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목 뒤를 넘는 카오루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만해도 시원스럽게 목을 내놓던 그 머리는 어느새 다시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초등학생 때도 저 머리모양이였지. 잘 모으면 묶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머리 묶어도 돼?"
슬며시 카오루의 뒤에서서 말을 걸면 그는 고개를 돌리며 "너 말이니?" 라고 물어보았다. 뭐야, 내가 내 머리를 묶는 데 그걸 너한테 왜 물어보냐? 어이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풀이자 그는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슨 네 노예야? 내 머리 묶는데도 너 한테 허락 받아야 되냐."
"그러게."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 말에 기운이 빠졌다. 카오루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도복을 곱게 접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고무줄을 꺼내 그의 머리를 묶기 시작했지만 카오루는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적어도 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오, 꽤 잘 어울리네!"
"그래?"
"내 작품 멋지다."
"내 얼굴은 네 작품이 아니지."
"나르시시스트."
"농담이야."
이쁘게 뻗친 머리가 꽁지를 내어 묶이니까 보기가 아주 좋았다. 깔끔하게 정돈된게 단정한 멋이 난다. 거 봐, 잘생긴 애들은 머리 묶어도 잘 어울린다니까. 뭐 그거같이. 그, 아티스트같잖아. 세련되어 보여.
토끼꼬리 처럼 쭉 삐져나온 꼬랑지를 내보이며 카오루는 그게 뭐냐며 작게 웃었다. 나는 그의 꽁지머리를 쓸어내리듯 만져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진짜 잘 어울린다."
"넌 머리묶은 남자는 별로 라고 하지 않았니?"
"그치 긴 머리는 좀...뭐 잘생기면 다 잘 어울리지만."
미소지으며 카오루의 머리카락을 사락 만지지만 그는 흥미없는 표정을 했다. 하긴 잘생긴 사람이 맨날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감흥은 없으려나. 다른 반의 종례가 끝난 듯 동아리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은 나기사에게 인사를 한다. 그 다음은 나. 평소처럼 그 인사를 돌려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목소리는 반응없이 나기사의 주변에서 꺄르륵 떨기 시작했다.
"나기사군 그 머리 뭐야? 어울린다!"
"나기사군이 한 거야?"
"아, 응. 조금."
"귀엽다~아니, 멋있으려나?"
역시 잘생긴 사람의 조그만한 변화에도 여자들은 재빨리 알아차리는 구나. 아니 미소년이니까 더 잘 알아차리는건가. 그렇겠지. 나는 그녀들의 나기사에 대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며 자리를 옮겼다. 사과머리로 했으면 분명 한대 맞았을거야. 눈에 선하다. 그 혼잣말이 저에게 들린 듯 나기사가 뒤에서 당연하지 라고 쏘아붙였다.
"나기사군은 멋있으니까 무슨 머리든 잘 어울려~"
부원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카오루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기묘하게 사람 피부보다 흰 머리카락에 점점 그녀의 손 끝이 닿을 듯 하다. 그러나 카오루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피했다.
살짝 몸을 뒤로 빼는 행동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역시 손을 뻗었던 당사자는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다. 나 또한 카오루가 부원의 손을 피한 것을 눈치챘으니까. 대화에 열이 오른 다른 부원만이 눈치 못채고 있었다. 나기사의 행동을 깨달은 우리 둘만이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찰나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간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손을 거절하면 어떡해! 하지만 나조차도 잘 모르는 누군가가 만진다면 싫어했을 거다. 그래도 넌 부장이잖아, 부원한테 그러면 어떡하니! 그렇지만 부장이라고 다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
나기사군, 머리모양 바꿀 생각 없어? 다른 부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당황해하던 아이를 바라보면,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 그러게. 이제 3학년이니까 머리 검사도 안하고...머리 길러보는 것도 어때?"
"응응, 아니면 펌하는 것도 멋있을 거 같아!"
"그, 그거 좋다."
"거봐 역시, 실명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대걸레를 두어개 갖고 오면서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곤 각각 부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다행이다. 어찌저찌 카오루의 행동은 넘어간 것 같다. 근데 왜 당사자도 아닌 내가 신경을 써야하는 거야? 힐끔 쳐다본 카오루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잠깐 나 고문 선생님께 갔다 올게."
"응, 나기사군 잘 갔다와."
동아리실을 떠나는 카오루를 부원들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였다. 고문선생님이 나기사를 부를 일이 있었나? 없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설령 카오루가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동아리실에 있는 건 거북할테니까. 아무리 뻔뻔함에 극치인 나기사 카오루라고 해도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할 것이다.
"실명이는 말야."
"어, 어?"
"좋겠다. 나기사군이랑 친해서."
약간 부러움이 섞인 앙증맞은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다행히 별 질투는 없어보였다.
"그런가...? 너도 그 농구부 에이스랑 친하잖아. 걔 잘생기고 인기 많던데."
나는 다른말로 그 부러움에 대답한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 부끄러운듯 한명이 가볍게 나를 치며 웃었다. 원래 이런식으로 이 관계에 부러움을 나타나면 나는 상대방의 인간관계로 맞받아치곤 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회피는 대화주제를 손쉽게 바꾸고 관심도 돌려냈다. 솔직히 나랑 나기사가 남들한테 부러움을 살정도로 애틋하거나 뭐 그런건 아닌데. 무신경 하면 더 했지. 학교에서도 서로 말은 잘 안하는데, 나기사가 여학생들에게 눈길을 받으면 어느새 우리 관계는 소문으로 퍼지고 나는 좋건싫건 한번쯤 입에 오르게 되었다. 연예인하고 친분있는 사람은 이런 느낌일려나.
"실명아, 이쪽은 우리가 닦을게."
"그래, 그럼 난 탈의실 할게."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 대걸레를 물통에 넣고 있으면, 귓가를 소녀들의 말소리가 톡톡 건들였다.
아, 그러고보니 말야. 환기를 시키려 반쯤 열어둔 여자 탈의실 문틈으로 그것이 들어온다.
"나기사군 무슨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도 있던데."
"아 진짜? 있을법하네. 모든지 다 가진 사람인가. 멋지다."
"어어 맞아. 근데 좀 무섭지 않아? 오히려 그렇게 완벽하니까 더 큰 결점이 있을거 같아."
"뭐야, 드라마냐? 근데 그것도 상상이 가서 무섭네."
"아까도 그랬고..."
"아까? 뭐?"
"내가 만지려니까 피했어."
아냐, 그건 너가 잘못한 거 잖아. 사람 무안준 건 맞긴 하지만! 용기있게 그녀에게 말을 꺼내진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그 말을 부정하였다.
"그건 네가 잘못했네. 사람 함부로 만지면 기분 나쁘지."
"그래도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갑자기 그렇게 거부하니까 놀랐단 말야. 평소엔 상냥한데."
"흠, 하긴 좀 놀라긴 하겠다. 그러고 보니 나기사군 상냥하긴 한데 묘하게 사람들하고 안 어울리는 거 같아."
"그지? 가만보면 우리반에서도 단짝친구 같은 거도 없고."
방금전 까지만해도 나기사에 대해 연심을 피워내었던 여자애들이 어느새 어두운 대화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쟤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그나저나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은 또 뭐야. 남의 가정재력은 어떻게 알았대?
"나기사군, 멋있는 데 좀 무서운 거 같아."
"알거 같아. 좀...뭐랄까 나도 나기사군 개인적인 얘기 들은 적 없어."
"우린 같은 동아리 부원이니까 그나마 대화나눈 거야."
"나누는게 이 정도야? 진짜 모르겠네."
"혹시 평소에 상냥한 거도 다 연기 아닐까? 사실 막..."
"얘들아, 청소 다 했어?"
부원들에게 다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표정은 잘 유지하고 있나? 목소리도 감추려곤 했지만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올라간 입술이 딱딱하다. 아이들은 놀란 듯 나를 보며 커다랗게 뜬 눈을 내보였다. 그래 얘들아, 내가 있었단다.
"다, 다 했어!"
"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뒷정리 내가 할게. 먼저가도 돼."
"으, 응...저기..."
"어?"
"아, 아냐. 고마워. 우리 먼저 갈게."
재빠르게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곤 동아리실을 떠났다. 역시 누군가의 뒷 얘기를 듣는 다는 건 불편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카오루라니, 최악이다. 카오루도 저런 소릴 많이 들었을까?
물론 나도 잘나가는 카오루와 친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른 적은 있지만, 카오루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울면서 카오루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카오루도 이런 기분이였나.
나기사도 꽤 고생 하겠구만. 아무짓도 안했는데. 없는 꼬리를 남들이 만들고 있어. 나중엔 나기사군은 사실, 이러면서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는 게 아닐까.
좁은 시골인 만큼 소문은 허항되고 빨리 퍼진다. 우리학교가 심한편이긴 하지만 걔도 행동 하나에 입방아 상대가 되니 피곤하겠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스스로만 신경쓰느라 그는 맘편히 생활한다고 오해해버렸다. 실은 진짜 그런진 모르지. 카오루는 남 신경 안쓰니까. 그래도 미안한 감이 다소 들었다. 한동안은 말 대답하지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들을까?
그래도 카오루의 얼굴은 보면 결국 화를 내고만다. 얘가 만약 차분한 여성이 이상형이면 난 당장 대상 밖이 되버리고 말거야. 그치만 맨날 먼저 시비거는 건 다름아닌 나기사군인걸. 언제 머리끈을 풀었는지 본연의 머리모양을 한 카오루가 내게 다가왔다. 자, 여기. 그가 주먹쥔 손으로 내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놓는다. 머리끈이였다.
"머리 왜 풀었어..."
"아니...왜 그런걸로 화내니."
"화내는 건 아니고 그냥 아까워서."
"그런 머리 난 별로 안 좋아하거든."
"고문 선생님 하고 무슨 얘기 했어?"
"설마 그 말을 믿었니?"
역시 도망간거구나. 알면서도 속아준거야! 카오루에게 심통을 부리면 그가 가볍게 웃으며 거짓말, 이라고 말했다.
"오늘 신지군하고 같이 돌아가?"
"네가 신지군이라고 부르지 말아줄래?"
"하여간 저 독점욕 진짜."
오늘은 같이 안가. 나기사가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솔직하게 대답할 것을 굳이 남 신경을 긁어야 하나?
"아 그래?"
"그건 왜 묻니?"
"돌아가는 날이면 오늘은 혼자 정리할려고 그랬지."
"뭐?"
칼날같이 카오루가 내 말에 대답한다. 내 입에서 나올거라고 생각 못했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니 솔직히 나도 그런일 없을거라곤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도 그 반응은 좀 그렇지 않나. 내가 눈살을 작게 구겼지만 그는 반응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내 행실 탓이긴 한데. 반응이 너무하다. 남의 호감을 마치 신기루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다니. 그나저나 내가 나기사한테 그렇게 인색했나? 얘가 놀랄만큼. 나름 잘해준 거 같은 데 그것도 아니였나.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어느샌가 다시 나를 보고있던 그가 말했다.
"고맙기는 하지만 실명이 혼자 맡기기엔 걱정돼."
"아, 진짜."
역시 사람은 친절도 사람을 보고가며 베풀어야 한다. 그 증거로 나기사 카오루가 도와준다는 내 말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제부턴 상냥하게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만 도와줄거야. 두번 다시 얘한텐 도움따위 주나봐라.
"됐다 됐어. 이렇게 사람 무시하는 거면 안 그러는 건데. 괜히 말 꺼냈어!"
"글쎄, 언젠간 실명이가 필요할지도 모르잖니."
"때 지났어 이미. 친구 좋은게 뭐냐고 도와줄려는데..."
"난 친구라고 생각한적 없는데."
뭐.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나기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키가 커서 내려다 보는거겠다만 저런 말을 들으면 그 행동에도 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상처받고 문제가 아니라 매정한 그 행동에 화가 난다. 기껏 좋은뜻 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까탈스럽지. 눈썹을 길게 떨어트리며 나기사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이 마주치면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인색 그 자체야.
"나 간다."
"같이 가자."
"싫어, 따라오지 마."
"같은 아파트면서, 무리야 그건."
"......몰라. 방금까지 얼음 쏘는 듯 말한 주제에. 같이가자고 하는건 도대체 무슨 심보래?"
"내가? 글쎄, 실명이 너 혼자 착각한 거 아니니?"
"퍽이나!"
이를 들어낼 듯 카오루의 말에 신경질을 냈다. 상냥한 나기사군은 무슨. 참말로 상냥하시면 저런 말을 면전에다 뱉어내실까!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긴 다리를 쭉 뻗으며 다가오는 카오루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뭐야 황새하고 법새도 아니고. 어느샌가 내 옆에 선 카오루가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실명아." 듣기 귀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애 같긴"
"...뭐야, 나 아니라도 다른사람도 그런 말 들으면"
"가자. 그리고, 다리 아플테니까 그렇게 걷지마. 속도 맞출테니까."
"저게 뭔 생색이야?"
"가방 이리 줘."
나기사는 내게서 가방을 집어 제가 들기 시작했다. 말 반마디를 꺼낸 순간이였다. 뭐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지만 평소와 다르지않은 얼굴로 그는 대응했다. "안 걷니?" 능구렁이처럼 행동하는 그 모양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분위기를 따라갔다. 여기서 그를 무시한다면 정말 카오루가 말한대로 유치한 어린아이가 될 것 같았다.
아무말 없이 카오루와 함께 걸어가면, 남의 속도 모른 체 천연덕 스럽게 그가 이야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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