역시 괜히 말했나. 아까부터 왜 계속 보기만 하는 거야?

"실명."
"으, 응?"
"남이 와주기 만을 바라는 게 어리석은 거니?"
"어?"
"너가 생각하기엔 어때?"

카오루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였다. 유난히 진지해 보이는 얼굴은 정말 그 답을 알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마치 수학문제에 정해진 답을 찾는 것 마냥. 부드럽게 내 의견을 묻는 그 목소리는, 평소에 카오루 같지 않았다. 왠지 내가 모르는 나기사 카오루를 보는 듯 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글쎄...난......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는 내 감정을 알고 있어도 상대방은 모르는 거니까......물론 서로 상호간에 애정이 존재하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순 있겠지만...정말 중요한 건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그리고 내가 남을 좋아해서 같음 감정을 느끼가 바란다면, 적어도 남이 날 좋아할 수 있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 데? 도저히 내 말을 끝맺을 수 없어 그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 감정이란 건 너무 복잡해서,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상처 입는 걸 두려워 하기 때문일 거야. 그건 그 누군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서일 수도 있고, 자기혐오로 주저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 나는...그게 안타깝고 불쌍하지만...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사람은 한 순간의 마음으로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마음을 소중히 여기니까."

마음이 상처 받으면 살아갈 수 없을정도로 외로운 거 뿐이야. 카오루는 나지막히 그런 말을 꺼내었다.

"사실...잘 모르겠어."
"뭐가?"
"너와 신지군을 보면서, 리린의 감정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지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리린의 마음, 리린의 삶을. 지금도 리린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어."

리린?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 그는 알 수 없는 단어를 꺼냈다. 독일어인가? 내용으로 보면 사람을 말하는 거 같은데. 그나저나 카오루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니. 처음 안 사실이였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니까. 물론 사람에게 벽을 치는 성격이지만, 나나 신지군을 대하는 걸 보면 카오루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카오루, 사람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거야?"
"맞아."
"그런거 치곤 너 엄청 잘 지내잖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지는 알지만 그 이면은 모르겠어. 내가 그를...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지. 무엇이 그를 위한 행복이고 옳은 건지, 알 수가 없어."


카오루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자신 없어보이는 눈이였다. 카오루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거야...그걸 알면 이 세상에 안 행복한 사람이 어딨겠어?"

내가, 남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을리 없다. 원하는 물건이나 명예, 금전은 쉽게 알 수 있지만 행복은 감정이니까. 나만 해도 오늘 친구에게 너는 뭐가 하고 싶은데? 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남의 진정한 속내라는 건 그렇다.
카오루를 좋아한다고 넌지시 얘기를 들은 그녀도 내 행동을 보고 그 말을 의심하였다. 마음이란 보여줘도 금방 흐지부지 되는 거다. 계속 보여주고 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쉽게 알 수 있겠어?

"아무도 진정한 행복같은 건 모르고 옳은 것도 모르지. 그냥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거 잖아?  옆에 있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같이 생각하는 거 아냐? 원래 행복이란 게 주관적인 거 잖아. 너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남은 행복이라고 생각 안 할수도 있지."


카오루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그런 건 혼자 정하는 게 아니잖아.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지. 상대방이 무얼 생각하는 지 알아야지.
...그리고 계속 알려주고 들어야 하는 거 잖아. 끊임없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알려줘야 하고, 신뢰를 잃기 전 까지 계속 보여줘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귀찮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까 어떻게든 계속 알려줘야 한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아야 한다.

"결국...음 대화가 중요하다는 거 아닐까?"
"대화?"
"카오루는 그 알고 싶다는 사람하고 그런 얘기 해봤어? 행복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카오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질렀다. 얼핏 얼굴에 슬픈 빛이 맴돌았다. 왜 그걸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드디어 깨달았다는 표정인 것도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루의 속 내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사람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티비에 나오는 사기꾼이나 설득가들도, 가만보면 다 상대방의 대화를 엄청 듣기만 하던 걸.
어느 틈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고 시답지 못한 농담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웠다.

"실명."
"으, 응?"

입을 삐죽이며 카오루에게 고개를 돌리면 그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나는 오히려 긴장을 느꼈다. 처음으로 카오루와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지 알아서 좋았지만, 그 반응은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내게 핀잔을 주려나? 아니면 덕분에 좋은 얘길 들었다고 고마워 할려나?

"패밀리 레스토랑, 도착했어."
"......아, 그래..."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싱거운 평범한 대화였다. 방금까지 그렇게 무거웠던 분위기가 주전자의 김이 빠지는 것 마냥 사라진다. 내 긴장감도. 보통 저런 대화를 하고 나면 무언가 말하지 않나? 왜 얘는 없던 일 마냥 치부하는 건데. 괜히 떨던 내가 바보 같았다.

"아, 맞다. 카오루, 체육복 빌려준 거랑, 엄마한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아깐 경황이 없어서 대충 말한 거 같아서. 너 아니였으면 큰일 났을 거야. 그 꼴로 어떻게 돌아가? 약간 자조하듯 웃으며 동아리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카오루는 별말씀을. 이라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실명인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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