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계기는 간단했다. 누가 좀 도와달라며 힘 없는 시민이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마음씨 착한 히어로가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어린아이가 읽을 법한 전래동화에 나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적으로 부터 위협받고 있다면, 나는 연휴동안 쌓인 과제에 맥을 못추리고 있는 거지만.


".........클락?"


나는 분명히 도움을 부르긴 했다. 믿지 않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까지 끌어 모아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 과제를 누군가 끝내주길 빌었지.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며 간절하게. 그리고 설마 그 결과가 눈 앞에 슈퍼맨을 불러오게 될 걸 누가 알았겠는가.


눈 앞에 남자는 슈퍼맨으로써 입는 수트가 아닌 평상복이였다. 검정색 목티 위에 모닝코트를 입은 아주 말끔하였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후드티 차림에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었다. 단정한 차림새와 늘어진 꼬라지가 아주 잘 비교 되었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길래..."


클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걸 내게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재빠르게 달려...날아왔는 데 눈 앞에는 책상에 좀비처럼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가 있었으니까. 적잖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나도 당황했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던 건 물론이고, 항상 그에게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완벽하게 화장도 마친 상태로 만났었는데 이 꼴이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평소와 똑같이 상냥하겠지만 이건 그저 내 만족감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그 어느 여자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냥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좋을텐데. 슈퍼맨이 들으면 놀랄 생각을 접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이미 그에겐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그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어야지 어쩌겠어. 이제와서 화장을 한다던가 옷을 갈아입는 건 난리 피우는 꼴이 된다. 나는 민망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와줘서 고마워요...그치만... 어쩌죠, 그냥 난 과제가 너무 많아서...으, 미안해요.. 사실 클락이 올 줄은 몰랐어요."

"실명씨, 마음 쓰지 말아요. 오히려 무턱대고 온 제 잘못이에요."


클락은 내게 사과를 건네었다. 흐려지는 그 말 끝이 그가 미안쩍음을 나타내었다. 물론 정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 마냥 도움을 부른 것은 아니고, 그저 개미만한 목소리로 투정부리 듯 말을 꺼낸 것은 사실이지만...엄연히 그가 날 걱정해서 온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괜찮아요...생각보다 클락이 걱정이 많은 편이란 건 좀 놀랐지만."


솔직한 심정이였다. 일반인의 청력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그는 중얼 거리는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기색이 다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감이 임박한 내 과제를 서둘러야 하는 건 맞지만, 적어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사람의 애원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았을텐데. 곧장 달려오는 모습이 뜻밖이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그의 일면이였던 걸까?


"당신의 요청을 듣자마자 경황이 없어져서...미안해요.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 쳐해진 게 아닐까 하고..."



그렇구나.

그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에 그 조그만한 목소리에도 날아온 것이였다. 만약 위협을 가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다급한 목소리조차 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을 둔 것이겠지. 날 생각 해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곤혹해하는 청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클락, 으음......당신이 어떤 걸 걱정하는 지는 알지만...전 별로 당신에게 지켜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히어로의 주변인은 언제든 위협받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였다. 그가 걱정하고 보살피는 존재 보단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애석하게도 나는 과제 하나에 끙끙 앓는 보잘것 없는 대학생이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새끼 병아리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삐약거리는 걸로 보일 것이다. 그 증거로 클락의 표정이 바뀌었으니까. 그치만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클락이 날 생각 해주는 것도 기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싶지도 않구요."


앗, 물론 클락이 지키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짐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허둥지둥 거리며 나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선한 마음이 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이 날 위해서 한 걸음에 와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나보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우선 해도 괜찮아요."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특별함을 얻고 싶진 않았다. 나에 대한 마음과 책임을 전부 다 벗어던지라는 소리는 아니였다. 그저 그의 선함과 힘이 나 때문에 다른 이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음...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절 위해서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무거운 이야기 였다면 사과할게요."


그에게 꺼낸 말이 쌀쌀맞은 느낌이 들어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날 구해주는 건 정말 기쁘지만...클락이 나의 히어로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에게 구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클라크 켄트라는 남자를 원한다. 우리 둘 사이에 슈퍼맨이 존재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물론 클라크 켄트가 바로 슈퍼맨이긴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중점이 되는 건 싫다.


"만약 당신이..."


말이 없는 청년 덕에 어색해진 분위기는 미성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는데도 내가 구하지 못한다면, 난..."


점점 슬픔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뒤를 말하는 것 조차 버거운 듯 입을 다물었다. 상상만으로도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를 안았다.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클락, 괜찮아요. 만약에 그런 상황이 와도...다른 히어로가 있잖아요?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나도 날 지킬 수 있어요."


그러나 번지르르한 말이다. 만약 슈퍼맨에게 적의가 있는 외계인 같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상대가 온다면 나는 위험하겠지. 그치만 그 적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슈퍼맨이 나를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였다. 누구든지 구해주는 슈퍼맨을 사랑했기에 누구든지 구해주길 바랬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상관없다. 죽는 건 역시 무섭지만, 견뎌내야 하며 견딜 것이다.


클락은 대답없이 나를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숨겼다. 감싸안는 그 손은 마치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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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루, 너 방과후에 약속 없지?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같이 가자."


카오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복도를 떠났다. 옆에 있던 신지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지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교실로 몸을 옮겼다.


어제는 카지씨에게 많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울음을 다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카지씨에게 사과를 하면 그는 멋쩍스런 웃음으로 답하였다. 진정은 좀 됐니?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 목소리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었지.


"와 방금 대단했어, 실명아."

"어? 뭐가?"

"나기사군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

"고작 같이 하교하는 거 뿐이잖아...데이트는 무슨..."

"그치만 너 옛날엔 같이 하교하는 거도 눈치 봤었잖아."



친구의 말에 나는 예전 일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보니 옛날엔 그랬었지, 1학년 땐 카오루는 거의 학교에 스타라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떠돌았으니까.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앨 피하고 다녔었지.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2학년 말 까진 학교에선 말도 잘 안했으니까. 카오루가 졸업생이 될 때 즈음부터 학교에서 대화를 했었던 거 같다.



"이제 애들 눈은 신경 안쓰여?"

"아니 쓰여."

"뭐야...근데 왜 같이 가자고 했어?"

"신경이 쓰여도 오늘 꼭 해야 할 얘기가 있거든."



머리를 긁적이며 친구에게 말하면 그녀는 웃었다. 뭔진 몰라도 일이 좋게 해결 되는 거 같네. 그럼 다행이야. 진심을 담은 그 눈빛이 쑥스러웠지만 고마웠다.


"잘 안 해결 될 수도 있고. 일단 봐야 알 거 같아."

"만약 안 되면 어쩌게?"


음, 글쎄. 사실 우선 이야기만 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뒤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만약에 카오루랑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어봐도 안 된다면...뭐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를 무작정 내 곁으로 끌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것. 그거 뿐이다. 그저 겸허히 카오루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여기서 기다릴 줄은 몰랐네."

"반에 가도 네가 없었거든. 그럼 돌아갈까?"

"응."


교문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카오루와 함께 하교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의 반으로 가면 카오루는 이미 하교하고 난 뒤였다. 설마하니 날 두고 도망쳤을린 없으니,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띄는 은발이 교문 앞에 있었다. 분명 우리 반 보다 늦게 끝났을 텐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간거지?



"네가 혹시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뭐?"


그 말은 즉슨 내가 카오루를 내버려 둔 체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나보다 빠르게 학교를 나선거고. 뭐야 그게. 아무 말 없이 표정을 찌푸리며 카오루를 바라보면, 그는 그런 표정 짓지말라고 말하였다.



"내가 너한테 먼저 말해놓고 도망가겠어? 아님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거야?"

"설마, 그런 일은 없어."


어쨋든 내가 도망갈거라고 생각한 거 잖아. 확신은 아니고 그저 일말의 가능성으로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결투장을 건넨 사람이 바보같이 그 결투를 피하겠냐고.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는 눈치챈 듯 나를 슥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과는 커녕 위로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거다. 그래 비꼬지 않는 게 어디야.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천천히 걷던 도중 우연히 어린아이들이 놀 법한 작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자주 드나들던 곳 이였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낡은 놀이기구 들이 녹슨 몸을 보이며 말해주었다. 하기사 요즘은 다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서 노니까. 이렇게 모래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놀이기구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



"여기서 자주 놀았었니?"

"옛날엔 그랬었지. 그러고보니 너랑 놀이터에 온 적이 없네."



항상 그와 놀 땐 집 안에서 였다. 카오루의 방엔 항상 놀 것이 많아 정신이 팔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비노라 그런가, 햇빛에 약해서 밖에서 모래장난을 한 적은 없었지. 머릿속을 헤쳐내며 몇 기억들을 떠올려봤지만 기껏해야 부모님들 끼리 밖에 나갈 때 빼곤 전무했다. 그래서 카오루가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비밀친구 같은 느낌이여서.



"우리 여기 앉자."

"여기가 좋은 거니?"

"옛날 생각 나서 좋아."



그를 두고 먼저 공원으로 들어가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옛날엔 여기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쳤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곤 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론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카오루랑 오다니. 이렇게 될 줄은 그 땐 꿈에도 몰랐을 거야. 


"실명아."

"응?"

"할 얘기가 뭐니?"


카오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상대를 놀릴 때 간혹 올라가던 입꼬리는 수평이였다. 나는 그를 마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하늘은 윗자락부터 어둠이 기웃거렸다.


"너한테 사과하려고."

"사과?"


저번에 내 방에서 같이 얘기 했을 때 있잖아. 카오루에게 넌지시 말하면 그는 기억하는 듯 작게 수긍의 소리를 내 뱉었다. 



"저번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 있잖아. 너한테 괜히 화내고 놀라게 한 거. 미안해."

"그건..."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 같아."

"...뭘 말이니?"

"너랑 제일 오래 지내왔던 게 나 잖아. 그래서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지. 몇 없는 너의 주변 사람이란 것에 같잖은 책임감을 느끼고 카오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믿었었다. 카오루가 나한테 특별한 만큼 나도 네게 특별한 믿음을 주고 싶었어. 



"바보같이 그렇게 믿은 결과는 완전 꽝이였지만. 나한텐 말야,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게 말이야, 잘 이해가 안갔어."



어느 동화책에 나올법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자길 껴맞추지 않는 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소모품인 것 마냥 말하는 게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되나. 너랑 내가 지내온 시간이 몇인데 그것마저 가볍게 여기는 거 같아서 싫기도 했고.


"뭐, 넌 아니라고 그랬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아는데...납득이 안갔어. 자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애한테 그게 제대로 들렸을리도 없고."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을 빛에 산수유 같은 눈동자가 빛을 담았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져 작게 헛 기침을 내뱉어 버렸다. 남부끄러운 자기 반성을 고해하는 이 순간조차 설렘을 느끼다니. 나는 이 애를 참 좋아하는 구나. 징하기도 하다.



"나도 내 마음을 가끔 모를때가 있는데, 남에 대해서 다 알고 이해한다고 잘못 믿고 있었어.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닌걸.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카지씨가 말했어. 저번에 시내에서 만났거든. 어색한 웃음을 그에게 내보이면 카오루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지씨 덕분에 깨달은 거 같아. 실은, 나 널 이해 못하는 게 너한테 상처주는 게 아닐까 겁먹고 있었어. 네 곁에 있어도 되나 무서웠어.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죄책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카지씨가 아니래. 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대. 우리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 안다면, 이해 못해도 괜찮은 거야."


목석같이 앉아만 있는 카오루는 반응 조차 없다. 그에게 듣고있냐는 물음을 던지면 카오루는 무겁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지금부터 카오루에게 해야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이 부끄러운 말을 도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 까.


"실명아?"

"왜."

"이제 끝이니?"

"...아니."


카오루가 보채듯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무말도 안하는 내가 참을 수가 없던 게 아닐까. 하얀 속눈썹이 천천히 두어번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입을 움직였다. 왜 쓸 데 없는 곳에서 성질이 급한 걸까. 결정적인 말이야, 언제든지 소리낼 수 있는데. 그 잠깐 망설이는 걸 기다리지도 못하다니.


"그러니까...내가 하고싶은 말은...너한테 사과도 하는 김에 화해하자는 뜻이였어. 나는 카오루 곁에 계속 있고 싶어. 솔직히 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네 곁에 내가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바싹 마른 입술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 남은 건 카오루의 대답 뿐이다. 바람 한줄기조차 가려울 만큼 내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저 입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나올까? 목울대를 두드리는 심장소리는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곁에있을지 말지는, 나는 실명이가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단다."

"그런가...그렇구나."


약간 싱거운 대답을 끝으로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그런건가. 내가 곁에 있고 싶어서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거구나. 지금껏 깊은 굴을 파면서 썩혀왔던 생각들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등줄기를 누르던 무게에 해방된 느낌이였다. 정말 단순한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있는 건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닌거야. 하고싶은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다.



"실명아."

"왜."

"얼굴이 빨갛네."

"그야...너 같으면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하는 게 안 쪽팔리겠어?"

"실명이가 많이 말썽을 피우긴 했지."

"동네 골목대장처럼 얘기하지마."

"그래도 조금은 리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거 같아."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노을마저 저 밑자락으로 내쫓은, 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춰졌다. 옅은 어둠속에 그의 얼굴은 오히려 또렷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미소에 가슴이 간지러운 게 미칠 것만 같았다.



"리린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이 갈 수록 상처 받는 게 나는 너무 안쓰러웠단다. 사람과 닿는게 두려우면서도 외로움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기에 사랑스러웠지만, 사랑했기에 그 슬픔을 멎게해주고 싶었어.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라면, 아마 카오루의 순정의 대상을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내가 카오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이 남자가 목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카오루를 고민에 빠트리고 이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쥐어잡는 그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다.



"그 애는 항상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며 상처를 받았단다. 그래서 사람들과 멀어졌지만  고독과 쓸쓸함을 잊지못해서 결국은 누군가를 원하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어. 하지만 오늘 네 얘기를 듣고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거 같아."



빙긋 올라간 입술은 심술을 부리지 않고 감사함을 표했다. 나도 카오루에 맞춰 웃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 수 없는 그지만, 이 애가 기뻐한다면 나도 기쁘다.



"너 꼭 말하는 게 신같아."

"...후후, 사실 난 천사란다."

"웃기지마. 이렇게 내숭떠는 천사가 세상에 어딨어..."


카오루는 아무말 없이 웃을 뿐이였다. 대답없는 그 모습에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뻔 했지만 실 없는 농담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순수하고 깜찍하지 못했다. 그저 그 미소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맞받아 칠 뿐이였다.



"그래, 뭐 니가 외계인이든 천사든 신이든.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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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도 마실래?"
"아니, 괜찮아."


친구를 내 쫓고 방으로 들인 카오루는 가만히 바닥에 앉아있었다.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워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짧은 거절 뿐이였다.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무거운 공기는 변함없이 나를 짓눌렀다. 카오루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꺼낼 지 긴장하면,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즘 실명이가 이상해서."
"난 맨날 이상하다며."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야! 이럴 땐 아니라고 해야지!"
"...요즘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니?"


핵심을 찌르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민이 있냐고 묻는 게 아니라, 아예 고민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구나. 대답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실명이랑 대화하고 난 뒤였지. 태도가 이상해진게."
"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게 눈에 보이던 걸. 날 볼때마다 괴로워 보이던데."

카오루는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괴로웠다고? 확실히 카오루와 얘기할 때마다,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결코 괴롭지는 않았다. 카오루는 내 표정을 괴로워 보인다고 생각한 걸까? 


"괴롭다니...그런 건 아닌데."
"무언가 참고 있었다는 건 맞구나."


카오루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아버렸다. 그것도 카오루가 지적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테지. 하여간 쓸 데 없이 눈치만 좋아가지고. 무겁게 입을 다물었지만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입술이 말라갔다. 물론 나도 그에게 제대로 내 감정들을 얘기하곤 싶었다. 이렇게 우물쭈물 해 하는 것도, 카오루를 보면서 자꾸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카오루와 대화할 수록 그가 나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카오루가 껄끄러웠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를 알아갈 수록 애정이 식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불안했다. 카오루의 마음을 들을 수록 이 애정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카오루를 좋아하고 싶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그의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끝에 다다르고, 내가 그를 계 좋아할 지 결정하고 싶었다.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은 하지 못했고 답도 얻지 못했다. 서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른 체 이 사랑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실명, 예전에 네가 했던 말 기억하니?"
"무슨..."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해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대전시합 전에 일을 말하는 건가. 카오루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카오루가 멀게 느껴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 나기사 카오루는 알아갈 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물론 카오루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정말로 좋아한다면 제대로 전해야 된다고. 감정이란 건 안 보이는 거니까 더욱 보여줘야 되는 거라고 나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고 싶은 마음의 경우다. 나는 카오루에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친구가, 자신을 꺼려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게 실망을 할까? 그건 무섭다.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 또 만약, 카오루가 내 마음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내가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면 어떡하지? 무기력하게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실명이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친구로써...그러니까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려줬으면 좋겠단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표정이였다. 그건 맞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보낸 카오루를 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 안에 깊숙히 숨어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모를거야.
그리고 우정도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카오루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카오루가 듣고 싶은 말은 바로 그 가능성에 대한 것이였다.

나를 직시하는 그 눈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망설임과 함께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테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곤 그에게 말했다.


"꼭 듣고싶어?"
"내 말에 거짓은 없어."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근데...그게 너한테 말하기 너무 무서워."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오루는 어루듯 내게 물었다. 무얼 말이니? 그 말에 나는 빠르게 대답한다.

"내가 말하면 우리 관계가 다 부숴질 거 같아."

그래서 망설여지고 더욱이 숨기고 싶다. 카오루와 계속 지내기 위해선 이 말을 꼭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일까. 그저 모르는 것 마냥 영원히 저 밑바닥 속으로 숨겨버리고 싶은데, 마치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실명아, 그럴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나인데. 충분히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 보다 더욱 허탈했다. 남의 마음이란 건 직접 마주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네가 무서웠어.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위해서 죽어도 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갔거든.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게 무섭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정말 죽어도 되는 거야? 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너무 미웠어. 넌 죽으면 끝이지만 나는 아니잖아. 네 주변 사람들이 남겨졌을 때 생각해 봤어? 내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 안했어?"


너한테는 내가 네 사랑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말 같은 존재였냐고. 그렇게 끝을 내면 카오루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 말은 진심일 것이다. 나기사 카오루가 사람을 마음 안 으로 들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게 사람을 쉽게 버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럴거잖아. 만약 네 목숨을 버려야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난 말야, 네 그런 점이 무서웠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그 점이 사람같지가 않았어. 아무 욕망도 없는 거 같아서 겁이 났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처음 보는 사람 같았어."

이런 날 넌 이해할 수 있어?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실명아."
"어, 카지씨!"


오랜만에 번잡한 번화가로 나오면 낯 익은 얼굴과 조우했다. 요즘들어 번화가에 나오는 카지씨랑 마주치게 되는 거 같다. 솔직히 번화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건 이번을 포함해서 고작 두번밖에 안되지만. 카지씨는 외국에 자주 나갔다 오는 사람이라 워낙 만나기 힘들어서, 만날 때마다 인상이 깊었다.


"혼자 여기서 뭐하니? 쇼핑이라도 하려고?"
"책 좀 사려구요. 카지씨는요? 언제 귀국한거에요? 오늘은 아스카하고 같이 안 왔네요?"
"실명아...한개씩 물어보렴."


그나저나 아스카하고는 언제 친해진 거니? 카지씨가 놀란 듯 물어보면 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여자애들은 원래 금방 친해지는 거라고 대답했다. 카지씨는 그저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실명이 만났는 데 어디가서 차라도 마실래? 뭐, 한창 좋을 여자애가 아저씨한테 데이트 신청 받으면 별로일려나?"
"중학생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아저씨는 좀 위험하지만 카지씨는 특별히 봐줄게요."
"아스카를 만나서 실명이가 좀 차가워졌나...?"
"카지씨! 우리 저기 가요!"


카지씨를 기운좋게 끌고 근처의 분위기 좋아보이는 까페로 향했다. 언젠가 친구와 인테리어도 멋지고 커피도 맛있을 거 같지만 비싸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함께 낙심한 곳이였다. 설마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이야. 역시 남의 돈으로는 뭐든 지 할 수 있구나.


"실명이랑 이렇게 둘이서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니?"
"저야 뭐 쌩쌩하죠. 카지씨는요? 원래 방학마다 일본에 오시잖아요. 왜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아, 실은 외국에 나가지 않았단다. 잠깐 회사 일 때문에 말이야. 뭐 카오루 일도 있고."
"그랬구나."
"실명아."


카지씨는 평소에 거들먹 거리는 목소리는 생각조차 안 들정도로 찬찬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언가 얘기하려는 그 눈은 장난스러운 느낌은 전혀 감돌고 있지 않았다. 일하는 카지씨의 모습은 이런 모습일려나. 저것은 명백히 진지한 어른의 눈동자였다.


"카오루랑 싸웠니?"
"카지씨, 저랑 걔랑 싸울 거 같아요? 제가 삐지고 걔는 무시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무슨일은 있었구나. 아, 요즘들어 카오루가 이상한 거 같아서."


곤란해 하며 빨대를 씹는 내게 카지씨는 손을 뻗더니 빨대를 가져가 버렸다. 안 좋은 버릇이라며 살짝 웃는 그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이상하다고 해야 될까...그 애가 그렇게 말하더구나. 역시 사람 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그, 그래요?"
"실명이는 카오루가 남들하고 조금 다른 건 알고 있었지?"


마치 특이한 반 친구를 이해시키려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카지씨는 말했다. 남들과 다른 건 확실하지. 그 차이가 큰지 작은 지는 잘 모르고 애초에 그 차이를 구별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앤 사람 마음을 잘 몰라. 예전부터 그랬거든.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 느낌이랄까? 어릴적에, 그 애 부모님이 카오루를 걱정해서 병원에 데려가셨단다. 남들 보다 공감능력이 좀 떨어진다더구나."


만화같은 표현을 하시네. 신의 사자가 인간으로 환생한다니. 그나저나 카오루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이건 정말 처음듣는 소리였다. 다만 크게 놀라지 않는 이유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그 앨 병원에 데려가신 이유가 납득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잘 지내지만 예전엔 큰일이였어. 사람의 목숨과 벌레의 목숨도 동일시하고, 식욕을 느끼거나 수면욕을 느끼는 걸 기분나빠하고 말이야. 마치 사람으로 지내는 게 어색한 거 처럼. 그래서 친구도 없었어."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었지. 어릴 적 카오루 곁엔 아무도 없었고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의 행동을 헤아리는 사람도 없이, 그 앤 철저한 고독 속에서 지내왔어.


"카지씨, 마치 카오루가 된 것 마냥 잘 아시네요."
"거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무엇보다 그 애가 더 이상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마치 포기한 것 처럼 주변에 맞춰가더군."


어느새 음료가 나온 듯 점원이 우리들에게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카지씨는 찻잔을 들어 이내 한모금 마셨다. 헤이즐넛 향이 은은하게 났다.


"카지씨."
"응?"
"근데 왜 카오루의 과거를 얘기하는 거에요?"


카지씨는 카오루와 있었던 일에 대해, 피하는 내게 나기사 카오루에 대해서 얘기하였다. 흡사 고기를 잡기 위해 조금씩 먹이를 깔아놓는 사냥꾼 같았다.  


"실명이가 카오루랑 있었던 일이 대충 뭐였는 지 알 거 같으니까."
"...정말요?"
"실명아, 난 어릴적에 카오루를 보면서 진심으로 사람이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렇지 않니?"


정확하게 내 속을 꿰뚫어 본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하지 않아도 카지씨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순간 만큼 카지씨와 나는 같은 생각을 공유한 일심동체였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느끼곤 하지만. 적어도 이질감은 많이 없어졌어. 나는 그게 실명이의 영향이라고 생각해?"
"저요?"
"카오루는 실명이랑 지내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카지씨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 좀 기분 나빴을려나? 실험쥐처럼 말해서. 나는 카지씨를 향해 고개를 가로로 가로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카오루와 처음으로 속 내를 얘기했던 그 날에 바로 그와 헤어졌겠지. 카오루가 나를 실험체로 삼았다 해도 싫지 않았다. 지금 카오루가 내게 느끼는 건 틀림없이 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쁠테니까. 이유는 무엇이든 그것이 나와 카오루가 만나게 된 계기이다.


"앞으로 실명이는 카오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겠지. 사람과 신이 다른 점이 뭔 줄 아니? 바로 영향이야.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받는단다. 카오루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이 되가는 거라고 생각해. 물론 실명이도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실명이가 카오루랑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카오루가 내게 영향을 받고, 그 애도 내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사람이 되간다. 흡사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이처럼. 카오루를 사람이 아니라는 그 결론이 조금 꺼려졌지만 카지씨의 말은 내 가슴을 울렸다. 카오루와 그런 사이가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뭐든지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애를 미어내고 말았다. 카오루에게 진심을 터 놓은 날, 나는 카오루에게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했고 그 애는 말 없이 방을 나섰지. 아직까지도 카오루가 떠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 지 신경이 쓰인다. 그 애를 한 번 거절한 내가 카오루에게 다시 다가가도 될까?


"그치만...내가 카오루 옆에 있어도 될까요? 무얼 하든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할 거 같아요. 그러면 카오루가 상처받잖아요. 그건 싫어요."


카지씨의 깊은 말에 저도 모르게 그 속내를 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뜨겁게 눈이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지씨는 내 눈가에 손을 갖다대더니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카지씨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실명아, 인간관계라는 건 이해가 전부가 아니야. 남은 나와 다른 이상,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겪은 경험도 다르니까. 그저 다르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카오루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은 나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 애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애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곁에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왜 이렇게 간단한 답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얽매였던 것일까? 그의 곁에 오래 있었다는 자부심으로 괜한 책망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였을까. 자만이 화를 부른다는 말은 아마 이런 말일지도 모른다.

히잉, 거리면서 훌쩍이는 나를 보며 카지씨는 그제서야 당황해 했다. 주변 사람들이 카지씨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카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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