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 내가 카오루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은 아니였다. 평소처럼 만나면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며평소와 다름 없이 그를 대하였다. 하지만 꺼림직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카오루와 평범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이따금씩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카오루를 보내고 난 뒤, 혼자남은 방에서 나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에서 카오루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봤다.
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난 죽어도 괜찮아.

떠올릴 수록 카오루의 말은 나를 옭아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범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쉽게 죽어도 좋다는 말을 떠올리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 나를 짓누른 것은 카오루의 알 수 없는 말 보다 그에게 저도 모르게 배신감이 든 자신이였다.

찰나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배신감을 느낀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을 씹어 넘기려고 해도, 마치 알사탕이 목에 걸리는 것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죽어도 된다니, 그 애 만을 위해 살아도 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카오루와 내가 보내왔던 추억은 그의 아름다운 사랑에 한번에 꺾일 만큼 연약한 것이였을까? 그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을 다짐할 때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걸까?
나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친구들도.
그는 떠올리지 않았던 걸까.

질투를 느낀 건 아니였다. 카오루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있는 사람에 대해서. 왜냐하면 난 그 아이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날 위해서 죽겠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저 나기사 카오루의 결정이 너무 미웠다. 모든 것을 두고 사랑을 위해서 떠난다니.
그게 뭐야.

카오루가 어째서 동화속에서 나올 것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걱정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였다.
무서움, 꺼림직함. 도저히 사람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을 꺼내는 그가 기분나빴다.
물론 다들 사랑에 빠지면, 널 위해서 죽을 수 있어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마치 자신의 존재자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것 마냥 말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기분 나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거북해 했다.

그런 마음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한낱 호감에 도취되어 있던 거고, 그 감정을 카오루에게 강요한 건 아닐까.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만으로 머릿속이 가득찬 자신이 너무 싫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정말 카오루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을까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움을 느낀다니, 그 헌신적인 사랑에 걱정이 아닌 배신감을 느낀다니.
어느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런 감정을 가지겠는가.


하루종일, 아니 그 일 직후 계속 나를 덮치는 그 생각을 마치 나를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사랑이냐고.
그리고 제대로 답할 수도 없었다.


"실명아."
"왜?"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수업중에 왜이렇게 눈쌀을 찌푸려? 무슨 일 있었어?"

선생님이 네가 자꾸 자기 노려본다고 무섭데. 친구가 우스운 농담을 던지며 넌지시 내게 물어봤다. 남의 방을 마치 자기 집 거실마냥 퍼질러져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카오루 앞에서는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그와 눈이 안 마주치게 되면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려지는 구나.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친구는 말을 가로채 버렸다.

"너 고민있지. 나기사군?"
"아 무슨 맨날 걔 얘기야, 그런거 아,"
"나기사군이랑 뭔 일 있었어? 요즘 순탄한 거 같은데...?"
"나기사 카오루 얘기 아니라고."
"아니든 어쨋든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하네."

친구는 입술을 슬쩍 올리며 말했다. 꼭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낸 문제를 맞춘 게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남자 아이 같았다.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귀신같이 그런 건 잘 맞추네..."
"니가 고민이 없었으면 바로 고민 없다고 했겠지. 그래서 뭔데?"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하는 친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마쉬고는 나와 카오루 사이에 있었던 일을 A와 B라고 칭하며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히익, 나기사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왜 거기서 나기사 카오루가 나오는 건데?!"
"아무리봐도 A랑 B는 너랑 나기사군 얘기잖아...차라리 딴 친구 이름을 거론해라."

하긴 나 같았어도, 친구와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 라는 건 대부분 자기 이야기 라는 거니까. 그게 설령 A나 B라는 알파벳으로 바뀌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요즘 내 고민은 카오루에 대한 것들이였으니까.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인 거지.

"음...목숨을 다 바쳐 사랑한다라...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해주면 기쁘긴 하지만, 진짜로 그러면 끔찍할 거 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슬픈데, 나 때문에 죽는다니. 나 같으면 살기 싫겠다."
"응...나도 그래..."
"그리고 그거 좀 자기만족 아니야? 남겨진 사람은 어쩌려구. 막말로 죽으면 자기는 끝이지,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니잖아."
"야, 그건 말이 너무 심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난 좀 ...아닌 거 같아."

친구는 고개를 가로 지으며 내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도 친구와 비슷했다. 친구처럼 그건 사랑이 아닌 거 같아,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랑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답해야 할 말은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겠지.

"무서웠어."
"무서웠다고?"
"그냥...맨날 옆에서 봤던 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고, 왠지 꺼림직해서 무서웠어......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싫고...제일 무서운 건 내가 걔한테 배신감을 느꼈어."
"배신감?"
"......나나 가족들 두고 어쩜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할 수 있는거냐고...배신감이 들었어."

친구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다물곤 입속으로 생각하는 소리를 내었다. "음......" 점점 길어지는 소리에 왠지 모르게 초조함이 들었다.

"왜, 왜?"
"그래서 네 고민이 뭔데?"
"뭐?"
"나기사군한테 배신감이 들든 뭐든, 너가 계속 골치아파 했던 게 뭔데?"
"그, 그게......"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서운 말이였다. 만약에 꺼냈을 때, 친구가 단호하게 내 고민에 부정을 던지면 더 이상 카오루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덕적으로 안되는 짓을 해버린 스스로와 대면할 것 같았다.

"답답하게 하지말고 빨리 말해봐. 말해야 알지."
"그, 그게.........카오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진지하게 꺼낸 얘기에 너무 철 없게 그런 생각을 한게 믿기지가 않았어...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내가 진짜 카오루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꺼려하다니. 그게 진짜 애정일까?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가벼운 호감이 아닐까. 나는 카오루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친구는 그야 당연히 그딴 소리를 내뱉는 데! 라며 소리를 쳤지만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네 말은 뭔 진 잘 알겠는데...음, 일단 나기사군이 사람 식겁하게 할 만한 말을 한 건 맞는 거 같아. 나도 뭐지? 싶었다니까."
"응..."
"그러니까 너 말은 나기사군의 말에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잊어버릴 정도로 겁을 먹었다는 거지? 그리고 고작 그런걸로 사랑이 식은 거 같아서 그런 자신이 싫은 거고."
"아니, 식은 건 아니고..."
"식을만 하지. 보통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나기사군 좀...어디 아픈거 아니야? 너무 자기애가 없잖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저도 모르게 친구에게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욱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 친구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미안하다 말하면, 친구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이 식은 건 아닌 거 같네."
"미안하다니까..."
"어쨋든 순간 사랑이 식을 만큼 걔가 기분 나빴다는 거 맞잖아. 친한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 무섭긴 하지. 간단하게 생각해, 연인사이에서도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 애정이 식어서 헤어지는 사람도 있잖아.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한 순간에 그러는 경우가 있는 거라구. 행동 하나에도 그러는 데 하물며 가치관이 다르면...그럴 만 하지."
"가치관?"
"넌 나기사군 좋아할 때 그렇게 목 맬 수 있어? 아님 나기사군이 너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래?"
"...아니."

카오루를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그가 나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있어주길 바라진 않는다. 나 또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리고 카오루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그냥 가치관의 문제인 걸까?

"배신감이야...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 데 음...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랑이란게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신뢰가 바탕이잖아. 또 바치는 게 아니라 주고 받는 거고. 그 신뢰를 주고 받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런데 네 입장에선 나기사군이 그 신뢰를 깨게 된 셈이고. 음, 이렇게 생각하니 니가 조금 이해 된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뭐 어때, 무서워 하거든 배신감을 느끼든. 그리고 애정이 식어도 뭐 어때. 거기서 끝날 인연이면 인연인 거지.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잖아. 나기사군한테 니 인생 평생 바칠 거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정을 변호해주는 저 말이 맞다고 믿고 싶었다. 그치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맹목적으로 변하는데, 나는 카오루에게 그 맹목적인 모습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실명아."
"어? 엄마?"
"실명이 친구 아직 있니? 카오루군이 왔는데..."

과자를 깨작이던 나는 문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 먹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카오루가 우리집에 오는 건 볼 일이 있어서, 거실까지 오는 게 전부였는데. 왜 내 방까지 직접 온 거지? 초코가 묻힌 과자를 씹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입안에는 쓴맛이 가득했다.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뭐 일단...나기사군이랑 얘기해봐. 내 생각엔 나기사군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 알아야 니가 걜 좀 이해할 거 같아."

친구는 방문을 열더니, 카오루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카오루를 문 앞에 내버려둔 엄마는 친구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고. 나기사 카오루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려고 왔어. 들어가도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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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그 인형들."
"친구한테 받았어."

인형이 내게 안겨있는지 내가 안고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솜뭉치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카오루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창황한 얼굴은 꽤나 기묘했다. 동아리 대회 후, 카오루는 그 동안 미루두었던 공부를 하는 지 학교 쉬는 시간에도 참고서만 봤으니까.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바닥에 뒹구는 인형을 같은 종끼리 모아 정리하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면 어느새 놀란가슴이 진정되었는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는 또르르 내 손을 따르고 있었다. 무릎을 꿇어 그가 토끼인형을 들어올렸다. 축 쳐진 귀를 만지작 거리던 카오루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이......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대회같은 걸 했었지."
"어, 나기사가 그걸 알아?"
"신지군한테 들은거야, 오늘 친구들하고 같이 간다고 했었는데...흐음, 실명이도 참가했니?"
"나 말고 친구가. 걔가 우승했어. 자긴 인형 싫다고 나한테 줬는데...너무 많네 이거...나기사, 주변에 여자애들 많아?"
"그건 왜? 글쎄, 별로."
"나눠줄려고 그랬지...그래? 의외네. 잘생겼으니까 당연히 많을 줄 알았는데......아, 이건 내꺼."

토끼와 고양이 밑에 깔려있는 부엉이 인형을 꺼내 품에 꼭 안았다. 이건 뽑느라 무진장 고생했으니까 상관없겠지. 친구에게 이 인형을 뽑아 달라고 떼를 쓰며 돈을 갖다바친게 떠오른다. 이래서 인형뽑기는 하는 게 아닌데. 초등학교때도 일주일 용돈을 인형뽑기에 하루만에 써버려서 엄청 혼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땐 진짜 아빠한테 죽는 줄 알았지. 지금은 다행히 친구가 한번에 뽑아서 본전 뽑았지만.

"부원 애들한테 나눠줄까? 음...그래도 남겠네."
"살명아, 남자애들한테도 줄 생각이야?"
"귀여운 걸 좋아하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나기사군, 남녀차별하면 안 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음...근데 여자애들 중에도 별로 안 좋아할 애들 있겠지? 어림잡아 반 애들하고 동아리 애들 세어보면......여섯? 일곱? 너무 적은데..."
"친구가 너무 적네, 실명이는."
"니가 인기가 넘쳐 흐르는 거겠지!"


너 보단 친구 많거든! 쉬는시간에도 신지군이 아니면 별로 남들과 떠들지 않는 카오루를 떠올렸지만, 이내 그말은 목을 넘기지 못했다. 나기사 카오루가 친구를 사귀지 않는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였다.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 라고 저번에 내게 진지하게 말했으니까. 학교생활도 잘하고, 신지군하고도 잘 지내는 걸 보면 그 말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묘하게 사람에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면 납득이 가긴했다. 예전부터 철벽치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때 카오루는 '내가 그를 어떻게 행복으로 끌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때 그 에게 대화를 해보라고 대답했지. 카오루는 그 애랑 제대로 얘기를 나눴을 까?
그리고 그 애는 도대체 누구일까? 말 하는 걸 보면 신지군인 거 같긴 하지만, 신지군이랑 카오루는 지금도 행복해 보인다. 그럼 신지군은 아닌 거 같고. 어떤 사람이지, 카오루랑 무슨 사이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카오루에게 무참히 묻힌 고백아닌 고백의 충격에 그제서야 카오루와 나눴던 그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그 사람이 카오루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실명? 무슨 생각해?" 

잠자코 인형을 든 체로 바닥을 쳐다보는 것이 별 일인지 무슨일이냐며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든 듯 인형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물어볼까 고민하던 때에 말을 붙이다니.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저기, 있잖아."
"왜 그러니? 답지 않게 운을 띄고."
"나는 뭐 진지하면 안 돼?"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뗀 내게 카오루는 시건방진 소리를 내던졌다. 약간의 울컥함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진정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질까봐 말을 서슴는 나를 다독이는 것이겠지.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놀리곤 하지만, 이 정도의 상냥함은 있다.

"나랑 그 때 했던 얘기 기억나?"
".........어떤 얘기?"
"그게......"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무겁게 입술을 움직인 카오루가 내게 물었다. 카오루에게 그와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었을 때의 일을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K고등학교에 가려고 한 이유. 나기사 카오루가 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했던 말.
머릿속에서 그 일이 지나치자 마자, 나는 카오루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 녀석이 모르는 척 넘어가고 하는 게 맞다면, 적어도 말끔하게 그를 잊을 수 있게 거절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거기다 아주 만약의, 기적이 일어나서, 카오루가 자기도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감정을 직접 말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카오루에게 그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로,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지만 지금 카오루에게 물어야 할 말은 따로 있을 거다. 카오루도 사람이니까, 이따금씩 고민을 끌어 안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때 서글퍼 보였던 표정이 카오루가 그 사람에 대해 정말로 애를 태우고 있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친구로써,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사람으로써 그가 그 고민을 잘 풀어나가고 있는 지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말이야, 나 걸레물 뒤집어쓰고 했을 때."
"아...그 때 말이니?"
"너 그 때 나한테 같이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얘기 해봤어?"
"응. 해봤어."
"진짜? 그래서 그 애 뭐라고 했어?"

카오루는 생각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안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나 싶어 그러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행복하다고...아니, 행복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불행한 거 같진 않다고 했어."
"그럼 됐지 뭐. 사는 게 우울하지 않으면 된 거아니야?"
"...실명.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원래 행복이란 게 그런 거 잖아.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거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한 거고.
어차피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파지는 거니까...제일 좋은 게 행복이고 뭐고 생각없이 그냥 잘 사는 거지.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거 보단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카오루는 왜 그,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사람을 마치 불행하다는 것 마냥 말하는 걸까? 신지군은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았는데. 신지군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보통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니까. 나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돼, 이렇게 말하는 건 연인이 아닌 이상 마치 불행한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같다.

"카오루...있잖아, 너 그 애랑 사귀는 사이야?"
"...실명, 아무리 네가 사춘기 소녀라고 하지만 너무 연애론적인 사고방식 아니니?"
"나도 사랑이 굳이 연애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그냥 단지, 네가 너무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서. 아니면 너, 그 애를 불행하다고 생각해?"
"불행...? 그렇진 않아. 그저 단지...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사람의 마음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던 카오루는 그 때와 똑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카오루의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였다. 자기 존재가 사라져도 상관 없다는 것 마냥, 카오루는 본심을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카오루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왜 질투를 하지 않는 지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질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카오루는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해 하길 바라는 것 뿐이다. 나 처럼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지만 연애감정은 아니다. 카오루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미래에 자기는 없다. 없어도 상관이 없다. 나기사 카오루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가? 뭐지 이 아가페적인 사랑은. 사랑에 굶주린 애정결핍자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들으면 소름끼쳐할 감정이다. 받지 않고 카오루의 마음을 두 귀로 듣고 있는 나도 그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카오루는 그 앨 사랑하지만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럼 카오루는 그 애가 혼자서만 행복해져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
"너가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아?"
"난 죽어도 괜찮아."

설사 이 몸이 부숴진다고 해도, 그 애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야. 카오루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웃는 그 표정이, 더욱이 황홀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카오루가 왠지 모르게 무서워 졌다. 자길 내다버리고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 붓는 건, 이야기 속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건 이야기 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주 희생의 아이콘으로 나오곤 하지만, 카오루의 희생은 무언가 달랐다. 부모의 사랑이라기 보단, 오히려 신 같았다. 흔히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말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은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고 만다. 너무나도 다르니까. 신의 사랑은 인간을 독에 빠트리고 만다. 인간과 신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오루와 시선이 맞으면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 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심...이야?"
"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 정말이야."

그게 뭐야. 보통 사람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다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는 미래를 생각하잖아?
나는 어릴적 부터 지내왔던 친구에게 뭔지모를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런 거 단순히 자기만족이잖아? 라고 몰아세우고 싶었고, 그의 사랑이 경이로운 탓에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아니,  카오루와 있는 이 상황이 무서워 졌다. 

"...실명? 왜 그러니?"
"어? 아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프니?"
"아니야, 안 아파. 괜찮아."

방금전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카오루가,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 아이와 지낸 세월을 오래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의 이런면은 처음 보는 것이였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오랜 지인에게 이런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일을 겪곤 하지만. 그건 보통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겠지. 감정적으로 그 면을 공감한다는 이해가 아니라,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이해의 것일 거다. 하지만 카오루의 행동은 내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오루는 절대 아가페적인 자신의 사랑에 도취된 것도 아니였고, 그걸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였다. 그저 자기 안에 그런 사랑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바치기만 하는 사랑. 사람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나기사 카오루가 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실명? 얼굴이 새하얘. 속 안 좋은 거 아니니?"
"괜찮,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다독이는 듯 카오루에게 연신 탈이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듯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갖다대곤 안색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열이없는 손은,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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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만 있으면 2학년애들 수학여행가겠네...부럽다."
"우리도 작년에 갔잖아."
"학교 안가서 좋겠다~..." 


이따금씩 음악수업 때문에 밑층으로 내려가면 2학년 소식이 들려온다. 요즘은 수학여행이 얼마남지 않아 복도에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그래봤자 교토에 가는거지만 여행이란 왠지 모르게 사람을 설레게 한다. 촌스럽게 장소가 그 모양이냐며 입술을 삐죽이던 아이들도 버스에 타면 웃음꽃이 활짝핀다. 나도 그랬었고. 갔다오면 평범한 여행이고 그닥 추억거리도 없지만 여행 순간에는 잘 즐기고 있단말이야, 참.

"여행 갔다오면 축제 준비 때문에 시끌벅적 하겠네."
"수험생의 좋은 점은 축제에 참가 안해도 된다는 거지. 얼마나 안 귀찮고 좋아?"
"너 그러면서 찻집했을 때 엄청 열심히 했잖아."
"그야...농땡이 피우면 안되니까.'

아무리 내가 나태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남한테 욕먹으면서 까지 게으름을 부릴 생각은 없다고. 설득력 없는 내 단언에 친구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어련하시겠다고 말했다. 넌 다행인게 배짱이여도 새가슴이라서 남한테 민폐는 못 끼치지. 네 보기좋은 장점은 어쩔 수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사람을 칭찬하는 건지 헐뜯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곰곰히 듣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결국 제대로 반항은 못하는 소심한 게으름뱅이라는 거 아냐.

"칭찬할 건지 욕할 건지 한가지만 하지."
"애매한 칭찬이야. 설마 욕을 하겠어?"
"거하게 욕 한 사발 들이킨거 같은데."
"어? 저기 나기사군이다."

말 돌리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친구에게 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도 친구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복도에서 이카리 신지군과 즐겁게 얘길 나누고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이야, 나기사군 저런표정도 짓는구나."
"그러게."
"우리 실명이는 평생 못 볼 얼굴이지."
"내 팔자가 그렇지. 야, 매점이나 가자."
"뭐야, 너 연적이 저러고 있는거 가만 냅둘 셈이니?"
"이카리군이랑 나랑 싸워도 이백퍼센트 내가 진다."
"패기없긴...얘, 가서 본처 티 좀 내봐. 너 소꿉친구잖아."
"본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그렇게 나기사군 앞에서 끙끙 앓아봤자 누가 알아줘. 친구는 가만히 있는 나를 나무라며 한 소리 내뱉었다. 누가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거야. 내가 요즘 얼마나 카오루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친구의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 무심한 소녀에게 뜨거운 손바닥을 날렸다. 내 불타는 열정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고 친구는 맞은 등이 아픈 듯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실명, 뭐하니?"
"엇. 카오루...아, 안녕."
"친구를 때리다니, 실명이는 역시 폭력적이구나."
"역시라니, 보기보다겠지."
"내가봐도 너 맨날 나만 때리는거 같아. 나기사군 말이 맞아."
"방금까지 네가 내 욕했잖아."
"실명, 게임 좀 줄이렴. 매일 몬스터 헌터같은거만 하니까 그런거야."
"왜 게임 탓인데!"
"신지군, 이 쪽은 내 소꿉친구야."
"아, 안녕하세요."

약간 말을 더듬으며 그 신지군이 내게 수줍게 인사하였다. 이카리 신지라고 합니다. 앳 된 그 목소리가 귀여운 소년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먹힐 거 같았다. 카오루는 이런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는 구나. 약간 어색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맞인사 하였다. 깍듯한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이카리군은 멋쩍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얘기 하고 있었니?"
"그냥 수학여행이랑 축제. 아 이카리군은 2학년이라 둘다 참가하지? 축제 때 뭐해?"
"예? 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요. 수학여행 끝나고 바로 정할거 같아요."
"작년에 우리반이 일찍 정한거 뿐이야. 원랜 다 저 맘때쯤 정할 걸."

아 그렇구나. 친구의 말을 들으며 작년의 축제기간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우리반만 여행 전부터 테마를 정했구나. 딱히 반에 학생회 임원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아이들도 그닥 의욕을 보이지 않아서 계획을 빨리 짜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까딱하면 암막 뺏기는 거 부터 테마까지 다른 반이 다 차지할 지도 모르고. 작년에 반장이 얼마나 고생했었을 지를 떠올리자, 아까까지 귀찮다고 내뱉었던 말을 주워담고 싶어졌다.

"그래도 훗카이도로 수학여행 가지? 부럽다. 나도 게먹고 싶어."
"아, 이번엔 게 요리 코스를 안 들어가서 그건 못 먹는 거 같아요."
"아냐, 이카리군. 우리 때도 그건 없었어."
"맞아. 그 때 같은 방에 있었던 애들끼리 뭉쳐서 몰래 나가서 산 다음에 택배 부친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카오루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한심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카오루가 모르는 게 있다면, 수학여행을 마치고 온 다음 날 그를 집으로 초대해 내가 사온 게를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너 분명히 맛있다고 했거든. 모르고 먹었을 테지만.

"신지군, 가자."
"어? 으, 응. 저, 안녕히 계세요."

카오루는 이내 이카리군의 어깨를 끌어안곤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태와 일탈의 대표인 내가 성실하고 순수한 이카리군을 물들일 까봐 걱정하는 듯 보였다. 다소 과장된 감이 있지만 날 쳐다보는 눈이 더 이상 신지군에게 그런 얘긴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내가 한심하다는 것도 있고. 이 인간, 이카리군이 사춘기의 일탈을 저지르면 집에가서 혼자 울지나 모르겠네. 아니, 신지군에게 푹 빠져 있으니까 그러고도 남을 거다.

그리고 모든 수업이 끝난 방과후. 하교길에 오르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자신또한 볼일을 마친 듯 집에 가려는 카오루와 마주쳤다. 같이 집에 가자며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내가 신발을 다 신을 때 까지 카오루는 기다려 주었다. 애초에 옆집이니까 가는 길도 똑같아서, 결국 같이 돌아가는 꼴이 되지만. 가방을 챙겨 걸어가는 내 옆에 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보폭을 맞춰 걸었다.


"카오루 너 정말 볼 때마다 팔불출인거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니?"
"신지군 데리고 피신하는 거 말야. 누가 보면 내가 양아친 줄 알거 같애."
"양아치...는 아니더라도, 신지군에게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칠 거같진 않아, 실명이는"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눈에 힘을 주어 그에게 뜻을 되물었지만 새침한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가 확실히 게으르고 노는 걸 좋아해도 지탄받을 만큼 불 성실한 건 아닌데. 아니 것보다 카오루가 지나치게 완벽한 거 아닐까. 보통 내가 정상이잖아.

"아, 그러고보니 아까 신지군이. 카오루군한테 얘기 들었어요, 라고 말했잖아."
"응?"
"무슨 얘기 한거야?"
".........별로, 아무 얘기 안했어."
"안했으면 그런말은 보통 안하지 않나?"

어째서인지 카오루는 정적을 띄고는 짧은 답변은 하였다. 지레 찔리는 눈치인가 싶지만, 그랬다간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며 놀려대겠지. 저건 잘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아니란 뜻이다.

"카오루가 먼저 내 얘길 꺼냈을 거 같진 않고."
"...토우지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널 알고 있는 지 아이들 앞에서 너에 대해서 얘기하길래 잠깐 응해준 거 뿐이야."

흐음,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 말을 아낀게 맞구나. 예전부터 카오루와 오랜 인연으로 이래저래 주변에 관심을 받던지라 서로 알고 지낸 사이를 밝히는 건 사실 꺼름직한 일이였다. 심하게 눈길을 받은 건 아니지만 적잖이 성격 안 좋은 여자아이들에게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고. 대범치 못한 성격에 홀로 그걸 신경 쓰고 있으면 귀신같이 카오루는 그걸 알아내고는 무슨 수를 썼는 진 몰라도 소문을 잠재웠다. 생각해보니 얘 정치가가 되도 잘 할거 같은데. 뭐, 예전에 내가 좀 학을 떼다 보니 카오루도 가능하면 나에 대해서 얘기를 꺼낸 거 같지 않다. 토우지라는 애는 귀가 참 밝군. 그나저나 그럼 신지군한테도 내 얘기를 안 꺼낸 건가. 하기사 그 애한테 다짜고짜 내 얘길 꺼낼 성격은 아니지만.


"그럼 그 때 신지군도 날 알게 된거야?"
"응, 그렇지."
"그렇구나. 그래서, 그 때 뭐라고 했는데?"
"........."
"응?"
"실명...끈질기네. 아무 소리 안했다니까."
"이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무말도 안했지만, 지금부터 해주길 바란다면 신지군에게 이것저것 말해줄게. 확실히 신지군이라면 여러가지 말할 맘은 드네."
"앗, 잠깐만. 어차피 이상한 소리 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저 실명의 행동을 말하는 거 뿐이야."
"악의 가득찬 장난이랑 몰아세우는 게 무슨 본연의 행동이냐!"


성을 내며 그에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건 시침을 뚝 대답 뿐이였다. "내가 언제 그랬니?" 진짜 정치하면 성공할 놈이라니까, 얘. 어쩜 연기까지 이렇게 잘할 수가 있는 건지. 새초롬, 힐끗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내가 꽤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아무말도 안 해."
"그 신지군이 말해달라고 하면 당장 말할거면서, 무슨."
"신지군이라도 말 안해."
"...진짜?"
"응."


솔직히 신지군이라면 내 얘길 해도 괜찮은데. 남 입에서 오르락 거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 애라면 날 유흥거리로 씹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 질리게 군 것 가지고 또 몰아세우는 카오루의 꼴을 보니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하지만 카오루의 대답을 들으니 아까까지 오르던 화가 가라 앉았다. 조금 감동도 받고. 카오루 성격상 내 얘길 안 꺼내는 배려심이 있는 건 알지만 자기가 죽고 못사는 신지 군 앞에서도 날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였다. 순간이나마 신지군보다 우위에 선 기분이 든 것이 기쁘다.


"...왜 이럴 때만 배려심이 넘치고 그런대."
"별로 실명을 위한 일이 아닌걸?"
"...어, 뭐?"

따뜻한 감동을 느끼고 있던 와중 카오루가 갑작스럽게 찬 물을 끼얹었다. 물론 카오루가 진짜로 날 우선순위에 둘거라곤 생각 안했지만 사람이 좀 착각을 할 시간은 주면 안되겠냐.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던 화가 다시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퉁명스런 말투로 그에게 그럼 뭐냐고 물으면 소년이 대답한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
"말하자면?"
"......솔직히 난 신지군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 질투를 느끼지만...그래도 왠지 신지군에게 그런 얘길 듣고 싶진 않아서."
"그런...얘기?"
"실명이 말야."


그런 얘길 듣고싶지 않다니,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신지군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듣고 싶지 않다는 건가. 신지군이랑 있는 동안은 그가 자길 봐주길 바래서? 엄청난 팔불출이다.이 정도면 꽤나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십 면년지기 친구에게서 새삼스런 면을 발견하게 된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그에게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이쯤 되면 무섭다, 나기사 카오루.


"그러고보니, 실명이는 나랑 있을 땐 신지군 얘길 많이 꺼내네."
"그야 네가......으응, 아냐. 미,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왜 그러니?"
"카, 카오루 니가 신지군 엄청 좋아하니까 꺼낸 건데...이젠 농담으로도 안 꺼낼게."
"...확실히, 네가 장난으로 신지군 얘길 꺼내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신지군 얘길 하는 건 싫어하는 건 아냐."


생각보다 아량 넓은 그 말에 나는 조금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그에게 거리를 좁혔다.음, 이렇게 까지 무서워 하진 않아도 되는 거겠지. 카오루도 분명히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고. 그치만 생각해보니 내가 신지군 얘길 진지하게 꺼내도 장난스럽게 말해도 카오루는 항상 별로 기분 좋아보이진 않았다. 지금 껏 내게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소유욕은 그럼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거 치곤 너 맨날 표정 굳어있잖아."
"흠, 그거야......."
"뭔데?"
"나랑 둘이 있을 때 신지군의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카오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자전거가 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나와 그는 발걸음을 옮겼고, 자전거가 지나간 후엔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소리와 내 어깨를 감싼 카오루의 큰 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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