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 내가 카오루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은 아니였다. 평소처럼 만나면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며평소와 다름 없이 그를 대하였다. 하지만 꺼림직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카오루와 평범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이따금씩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카오루를 보내고 난 뒤, 혼자남은 방에서 나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에서 카오루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봤다.
난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그 애가 행복하다면 상관 없어.그 애에 대한 마음에 거짓은 없어.난 죽어도 괜찮아.
떠올릴 수록 카오루의 말은 나를 옭아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범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쉽게 죽어도 좋다는 말을 떠올리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 나를 짓누른 것은 카오루의 알 수 없는 말 보다 그에게 저도 모르게 배신감이 든 자신이였다.
찰나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배신감을 느낀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을 씹어 넘기려고 해도, 마치 알사탕이 목에 걸리는 것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죽어도 된다니, 그 애 만을 위해 살아도 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카오루와 내가 보내왔던 추억은 그의 아름다운 사랑에 한번에 꺾일 만큼 연약한 것이였을까? 그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을 다짐할 때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걸까?
나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친구들도.
그는 떠올리지 않았던 걸까.
질투를 느낀 건 아니였다. 카오루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있는 사람에 대해서. 왜냐하면 난 그 아이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날 위해서 죽겠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저 나기사 카오루의 결정이 너무 미웠다. 모든 것을 두고 사랑을 위해서 떠난다니.
그게 뭐야.
카오루가 어째서 동화속에서 나올 것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걱정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였다.
무서움, 꺼림직함. 도저히 사람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을 꺼내는 그가 기분나빴다.
물론 다들 사랑에 빠지면, 널 위해서 죽을 수 있어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마치 자신의 존재자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것 마냥 말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기분 나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거북해 했다.
그런 마음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한낱 호감에 도취되어 있던 거고, 그 감정을 카오루에게 강요한 건 아닐까.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만으로 머릿속이 가득찬 자신이 너무 싫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정말 카오루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을까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움을 느낀다니, 그 헌신적인 사랑에 걱정이 아닌 배신감을 느낀다니.
어느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런 감정을 가지겠는가.
하루종일, 아니 그 일 직후 계속 나를 덮치는 그 생각을 마치 나를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사랑이냐고.
그리고 제대로 답할 수도 없었다.
"실명아."
"왜?"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수업중에 왜이렇게 눈쌀을 찌푸려? 무슨 일 있었어?"
선생님이 네가 자꾸 자기 노려본다고 무섭데. 친구가 우스운 농담을 던지며 넌지시 내게 물어봤다. 남의 방을 마치 자기 집 거실마냥 퍼질러져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카오루 앞에서는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그와 눈이 안 마주치게 되면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려지는 구나.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친구는 말을 가로채 버렸다.
"너 고민있지. 나기사군?"
"아 무슨 맨날 걔 얘기야, 그런거 아,"
"나기사군이랑 뭔 일 있었어? 요즘 순탄한 거 같은데...?"
"나기사 카오루 얘기 아니라고."
"아니든 어쨋든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하네."
친구는 입술을 슬쩍 올리며 말했다. 꼭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낸 문제를 맞춘 게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남자 아이 같았다.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귀신같이 그런 건 잘 맞추네..."
"니가 고민이 없었으면 바로 고민 없다고 했겠지. 그래서 뭔데?"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하는 친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마쉬고는 나와 카오루 사이에 있었던 일을 A와 B라고 칭하며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히익, 나기사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왜 거기서 나기사 카오루가 나오는 건데?!"
"아무리봐도 A랑 B는 너랑 나기사군 얘기잖아...차라리 딴 친구 이름을 거론해라."
하긴 나 같았어도, 친구와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 라는 건 대부분 자기 이야기 라는 거니까. 그게 설령 A나 B라는 알파벳으로 바뀌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요즘 내 고민은 카오루에 대한 것들이였으니까.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인 거지.
"음...목숨을 다 바쳐 사랑한다라...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해주면 기쁘긴 하지만, 진짜로 그러면 끔찍할 거 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슬픈데, 나 때문에 죽는다니. 나 같으면 살기 싫겠다."
"응...나도 그래..."
"그리고 그거 좀 자기만족 아니야? 남겨진 사람은 어쩌려구. 막말로 죽으면 자기는 끝이지,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니잖아."
"야, 그건 말이 너무 심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난 좀 ...아닌 거 같아."
친구는 고개를 가로 지으며 내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도 친구와 비슷했다. 친구처럼 그건 사랑이 아닌 거 같아,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랑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답해야 할 말은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겠지.
"무서웠어."
"무서웠다고?"
"그냥...맨날 옆에서 봤던 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고, 왠지 꺼림직해서 무서웠어......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싫고...제일 무서운 건 내가 걔한테 배신감을 느꼈어."
"배신감?"
"......나나 가족들 두고 어쩜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할 수 있는거냐고...배신감이 들었어."
친구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다물곤 입속으로 생각하는 소리를 내었다. "음......" 점점 길어지는 소리에 왠지 모르게 초조함이 들었다.
"왜, 왜?"
"그래서 네 고민이 뭔데?"
"뭐?"
"나기사군한테 배신감이 들든 뭐든, 너가 계속 골치아파 했던 게 뭔데?"
"그, 그게......"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서운 말이였다. 만약에 꺼냈을 때, 친구가 단호하게 내 고민에 부정을 던지면 더 이상 카오루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덕적으로 안되는 짓을 해버린 스스로와 대면할 것 같았다.
"답답하게 하지말고 빨리 말해봐. 말해야 알지."
"그, 그게.........카오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진지하게 꺼낸 얘기에 너무 철 없게 그런 생각을 한게 믿기지가 않았어...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내가 진짜 카오루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꺼려하다니. 그게 진짜 애정일까?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가벼운 호감이 아닐까. 나는 카오루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친구는 그야 당연히 그딴 소리를 내뱉는 데! 라며 소리를 쳤지만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네 말은 뭔 진 잘 알겠는데...음, 일단 나기사군이 사람 식겁하게 할 만한 말을 한 건 맞는 거 같아. 나도 뭐지? 싶었다니까."
"응..."
"그러니까 너 말은 나기사군의 말에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잊어버릴 정도로 겁을 먹었다는 거지? 그리고 고작 그런걸로 사랑이 식은 거 같아서 그런 자신이 싫은 거고."
"아니, 식은 건 아니고..."
"식을만 하지. 보통은 그런 생각 안하잖아. 나기사군 좀...어디 아픈거 아니야? 너무 자기애가 없잖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저도 모르게 친구에게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욱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 친구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미안하다 말하면, 친구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이 식은 건 아닌 거 같네."
"미안하다니까..."
"어쨋든 순간 사랑이 식을 만큼 걔가 기분 나빴다는 거 맞잖아. 친한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 무섭긴 하지. 간단하게 생각해, 연인사이에서도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 애정이 식어서 헤어지는 사람도 있잖아.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한 순간에 그러는 경우가 있는 거라구. 행동 하나에도 그러는 데 하물며 가치관이 다르면...그럴 만 하지."
"가치관?"
"넌 나기사군 좋아할 때 그렇게 목 맬 수 있어? 아님 나기사군이 너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래?"
"...아니."
카오루를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그가 나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있어주길 바라진 않는다. 나 또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리고 카오루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그냥 가치관의 문제인 걸까?
"배신감이야...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 데 음...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랑이란게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신뢰가 바탕이잖아. 또 바치는 게 아니라 주고 받는 거고. 그 신뢰를 주고 받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런데 네 입장에선 나기사군이 그 신뢰를 깨게 된 셈이고. 음, 이렇게 생각하니 니가 조금 이해 된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뭐 어때, 무서워 하거든 배신감을 느끼든. 그리고 애정이 식어도 뭐 어때. 거기서 끝날 인연이면 인연인 거지.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잖아. 나기사군한테 니 인생 평생 바칠 거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정을 변호해주는 저 말이 맞다고 믿고 싶었다. 그치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맹목적으로 변하는데, 나는 카오루에게 그 맹목적인 모습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실명아."
"어? 엄마?"
"실명이 친구 아직 있니? 카오루군이 왔는데..."
과자를 깨작이던 나는 문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 먹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카오루가 우리집에 오는 건 볼 일이 있어서, 거실까지 오는 게 전부였는데. 왜 내 방까지 직접 온 거지? 초코가 묻힌 과자를 씹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입안에는 쓴맛이 가득했다.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뭐 일단...나기사군이랑 얘기해봐. 내 생각엔 나기사군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 알아야 니가 걜 좀 이해할 거 같아."
친구는 방문을 열더니, 카오루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카오루를 문 앞에 내버려둔 엄마는 친구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고. 나기사 카오루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려고 왔어. 들어가도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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