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목 뒤를 넘는 카오루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만해도 시원스럽게 목을 내놓던 그 머리는 어느새 다시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초등학생 때도 저 머리모양이였지. 잘 모으면 묶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머리 묶어도 돼?"
슬며시 카오루의 뒤에서서 말을 걸면 그는 고개를 돌리며 "너 말이니?" 라고 물어보았다. 뭐야, 내가 내 머리를 묶는 데 그걸 너한테 왜 물어보냐? 어이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풀이자 그는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슨 네 노예야? 내 머리 묶는데도 너 한테 허락 받아야 되냐."
"그러게."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 말에 기운이 빠졌다. 카오루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도복을 곱게 접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고무줄을 꺼내 그의 머리를 묶기 시작했지만 카오루는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적어도 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오, 꽤 잘 어울리네!"
"그래?"
"내 작품 멋지다."
"내 얼굴은 네 작품이 아니지."
"나르시시스트."
"농담이야."

이쁘게 뻗친 머리가 꽁지를 내어 묶이니까 보기가 아주 좋았다. 깔끔하게 정돈된게 단정한 멋이 난다. 거 봐, 잘생긴 애들은 머리 묶어도 잘 어울린다니까. 뭐 그거같이. 그, 아티스트같잖아. 세련되어 보여.
 토끼꼬리 처럼 쭉 삐져나온 꼬랑지를 내보이며 카오루는 그게 뭐냐며 작게 웃었다. 나는 그의 꽁지머리를 쓸어내리듯 만져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진짜 잘 어울린다."
"넌 머리묶은 남자는 별로 라고 하지 않았니?"
"그치 긴 머리는 좀...뭐 잘생기면 다 잘 어울리지만."

미소지으며 카오루의 머리카락을 사락 만지지만 그는 흥미없는 표정을 했다. 하긴 잘생긴 사람이 맨날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감흥은 없으려나. 다른 반의 종례가 끝난 듯 동아리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은 나기사에게 인사를 한다. 그 다음은 나. 평소처럼 그 인사를 돌려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목소리는 반응없이 나기사의 주변에서 꺄르륵 떨기 시작했다.

"나기사군 그 머리 뭐야? 어울린다!"
"나기사군이 한 거야?"
"아, 응. 조금."
"귀엽다~아니, 멋있으려나?"

역시 잘생긴 사람의 조그만한 변화에도 여자들은 재빨리 알아차리는 구나. 아니 미소년이니까 더 잘 알아차리는건가. 그렇겠지. 나는 그녀들의 나기사에 대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며 자리를 옮겼다. 사과머리로 했으면 분명 한대 맞았을거야. 눈에 선하다. 그 혼잣말이 저에게 들린 듯 나기사가 뒤에서 당연하지 라고 쏘아붙였다. 

"나기사군은 멋있으니까 무슨 머리든 잘 어울려~"

 부원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카오루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기묘하게 사람 피부보다 흰 머리카락에 점점 그녀의 손 끝이 닿을 듯 하다. 그러나 카오루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피했다.

살짝 몸을 뒤로 빼는 행동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역시 손을 뻗었던 당사자는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다. 나 또한 카오루가 부원의 손을 피한 것을 눈치챘으니까. 대화에 열이 오른 다른 부원만이 눈치 못채고 있었다. 나기사의 행동을 깨달은 우리 둘만이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찰나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간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손을 거절하면 어떡해! 하지만 나조차도 잘 모르는 누군가가 만진다면 싫어했을 거다. 그래도 넌 부장이잖아, 부원한테 그러면 어떡하니! 그렇지만 부장이라고 다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
나기사군, 머리모양 바꿀 생각 없어? 다른 부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당황해하던 아이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 그러게. 이제 3학년이니까 머리 검사도 안하고...머리 길러보는 것도 어때?"
"응응, 아니면 펌하는 것도 멋있을 거 같아!"
"그, 그거 좋다."
"거봐 역시, 실명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대걸레를 두어개 갖고 오면서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곤 각각 부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다행이다. 어찌저찌 카오루의 행동은 넘어간 것 같다. 근데 왜 당사자도 아닌 내가 신경을 써야하는 거야? 힐끔 쳐다본 카오루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잠깐 나 고문 선생님께 갔다 올게."
"응, 나기사군 잘 갔다와."


동아리실을 떠나는 카오루를 부원들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였다. 고문선생님이 나기사를 부를 일이 있었나? 없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설령 카오루가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동아리실에 있는 건 거북할테니까. 아무리 뻔뻔함에 극치인 나기사 카오루라고 해도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할 것이다.

"실명이는 말야."
"어, 어?"
"좋겠다. 나기사군이랑 친해서."

약간 부러움이 섞인 앙증맞은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다행히 별 질투는 없어보였다. 

"그런가...? 너도 그 농구부 에이스랑 친하잖아. 걔 잘생기고 인기 많던데."

나는 다른말로 그 부러움에 대답한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 부끄러운듯 한명이 가볍게 나를 치며 웃었다. 원래 이런식으로 이 관계에 부러움을 나타나면 나는 상대방의 인간관계로 맞받아치곤 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회피는 대화주제를 손쉽게 바꾸고 관심도 돌려냈다. 솔직히 나랑 나기사가 남들한테 부러움을 살정도로 애틋하거나 뭐 그런건 아닌데. 무신경 하면 더 했지. 학교에서도 서로 말은 잘 안하는데, 나기사가 여학생들에게 눈길을 받으면 어느새 우리 관계는 소문으로 퍼지고 나는 좋건싫건 한번쯤 입에 오르게 되었다. 연예인하고 친분있는 사람은 이런 느낌일려나.

"실명아, 이쪽은 우리가 닦을게."

"그래, 그럼 난 탈의실 할게."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 대걸레를 물통에 넣고 있으면, 귓가를 소녀들의 말소리가 톡톡 건들였다.

아, 그러고보니 말야. 환기를 시키려 반쯤 열어둔 여자 탈의실 문틈으로 그것이 들어온다. 


"나기사군 무슨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도 있던데."
"아 진짜? 있을법하네. 모든지 다 가진 사람인가. 멋지다."
"어어 맞아. 근데 좀 무섭지 않아? 오히려 그렇게 완벽하니까 더 큰 결점이 있을거 같아."
"뭐야, 드라마냐? 근데 그것도 상상이 가서 무섭네."
"아까도 그랬고..."
"아까? 뭐?"
"내가 만지려니까 피했어."

아냐, 그건 너가 잘못한 거 잖아. 사람 무안준 건 맞긴 하지만! 용기있게 그녀에게 말을 꺼내진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그 말을 부정하였다. 

"그건 네가 잘못했네. 사람 함부로 만지면 기분 나쁘지."
"그래도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갑자기 그렇게 거부하니까 놀랐단 말야. 평소엔 상냥한데."
"흠, 하긴 좀 놀라긴 하겠다. 그러고 보니 나기사군 상냥하긴 한데 묘하게 사람들하고 안 어울리는 거 같아."
"그지? 가만보면 우리반에서도 단짝친구 같은 거도 없고."

방금전 까지만해도 나기사에 대해 연심을 피워내었던 여자애들이 어느새 어두운 대화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쟤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그나저나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은 또 뭐야. 남의 가정재력은 어떻게 알았대?

"나기사군, 멋있는 데 좀 무서운 거 같아."
"알거 같아. 좀...뭐랄까 나도 나기사군 개인적인 얘기 들은 적 없어."
"우린 같은 동아리 부원이니까 그나마 대화나눈 거야."
"나누는게 이 정도야? 진짜 모르겠네."
"혹시 평소에 상냥한 거도 다 연기 아닐까? 사실 막..."
"얘들아, 청소 다 했어?"

부원들에게 다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표정은 잘 유지하고 있나? 목소리도 감추려곤 했지만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올라간 입술이 딱딱하다. 아이들은 놀란 듯 나를 보며 커다랗게 뜬 눈을 내보였다. 그래 얘들아, 내가 있었단다.

"다, 다 했어!"
"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뒷정리 내가 할게. 먼저가도 돼."
"으, 응...저기..."
"어?"
"아, 아냐. 고마워. 우리 먼저 갈게."

재빠르게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곤 동아리실을 떠났다. 역시 누군가의 뒷 얘기를 듣는 다는 건 불편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카오루라니, 최악이다. 카오루도 저런 소릴 많이 들었을까?
물론 나도 잘나가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른 적은 있지만, 카오루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울면서 카오루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카오루도 이런 기분이였나.

나기사도 꽤 고생 하겠구만. 아무짓도 안했는데. 없는 꼬리를 남들이 만들고 있어. 나중엔 나기사군은 사실, 이러면서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는 게 아닐까.
좁은 시골인 만큼 소문은 허항되고 빨리 퍼진다. 우리학교가 심한편이긴 하지만 걔도 행동 하나에 입방아 상대가 되니 피곤하겠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스스로만 신경쓰느라 그는 맘편히 생활한다고 오해해버렸다. 실은 진짜 그런진 모르지. 카오루는 남 신경 안쓰니까. 그래도 미안한 감이 다소 들었다. 한동안은 말 대답하지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들을까?

그래도 카오루의 얼굴은 보면 결국 화를 내고만다. 얘가 만약 차분한 여성이 이상형이면 난 당장 대상 밖이 되버리고 말거야. 그치만 맨날 먼저 시비거는 건 다름아닌 나기사군인걸. 언제 머리끈을 풀었는지 본연의 머리모양을 한 카오루가 내게 다가왔다. 자, 여기. 그가 주먹쥔 손으로 내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놓는다. 머리끈이였다.



"머리 왜 풀었어..."
"아니...왜 그런걸로 화내니."
"화내는 건 아니고 그냥 아까워서."
"그런 머리 난 별로 안 좋아하거든."
"고문 선생님 하고 무슨 얘기 했어?"
"설마 그 말을 믿었니?"

역시 도망간거구나. 알면서도 속아준거야! 카오루에게 심통을 부리면 그가 가볍게 웃으며 거짓말, 이라고 말했다.

"오늘 신지군하고 같이 돌아가?"
"네가 신지군이라고 부르지 말아줄래?"
"하여간 저 독점욕 진짜."

오늘은 같이 안가. 나기사가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솔직하게 대답할 것을 굳이 남 신경을 긁어야 하나?


"아 그래?"
"그건 왜 묻니?"
"돌아가는 날이면 오늘은 혼자 정리할려고 그랬지."
"뭐?" 

칼날같이 카오루가 내 말에 대답한다. 내 입에서 나올거라고 생각 못했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니 솔직히 나도 그런일 없을거라곤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도 그 반응은 좀 그렇지 않나. 내가 눈살을 작게 구겼지만 그는 반응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내 행실 탓이긴 한데. 반응이 너무하다. 남의 호감을 마치 신기루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다니. 그나저나 내가 나기사한테 그렇게 인색했나? 얘가 놀랄만큼. 나름 잘해준 거 같은 데 그것도 아니였나.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어느샌가 다시 나를 보고있던 그가 말했다. 

"고맙기는 하지만 실명이 혼자 맡기기엔 걱정돼."
"아, 진짜."

역시 사람은 친절도 사람을 보고가며 베풀어야 한다. 그 증거로 나기사 카오루가 도와준다는 내 말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제부턴 상냥하게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만 도와줄거야. 두번 다시 얘한텐 도움따위 주나봐라.



"됐다 됐어. 이렇게 사람 무시하는 거면 안 그러는 건데. 괜히 말 꺼냈어!"
"글쎄, 언젠간 실명이가 필요할지도 모르잖니."
"때 지났어 이미. 친구 좋은게 뭐냐고 도와줄려는데..."
"난 친구라고 생각한적 없는데." 




뭐.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나기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키가 커서 내려다 보는거겠다만 저런 말을 들으면 그 행동에도 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상처받고 문제가 아니라 매정한 그 행동에 화가 난다. 기껏 좋은뜻 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까탈스럽지. 눈썹을 길게 떨어트리며 나기사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이 마주치면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인색 그 자체야. 


"나 간다."
"같이 가자."
"싫어, 따라오지 마."
"같은 아파트면서, 무리야 그건."
"......몰라. 방금까지 얼음 쏘는 듯 말한 주제에. 같이가자고 하는건 도대체 무슨 심보래?"
"내가? 글쎄, 실명이 너 혼자 착각한 거 아니니?"
"퍽이나!"

이를 들어낼 듯 카오루의 말에 신경질을 냈다. 상냥한 나기사군은 무슨. 참말로 상냥하시면 저런 말을 면전에다 뱉어내실까!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긴 다리를 쭉 뻗으며 다가오는 카오루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뭐야 황새하고 법새도 아니고. 어느샌가 내 옆에 선 카오루가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아." 듣기 귀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애 같긴"
"...뭐야, 나 아니라도 다른사람도 그런 말 들으면"
"가자. 그리고, 다리 아플테니까 그렇게 걷지마. 속도 맞출테니까."
"저게 뭔 생색이야?"
"가방 이리 줘."

나기사는 내게서 가방을 집어 제가 들기 시작했다. 말 반마디를 꺼낸 순간이였다. 뭐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지만 평소와 다르지않은 얼굴로 그는 대응했다. "안 걷니?" 능구렁이처럼 행동하는 그 모양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분위기를 따라갔다. 여기서 그를 무시한다면 정말 카오루가 말한대로 유치한 어린아이가 될 것 같았다.
아무말 없이 카오루와 함께 걸어가면, 남의 속도 모른 체 천연덕 스럽게 그가 이야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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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월말이라니...내 방학은 밑독이 뚫렸나...뭐가 이리 줄줄새지?"

"새기는. 나기사군하고 알콩달콩 공부했잖아."
"알콩달콩은 무슨..."

괜히 좋으면서 심술을 부린다며 친구는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왠일로 카오루가 나한테 방학 때같이 공부하자고 말해서 좋았지만, 정말 공부말곤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였다. 내가 카오루네 가면, 공부하고 모르는거 물어보고 배우고 공부가 끝나면 집에간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건 누구나 꿈꾸는거지만, 내가 생각했던거랑은 많이 달라 달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것이였다. 조금은 친해져서 상냥해질 줄 알았는데, 더하면 더했지 절대 유해지지 않는 나기사 카오루 였다. 오히려 기초지식도 없는 날 가르쳐서 애를 힘들게 해서 화난거 같고. 카오루는 화났다곤 안했지만 나였으면 짜증내고도 남을거야. 게다가 그 인간 가끔 날 보면서 한숨도 쉬는 걸. 머리 나쁜 날 보며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길 바랄뿐이다.

"실명, 너 이번 축제 갈거야?"
"...아니."
"뭐야, 나기사군이랑 안 가?"
"뭐 어차피 이카리군이랑 가지 않을까? 그리고 더워서 나가기 귀찮아."
"괜한 변명은."
"아 몰라, 너는?"
"나 다음 주에 학원에서 시험 봐서 안 돼."


가볍게 참고서를 넘기며 친구가 말하였다. 뭐야, 주말에도 공부 하려고? 내가 그녀에게 놀란 목소리로 물으면,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뜻한 그 목소리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스물거린다. 난 주말에는 티비보면서 놀고만 있었는데.

"뭐야. 넌 공부하면서 친구한테 공부하지 말고 놀라는 거야?"
"어차피 넌 계속 공부해봤자 나기사군하고 같은 고등학교 못가..."
"방금 뭐랬냐?"
"이 기회에 나기사군 하고 더 친해지라고 그랬지~"

이미 친구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걸 똑똑히 들었지만 그녀는 시치미를 뗐다. 천연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이 눈꼴사납다.


"뭐 난 남자랑 가는 건 글렀고. 너라도 가서 청춘사업 해."
"내가 나기사 뒷꽁무니 쫓아다닐 동안 넌 공부를 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구?"
"갈 남자가 없어서 안가는 거라니까?"

샤프 펜으로 친구의 볼을 찌르면 귀찮은 듯 그녀가 성을 냈다. 쌀쌀맞게 쳐다보는 눈빛에 겁을먹어 펜을 내려놓으면 그제서야 시선이 거두어졌다.

"나기사군 한테 차이면 내가 위로해줄 테니까 한번 권유는 해보는 게 어때?"
"으, 으음...거절당하면 어떡해. 간접적으로 차이는 거 같아서 무서워."
"뭐가 무서워. 죽는 것도 아닌데. 자신감 좀 가져봐."

친구는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였다. 그 응원에 용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약한 용기지만.
그래. 솔직히 나기사한테 어디 놀러가자며 권해도 그 정작 받아들여진 적은 드물고. 카오루도 그 때마다 태도가 똑같았으니까.
친구 말마따나 차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카오루한테 가냐고는 한번 물어볼까.
주말에 큰맘먹고 정한 결정을 월요일에 행하면 굉장히 산뜻한 답이 날아왔다.


"카오루, 너 오늘 축제 갈거지?"
"아니, 별로."
"뭐? 진짜? 신지군때문에 꼭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신지군이 유카타입은 모습은 보고싶지만...아무래도 그가 다른여자애하고 둘이 갈거같아서 말이야."
"아.........힘내."
"그래."

나기사도 신지군한테 차였구나. 사랑하는 이에겐 동정을, 연적에겐 질투를 표한다. 애초에 신지군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까워 하는 내가 심기에 거슬린듯 카오루가 무뚝뚝하게 샤프로 내 문제집을 두드렸다. 알겠다니까. 샤프를 집어 영어 문제를 풀고있으면 갑자기 카오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뜻밖이였다.

"실명이는?"
"어...나? 글쎄 별로...유카타 사둔것도 없고..."
"여자애답지 않구나 역시."
"야,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야 그건. 갈 약속도 없고...사람많은거 싫어하잖아, 나."
"그렇지. 운치있게 불꽃놀이 소리들으면서 공부하는건 어때?"
"운치가 아니라 울지...불꽃놀이는 보고싶다. 여긴 빌딩때문에 안보이잖아."

매년 축제는 집근처 공원에서 이루어졌지만 항상 우뚝솟은 건물들 탓에 끄트머리 불꽃만 보고 말았었다. 예쁘게 밤하늘에 수놓아진 불꽃들은 참 예쁜데. 사람들하고 부딪치는건 싫은걸. 밖에나가기도 귀찮고. 올해도 역시 아쉽지만 불꽃이 터지는 소리로 배를 채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기사군이 딴 여자하고 팔짱끼며 축제에 안간다는건가.

"그러고보니, 초등학교때 실명이랑 축제에 갔었는데 네가 울었었지. 잉어잡기에 열중해서 용돈 다 써버려서, 혼날거라고 울던게 떠올라."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혹시 그 일때문에 축제에 안가는거니?"
"...그럴리가 있겠냐."

하여간 기억력도 좋다니깐. 소년은 씩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지금은 과소비가 아니라 과하게 빈둥거리는게 문제라고. 거 참 능글맞은게 구렁이라니깐. 그치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결국 잉어를잡긴했지만 500엔을 다 써버려서 울고말았지.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게 뻔했으니까. 울던 나를 카오루는 어떻게 했더라. 다독여줬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나. 그나마 희미하게 크게 안 혼난건 떠오르는데.

"그 때 잘 기억은 안나는데 별로 안 혼난건 생각나...하기사 그렇게 처량맞은데 화낼까 싶지만."
"...실명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나쁘니까 도박은 안하는게 좋을거같아."
"여러가지라니, 뭐야?"

머리나쁜건 인정하겠지만, 그건 공부하는 머리일 때 얘기다. 그거 아니면 나 꽤 똑부러지는데, 나기사 카오루군 정도는 아니지만. 도대체 뭘보고 멍청하다는거야. 맹목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는 그의 험담에 저절로 미간이 찌풀여졌다. 카오루는 이런 나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문제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진짜 차갑네. 그의 단호함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공부 안 하니?"
"해..."


무심코 시곗바늘을 보면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낼시간이네. 별로 집중이 안된다. 축제가 6시에 시작이였던가. 한 일곱 여덟시 쯤에 불꽃놀이가 시작하려나. 지금쯤 친구는 준비하고 나가느라 급급하겠지. 강물마냥 흐르고있던 생각을 멈추면 카오루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라 뭐지.

"오늘은 이 쯤하자."
"어? 어.......미, 미안...화났어?"
"화 안났어."

내가 너무 딴 생각을 한 게 거슬렸나. 카오루는 평소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공부하자고 부른애가 딴청만 피우면 나같아도 화날거 같은데, 양심에 찔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지만 카오루는 이런 나를 배려한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실명. 내일까지 단어100개랑 문법80문제 풀어와."
"........."
"안 풀어오면 벌금 알지?"
"...네이......"


밤하늘에 떠다니는 불꽃 조각마냥 내 정신도 흩어지겠군. 하지만 나기사 카오루군은 나보다 더 풀어오면 풀어왔지, 절대 숙제를 안해올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카오루가 정말 사람일까 궁금해질때가 있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애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열면 또 까칠한 말투로 나를 건들일게 뻔하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도 그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자기 딴에는 티를 안낸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다 보이는 걸. 카오루는 이런 말을 싫어한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난 뒤 책상 앞에 앉으면 왠일로 핸드폰이 울려 대었다. 스팸 메일인가 싶어 메시지함을 확인하면 착신자의 이름이 명확하게 써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놀란 마음에 잽싸게 문자 내용을 보지만 극히 짧은 문장만 써 있었다. '옥상으로 와.' 내가 무슨 부르면 달려나가는 애완견인 줄 아나. 하지만 심심해서 남을 부르는 성격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투덜 거리면서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왜 갑자기 옥상으로 부른걸까. 옥상에서 볼 일이 있을 건 아닐테고, 보통은 방에서 대화를 할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장소가 옥상인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이 영 개운하지가 않아. 무슨 일이지. 조심히 옥상문을 열고 발을 내딛으면 익숙한 또래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름 해는 꿋꿋하게 하늘에 떠 있어, 단숨에 누군지 알아채었다.


"카오루?"
"아, 왔니? 이쪽으로 와."
"왜 옥상으로 부른거야? 무슨......어, 불꽃놀이 세트?"

솔직히 장난으로 결투같은 걸 떠올리긴 했지만, 내가 연애감정을 품은 상대는 이카리군이 아니라 그럴 일은 없었다. 정답은 무얼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왠지 기운이 쭉 빠지는 듯 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네가 갖고 온거야, 물어보면 카오루는 대답했다.

"설마, 카지씨가 갖고오신거야."
"하기사......네가 사올리는 없지."

아, 카지씨. 아직 일본에 계셨나. 카오루는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물이든 양동이를 곁으로 옮겼지만 카지씨가 무슨 말을 했을진 대충 가늠이 갔다. 젊은 나이가 아깝다며 탄식을 내뱉었겠지. 특유의 가벼운 미소가 떠오른다. 카오루는 라이터를 바닥에 놓곤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왠지 모르게 장난끼가 돈다.

"라이터? 카오루 너 담배펴?"
"........."
"미안, 미안. 사실 말야, 니가 옥상으로 불러서 무슨 결투라도 하는 줄 알았어. 보통 옥상으로 안 부르잖아."
"결투?"
"뭐......그런 거 있잖아, 비오는 날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싸우는 남자 둘...같은 거. 너 같은 경운 이카리 신지군일려나. 신지군을 두고 너랑 나랑 싸울린 없지만."

조금 심기가 거슬린듯 카오루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농담도 못하나. 그래, 나도 반성하니까 이제 더 이상 이카리 신지군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카오루와 같이 나 또한 포장을 뜯어 막대기를 꺼냈다. 카지씨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른스러운 일을 하는 구나. 위험한 분수나 로켓폭죽은 없었다. 걱정해주는 건 좋지만 왠지 초등학생 취급 받는 거 같아.


"실명, 이리 줘."
"어? 아, 고마워......근데 있잖아, 왜 갑자기 불꽃놀이 하려고 하는 거야? 나기사 이런 거 좋아했던가?"
"가끔씩은 좋잖아."
"아까 운치 있게 폭죽소리 들으면서 공부하라고 했으면서."
"조심해."


카오루가 라이터로 막대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화약과 함께 내 말은 불꽃에 태워져 버린 것이다. 사람 말 끊는 건 선수라니까. 옹졸맞게 끝자락에 피어있던 불꽃은, 점점 심지를 타고 올라와 반짝이며 톡톡 불꽃을 터트렸다. 분홍색 불빛이 꼭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인다. 카오루 또한 자신의 심지에 불을 붙이곤, 이내 주황색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을 받는 부드러운 은색은 마치 석양빛에 비춘 것 마냥 갈색을 띄워냈다. 마치 갈색머리를 한 카오루를 보는 것 같다. 빨간 눈동자 안에 솟아오르는 오렌지 빛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빛깔을 마음껏 뽐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이 아닌 자신을 보는 게 의아한 듯 카오루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수줍어져,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게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 생각났다."
"뭐가?"
"잉어뽑기로 돈날렸을 때. 니가 울지말라고 나한테 사과사탕 사줬었던거. 넌 기억 안나나?"
"기억나. 먹다가 갑자기 울고 멈추고 그랬지."
"그러고는 같이 우리집 가줬지? 카오루가 돈 잃어버려서 내가 빌려줬다고 거짓말 해줬던거 같아."
"실명이 답지 않게 잘 기억하는구나."
"야아......됐다, 됐어. 그땐 고마워."
"그날 밤에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괜찮아."


무덤덤하게 그가 인사치례를 했다. 하여간 나한텐 부드럽게 말 안한다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 나름대로의 배려인 걸 알아, 아무 볼맨소리 없이 가만히 환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하늘을 향해 불꽃이 커다란 함성을 터트렸다. 놀란 우리 둘은 등을 돌려 멍하니 남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왠일인지 예쁘게 퍼지는 폭죽이 깔끔하게 보였다. 쏘는 위치를 바꾼건가. 이번엔 빌딩에 안 가려지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카오루가 붙여준 폭죽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늦게 시선을 돌린 그가 내게 신기한 듯 물었다.



"실명, 저거 안 보니?"
"...난 이게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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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한번 크게 몰아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시끄럽게 소리치지만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듯 했다. 그래, 이미 어쩔 수 없다. 그녀에게 옥상으로 오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 서로는 원하는 것이 일치하니까. 그리고 그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존재다. 반드시 누구 하나는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흑백싸움이다.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을 옷으로 닦고선 문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면 새하얀 시멘트와 퍼런 하늘, 그리고 눈에 지울 수 없는 보랏빛 소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그래."



대화는 곧 단절 되었다. 말을 꺼낼 필요 조차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녀가 나를 불러낸 이유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긴 말 안하고 짧게만 말할게요. 선배한테서 떨어지세요."

"내가 왜?"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아내면 소녀의 이맛살이 치몰린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너하고 하쿠노,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니?"

"어머, 보기보단 다르게 꽤 성격 있으시네요."




그야 당연하다. 본래 내 성격은 사람과 말 다툼 조차 어려워 했지만, BB의 견제 덕에 적어도 그녀에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하쿠노와 어디 놀러가거나, 재밌는 얘기를 나누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 받을 때 항상 뒤에서 노려보았다. 불러내서 협박도 했었다. 보통 여고생이 기껏해야 으름장을 내놓는 것이 무슨 협박이라고 하겠지만, 그걸 들은 본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꼈으니 협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이 선배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미모, 운동, 공부 재색겸비 그 자체인 저한테 아무리 노력해봤자 수준 떨어지지 않나요?"

"너 말야, 하쿠노가 수준을 나눠서 사람을 본다고 생각하는 거니?"

"윽..."

"거기다, 하쿠노는 네가 사람 불러놔서 으름장 놓는 거 알면 바로 화낼텐데. 하쿠노는 네가 착한 애가 아니란 건 알지만 나쁜짓을 하는 걸 눈 감아주는 무른 사람은 아니거든."



물론 하쿠노는 BB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끼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 횡포를 모른척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혼내면 혼냈지. 그리고 눈 앞의 소녀는 하쿠노가 자신을 꾸짖는 걸 무서워한다. 혹시 그에게 미움 받지 않을 까 하고. 이것이 바로 그녀의 약점이다.

하지만 하쿠노에게 여지껏 내게 으름장을 놨다는 사실이 알려질지라도, 하쿠노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각오겠지. 그 위험성을 안고갈 정도로 하쿠노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내 각오가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BB는 분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 뻔뻔한 말투...선배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도군요!"

"누가 뻔뻔하다는 거야. 애초에 맨날 하쿠노한테 내숭 부리는 건 누군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쁜 짓 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안 돼!"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아주 웃기고 있어. 자기는 맨날 하쿠노한테 말 끝마다 하트를 붙이고, 보는 사람 녹을 정도로 애교 피우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음마냥 차갑고. 그게 내숭이 아니면 뭐가 내숭이야?




"...다음 주에 해수욕장 근처에서 불꽃놀이 축제 열리는 거 알죠?"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그 축제를 말하는 건가? 나는 짧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BB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곤 의지깊은 눈동자로 말하였다.




"저하고 내기해요."

"내기? 무슨 내기?"

"그 불꽃놀이 축제에, 선배랑 누가 같이 갈지 내기해요. 만약에 제가 이기면, 당신은 이제 선배한테 떨어져 주세요."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해야 되는 건데?"

"대신, 제가 지면 선배한테서 떨어질게요."




BB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을 내걸며 내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가 하쿠노한테 떨어지면 나한테야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질 경우의 패널티가 너무 크다. 완전 모 아니면 도잖아? 항상 BB가 방해하는 바람에 하쿠노랑도 겨우 약속 잡아서 놀러가고 하는데. 만약 내기에서 진다면 하쿠노한테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다는 거잖아? 그건 싫다. 내가 내기 결과를 무시하고 다가가려고 해도, 이 소녀는 죽을 힘을 다해 날 방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질지도 모르는 경기는 거절하는 게 나을거다. 애초에 난 도박 같은 건 싫어하니까.

 



"...아니, 그건 불이익이 너무 커. 난 안해."

'흥, 저한테 선배를 빼앗길까봐 무서운가 보네요? 그렇게 자신이 없나요? 뭐 제가 당신부터 백배 천배 선배한테 어울리긴 하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야 당연하지. 누구하고 사귈지 결정하는건 하쿠노니까. 하쿠노의 선택을 내가 어떻게 막아? 네가 아무리 사람 골탕먹이고 협박하는 무서운 여자지만, 하쿠노는 그런 너라도 선택할지 모르잖아."

"...말이 꽤 험해지셨네요. 예전엔 으름장만 줘도 울먹거렸으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인데?"


BB를 향해 원망을 가득담은 눈초리를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해버렸다. 역시 이 소녀 아주 무서운 여자다.



"좋아요, 그럼 내기 결과내용을 바꾸죠. 진 사람이 선배하고 일주일동안 접촉하지 않는 거에요. 당신하고 선배는 같은 반이니까 인사까지. 제가 선배 옆에 꼭 달라 붙어도 지켜만 보는 거죠."

"아까부터 네가 이길것 처럼 얘기하네?"

"흥, 그야 이렇게 귀여운 후배를 버리고 당신같이 개성없는 동급생을 고를리 없잖아요?"

"허세부리긴. 너 그러면서 하쿠노한테 차이는 거 무섭지?"



그리고, 하쿠노가 진작에 그런 끼부림에 넘어가는 애라면 진작에 너한테 넘어갔을걸? BB를 향해 조롱을 던지면 그녀는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속이 약간 뚫리는 기분이였다.




"좋아, 그 조건으로 내기 받아들일게. 8월 1일은 일요일이니까, 토요일 방과후까지 하쿠노에게 선택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어때?"

"좋아요. 대신, 선배가 그 전에 누군가를 선택해도 승패는 뒤집을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흥! 반드시 이겨서 선배옆에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있는 당신 얼굴을 떼어버릴 거에요!"

"혀 내두룰 정도로 붙어있는 게 누군데? 연하인 거 어필하면서 알랑거리면서!"

"어머, 제가 선배보다 어린게 부러우신 가 봐요? 그러고보면 선배는 연하가 취향인 거 같던데."

"웃기네! 내가 물어봤는데 상관없다 그랬거든? 그리고 난 하쿠노랑 동급생인 게 아아주 좋아.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반이니까 매일 얼굴도 볼 수 있고."




만화 속에서 나올 것 마냥 그녀와 나는 이글거리는 불꽃을 등 뒤에 맨 체 서로를 못마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구겨진 이맛살이 그대로 주름으로 남을 것만 같다.



"토요일 날 당신에게 승리의 선언을 날릴테니까 각오하세요!"

"너야말로 졌다고 집에가서 일기쓰면서 울지나 마!"



그렇게 BB와 나의 목숨을 건 대결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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